8화. 때론 주변이 삶을 좌우하기도 한다. Ⅰ (2)
그렇게 화끈한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일찍 병원에 나온 이혁원, 나종진과 함께 연구실에서 예행연습을 하고 학회장으로 향했다.
“선생님. 어제보다 발표가 매끄러워지셨네요. 집에서도 연습하셨어요? 그리고 옷이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그렇게 보여? 혁원아. 종진아. 니들도 장가가면 알게 된다. 종종 맵기도 하지만 달콤할 때가 더 많은 게 인생 아니겠어? 형수 같은 여자 얻어라.”
뚱딴지같은 말을 던진 김지훈이 차안이 떠나가도록 크게 웃었다. 눈만 멀뚱거리던 이혁원과 나종진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보았다.
‘지금 형수라고 하셨지?’
은연 중 새어 나온 김지훈의 마음이었다.
학회장의 도착한 전공의 두 놈의 발걸음이 왠지 가볍게만 보였다. 잠시 후 도착한 이준영 교수가 힐끗 눈길을 주었다. 어젯밤 한숨만 푹푹 내쉬던 이혁원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본 것이다.
‘이 놈들 얼굴이 왜 이래? 아침부터 무슨 일이 있었나? 이왕 왔으니까 열심히 보고 가. 지훈이만큼 너희들을 챙기는 사람도 없다.’
궁금하다고 물을 이준영 교수가 아니었다.
낯익은 얼굴이 줄줄이 나타났다.
“이혁원. 나종진. 너희들도 왔구나. 역시 우리 과 에이스들이야. 김지훈 선생님이 슬라이드 돌릴 생각하지 말고 발표만 잘 들으라고 하실 때 딱 니들이 올 줄 알았다. 자식들! 완전히 총애를 받네.”
박순용을 비롯한 3년차 치프들이 등을 두드리며 휙 지나갔다. 서서히 미소가 사라지며 이혁원과 나종진의 눈 밑이 까매졌다.
이내 학회가 시작 돼 항의할 시간이 없었다.
과연 용기는 있을까?
그러건 말건 김지훈은 다소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발표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떨리지도 않고 전공의 때하고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네. 다 같은 교수인데 떨 이유가 없지. 자신감을 갖고 발표하자. 첫 발표가 간암이네.’
김지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발표가 이어질수록 다른 병원의 수준과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같은 처지인 펠로우들이 연자로 나올 때는 눈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정말 대단하다. 웬만큼 수술해서는 명함도 못 내밀겠어. 다들 언제 저렇게 수술했지?’
슬슬 초조해졌다.
그들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최고의 써전이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분명한 경쟁자였다. 신현수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잠시 숨을 죽인 자리에 강력한 파문이 일었다.
어떤 환자를 어떻게 수술했는지 하나하나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 자체로 발표하는 것 이상의 소중하고 귀중한 의미였다.
간담도 부분 복강경 증례가 발표될 때마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역시 라파로만큼은 스승님을 따라올 사람이 없네.’
이제는 복강경 수술에 관한 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이준영 교수의 말에 실린 무게는 대단했다. 또한 발표자의 노력과 성과를 인정하며 경의마저 표했다.
대가의 모습이 그러할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큰 스승에 이어 스승까지 대가라는 소리를 듣게 되면 제자에게도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무겁고 커다란 짐일 수도 있었다.
끊임없는 노력과 배움 속에 길이 있을 것이다.
오전 마지막으로 배정된 발표 시간이 가까워졌다.
열심히 준비를 했지만 다가오는 긴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다른 병원 펠로우들의 발표를 본 탓일지도 몰랐다. 문득 고경아의 말까지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핵심적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발표하기 위해서는 침착해야 돼. 침착하자.’
이준영 교수가 좌장 자리에 앉았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슬라이드를 틀 준비를 마쳤다.
연단에 선 김지훈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S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펠로우 김지훈입니다. 오늘 발표할 증례는 직접적인 간 전이가 동반된 담낭암과 조기 위암에서 시행한 부분 절제술입니다.”
환자의 나이, 성별, 진단명, 수술 방법에 이어 현재 경과까지 일목요연하게 발표했다. 전공의 때 경험 덕인지 아니면 이젠 펠로우기 때문인지 몰라도 김지훈은 예상외로 침착했다. 조용히 귀를 기울였던 수많은 선배 의사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가장 긴장해야 하는 순간이다.
“간 우엽과 좌엽의 일부를 절제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특히 혈관과 담도가 있는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간담도에서 위장관 수술을 듣다니 상당히 신선하면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부분 절제술을 할 때 십이지장을 많이 박리했다고 했는데 기술적 문제로 인한 위험성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까?”
이미 충분한 준비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당황할만한 질문이 아니었다.
아는 한도 내에서 대답을 했고 부족한 부분은 이준영 교수가 채웠다. 한동안 열띤 질문과 대답이 이어져 할당된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양해를 구해야 했다.
“죄송하지만 이것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점심 식사 맛있게 하시고 오후 발표에도 많은 참석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의 인사를 끝으로 오전 일정이 마무리됐다.
식사가 끝난 후 휴식 시간에 몇몇 교수들이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을 찾았다. 모두 다 쟁쟁하다고 소문난 의사들이었다. 단순한 인사치레를 위한 자리만은 아니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김지훈이 마른 침을 삼켰다.
복강경에 관한 의견들이 오고갔다.
은근한 경쟁의식은 경력과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솔직히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는 생각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짧은 근무 기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많은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말 속에 결코 이론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생생한 지식과 경험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스승님이셔.’
공연히 우쭐해진 김지훈의 어깨에 힘이 팍팍 실렸다.
그 때 뜻밖의 인물이 다가왔다.
타 대학 병원 간담도 주임 교수였다. 이준영 교수 못지않은 실력을 가졌다는 평판이 자자한 의사였다. 대화중인 이준영 교수에게 살짝 눈인사를 한 후 김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김지훈 선생. 발표 잘 들었습니다. 전공의 때도 라파로로 탈장 수술인가를 하고 발표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맞습니까?”
“예. 선생님. 맞습니다.”
“그렇군요. 사실 오늘 발표를 들으면서 상당히 놀랐어요. 펠로우가 하기에는 힘든 수술인데 혼자 다 했습니까?”
드문 일이지만 가끔은 제자를 띄워주기 위해 퍼스트를 섰는데도 집도의로 올리는 경우가 있었다.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사실 펠로우가 집도하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한 수술이기도 했다.
“담낭암은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준영 선생님과 함께요?”
대화를 막 끝낸 이준영 교수가 스윽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아까 시간이 부족해 궁금한 것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리고 제가 퍼스트를 섰습니다.”
주임 교수가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발표 도중 오간 질문과 대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수술 과정을 자세하게 묻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가 지나든 백선희는 잊을 수 없는 환자였다.
수술 과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퍼스트를 섰다고 해도 집도의가 아닌 이상 대답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 날카로운 질문에도 막히지 않고 대답을 하자 주임 교수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전공의 때도 눈 여겨 보았지만 이 정도였나?’
“고생 많이 했네. 그럼 다른 수술도 경험이 쌓였겠죠? 라파로는 몇 건 정도나 했습니까?”
학회장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물음이었다.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쑥스러운 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세 보지를 않아서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최근에는 일주일에 두세 건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복강경은 다른 수술이 많다고 해서 많이 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다. 더구나 이준영 교수가 있다. 그런 면들을 생각하면 펠로우로서는 상당한 건수였다.
조금은 놀란 모습이었다.
실력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신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김지훈을 보던 주임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영 교수가 제대로 키워냈군. 펠로우 마치면 얼마나 더 발전해 있을까?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 되겠어. 아니지. 펠로우 끝나는 대로 스카웃을 하는 게 좋겠군.’
“이준영 선생님, 좋으시겠습니다. 김지훈 선생, 앞으로도 지금처럼 노력하고 열심히 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은 무심코 지나쳤지만 다른 병원 의사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은 날이었다. 그것도 명망 있는 주임 교수였다. 이준영 교수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어? 스승님이 저렇게 웃으실 때도 있었나?’
둔한 놈.
김지훈 눈에는 주임 교수의 관심보다 스승의 웃음이 더 신기한 모양이었다. 학회가 끝날 때까지 김지훈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이혁원과 나종진이 도리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종진아. 다른 병원 선생님들 눈빛 봤지? 우리도 펠로우하게 되면 김지훈 선생님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냐?”
“맞아. 꿈은 야무지게 먹어야 돼.”
“그런데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긴. 죽었다고 복창하고 달려가야지.”
지금도 죽을 지경인데 일할 궁리를 하고 있다.
이럴 때 보면 세상은 참 희한하다.
박봉과 열악한 근무 환경은 차치하고 잠 잘 시간조차 없는 것이 전공의였다. 펠로우가 아무리 치열하게 산다고 해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공의들끼리 모이면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쉴 시간이 없다.
오프도 적정하게 가야 한다.
당직을 서면 그에 준하는 당직비를 받아야 한다.
온갖 불평이 쏟아졌지만 실력 있는 의사가 되려면 그 모든 것을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다른 직종이라고 다를 바 없을 테지만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있다.
꿈과 희망 그리고 자부심일 것이다.
그래야 온몸을 짓누르는 피곤을 이겨낼 힘을 얻지 않을까?
서글픈 일이라고 해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감수해야 하는 현실이다. 인정하고 싸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조그만 변화라도 먼저 이끌어야 할 것이다.
말이 거창했다.
이혁원과 나종진에게는 치열한 일상일 뿐이었다.
김지훈은?
오늘도 치열하게 살았다.
다음 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월요일 당직을 맞아 응급실을 떠나지 못했다. 일반외과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아수라장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선생님. 저희가 있으니까 들어가시죠.”
“혁원아. 종진아. 우리 과 영문이 왜 General Surgery일까? 배 속 질환만 알아도 되면 그렇게 붙였을 리가 없겠지. 진정한 일반외과 의사가 되려면 다른 과 질환도 어느 정도 알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거야. 그래야 General이 Great가 되지 않겠어?”
김지훈이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가슴 속에 담긴 꿈과 희망은 힘이었다.
이혁원이 콧등을 찡그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죽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복창하라며.”
정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성형외과.
전문 분야는 달라도 기본은 반드시 알아야 두어야 할 과였다. 일반외과 환자가 아니더라도 바이탈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그때 가장 필요한 의사가 바로 일반외과 의사다.
어느 틈엔가 환자를 살피고 있는 김지훈 옆에 이혁원이 함께 있었다. 잠시 후 나종진의 가운에도 피가 묻었다. 다른 과 전공의들의 눈에 안도감이 흘렀다.
일반외과 의사가 세 명이나 있는 이상 어이없이 환자를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반외과의 자부심이자 힘이었다.
“여기 피 준비하고 라인 잡읍시다.”
간만에 중심 정맥에 도관을 삽입하는 이혁원과 나종진의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바이탈이 흔들리고 있는 환자는 분명 건강하게 회복돼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수술 방 앞에 선 김지훈이 희죽 웃었다.
오늘은 복강경 수술만 두 개다.
점점 쌓여 가는 경험은 곧 실력이었다. 자신감과 함께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담낭에 국한된 돌만이 아니라 담도에 돌이 있는 경우 혹은 염증이 너무 심해 개복해야 하는 환자도 복강경으로 시도해 보고 싶었다.
바로 스승의 경지다.
그래야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수술을 했다.
‘현수 오기 전에 위암 수술도 더 해보고 싶고 혈관 수술도 손목이 아니라 팔꿈치 동맥과 정맥을 연결해 보고 싶네. 이렇게 욕심을 부려도 되는 걸까?’
처컥! 처컥!
공기 주입되는 소리와 함께 수술이 시작됐다.
이혁원의 손이 능숙하게 움직였다.
번갈아 들어오는 강병옥과 송진우도 눈을 부릅뜨고 수술에 참여했다.
고경아는 노련했다.
어떤 변수가 생겨도 훌륭하게 대처할 것이다.
“담낭 나갑니다.”
어느새 담낭이 절제됐다.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수술에 집중했던 김지훈이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김진호 교수가 마취 기록 지를 정리하며 시계를 보았다.
총 마취 시간 - 2시간.
수술 시간 - 1시간 40분.
“김 교수. 조금 있으면 이준영 선생님하고 거의 똑같이 끝내겠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수술 참 잘한다.”
정리를 하던 고경아가 활짝 웃었다.
“우리 고 간호사하고 혁원이가 잘 해서 그렇죠.”
“맞는 말이지만 이준영 선생님은 뭐 다른 사람하고 수술해? 도리어 3년차 치프가 어시스트를 서니까 더 편하게 하실 거야.”
과한 칭찬이었다.
그 탓인지 잠시 사라졌던 욕심이 또 머리를 내밀었다. 만일 시도를 한다면 어떤 케이스가 더 적절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김진호 교수가 어깨를 축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