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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612화 (612/1,329)

제3화. 큰 스승님! Ⅲ (1)

아침 검사 결과가 나왔다.

무엇보다도 흉부 사진 소견이 중요했다.

누군가 흥분과 기대 섞인 숨을 내뱉었다.

까만 부분이 전보다 넓게 보였다.

회복의 징조라고 보기에는 미흡하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또 하나의 빛이 보였다. 그간 말을 듣지 않던 항생제의 감수성 검사 결과가 나왔다. 폐 속에 숨어 독소를 뿌리고 있을 세균을 잡을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얻은 것이다.

“새로운 항생제를 투여했습니다만 효과가 얼마나 날지는 미지수입니다. 김지훈 선생,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야겠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눈앞에 있을지도 몰랐다. 회복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과 집중이 필요했다.

동료들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환자실 킵을 하지 않지만 홍재순과 이경석 그리고 3년차 총치프인 박순용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김지훈 자신의 일을 대신해 주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직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오늘도 하루는 길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고 시간 나는 대로 중환자실을 찾았다. 전공의 때처럼 조각 잠으로 피곤을 조금이나마 풀었다. 새벽이 가까워지면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어느새 토요일이다.

입원한지 벌써 6일이나 됐다. 주말은 중한 환자에게 가장 위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많은 시간을 얻은 김지훈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었다.

‘큰 스승님도 지금까지 버텨주셨는데 내가 버티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돼. 조금만 더 힘내자.’

얼굴을 굳힌 김지훈이 석션 줄을 들었다.

찌이익! 찌이익!

줄줄 끌려 나오는 누런 가래.

똑똑 떨어지는 수액을 따라 투입되는 항생제.

습기를 가득 머금은 산소.

점점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바이탈.

의사들의 노력.

허경발 원장의 강인한 의지.

절망보다는 희망을 보아야 할 때였다.

이혁원과 교대로 킵을 했다.

주중 당직에 이어 주말 당직까지 대신 서는 탓에 피곤이 가중된 이경석과 홍재순도 시간 나는 대로 교대를 해 주었다. 전공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덕분에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하루에 수십 번 이상 석션을 했다. 숨소리가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반색을 하다가도 이내 거칠어지는 소리에 낙담하길 반복했다.

허경발 원장의 고통은 끝이 없을 것 같았다.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던 김지훈의 눈빛이 흐려졌다. 앙상하게 마른 팔목을 보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치료 자체도 힘들기만 한데 지금까지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 못했다. 수액과 영양제를 투여한다고 하지만 입으로 섭취하는 것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었다.

‘체력이 버텨 줄까? 이 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악순환에 빠지게 될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희망을 보다가도 툭하면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내과 질환을 두고 외과가 킵을 한 것 자체가 애초에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들 지경이었다. 내과가 킵을 한다고 해서 치료가 달라질 일이 없는 데도 말이다.

수시로 전화를 하는 고성문을 볼 낯이 없었다.

어느새 하루가 또 지나고 일요일 오후가 왔다.

막 석션을 한 탓에 힘들어만 보이는 허경발 원장을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백하기만 했던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 같았다. 중환자실을 가득 채운 기계음 사이를 비집고 들려오던 거친 호흡 소리가 다소 잦아든 것 같기도 했다.

급히 청진을 했다.

다소 맑아진 숨소리였지만 석션을 하고난 직후에는 항상 그렇게 들렸다. 회복의 명백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잔뜩 인상을 쓰며 허경발 교수의 상태를 살피던 김지훈이 석션 줄을 잡았다.

고통스러운 과정이 반복됐다. 진정제를 투여해도 본능적인 반응은 제어할 수 없기에 보는 사람도 괴롭기 짝이 없었다.

‘큰 스승님. 절대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던 김지훈이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지 다르게 보였다.

느낌에 불과할까?

경험은 상당히 무서운 놈이다. 지금이 바로 생사를 가를 터닝 포인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할 때였다.

고민만 할 때가 아니었다.

“간호사. 포터블(이동식 방사선 촬영 장치) 불러 주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확인할 게 있어서요.”

촬영을 기다리는 사이 이혁원이 들어왔다.

이준영 교수도 함께였다. 포터블이 들어오자 다소 놀란 눈치였다.

“무슨 일 있어? 설마 나빠지신 거야?”

“아닙니다. 뭔가 변화가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환자를 느낌으로 치료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때론 경험이 주는 감각이 필요할 때도 있다. 좋든 나쁘든 사전에 알아낸다면 최악의 경우는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경발 원장의 앙상한 가슴이 드러났다.

십자 모양의 그림자로 초점을 맞췄다.

“슛합니다.”

위이이잉! 삑!

촬영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혁원이 부리나케 뒤를 따라가 직접 흉부 사진을 받아왔다. 분명 필름을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먼저 확인했을 것이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것 같았다.

김지훈도 내심 기대를 걸었다.

어제, 오늘 아침, 그리고 지금 막 찍은 사진 세 장을 줄줄이 뷰박스에 걸었다. 모두들 눈가를 잔뜩 찡그리며 사진을 확인했다.

이준영 교수가 훅 숨을 내뱉었다.

이혁원은 입술을 물고는 귀를 활짝 열고 있었다.

“선생님. 확실히 좋아진 거죠?”

공기가 들어 차 검게 보이는 부분이 늘었다.

폐의 구조물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기만 했던 부분에서 가느다란 선들이 보였다. 정상적인 폐라면 반드시 보여야 할 기관지와 폐혈관 음영이었다.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변화였지만 회복의 길로 완전히 들어섰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허경발 원장의 상태를 가리키는 모든 지표가 좋아져야 한다.

“석션.”

허경발 원장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했다.

아직도 가래는 누렇기만 했고 양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85퍼센트 언저리에 있던 산소 포화도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칠어지던 호흡음도 이내 잦아들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흥분으로 숨까지 가빠온다.

모두들 그 자리에 선 채 허경발 교수만 보았다.

새애액! 새애액!

십여 분 간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던 호흡이 다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위험에서 온전히 벗어난 상태가 아니었다. 고삐를 바짝 쥐어야만 회복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지 않는 이유였다. 하지만 분명 희망의 빛이 보였다. 허경발 교수의 목소리를 언제 들을 수 있을지는 이제 김지훈과 이혁원의 손에 달렸다.

“선생님. 석션 간격을 20분으로 당기겠습니다.”

비록 재운 상태라고 하지만 허경발 원장은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다. 김지훈과 이혁원 역시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사다.

환자가 누구이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희망을 본 이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목숨이 걸렸기에 더욱 그래야 한다.

째깍! 째깍!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다.

어김없이 석션이 이어졌다.

폐의 염증과 호흡 상태만이 아니라 바이탈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었다. 조그만 변화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김지훈과 이혁원이 밤을 꼬박 새워가며 매달렸다.

킵은 면했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해 온 내과 전공의도 곁을 지켰다. 외과 전문의보다 내과 전공의가 폐렴에 관한 한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갖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어제 저녁에 찍은 흉부 사진보다 더 호전됐다. 검사 결과도 좋아졌고 가쁘기만 했던 호흡도 점점 안정되고 있었다. 고령임을 생각하면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호흡기 내과 교수가 신중하게 진찰을 했다.

모두가 내과 교수의 입만 바라보았다.

“상당히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아직은 안심할 수 없지만 조금만 더 좋아지면 중환자실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이었다.

교수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지훈아. 혁원아. 조금만 더 노력하자. 조금만 더. 수고했다. 정말 수고했어.”

애써 웃음 짓는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교수들 모두 기대와 흥분을 느꼈지만 가시지 않는 불안감에 긴 숨을 내뱉었다. 하기에 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오후에는 천군만마까지 얻었다.

일주일간의 달콤한 휴식을 끝내고 전문의 시험 준비를 위해 모인 4년차들이 중환자실을 찾은 것이다.

“선생님. 저희들 왔습니다.”

“푹 쉬었어? 휴가 간다고 인사도 제대로 못해서 미안하다. 지금은 좀 어렵고 선생님 좋아지시면 술 한 잔 하자.”

“안 그래도 원장님 때문에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바로 내려왔습니다. 오늘부터 저희가 킵을 하겠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일할 사람은 따로 있는 법이다.

“무슨 소리야? 공부해야지.”

서도진이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밤에는 힘들고 낮에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번갈아 한 명씩 서고 모자란 준비는 밤에 보충하면 됩니다. 그리고 선생님, 거울 좀 보세요.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안호석과 천광호도 눈빛을 굳히고 있었다.

충분한 상의 끝에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고마웠다.

낮에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만큼 각자 해야 할 일도 많다. 누군가 자리를 지켜준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다. 게다가 전공의 수련을 마친 4년차들이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4년차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지만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선생님. 솔직히 대가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허경발 선생님을 많이 뵙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손 놓을 때 일부러 찾아오셨었습니다. 열심히 해 줘서 고맙다고 하시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더라고요. 그런 분이 아프신데 당연한 일입니다. 원장님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죠.”

어깨에 걸렸던 짐을 한결 덜었다.

누가 이런 존경을 받을까?

문득 큰 스승님이 왜 대가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경험과 실력, 그리고 선구자적인 개척만이 아니었다. 평생 동안 내준 동료와 후배들에 대한 격려와 사랑이었다. 하기에 손을 놓은 4년차들까지 기꺼이 킵을 자청했을 것이다.

‘최고의 써전은 어떤 존재일까?’

문득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피곤이 점점 극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절망보다 희망이 강해지는 순간 무겁기만 했던 몸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킵을 하는 김지훈의 눈이 번쩍거렸다.

허경발 원장의 상태가 점점 좋아졌다.

묽어진 가래.

나직한 숨소리.

90퍼센트를 넘나드는 산소 포화도.

갈수록 정상 소견에 가까워지는 흉부 사진.

충분한 횟수의 자발 호흡.

모든 것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아직도 20분 간격으로 석션을 해야 했지만 이제 기관 내 삽관을 유지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였다.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이점보다 손해가 더 많았다.

‘제거를 건의하자. 그러려면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니까 더 이상 주무시게 하면 안 되겠지?’

마침 오후 회진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의식이 명료해졌을 때 어떤 변화를 보일지 교수들도 확인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수면 유도제의 효과가 서서히 사라졌다.

허경발 교수가 몸을 비틀었다. 만약을 대비해 팔다리를 묶은 천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앙상한 몸에 의외의 힘이 남겨져 있었다.

김지훈이 손을 잡으며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선생님. 제 말 들리시나요? 더 이상 주무시지 않게 할 겁니다. 갑갑하고 힘드시더라도 잠시만 참으십시오.”

점점 의식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성대를 막은 튜브와 묶인 팔다리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던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잠시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허경발 원장이 고개를 돌렸다.

“정신이 드십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자극을 받았는지 심하게 기침을 했다.

“선생님. 조금만 참으세요. 튜브를 제거할 수 있을지 판단하는 중입니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허경발 원장은 누구보다도 경험이 많은 의사다. 이내 상황을 깨달았는지 눈을 감고 최대한 호흡에만 집중했다.

교수들이 올 때까지 김지훈의 손을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김지훈의 온기가 차가운 냉기만 흐르던 뼈만 남은 손에 전해졌다. 따스한 온기 덕인지 허경발 원장의 얼굴이 편안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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