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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622화 (622/1,329)

8화. 때론 주변이 삶을 좌우하기도 한다. Ⅰ (1)

한 명의 환자가 퇴원하면 또 다른 환자가 그 자리를 채우는 일상이 이어졌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도 있고 여유 있게 한가한 시간을 즐길 때도 있었다.

어느새 새벽에는 찬바람이 돌며 은행나무가 노란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완연한 가을이다.

어젯밤 여느 때처럼 호된 당직을 보낸 김지훈이 커피 타임을 갖는 동안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지훈아. 너도 힘들어 하는 거 보니까 나이 먹었구나. 먹었어. 그래도 당직 때 환자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게 낫지? 그치? 얼마나 보람차니.”

말이 없다.

“에구! 안 되겠다. 안 되겠어. 재순아. 경석아. 다음 당직 니들이 대신 서라. 이러다 지훈이 잡겠다. 지훈이 쓰러지면 니들이 고생이다. 고생. 스승님 입원하셨을 때 이미 겪어 봤잖아. 어때? 그게 좋겠지? 싫어?”

이경석과 홍재순이 딴청을 피웠다.

마음은 굴뚝같아도 몸이 따라줄 리 없었다.

“얼마 안 있으면 현수가 오니까 짐을 많이 덜 겁니다. 김지훈. 4개월만 버티자. 니 일복인데 어쩌겠나.”

“한 명이라도 늘면 한결 편해지겠네. 김지훈. 듣고 있는 거야?”

신기동 교수의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말이 없다.

대답할 힘도 없는지 눈만 감고 있었다.

아니, 정말 졸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가 피식 웃으며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따로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김지훈.”

단 한 마디뿐이었다.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예. 선생님.”

다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송재덕 교수는 혀까지 차며 투덜거렸다.

“차별이다. 차별. 내가 이 교수보다 더 높은데 이건 아니다. 아니야. 경석아. 재순아.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니? 내가 너무 일을 많이 시킨 거니? 아니잖아. 다 자기 일복인데 이러면 안 되지. 안 된다.”

무슨 말인지 몰라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이준영 교수만이 당연하다는 듯 의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앉아. 3주 후에 간담도 학회 있는 거 알지? 그때 백선희 환자 케이스 발표하자. 그리고 이병석 환자도 준비해.”

마치 절대 졸지 않았다는 것처럼 눈이 말똥말똥해진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병석 환자도요?”

“그래. 위장관이지만 우리 파트에도 도움이 되는 케이스야. 조기 암에 대한 접근 방식과 생각을 다시 할 수 있는 경우잖아.”

일이 또 늘었다.

그나마 케이스 발표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김지훈. 니 석사 논문 준비는 하고 있나?”

헉! 잠시 잊고 있었다.

김지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혁민 교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준비가 부족하구나. 전공의 때도 그러더니 펠로우 때도 똑같네. 이경석, 홍재순, 니들은 문제없지?”

“예. 전번에 최종 점검해 주신 대로 수정 보강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까지 완성해서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전 주제와 방향은 다 잡았고 현재 케이스 보강 중입니다. 내년 전반기까지 대여섯 케이스만 보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경석과 홍재순은 차질 없이 준비하고 있었다.

등짝이 서늘해지며 왠지 배신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눈이 쭉 찢어진 김지훈과 눈이 마주 치자 일복 없는 펠로우 두 명이 또 딴청을 피웠다.

“지훈아. 당직 날이라도 바꿔볼까?”

바꾸면 상황이 변할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환자는 요일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일복 많은 놈을 보고 오기 때문이었다. 정말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회진을 돌기에는 시간이 조금 빨랐다.

힐끗 시계를 본 신기동 교수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 과장. 중앙 의료원 원장은 도대체 어느 선생님이 하시는 거야? 스승님이 추천하신 분은 없나?”

행정적인 일에는 눈곱만치도 없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갑자기 그런 일에 신경을 다 쓰고 웬 일이야?”

“어제 우연히 내과 하성원 교수님을 봤는데 외과에서는 누구를 원장으로 미냐고 물으시더라고. 잘 모른다고 하긴 했는데 하 교수님도 자천타천 입에 오르내리고 있지 않아? 솔직히 좀 의외야.”

이혁민 교수의 안색이 굳었다.

송재덕 교수는 한숨을 쉬며 혀만 찼다.

“그게 좀 골치 아프게 됐어. 스승님은 부원장이신 신상민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원장을 맡았으면 하시는데 인사 위원회 분위기가 묘해.”

“무슨 소리야?”

“파벌이다 라인이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만든 게 인사 위원회인데 도리어 그 안에서 그런 조짐이 보여. 하 교수님이 특히 그러시네.”

“어쩌면 하 교수 쪽 입장에서는 우리가 스승님을 등에 업고 라인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지도 몰라. 세상 그래서 어렵다. 어려워. 나하고 오상익 선생님이 연임은 안 한다고 누차 말을 했는데도 믿는 눈치가 아니야. 이 꼴 저 꼴 보지 않으려면 평교수가 최고다. 최고. 그놈의 자리가 뭔지.”

무엇인가 복잡한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전공의라면 모르지만 펠로우들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교수 임용도 인사 위원회에서 결정하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긴장한 홍재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장님. 그러면 우리들도 영향을 받겠죠?”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최종 결정이야 인사 위원회 소관이지만 우리 과에서 먼저 결정할 일이다. 우리 펠로우들은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럼그럼. 너희들을 안 뽑으면 누굴 뽑아? 게다가 우리 과는 지금 한 덩어리잖아. 한 덩어리. 다들 너희들 좋아한다. 우리 경석이하고 재순이가 당직 때 환자만 더 보면 금상첨화다. 금상첨화. 그러면 내가 니들 업어준다. 업어줘. 못 믿어? 설마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역시 송재덕 교수답게 기승전 환자다.

김지훈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려다 말고 황급히 입술을 모았다.

‘그럼 절 업어주셔야죠. 그런데 업을 힘은 있으세요?’

하마터면 속마음이 나올 뻔했다. 농담이라고 해도 뜨거운 불길과 차가운 비수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마침 회진 시간이 임박해 서둘러 병동으로 향했다.

“지훈아. 업어 달라는 소리 하지 마라. 나 너 업기에는 나이가 많다. 힘이 없어요. 힘이.”

속마음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왠지 식은땀이 난다.

바쁘다 바빠.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외래 환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간담도는 물론 위장관 컨설트도 이어졌다.

그 덕에 정규 수술이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네다섯 건 이상 확실하게 잡혔다. 여기에 혈관 수술과 응급 수술은 추가였다.

신기동 교수의 날카로운 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함을 피해 갈 수 없었지만 성취감은 복강경 수술만큼이나 대단했다.

대신 대가가 뒤따랐다.

고경아를 볼 낯이 없었다.

‘이걸 죽여 살려’하는 눈빛에 숨죽이고 처분만 기다려야 했다. 시간 나는 대로 학회 발표 준비를 했지만 부족하면 집에까지 자료를 가져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당직 때는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경아 씨. 미안해요.”

최근에 와 항상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그런데 고경아의 목소리가 의외로 나긋나긋했다.

“그런 말 말아요. 나도 일이 바쁘면 지훈 씨 얼굴 보기 힘들어질 수 있잖아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어? 무슨 일 있어요?”

“당장은 없지만 곧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수술 방 간호사들 기본 교육을 맡아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그때는 나 찾지 말고 알아서 끼니 챙겨 먹어요. 늦게 들어오면 이불 곱게 펴고 혼자 주무세요. 어지럽히지 말고. 특히 양말 똑바로 벗어요. 맨날 뒤집어 놔서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뱀도 아닌데 옷은 왜 허물 벗은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거예요? 빨래 통 안 보여요?”

따발총이 따로 없다.

잔소리가 점점 늘고 있었지만 대꾸할 수가 없었다. 나쁜 놈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고경아의 변신은 불행한 일이 분명했다. 당연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고경아는 인생의 동반자였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자료를 함께 정리하며 발표 준비를 꼼꼼하게 도와주었다. 이럴 때 점수를 따야한다. 논문이고 발표고 뭐고 늑대로 변신해야 할 때를 놓치면 안 된다.

우워워워!

고경아에겐 사랑스러운 늑대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사나운 늑대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 앞에서는 연약한 양일 수밖에 없는 두 놈이 머리를 맞댔다.

이혁원이 이마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종진아. 수술 받을 때는 날아갈 것 같은데 끝나면 불지옥이니 이걸 어쩌냐? 이젠 타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나? 어떻게 강병옥 선생이나 진우보다 더 타는 것 같아.”

“너는 김지훈 선생님만 상대하면 되지. 난 신기동 선생님까지다. 가끔 김지훈 선생님이 바쁘다고 안 들어오시면 이건 그냥 한겨울이야. 한겨울. 너도 잘 알잖아?”

“에휴! 너나 나나 운명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 학회 발표 때 같이 가자고 그러시는 거 아냐?”

“오프 날인데 설마.”

“아니야. 요새 너랑 나를 태우실 때 보면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김지훈이 선생님이 애정을 희한하게 표현할 때가 있잖아. 못 가르쳐서 안달을 내신다고.”

“공부도 좋지만 오프 날은 쉬라고 있는 거잖아. 안 돼. 난 세상이 무너져도 오프는 가고 말거야.”

묘한 걱정 속에 어느 새 3주가 거의 다 지났다.

목요일 밤 거의 미친 듯 응급실과 수술실을 오갔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쓰러지듯 소파에 널브러졌다. 그 때 조용히 문이 열리며 비슷한 몰골을 한 김지훈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벌떡 일어서는 이혁원을 보며 손짓을 한 김지훈이 나직하게 말했다.

“혁원아. 종진아. 이번 주말 오프지?”

의도가 보였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동시에 외쳤다.

“예. 간만에 가는 주말 오프입니다.”

“그렇구나.”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스윽 문이 다시 열렸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쌍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오프를 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줄줄이 뻗쳤다. 웬만한 일이 아니면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분과 학회 한 번 참석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무너질 리 없다.

“그런데 말이야. 발표할 때 슬라이드 돌려야 할 사람도 필요하고 안내할 사람도 필요한데 어쩌지? 이준영 선생님이 하실 수는 없잖아. 에이! 아니다. 간만에 가는 오프라고 했지? 누구랑 같이 가야 하나.”

이준영 교수가 슬라이드를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대학 병원 교수들이 보면 전공의도 없냐는 말이 바로 나올 것이다. 더구나 이혁원에게는 아버지다.

이혁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선생님. 오프는 나중에 가겠습니다.”

“그래? 미안하네. 그래도 이론을 겸비하면 그만큼 발전하는 거니까 좋게 생각하자. 부탁한다.”

김지훈의 시선이 쓰윽 남은 놈에게 옮겨졌다.

거역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이혁원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홀로 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나종진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역시 나종진이야. 둘 다 멋지다. 그럼 일요일 아침 7시에 병원 앞에서 보자. 오후 4시에 끝나니까 스케줄 조절 미리 해 놔.”

설마가 사람 잡았다.

금요일 하루 쉬고 토요일 오전 집담회가 끝나자마자 예행연습을 했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까지 참석해 살벌하면서도 치열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실제로 발표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는데 아직은 부족한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퇴근한 뒤에도 고경아 앞에서 수차례 발표 연습을 했다. 철저하게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고경아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머릿속에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으면 뭐해요? 다른 사람 머리에 쏙쏙 들어가게 발표를 할 수 있어야 그게 진짜죠. 다시 해 봐요.”

다시, 다시, 다시.

이 말을 또 들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고경아의 입에서 말이다.

회초리만 안 들었지 엄한 선생님이 따로 없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 정도면 괜찮겠네요. 내일 발표 잘 해야 돼요.”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 김지훈의 얼굴에 자신감이 팍팍 충전됐다. 진정한 내조는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외조도 해야 한다.

짧은 시간이나마 고경아가 한 주의 피로를 풀고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최선을 다했다.

오해 말자.

입 짧은 사람이라도 때론 맛있는 음식이 삶의 활력이 되는 법이다. 간만에 고경희까지 함께 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무교동 낙지볶음을 먹었다.

처음 가 본 곳이라 기대가 컸다.

정말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맵다.

고경아와 고경희가 눈물을 흘리며 수저를 놓았다.

“매운 맛 시키지 않으셨어요? 맞죠?”

“예. 맵게 해달라고 하긴 했는데.”

종업원이 벽을 가리켰다.

- 청양 고추는 껌 씹듯 드실 수 있는 분들만 매운 맛을 시키세요. -

이런! 어쩐지 다른 곳보다 심하게 맵다 싶었다.

미리 알려주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지만 이미 버스는 떠났다. 우유를 입에 문 고경아와 고경희가 애먼 김지훈을 째려보았다.

간만에 맛있는 음식 산다고 했다가 눈 화살에 찔려 죽을 판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입이 얼얼하다며 입술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그 놈의 무교동 낚지가 사람 잡았다.

이것도 인생이다.

좋은 일처럼 보여도 방심하면 한 방에 훅 가기도 하고 입에서 욕이 나올 정도로 매울 수도 있다. 즐길 때 즐기더라도 그 전에 발밑 정도는 꼭 확인하는 것이 생활의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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