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13화 (613/1,329)

3화. 큰 스승님! Ⅲ (2)

오후 회진을 마친 교수들이 모였다.

눈을 뜨고 있는 허경발 원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김지훈이 서둘러 설명을 하자 모두들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검사 결과를 확인한 호흡기 내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김지훈을 보았다.

환자를 가장 잘 아는 의사는 바로 곁을 지킨 의사다.

“김지훈 선생. 빼도 되겠지?”

“예. 선생님.”

밤을 앞두고 환자에게 큰 변화를 줄 수 있는 치료나 처치는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문제가 생겨도 제때에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지훈과 전공의들이 있기에 그런 우려는 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 빼자.”

김지훈의 훅 숨을 내뱉었다.

지난 일주일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다.

큰 스승님의 고통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바랐다.

“선생님. 튜브 제거하겠습니다.”

튜브를 빼기 전 마지막으로 석션을 했다.

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든 맑은 가래가 끌려 나왔다. 산소 포화도는 90퍼센트를 유지했다. 비록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어했지만 허경발 원장의 의식은 또렷했다.

튜브와 기도 사이를 밀착시키고 있던 공기주머니 속의 공기를 제거했다.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튜브를 빼자 허경발 원장이 거친 기침을 토했다.

“선생님. 입 다무시면 안 됩니다.”

목구멍과 입 안에 고인 분비물들을 깨끗이 제거했다.

팔다리를 속박했던 끈도 풀었다.

침대 윗부분을 세워 허경발 원장을 앉혔다.

쇠한 기력 탓인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초조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허경발 원장이 긴 숨을 내쉬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며 무언가 말하려 애를 썼다.

‘지훈아.’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마디 말도 들을 수 없었지만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큰 스승의 마음이었다. 떨리는 손을 잡은 김지훈의 눈가가 붉어졌다. 교수들도 다르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다시 한 번 상태를 확인했다.

호흡기 내과 교수가 김지훈의 등을 두드렸다.

“김지훈 선생. 오늘 밤 잘 봐. 고생했다. 원장님. 이 상태를 유지하시면 내일 병동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기침 열심히 하시고 숨 크게 쉬세요.”

“그래도 되겠어? 괜찮으실까? 정말 괜찮을까?”

송재덕 교수의 말에 호흡기 내과 교수가 웃었다.

“내일 아침 검사 결과와 상태를 봐야겠지만 이젠 중환자실에 계시는 것이 도리어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김지훈 선생 덕에 한 고비는 분명히 넘기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세요.”

곧 면회가 시작됐다.

튜브가 제거된 모습에 깜짝 놀란 보호자들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족들의 손을 잡은 허경발 원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몇 방울의 눈물이 떨어졌다.

소리 없는 눈물이 더 슬픈 모양이다.

김지훈도 먹먹한 가슴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 밤이 관건이다. 모든 기능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석션을 안 할 수는 없어. 큰 스승님. 하룻밤만 참으세요.’

면회가 끝난 후 허경발 원장이 제자들을 찾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눈길만 주고받았다. 김지훈과 이혁원에게도 미소를 보냈다. 그것으로 충분한지 허경발 원장이 밀려오는 잠에 눈을 깜빡였다.

다들 조용히 물러서는 순간 김지훈이 석션을 잡았다.

“선생님. 주무시기 전에 석션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아 하세요. 힘드셔도 참으셔야 합니다.”

말랑말랑한 고무호스를 이용해 입안의 분비물을 제거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쩌면 삽관했을 때보다 더 힘들지 모르는 일을 해야 했다.

콧구멍으로 고무호스를 집어넣었다. 환자에게는 보통 불편한 일이 아니었지만 김지훈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목 뒤편 깊숙한 곳에 낀 가래까지 모두 제거하고서야 고무호스를 뺐다.

허경발 원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숨소리는 맑다.

송재덕 교수가 콧소리를 냈다.

조금은 안심이 되는지 특유의 말투가 섞였다.

“어이구! 우리 의사되려면 멀었다. 멀었어. 스승님 주무신다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가자. 가자. 우리가 있어야 도움도 안 되겠다. 스승님. 지훈이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 하셔야 합니다. 내일 아침에는 병실에서 뵐게요.”

허경발 원장이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중환자실을 나가는 제자들에게 눈길을 주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김지훈이 눈을 뜨고 있는 한 곧 잠에서 깨야하겠지만 간만에 스스로 청하는 잠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이혁원과 함께 상태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훈아. 고맙다. 모두들 고맙다.’

안심하기에 아직은 이르지만 저승 문턱까지 갔던 스승을 살린 김지훈이었다. 오늘 밤도 무사히 지나갈 것이다. 아들이기에 아낀다는 내색을 철저하게 감춰왔지만 이혁원이 새삼스럽게 보였다.

‘혁원아. 남들 앞에서 나설 수는 없지만 언제나 응원하고 있다. 지금처럼만 해 다오.’

다소 들뜬 마음과 불안이 뒤섞인 밤이었다.

피곤한 눈으로 이혁원과 함께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밤 12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장인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가는 치도곤을 당할 것이다.

(뭐? 튜브를 뺐다고? 스승님은 괜찮으시지? 알았어. 내 지금 바로 올라갈게. 스승님 잘 보고 있어.)

“아버님. 내일 오세요. 이왕이면 병실에서 보시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아냐. 아냐. 이런 날 얼굴을 뵈야지.)

“아버님, 지금 오시면 면회 못합니다. 죄송하지만 저도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큰 스승님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당장 달려온다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정이 이렇게 깊은 일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큰 책임감을 느꼈다. 숨소리가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감기던 눈이 저절로 떠질 지경이었다.

‘다시 나빠지시면 어떻게 하지?’

일요일 밤이 하얗게 지나고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차례차례 검사 결과가 나왔다.

김지훈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보람이 있을까?

밤새 허경발 원장이 본의 아닌 시달림을 당했다. 가뜩이나 쇠약해진 육신이 더욱 지쳤겠지만 원활해진 호흡에 정신은 상당히 맑아 보였다. 하지만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섣부르거나 잘못된 판단은 환자에게 큰 심리적 타격을 준다. 교수들이 정확한 결론을 내기까지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교수들이 속속 들어왔다.

호흡기 내과 교수가 신중하게 검사 결과를 확인한 후 김지훈과 상의를 했다. 나직한 대화가 길어지자 행여 또 다른 문제가 있는지 불안해진 교수들이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이미 결과를 짐작하고 있다고 해도 제자이기에 걱정부터 앞서는 모양이었다.

상의가 끝났다.

호흡기 내과 교수가 허경발 원장 앞에 섰다.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활짝 열렸다.

“원장님. 올라가셔도 되겠습니다.”

마침내 중환자실을 벗어났다.

‘큰 스승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김지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막상 두 귀로 듣자 더 한 흥분이 다가온 것이다.

이준영 교수마저 티가 날 정도로 기뻐했다.

멀쩡한 사람도 두렵게 하는 중환자실 기계음을 뒤로 했다. 허경발 교수와 함께 병실로 들어섰다. 공기부터 다르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다들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보호자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터졌다. 급기야 허경발 원장의 손을 잡으며 엉엉 대성통곡을 했다.

북받치는 기쁨일 텐데 왠지 서럽게만 들렸다.

보호자의 마음은 다 그럴 것이다.

“그만 울어요. 그만. 스승님 다 좋아지셨는데 왜 울어요. 왜. 지금부터는 보호자 분들 역할이 아주 큽니다. 우리 김지훈 선생이 운동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 바로 스승님과 함께 복도를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아셨죠?”

아직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송재덕 교수가 입맛만 쩝쩝 다셨다.

“좋은 날인데, 기쁜 날인데.”

마냥 병실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허경발 원장의 상태를 확인한 김지훈이 마지막으로 병실을 나왔다.

그때 보호자들이 급히 달려 나왔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갑자기 모든 피로가 싹 사라졌다.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먹먹해졌다. 하지만 뒤늦게 도착한 고성문에게 된통 한 소리 들어야 했다.

“김 서방. 병실로 올라가셨다고 왜 연락 안 했어?”

“예? 아침에 바로 오신다고 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오는 내내 얼마나 초조했는지 알아?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휴대폰인데 전화는 또 왜 안 받아? 스승님 어디 계셔?”

전화가 왔었다고?

이런! 휴대폰 화면이 깜깜했다.

‘에휴! 이럴 때 배터리가 나가냐.’

바로 병실을 안내하고 외래로 달려갔다.

눈꺼풀에 바위 덩어리가 달려있었지만 오늘은 무조건 기쁜 날이었다. 진료 준비를 하고 있는 외래 간호사가 이뻐 보일 지경이었다.

환자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이번 일로 새삼 많은 것을 깨달았다.

‘병의 경중에 따라 치료는 다르다고 해도 환자는 다르지 않아. 모든 환자가 다 큰 스승님이라고 생각해야 돼.’

허경발 원장이 소중하듯 모든 환자 역시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일 것이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차이를 두진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계기였다.

모든 환자를 허경발 원장을 보듯 볼 수는 없지만 질환의 정도에 따라 적절하면서도 최고의 노력을 기해야 할 것이다. 외래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고 느꼈는데 눈이 감겨 있었다.

“선생님. 환자 분 부를까요?”

외래 간호사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피곤하긴 피곤한 모양이었다.

뻘건 눈은 어쩔 수 없지만 복장은 단정해야 했다.

찬물에 세수를 하고 가운을 살피고는 자리에 앉았다.

“진료 시작합시다.”

오늘도 첫 진료 이후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15분 간격으로 환자 아홉 명을 보았다.

의료 체계 상 수많은 의사들이 어쩔 수 없이 빠르게 환자를 봐야 한다. 특히 대학 병원은 3시간 대기 3분 진료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만 불행히도 의사가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놈의 돈이 문제다.

어쨌든 외래 환자가 적은 일반 외과는 그런 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병원 입장에서는 돈을 못 버는 과 중 하나겠지만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는 그나마 만족스러운 시간일 수도 있었다.

오늘따라 환자들의 궁금증이 폭발했다.

피곤까지 더해져 입에서 단내가 났다. 웃거나 혹은 만족스러워 하는 환자들을 보는 순간만은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거의 12시가 다 돼 마지막 환자를 보고 본 김지훈이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큰 스승님 어떠신지 보고 일단 좀 자야겠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어지럽네.’

그때 간호사가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선생님. 컨설트 하나 왔네요.”

용지를 받은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Stomach Cancer(위암).

for proper treatment(적정한 치료를 위해).

To prof. 김지훈(김지훈 교수에게 의뢰합니다).

이혁민 교수가 컨설트 일부를 넘겼지만 그동안 위장관 쪽은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다. 내심 ‘언젠가는 오겠지’ 하며 기다렸는데 드디어 위암 환자 수술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웃음소리가 당장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환자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가급적 맑은 정신으로 만나야 했다. 일단 병실에 들려 허경발 원장의 상태를 확인한 후 연구실로 가 잠을 청했다. 이준영 교수의 수술이 진행되고 있을 테지만 참여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따르르릉!

알람이 울렸다.

2시다.

죽은 듯 잠을 잤지만 눈은 뻑뻑하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긴장이 누그러진 탓일 것이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깜빡거리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1시간이 휙 지나 있었다. 여전히 온몸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지만 더 이상 쉴 여유는 없었다.

쏜살처럼 병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콧소리를 냈다.

‘오늘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정시에 퇴근해서 내일 아침까지 자고 만다.’

문 열리는 소리 때문이었을까?

침대에 머리를 묻고 있던 보호자가 벌떡 일어났다.

곤히 잠을 자던 허경발 원장도 눈을 떴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잠시 후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야.”

힘없는 손짓으로 김지훈을 앉혔다.

사실 단지 상태만 확인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이젠 목 상태도 돌아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 이상 금식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 물 좀 드셔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에게 부탁해 물 한 컵을 가져왔다.

“천천히, 천천히요.”

허경발 원장이 김지훈에게 기댄 채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입에 물었다. 상식과는 달리 가장 넘기기 어려운 것이 바로 물이다. 목 기능이 조금만 떨어져도 사레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물만 제대로 넘길 수 있으면 다른 음식물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조금씩 물을 넘겼다.

다소 힘들어 보였지만 사레는 유발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선생님. 내일 아침까지 문제가 없으면 교수님과 상의해서 식사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힘드시겠지만 운동을 시작해야 하니까 누워계신 동안에도 팔다리 운동 정도는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운동도 매우 중요한 치료였다. 체력이 돌아오고 호흡이 깊고 강해져야 스스로 가래를 뱉어낼 수 있다. 또 다시 폐렴이 발생한다면 이번처럼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

“그럼 이따 저녁에 뵙겠습니다. 보호자 분. 혹시 물을 드시다 사레가 걸리거나 숨소리가 이상하면 바로 중단하시고 제게 알리셔야 합니다.”

흡인성 폐렴이 걱정됐지만 충분한 주의를 기울인다면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바이탈 기록을 살핀 후 몸을 일으켰다.

그때 허경발 원장이 김지훈의 손을 잡았다.

“지훈아.”

자상하기만 했던 큰 스승의 눈에서 스승의 무뚝뚝함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 수 있었다. 고맙다는 말 이상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분명했다.

순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저 꾸벅 인사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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