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14화 (614/1,329)

4화. 특별한 환자. Ⅰ (1)

병실을 나와서야 한껏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큰 스승님. 이렇게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제가 감사드립니다.’

이제야 창문 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9월의 높고 푸른 하늘이 눈부셨다.

그때 누군가 툭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결혼한 사람이 청승맞게 뭐하는 거야? 옛날에 헤어진 애인이라도 있어?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해. 이 사람아.”

어? 장인어른이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도 함께였다.

간만에 수술이 일찍 끝난 모양이었다.

‘스승님 수술이 뭐가 있는지 신경도 못 썼네.’

“아버님. 선생님.”

“스승님 얼굴만 보고 바로 원주 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저녁 한 끼 사주고 싶지만 밥은 다음에 먹자. 스승님도 이만하면 자네 없어도 되겠어. 오늘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잠부터 자.”

“그래그래. 자는 게 좋겠다. 얼굴이 말이 아니다. 말이 아니야. 누가 보면 교수가 아니라 1년차라고 하겠어. 자자. 푹 자자. 근데 지훈이 너 당직이 안서니? 응급실에 환자가 없다. 환자가.”

“예? 예. 다시 서야죠.”

“송 교수. 앞뒤 말이 왜 그렇게 달라? 잠 좀 재워. 한 번만 더 우리 사위 얼굴 저렇게 만들면 내가 당장 데리고 갈 거야. 나 저놈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물건을 만들어야죠. 물건을. 개인 병원에서 그게 됩니까? 안될 겁니다. 암! 안되고말고. 이 교수. 안 그래? 내 말이 맞지? 그치? 지훈아. 이참에 대장하자. 대장. 좋다. 좋아.”

허경발 원장의 회복은 제자들의 활기였다.

이젠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물론 이준영 교수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킵은 그만 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로 들어가던 고성문의 마지막 말에 또 입가가 저절로 찢어졌다.

“김 교수. 수고했어. 고맙다.”

피곤해 죽겠는데 웃을 일만 벌어졌다.

모처럼 쫒기지 않고 회진을 돌았다.

확실히 마음이 편해지면 얼굴에 표시가 나는 모양이다.

“선생님.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웃는 모습이 다르네요.”

“일 좀 그만하고 잠 좀 자요. 환자보다 의사 얼굴이 더 환자 같으면 어떻게 해요?”

“그게 다 우리 때문인데 보약이라도 지어 드려야 하나?”

환자들의 너스레에 행복하고 즐거웠다. 킵을 하는 동안 환자들에게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혁원아. 컨설트 보자.”

“어? 위암 환자네요. 결국 대장만 빼고 다 보시네요.”

함께 내과 병동으로 가 차트와 검사부터 확인했다.

55세 남자 환자. 이병석.

조기 위암이었다.

암에 걸린 것은 불행이지만 조기에 발견한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바로 환자를 찾아 진료를 했다. 누구나 그렇듯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 잡혀 있었다.

“상당히 빠르게 발견해서 수술만 하시면 문제없으실 겁니다. 물론 수술 후 치료는 동일합니다.”

“저···. 위를 얼마나 자르고 입원은 며칠이나 해야 합니까?

초조한 만큼 궁금한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피곤을 못이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눈에 힘을 주어도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고 머릿속은 멍하기만 했다.

이런 상태로는 환자를 볼 수 없다.

환자를 보러 왔으면서도 조기 위암이라는 것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못했다. 미안하기만 했다.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병실을 빠져 나왔다.

이혁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선생님.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거의 비슷하게 날밤을 새운 이혁원이었다.

눈은 벌겠지만 팔다리에 힘이 남아있었다.

그깟 몇 년 차이가 이렇게 무서울지 몰랐다.

20대와 30대의 차이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부럽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제길!’

물먹은 솜처럼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를 끌고 병동으로 돌아왔다. 그때 연이어 신기동 교수 파트를 맡은 나종진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혈관 수술 하나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더 이상 킵을 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김지훈도 다시 혈관 수술에 들어가야 한다. 김지훈의 상태를 감안하면 말 안 하고 혼자 들어갈 수도 있지만 2년차 후반인 나종진으로서는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김지훈도 난감했다.

킵을 하는 동안 나종진에게 수술을 맡겼다. 이제는 수술을 들어가야 하지만 몸이 따라줄지 의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쉰다는 말은 김지훈도 꺼내기 힘든 말이었다.

설상가상 신기동 교수가 회진까지 올라왔다.

‘에휴! 아무리 힘들어도 쉴 팔자가 아닌 모양이다.’

김지훈이 뻐근한 어깨를 한껏 뒤로 젖히며 신기동 교수 옆에 섰다. 얼굴을 툭 찌르는 시선과 함께 날카롭고 예리한 목소리가 들려다.

“쯧쯧! 얼굴이 이게 뭐야? 김지훈. 회진이고 수술이고 뭐고 당장 퇴근해. 스승님 살리려다 제자 한 놈 잡겠네. 내가 다 말해 놓을 테니까 빨리 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수를 날리는 신기동 교수다.

얼떨떨하다.

감동이다.

카르페 디엠!

그날 밤 김지훈은 시체가 됐고 고경아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서방을 탓해야 할지, 병원을 탓해야 할지 아니면 이런 사람인줄 알고도 결혼한 자신을 탓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10시간을 내리 잤다.

잠을 많이 잤다고 해서 풀릴 피로가 아니었다. 급한 불만 끈 형국이었지만 그나마 머리는 가벼워져서 다행이었다. 간만에 고경아와 이른 아침을 먹고 출근을 했다.

외과 센터 응급실에 들어서자 이경석이 손을 흔들었다.

“김지훈 선생, 이제 좀 살만해? 킵하느라 힘들었지? 그동안 고생했어.”

이경석도 꽤나 지친 얼굴이었다.

김지훈의 빠진 자리를 메우기 위해 홍재순과 하루걸러 당직을 선 탓이었다. 불평은 몰라도 하다못해 생색 정도는 내도 될 텐데 도리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동료란 그런 존재일 것이다.

“형, 미안해요.”

“킵보다 당직 서는 게 훨씬 편한데 무슨 소리야?”

시간이 되자 칼처럼 나타난 송재덕 교수에게 보고를 하고 함께 외래로 올라갔다. 간만에 모두 모였다. 커피 한잔을 하면서도 허경발 원장과 환자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자자! 올라가자. 오늘도 처음인 것처럼 활기차게 환자보고 수술하자. 경석아, 재순아 당직 줄어서 좋겠다. 나도 좋다. 좋아. 그동안 환자 없었는데 팍팍 늘겠구나. 지훈아, 이제 힘 좀 쓰자.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우리 펠로우들 모두 귀하다. 귀해.”

너털웃음이 터졌다. 잠깐의 휴식과 말 몇 마디였지만 이 또한 삶의 활력소였다. 외래를 나서는 교수들을 보던 김지훈이 슬쩍 이혁민 교수를 보았다.

‘첫 위암 환자 컨설트를 받았는데 말씀은 드려야지.’

“선생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 있나?”

“다른 게 아니라 컨설트 하나 받았습니다.”

“그건 니가 알아서 해라. 어려운 점은 없을 거야. 아직 퇴원은 못하셨지만 그동안 수고했다.”

순간 가슴이 뿌듯해지며 감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혁민 교수 역시 스승처럼 자신을 충분히 신뢰하기에 위암 수술을 넘긴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시름 놓았을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도 그리 밝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다른 교수들처럼 자주 허경발 원장을 찾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왜? 얼굴이 안 좋아 보이나? 의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다. 그깟 자리가 뭐라고 벌써부터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하긴 내도 과장이라고 회의에나 참석하고 있으니 다를 바가 없다. 환자만 열심히 보면 결국 다 따라올 텐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이혁민 교수가 혀를 차며 일어났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예전에는 고개만 갸웃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펠로우가 돼서 그런지,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말 속에 담긴 의미가 확 다가왔다.

‘설마 금경태 같은 사람이 또 있는 건 아니겠지?’

허경발 원장은 복귀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앙 의료원 원장 자리가 공석이 된다. 맨 꼭대기에 있었던 자리가 비면 파급력이 대단하기 마련이다.

금경태처럼 야심에 매몰되지 않았다고 해도 명예와 권력을 쫓는 사람이 한둘은 아닐 것이다. 순리대로 해결된다면 모르지만 누구 한 명이라도 과욕을 부린다면 한 순간에 시궁창처럼 더러운 꼴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또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큰 스승님이 설마 아무 조치도 안 하시고 퇴임하실 리는 없잖아?’

진료나 수술보다 더 힘들고 복잡한 일이 병원 내 힘 싸움이었다. 예전처럼 확연한 파벌이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은연 중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묵묵히 뒤를 따르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펠로우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아. 선생님들이 계신데 난 환자 열심히 보고 중심만 잘 잡으면 되겠지.’

맞는 생각이었다.

전임강사도 아니고 시간강사에 불과한 펠로우가 진료 이외의 일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설혹 관심을 가진다고 해도 입방아나 찧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더구나 이젠 알게 모르게 흐트러졌던 일상을 단단히 단속할 때였다.

화요일이지만 수술이 없어 이혁민 교수의 수술을 들어갔다. 복부를 열 때 3년차 총치프가 된 박순용과 간만에 손을 맞춰 보았다. 인턴 때 놀러갔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순용은 더 할 것이다.

“선생님. 제가 어느새 펠로우가 됐네요.”

“전 벌써 3년찹니다. 세월 빠르죠? 남은 일 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과내에서는 후배 전공의지만 학교 선배다.

박순용의 너스레에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곧 이혁민 교수가 들어와 본격적인 수술을 시작했다. 컨설트까지 받은 마당이라 눈을 부릅떴다. 언제보아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이다.

박순용의 손이 훌륭하게 어울렸다.

‘순용이 형도 참 열심히 하셨네.’

모두들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반드시 꺾어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평생 함께 해야 할 동료들이었다. 하기에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마음가짐 때문일까?

아니면 컨설트 때문에?

송재덕 교수나 이준영 교수처럼 빠르진 않았지만 지루할 틈도 없이 수술이 끝났다. 위암 수술 하나면 점심은 무조건 건너뛰기 마련이었다. 고픈 배를 부여잡기도 전에 수술이 이어졌다.

어느새 4시가 넘었다.

컨설트 때문에 일찍 수술실을 빠져 나왔다.

물론 이혁민 교수에게 사유는 설명했다.

‘아! 허기져.’

어기적어기적 수술 방을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발소리를 죽이며 달려왔다. 고경아가 주변을 살피며 뭔가를 내밀었다. 삶은 계란 몇 개와 우유 하나였다.

“지훈씨. 배고프죠? 이거 먹고 힘내요.”

때 아닌 눈물이 나려고 한다.

사람들 눈만 없었으면 번쩍 안아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다.

콩 반쪽도 나눠 먹으라는 말이 있지만 사랑을 나눌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탈의실에 앉아 전공의들의 눈총을 받으며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우유까지 남김없이 마셨다.

허기가 사라지며 마음까지 풍요로워졌다.

기분 좋은 일이 이어졌다.

병동에 올라가자 이혁원이 부리나케 달려와 차트와 방사선 봉투를 내밀었다. 컨설트를 봐야 하는 환자였다. 역시 변함없는 김지훈 파트 전공의다웠다.

“이혁원. 이제 눈 좀 떴구나.”

“선생님. 2년차 후반에 이 정도는 기본이죠.”

그렇게 태우는데 넉살도 따라 늘었다.

피식 웃으며 회진을 돌았다.

허경발 원장이 무난하게 물을 섭취해 더욱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고령에도 강인한 정신력을 가졌기에 체력만 받쳐준다면 곧 거동도 가능할 것이다.

“선생님. 내일 미음부터 시작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환자가 아니라 의사가 결정할 일이야.”

가쁜 숨도 거의 다 사라졌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예. 그럼 내과 교수님과 상의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자 허경발 원장이 웃었다.

교수가 되었어도 예전과 똑같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컨설트를 보기 전 확실하게 환자 파악부터 해야 했다. 의국으로 들어가자 마침 홍재순이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공연히 미안해 헛기침을 하며 옆에 앉았다.

최근 얘기할 시간도 없어 몇 마디 나누고 복부 CT와 내시경 사진 및 조직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암은 위 하부에 발생했고 점막에만 국한됐다.

원칙적으로는 위의 삼분의 이를 자르고 소장과 이어주어야 한다. 전통적인 수술 방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점막에 국한된 암은 전이가 되지 않는다. 좁쌀만 한 암을 제거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너무 큰 수술을 하는 격이었다.

신현수와 함께 상의했던 수술이 떠올랐다.

음성의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

홍채연.

의사와 환자의 관계인데도 자주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미숙하고 힘들었을 때 본 까닭도 있었지만 그만큼 고마웠고 많은 도움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데 이 환자도 부분 절제술이 가능할까?’

일견 자명해 보이는 선택이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의문이 있을 때는 상의를 해야 하는 법이다.

김지훈이 슬며시 홍재순 앞으로 차트를 밀었다.

“나도 보라고? 김지훈 선생, 나 항문 파트야. 왜 툭하면 환자를 들이밀어?”

“항문은 항문만 봐야 된다는 법 있어요? 학문도 닦을 겸 학문적으로 이 환자 좀 봐주세요.”

“허경발 선생님 좋아지셨다고 여유가 생긴 모양인데 그걸 지금 개그라고 하는 거야? 일석이였으면 웃기기라도 했을 테지만 당신은 아니다. 다신 하지 마라.”

분위기 좋게 부탁한다고 했지만 효과가 영 좋지 못했다.

같은 말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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