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08화 (608/1,329)

제1화. 큰 스승님! Ⅰ (1)

‘죽일 놈! 너 나 좀 따로 보자.’

물론 마음뿐이다.

장인어른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손일석에게 질 수 없었다. 배신자에게 살벌한 눈길을 보낸 김지훈이 고성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처세술이다.

“아버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우리 일석이가 군대 가더니 생각이 아주 깊어졌습니다. 아까 차에서…….”

손일석이 흠칫 놀라며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직은 고경희가 볼모로 잡혀 있다. 만회할 필요가 있었다.

“형님, 결정은 됐지만 일요일인 내일도 있고, 설마 아버님께서 일만 시키시겠습니까? 아버님, 오전에 수술하면 오후에는 자유 시간인데,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맛있는 거라도 사 주실 겁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다 생각해 놨어. 자네들 내일 뭐 먹고 싶어? 서 서방, 동서들과 백숙에 술 한잔할래?”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서정호가 반색을 했다.

“저야 좋죠, 아버님. 그런데 수술하시는 날 동서들과 술 마시기는 조금 분위기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다음 주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오겠습니다.”

“그래. 마음껏 놀다 와. 그리고 이참에 나도 손주 좀 안아 보자. 경순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으면 어떻게 해? 애 늦게 낳으면 경순이만 힘들어져.”

“안 그래도 계획을 잡았습니다, 아버님. 저도 자리를 잡았으니까, 곧 좋은 소식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머! 형부! 정말이에요?”

식구들의 관심이 순식간에 서정호에게로 향했다. 가장 괄괄한 고경순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최문옥 여사가 누구보다도 반색을 했다.

시끌벅적 대화가 이어졌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김지훈이 슬며시 밖으로 나가며 손일석을 불러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손일석은 강적이다. 하오문주답게 특유의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피해 나갔다.

“지훈아, 삶이란 이런 거야. 나 아직 점수 따야 돼. 설마 치졸하게 경희한테 화살을 쏘는 건 아니겠지? 후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그럴 리는 없겠지?”

말이나 못하면.

미안하지만 약점을 건드릴 때였다.

“그래. 두고 보자. 일석아, 나 혈관 수술 많이 하고 있다.”

“신기동 선생님 환자가 많아진 모양이네. 어? 퍼스트가 아니라 집도를 한단 말이야? 정말이야?”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주시네. 얼마 전에는 전공을 바꾸라는 말씀까지 하시더라. 내가 정말 마음에 드시나 봐. 혈관 할까?”

손일석이 입만 벙긋거렸다.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 식은 커피가 이렇게 고소할 줄은 몰랐다.

틈만 나면 옆에 붙는 손일석을 피해 다녀야 했다.

활짝 웃으며 말이다.

***

일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반대로 선금을 받았으면 그만큼 일을 해야 한다.

소주까지 곁들이며 배가 터지도록 백숙을 먹인 고성문이 김지훈과 손일석을 양옆에 끼고 출근을 했다. 몇몇 외래 환자를 보는 사이 착착 수술 준비가 진행됐다.

“아버님, 그동안 한 번도 해 보신 적 없으세요?”

“그래서 내가 자네하고 수술하는 거 아냐. 혼자 하려니까 만만치가 않네.”

김지훈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첫 번째 라파로 담낭 절제술이 벌어졌다.

제법 라파로 기구가 손에 익은 김지훈에, 퍼스트 경험이 많은 손일석까지 있는 마당이었다. 친절한 설명과 함께 무난하게 끝났다.

대가는 삼겹살이었다.

두 번째 라파로 담낭 절제술이 벌어졌다.

“아버님, 오늘은 담낭관과 동맥 잡아 보시고, 담낭 박리도 일부 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왠지 나직하게 깔렸다.

“안 그래도 부탁할 참이었어.”

“아버님, 담낭을 박리할 때 너무 간 쪽에 붙이지 마세요. 그러다 삐끗하면 간에 손상을 줍니다. 잘 아시잖아요.”

말은 정중한데, 내용은 아주 당돌하다.

“잠깐만요. 아뻬 때도 그러시더니 또 이러시네요. 동맥을 잡을 때는 각도를 잘 맞추시고 침착하게 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개복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버님, 석션을 클립 있는 데서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다 클립이 헐거워지기라도 하면 동맥 출혈, 아니면 담낭관이 샐 수도 있습니다. 재수술하고 싶으세요?”

김지훈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살벌할 지경이었다.

수술 내내 고성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김 교수, 기구가 손에 완전히 익지 않네. 어떻게 하면 될까? 좋은 방법 없을까?”

“제가 연습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 테니까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김지훈이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전했다. 고성문은 진지했고, 대가는 막국수에 수육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손일석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지훈아, 별문제도 없는 것 같은데 너 왜 그래? 전공의가 아니라 장인어른이셔. 너 혹시 무슨 불만 있어?”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일석아, 아버님이 괜히 재야의 고수라는 말을 들으시는 게 아닌 것 같지? 경험도 거의 없으신데 대단하시네. 상당히 여러 번 해 보신 것처럼 보일 정도야.”

“근데 왜 그래?”

“다음에는 우리도 없이 혼자 하셔야 되잖아. 만일 사고라도 나면 그게 누구 책임이겠어? 아버님만이 아니라 나한테도 책임이 있는 거야. 죄송해도 어쩔 수가 없다.”

손일석이 갑자기 김지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야! 역시 교수네. 달라졌어. 예전의 김지훈이 아니에요. 멋지다, 멋져. 아! 나도 왠지 장인어른 태우고 싶다.”

“이 자식이 미쳤나. 사위 중에 널 제일 예뻐하시는데 죽고 싶구나? 그대로 전해 드릴까? 수술 중에 태우고 싶은 거 군인이라서 꾹 참고 있는데 그냥 확!”

“형님, 왜 이러십니까? 농담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강호의 예의이자, 법도입니다. 내일은 뭐 사 주실까?”

세 번째 라파로 담낭 절제술이 벌어지기 직전이었다.

김지훈이 잠시 고민하더니 집도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성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 오늘은 직접 하시죠.”

“응? 무슨 소리야? 그래도 되겠어?”

“저희 없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시작하십시오.”

김지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고성문이 연거푸 숨을 내쉬며 눈가를 좁혔다.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노련한 외과의도 새로운 수술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성문 역시 수술에만 집중했다.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담낭이 박리되고, 동맥을 클립으로 잡았다. 마침내 담낭이 배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고성문이 고개를 돌렸다.

수술 소요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마무리된 수술 부위는 처음 하는 수술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어제 밤에 들린 덜그럭 소리는 아마도 고성문의 손에 들린 라파로 기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내심 감탄을 터트렸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의 실력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다.

“김 교수, 이 정도면 괜찮게 한 건가?”

솔직하게 말할 일이었다.

“이전 수술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만 잊지 마십시오.”

‘저도 아버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성문의 입이 쫙 찢어졌다.

대가는 등심이었다.

서정호와 고경순이 없다고 해도 남은 식구는 많다. 더구나 김지훈은 가공할 식욕과 위를 가졌고, 손일석도 만만치 않았다. 두툼했던 지갑이 순식간에 홀쭉해졌다.

목요일 오전, 마지막 수술이 남았다.

김지훈도 어려워하는 탈장이다. 수처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막상 수술이 시작되자 말과는 달리 김지훈은 어렵지 않게 수처를 했다.

고성문이 약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수처를 해 보라는 말과 동시에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보는 것과 실제는 천양지차였다. 끙끙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서야 수술이 끝났다.

“조금 더 연습하시고, 기구가 익숙해지시면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다만, 그때까지는 환자에게 개복 가능성을 항상 설명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담낭을 떼고 조금 자신이 붙는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네. 김 교수, 잘 배웠어. 고마워. 손 서방, 자네도 수고했어. 오늘 서 서방도 오니까 함께 식사하고, 어디 좋은 곳에 놀러 갔다 와.”

온 식구가 다 모여 마지막 식사를 했다.

또 등심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할 사람의 지갑이 이틀 연속 속을 보였다.

쩝쩝! 입맛을 다시던 고성문이 빙긋 웃으며 봉투 세 개를 내밀었다.

“서 서방. 검사 월급도 많지는 않지? 이걸로 맛있는 것 먹고 힘내서 튼튼한 놈 하나 만들어 봐. 김 서방, 이거 받아. 경아하고 좋은 시간 보내. 손 서방, 자네 속도위반하면 알지? 바로 끝이야.”

공인받았다고 해도 아직은 정식 사위가 아니다.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손일석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럴 때 친구가 필요한 법이다. 장인어른의 엄명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액셀을 밟을 손일석도 아니었다.

“아버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신 내일 저희하고 같이 휴가를 떠나겠습니다.”

사부라면 사부다.

눈가를 쭉 찢으며 고민에 잠겼던 고성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일석이 만세 삼창을 했고, 고경희는 좋아 죽었다.

물론 고성문은 끝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쯧쯧! 키워 봐야 다 소용없네. 김 서방, 경아야, 손 서방하고 경희 단속 철저히 해. 사고 나면 연대 책임이야.”

불안에 찬 눈길을 뒤로하고 바로 출발했다.

동해 바다를 벗해 회와 소주가 오갔다. 믿음과 신뢰를 바탕으로 손일석과 고경희를 한방에서 재웠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우워워워워!

우으으으으!

늑대 울음과 허벅지를 찌르는 신음 소리가 교차했다.

***

보람찬 휴가가 끝났다.

손일석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서울로 향했다.

“경아 씨, 회진 돌고 들어갈게요. 참! 백선희 환자 기억하죠? 두 번째 항암 치료 받으러 왔다는데 어떤지 보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요.”

백선희는 첫 번째 항암 치료를 받으며 무척이나 고생했다. 특히 구역, 구토를 동반한 식욕부진에 심각한 체중 감소까지 보였었다.

내심 신경이 꽤 쓰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살이 빠졌다.

“수분 섭취만이라도 자주 하세요. 다음 달에 검사를 다시 할 텐데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제가 입원했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휴가 중 아니셨어요?”

“이혁원 선생 기억하시죠?”

“그럼요. 가장 신경을 많이 써주신 선생님인데 어떻게 기억을 못하겠어요.”

“환자 분 입원하셨다고 연락을 했네요. 진상미씨가 안 보이시네요.”

“하필이면 이럴 때 뭐 좀 사러 갔네요. 선생님을 봤으면 나보다 더 좋아했을 텐데.”

얼굴은 힘들어 보였지만 목소리는 밝았다. 삶의 희망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불안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친 김에 회진까지 돌았다.

모두 다 순조롭게 회복 중이었다.

열심히 환자를 본 이혁원이 무척이나 듬직했다.

이런 나날만 이어지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혁원아, 수고했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런데 의국이 한가하네.”

“선생님 오시기 전에 막 응급 수술 들어갔습니다.”

“그래?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고생들 하네.”

이혁원이 씨익 웃었다.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동안 응급실이 그래도 한가했는데 병원에 들르신 것만으로 수술이 딱 뜨네요.”

점점 능구렁이다.

‘도진이 말 들으면 이럴 놈이 아닌데 내 앞에서는 유독 능글맞네. 자식! 내가 친근하다 이거지? 나도 좋다. 인마.’

회진만 달랑 돌고 이대로 가면 허전할까?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이혁원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믹스 커피를 꺼냈다.

“선생님. 커피 한 잔 하고 가시죠.”

정말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달달하고 고소한 커피 향에 흠뻑 취했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통화를 하던 이혁원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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