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의사의 마음은 아무리 불안해도 좋다. (2)
내심 강병옥의 뛰어남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김지훈이 갑자기 울린 휴대폰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도 통화하기 힘들었던 신현수였다.
그간의 안부와 고마움을 전했다.
“친구끼리 고맙다는 말 하는 거 아니라며? 설마 얼굴 못 본다고 친구 아니라는 건 아니지?”
많이 변했다.
더더욱 고마웠다.
“그럴 리가 있어? 잘 지내지? 하여튼 덕분에 수술 잘 끝냈어. 회복도 순조롭다.”
“야! 듣기만 해도 상당히 어려운 수술인데 이러다 너한테 완전히 밀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단기 연수라 그런지 난 구경만 한다. 어쨌든 내년 3월에 보자. 지훈아.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서연이가 째려본다.”
“엄살은. 신현수보다 수술 잘 하기가 그렇게 쉽냐? 빨리 와. 인마. 보고 싶다.”
“잘나가다 징그러운 소리는. 끊자.”
전화비 타령이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많이 보고 배우고 있을까? 몰라보게 변했을 것 같네. 하지만 유학파가 아니라 토종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마.’
숨 가쁘고 마음 졸였던 시간을 잘 헤쳐 나온 덕인지 기분 좋은 일이 계속 이어졌다. 또 힘든 시간이 오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손을 놓은 4년차들과의 자리가 남았다.
“도진아. 밥 먹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언제요?”
뒤로 미루면 기약을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오늘은 가장 일복이 없는 홍재순의 당직 날이었다. 사실 이미 상의까지 마쳤다.
1차는 역시 고기다.
삼겹살에 소주만큼 궁합이 잘 맞는 음식도 없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2차를 외쳤다.
일반외과 전공의를 거쳤다면, 김지훈과 술 한잔 했다면 누구나 한 번 쯤은 거친 곳, 골뱅이 집으로 직행했다. 온갖 성화에 못 이겨 고경아가 동석했다.
“형수님. 여기 앉으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서도진과 안호석이 환호성을 지르며 반색을 했다. 병원에서 많이 보기도 했지만 김지훈이 인턴 때 청평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날의 일로 꽃을 피웠다.
한 병 두 병 소주가 사라졌다.
“형수님. 조카는 언제 만드실 거예요? 아!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김지훈 선생님 집에 들어오시면 파김치죠? 일복이 저렇게 많은 사람도 드물 거예요.”
“도진아. 그렇지도 않을 것 같은데. 체력하면 김지훈 선생님이잖아.”
“호석아. 그 체력이 이 체력하고 똑같아? 모르는 거다. 힘 좋다고 다 세냐?”
고경아의 얼굴이 발개졌다.
“서도진. 안호석. 자식들이 술이나 마시지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형님. 형님은 교수님들끼리 즐거운 대화 나누세요. 우린 형수님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겁니다. 형수님. 벌써 6년 전인데 어떻게 청평에서 봤을 때랑 똑같죠. 비법이라도 있으세요?”
“어머! 저 아직 이십 대에요. 왜 이러세요?”
“앗! 마이 미스테이크.”
“앞으로 조심해요. 그런데 선생님들은 애인 없으세요?”
“형님 등쌀에 연애할 시간이 났겠어요? 지금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어이구! 생각만 해도 춥네.”
“우리 지훈 씨 그런 사람 아니에요.”
“형수님. 솔직히 말씀하세요. 다 보셨잖아요.”
4년차들이 학창 시절로 돌아갔다.
고경아의 입도 활짝 열렸다.
김지훈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마이 미스테이크? 발음하고는. 그래. 오늘은 너희들 자리니까 마음대로 해 봐라. 제자리에만 갔다 놔.’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네. 김지훈 교수님. 자주 좀 오세요. 볼 때마다 호칭이 달라지면 어떻게 해?”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오잖아요.”
“더 자주 오라고. 이경석 교수님하고 홍재순 교수님도 이러다 얼굴 잊어 먹겠어. 어떻게 전공의 때보다 얼굴 보기가 더 힘들어?”
김지훈이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나 살가운 주인아주머니였다. 유독 자신을 좋아해 이모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문득 어릴 적 잃었다는 아들 얘기가 생각났다. 비슷한 또래였다고 했는데 이런 날에는 더욱 생각날지도 몰랐다.
‘우리 김 교수는 언제 봐도 꼭 내 아들 같아.’
잠깐 눈시울을 붉히던 주인아주머니가 활짝 웃으며 잔을 권했다. 펠로우 세 명이 이모와 대작을 했다. 당직인 홍재순도 술 마시는 시늉을 하며 분위기를 맞췄다. 손님이 뜸해졌는지 주인아저씨까지 동석을 했다.
역시 술자리였다.
자연스럽게 패가 갈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고경아의 목소리가 톡톡 튀고 4년차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떠들썩한 자리가 이어졌고 홍재순은 오늘도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휴대폰이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아쉽지만 이만 자리를 끝낼 때였다.
내일을 위해 경이적인 자제력을 발휘한 김지훈이 알딸딸한 눈으로 홍재순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말이 적어진 것 같았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응? 아무 것도 아니야.”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홍재순이 피식 웃었다.
“술 많이 안 취했구나. 사실 아버님 때문에 걱정이야. 몇 개월 전부터 대장 항문 전문 병원을 만드신다고 이리저리 신경 쓰시더니 최근에 몸이 안 좋아지셨어.”
“어디 안 좋으세요?”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연세가 있으시니까 감당을 못하시는 거지. 노인네. 그냥 있는 병원이나 잘 유지하시지 일은 왜 벌리시는지 몰라.”
게슴츠레한 눈으로 듣고 있던 이경석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선생님. 혹시 선생님한테 맡기시려는 거 아니에요?”
“그건 이미 못 박았지. 내년에 전임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되면 병원에 남는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렸어. 근데 왜 그렇게 놀라?”
“선생님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으셔야 저희들도 따라가죠. 다행이네.”
“내가 문제지 당신들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 우리 김 교수, 이 교수를 안 뽑으면 누굴 뽑겠어? 얼핏 들었는데 고과 점수도 굉장히 좋다니까 마음 푹 놔. 그나저나 누가 중앙 의료원 원장이 될까? 허경발 선생님 같은 분이 돼야 하는데.”
고경아와 4년차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길게 할 말이 아니었다. 물론 귀도 기울이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김지훈이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그만하고 다들 집으로 갑시다. 도진아. 호석아. 광호야. 즐거웠다. 전문의 떨어지면 알지? 죽는다.”
“그전에 쪽 팔려서 먼저 죽을 겁니다.”
다들 웃으며 헤어졌다.
고경아도 얼마나 신나게 수다를 떨었는지 볼이 다 상기돼 있었다. 마지막까지 배웅을 하고 집으로 향하려는 순간 주인아주머니가 달려 나왔다.
“김 교수. 경아 씨. 이거 받아. 결혼할 때 못 가서 미안해. 이놈의 장사가 뭔지 시간을 안 주네. 정말 미안해.”
하얀 봉투다.
김지훈이 손사래를 쳤지만 막무가내였다. 주인아저씨까지 나서서 억지로 쥐어주는 통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주인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내 아들 같아서 주는 거야.”
술김에 나온 말만은 아니었다.
이모라고 부르는 여인의 눈빛도 그랬다.
“지훈 씨. 우리 주변에 좋은 분들이 참 많죠? 언니나 형부도 그렇고 이모도 그렇고 다 좋으시네요.”
“갑자기 훈철이 형이 보고 싶네.”
고경아와 함께 걷는 길이 행복했다.
적당한 술기운은 배고픈 늑대를 부르는 법이다.
“경아 씨. 아까 도진이가 조카 언제 만들 거냐고 했잖아요. 이모도 그러더라고. 말 나온 김에 만들까?”
“어머머! 펠로우나 잘 마치세요. 나도 마음 놓고 임신 휴가 받으려면 2년은 더 지나야 한다는 거 잘 알면서 무슨 애에요?”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직장 다니는 여자는 애도 제대로 못 가지는 게 말이 돼? 다른 데도 아니고 사람들 건강을 책임지는 병원이 말이야. 에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손잡고 눈빛을 마주쳤다.
황새는 멀리멀리 쫓아내야 했다.
아우우우우!
이놈의 늑대 소리가 무서워 오지도 않을 것 같았다.
금요일 밤도 하얗게 지새웠을까?
전날 밤에 떡을 친 놈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잠시 후 코고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토요일이다.
허경발 원장의 병환 등 여러 가지 일로 잠시 흐트러졌던 주말 집담회 분위기가 바짝 조여졌다. 전공의들에게 죽음의 시간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병석 환자 케이스가 교수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끌었다. 부분 절제술을 한 이유와 안정성부터 수술 후 치료 및 예후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수술 전 충분한 근거와 원칙을 갖고 상의했다.
대답을 못하면 안 될 일이다.
“점막에 국한된 암이기에 부분 절제술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또한 수술 후 삶을 질을 따져볼 때 이와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이혁원이다.
이론적인 면에서도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병변 주위를 3센티미터만 잘라도 안전한 지가 거론되면서였다.
“3센티미터가 안전하다는 근거가 뭐지?”
“미국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이혁원 선생. 인종부터 생활이나 식습관까지 많은 것이 달라. 그쪽이 괜찮다고 우리도 괜찮다는 확신이 있어?”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질문자도 신기동 교수였다.
근거는 사실상 신현수와의 통화 뿐이었다.
미국에서 시행했다고 무작정 수용할 수 없는 문제기도 해 교수들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과 매서운 추궁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빈약했다. 게다가 가장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이혁민 교수는 묵묵히 토론만 지켜보았다.
“그럼 대책은 있는 거야? 왜 대답을 못해?”
이혁원의 얼굴이 허옇게 떴다.
“나종진 선생. 신현수 선생과 직접 통화했으니까 더 잘 알겠네. 대답해 봐.”
“그게 워낙 짧게 통화해서······.”
“수술만 하면 끝이라는 소리야?”
나종진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제대로 된 답이 없자 비수가 더욱 예리해졌다.
“왜 대답이 없어? 2년차면 책 좀 읽어야 하는 거 아냐?”
급기야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목소리까지 들렸다.
“이혁원 선생. 나종진 선생. 다른 환자는 원칙을 갖고 제대로 보고 있는 거야?”
비수에 난도질당하던 전공의 두 놈이 불길에 휩싸였다.
“공부 좀 하자. 공부 좀. 오늘 빤히 이 환자 질문이 나온다는 걸 알았을 텐데 준비가 이게 뭐니? 이게. 어렵게 수술한 김 교수 보기 미안하지도 않아? 에이! 아니다. 이건 아니다.”
송재덕 교수까지?
이혁원과 나종진이 머뭇거릴수록 질문은 점점 더 예리해졌다. 그야말로 집중포화였다.
김지훈이 슬며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내가 다 가슴이 두근거리네. 이미 다 준비했던 내용인데 왜 대답을 못해? 가볍게 얘기해서 그런가?’
사실 가장 정확하게 대답해야 할 수 있는 사람은 집도의다. 하지만 주말 집담회는 교수들과 전공의 간의 토론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더욱 엄격한 근거와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는 말씀이시네. 수술 후 어떻게 관리하고 치료해야 할지를 확실하게 정해놓지 않으면 도리어 환자에게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명심해야 할 문제들이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한 줌 재로 사라지고 나서야 질문이 끝났다. 그제야 이혁민 교수가 김지훈을 보며 말했다.
“김지훈 선생. 하고 싶은 말 있나?”
“예. 선생님들의 우려와 걱정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환자의 경우 저 역시 불안한 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론에 근거한다면 3센티미터보다 더 적게 잘라도 문제가 없다는 판단도 가능합니다. 단 고식적 방법으로 수술한 환자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추적 관찰을 해야 한다는 점 명심하고 있습니다. 최소 5년간은 지켜봐야 하겠지만 부분 절제술의 이점을 고려할 때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맞는 말이다. 새로운 시도가 없으면 발전도 없는 법이지. 단 환자를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거다.”
“그래. 그거야. 나도 맨 처음에 호치키스 사용하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 그래도 환자에게 좋다면 해 봐야지. 이왕 하는 거면 확신을 가져야 하고 말이야. 김 교수. 그치? 내 말이 맞지? 잘했다. 잘했어.”
“맞습니다. 우리 펠로우들이 그런 면에서는 아주 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교수. 어쨌든 수고했어.”
신기동 교수까지?
분위기가 확 변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펠로우가 된지 6개월도 더 지났는데 엉뚱하게도 새삼 교수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혁원이나 나종진과 똑같은 처지였다. 아니, 펠로우 초반만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비수와 불길은 전공의를 향하고 자신은 동등하게 대하고 있었다.
기분 좋으면서도 강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존중을 받으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할 것이다.
박순용과 3년차 치프들이 활활 불길에 타오르는 것을 마지막으로 집담회가 끝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전공의들의 모습을 보던 이경석이 피식 웃었다.
‘내가 다 땀이 나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