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06화 (606/1,329)

제10화. 휴가다! (1)

책 좀 읽고, 눈 부릅뜬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좋아질 일이 아니었다. 불처럼 타오르는 열정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 탔다. 아니, 비수에 난도질을 당했다.

얼마나 살벌한지 비수를 용케 피한 이혁원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나종진은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야말로 수술 때마다 전전긍긍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새로운 주가 시작되고, 일상은 반복됐다.

화요일이다.

수술을 하는 내내 아무 말도 없었다. 신기동 교수의 눈치를 봐서는 제대로 한 것인지, 아니면 이젠 입이 아프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변화라면 변화였다.

목요일 수술이 벌어졌다. 첫 번째 수술을 끝낸 신기동 교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김지훈, 무슨 일 있어?”

“예? 왜 그러십니까?”

“손은 그대로지만 전보다 집중을 하는 것 같아서 그래. 당직 때 편히 쉰 모양이구나. 얼굴이 좋네.”

은연중 비수를 슬쩍 꺼내 들었지만, 귀가 활짝 열릴 말이었다. 방심하지 말고 여기서 고삐를 바짝 죄어야 한다. 더욱 강력해진 열정에 나종진과 이혁원이 죽어났다.

“혁원아, 너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어떻게 김지훈 선생님은 자기 오프일 때도 컨퍼런스를 하자고 하시냐.”

“그러게. 혈관에 간담도에 우리 파트도 아닌 위장관까지, 죽겠네. 가뜩이나 열심히 하시는 분이 이러니까 무섭다.”

“어휴! 너 혈관 파트 돌 때 헉헉거리는 걸 보면서 이상하다고 했는데, 내가 완전히 잘못 봤어. 리포트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오프는 꼬박꼬박 가잖아. 난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전 텀만 생각하면…….”

이혁원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전공의 때 가장 편한 년차가 2년차다. 그런데 1년차보다 약간 편할 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둘 다 눈 밑이 까맣게 죽어 있었다. 이게 다 김지훈이라는 펠로우 때문이었다.

대가는? 지식으로 머리가 무거워지는 걸까?

***

기존의 일도 벅찬데 혈관까지 더해졌다. 신기동 교수의 이상한 침묵에 슬슬 피로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7월의 무더위도 한몫을 했다. 차라리 차가운 비수를 날릴 때가 뒷골이 시원해서 좋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적절한 휴식이다.

그리고 때가 왔다.

휴가 시즌이다!

‘앞으로 2주 정도 바짝 달리고 휴가 갔다 오면 딱이네. 장인어른이 시간을 좀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 전에 손일석과 시간을 맞춰야 했다.

어렵사리 연락이 됐다.

(여어! 김지훈 교수님께서 웬일로 연락을 다 하셨습니까? 별일 없으시죠? 전 죽겠습니다.)

“이 자식이 왜 또 이래. 자대 배치 받았을 때 연락 못해서 미안해, 인마.”

(아! 그러셨군요. 하오문주의 너그러움이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에휴! 시원한 병원이 그립다. 무지하게 더운데 훈련까지 했더니 안 아픈 데가 없어. 아이구! 팔다리야. 나도 이제 다 됐나 봐.)

“고생이 많네. 다른 게 아니고 휴가 날짜 맞춰야지.”

(휴가? 집에서 얘기 못 들었어? 지금 비상이 걸려서 8월 말이나 갈 수 있을 것 같아. 사고 하나 났거든. 총기 오발이야. 장인어른께는 이미 말씀드렸으니까 너도 8월 말로 맞춰.)

“그래? 난 아무 말도 못 들었어. 너는 아무 문제없는 거야? 환자는 살았어?”

(관리 잘못한 윗대가리들이 문제지, 내 책임이 뭐가 있겠어? 이럴 때는 그냥 내 임무에만 충실하면 돼. 응급 처치해서 보내긴 했는데 결과가 최악이네. 개죽음이 따로 없다.)

“어이구! 원해서 간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일이냐. 알았어. 8월로 맞춰 볼게. 시간 없어서 끊어야겠다.”

(수술 있구나? 잘 지내, 인마. 형 없다고 울고 그러면 안 된다. 그리고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말해. 내가 공수 아니냐. 바로 낙하해서 한 방 갈겨 줄게.)

간만에 연락을 했는데 찜찜한 통화였다.

휴가 시기도 그렇지만, 총기 사고로 꽃다운 나이의 젊은 군인을 잃었다는 소리에 가슴이 답답했다.

그런 기분도 잠시, 직접적인 일이 아니라 그런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한 달 후? 에이! 몰라! 경아 씨 휴가하고 안 맞으면 그냥 우리 스케줄대로 가고, 장인어른은 경아 씨한테 맡기자.’

근 다섯 달을 쉬지 않고 달린 탓인지 휴가 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하지만 일복 터진 놈이 스스로 일을 벌였다. 마음먹은 대로 되면 인생사 참 편할 것이다.

“어머! 내가 휴가 얘기 안 했나요? 8월 말로 휴가 신청했으니까, 지훈 씨도 그렇게 맞춰요.”

“무슨 소리야? 그걸 이제 얘기하면 어떻게 해?”

“얼굴을 봐야 말을 하죠. 당직 때는 수술한다고, 오프 때는 혈관 공부해야 한다고 허구한 날 늦게 들어오는데 언제 얘기를 해요? 나도 잠은 자야지.”

꿀 먹은 벙어리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는 거의 매일 곤히 자고 있는 고경아의 얼굴만 보았다.

오늘도 휴가 때문에 만사를 제치고 간만에 일찍 퇴근을 했다. 고경아도 하루 종일 수술실을 떠나지 못하고, 집안일까지 도맡아 해야 하니 피곤할 것이다.

“미안해요, 내 사랑.”

“에휴! 내가 미쳤지. 얼굴 보기도 힘든데 뭐가 좋다고 결혼을 했을까?”

세게 나온다. 그래도 할 말은 없다.

저녁부터 자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고경아의 비위를 맞췄다. 설거지를 하고 공손히 커피를 대령한 후, 정성스럽게 과일을 깎아 입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 잠귀 어두운 고경희가 잠들자마자 손도 잡았다.

왠지 보람찬 하루였다.

***

하나둘 휴가를 떠났다.

싱숭생숭했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이 기회였다. 교수들이 휴가를 가면 해당 파트는 수술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여유를 얻을 수 있어 혈관 수술에 집중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게다가 신기동 교수는 아예 휴가를 가지 않는다고 했다.

“수술이 너무 밀렸다. 겨울에 가는 휴가도 괜찮아.”

‘이거 좋은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확실하게 집중한 후, 깔끔하게 휴가 가자.’

마음먹기 나름이었다.

사소한 부분까지 챙기려 애를 썼다. 이론이 탄탄하지 않으면 곧바로 잊을 수 있기에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덕인지 신기동 교수는 좀처럼 비수를 꺼내 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동 교수가 휴가를 가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일주일에 대여섯 건이던 수술이 열 건 정도로 증가했다. 정식으로 수술하는 날이 이틀뿐이기에 하루에 다섯 건을 해야 했다. 점심부터 시작해 밤늦게 끝나기 일쑤였다.

“힘들어?”

“아닙니다. 많이 볼 수 있어서 도리어 좋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혈관 전공하는 놈이 둘 정도 있으면 환자에게도 훨씬 좋을 거야.”

새삼스럽게 혈관 전공을 운운하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어쨌든 휴가 시즌 덕분에 신기동 교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고, 그만큼 눈에 보이는 것도 많아졌다.

‘그동안 이런 걸 왜 못 봤을까?’

시간은 쉬지 않고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7월이 가고 8월 무더위가 시작됐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교수들과 커피를 마셨다.

송재덕 교수가 싱글싱글 웃으며 신기동 교수를 보았다.

“신 교수, 우리 경석이도 혈관 좀 가르치면 안 될까? 대장은 혈관 만질 일이 없지만, 할 줄 알면 좋잖아? 도움이 많이 될 거야. 경석아, 어때? 너도 좋지? 안 좋아?”

난데없는 말에 이경석이 눈만 말똥거렸다.

“경석아,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놈한테는 못 당한다. 그런 놈이 수술까지 해 봐. 무섭다. 무서워. 지훈이는 곧 자리 잡으니까 됐고, 일석이 올 때까지 네가 혈관 해라. 혈관. 지훈아, 넌 이 정도 했으면 됐다. 암! 되고말고.”

송재덕 교수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묘했다.

무슨 말일까?

의문도 잠시, 수술이 없어 시간이 많다지만 교수가 부재중인 파트는 회진 때 더 바빴다.

남은 커피를 홀짝 마신 김지훈이 먼저 일어나 일과를 시작했다.

이상하게 일상이 점점 바빠졌다.

예약된 수술을 하고 나면 곧바로 혈관 수술에 들어가야 했다. 점심을 걸러야 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오늘도 우유 하나로 허기를 달랜 후 수술실로 향했다.

줄줄이 환자가 내려왔다.

네 명의 환자를 수술하고, 마지막 환자만 남았다.

환자 상태와 어떤 수술을 하는지 확인한 김지훈이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신기동 교수가 수술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집중하고 주의해야 하는 과정들을 상기했다.

‘역시 정확하고 섬세한 수처만이 아니라, 최대한 혈관과 주변 조직 손상을 줄이는 것이 기본이야.’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손을 소독하고 들어오던 신기동 교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며 입술을 모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준비는 확실하게 됐어.’

“김지훈 선생, 수술하자.”

평소 하지 않던 말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퍼스트 자리로 향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신기동 교수가 고갯짓을 하며 집도의 자리를 보고 있었다.

‘제가요?’

환자는 국소마취 상태다. 안정제를 투여한 상태긴 하지만 함부로 입을 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신기동 교수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환자분에게는 이미 말했으니까 시작해.”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내심 바라고 있던 일이었지만, 기대도 하지 못했다. 최근에 와 비수는 날리지 않았지만, 솔직히 혈관 수술을 하기에 아직은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뭐해?”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정신이 확 들었다. 스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깐깐한 신기동 교수였다. 여기서 더 머뭇거리면 바로 자신의 말을 취소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혁원, 나종진, 김지훈 선생이 수술 어떻게 하는지 잘 봐. 손이 바뀌면 수술도 달라지는 면이 있기 마련이고, 결국 배울 것이 또 생긴다는 말이야.”

대단한 부담이었다.

조그만 실수나 사소하게 여긴 일이 환자에게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또한 신기동 교수의 눈과 후배들의 눈이 오직 자신의 손에만 집중되는 것이다.

김지훈이 앙상하게 드러난 환자의 손목을 보며 각오를 다졌다. 지금까지 숱하게 본 과정을 확실하게 떠올리고, 적당한 긴장을 유지해야 할 때였다.

“리도카인(국소마취제).”

가느다란 바늘 끝으로 주사액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리도카인을 주사하고 잠시 기다린 후, 포셉으로 피부를 강하게 잡았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수술 부위의 마취가 확실하게 됐다.

“메스!”

비쩍 마른 손목은 쉽게 절개됐고, 곧 동맥과 정맥을 싸고 있는 막이 보였다. 가늘고 얇은 혈관용 수술 기구로 조심스럽게 막을 박리하고, 혈관을 노출시켰다.

“루뻬(수술용 돋보기).”

간호사가 다가와 머리에 루뻬를 씌어 주었다.

크게 확대된 동맥과 정맥이 시야를 꽉 채웠다.

퍼스트를 설 때와는 감흥 자체가 달랐다. 벅찬 가슴에 긴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미세 수술은 아니지만 그에 준할 정도로 집중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혈관 수술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신중하게 혈관을 싸고 있는 조직을 박리했다.

“혈관 겸자.”

완전히 노출된 동맥과 정맥의 양끝을 겸자로 잡았다. 주행 방향을 따라 절개를 하자 혈관 속의 선홍색 피와 검붉은 피가 뒤섞였다.

“이리게이션(Irrigation:세척), 석션.”

헤파린을 섞은 식염수로 깨끗하게 씻어 내고, 시야를 확보했다. 두꺼운 동맥벽과 상대적으로 얇은 정맥의 벽이 뚜렷하게 보였다.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하다.

절대 수술의 핵심을 잊으면 안 된다.

봉합의 간격과 혈관을 뜨는 두께가 모두 일정해야 한다. 칼날처럼 생긴 바늘의 끝이 혈관 벽을 손상시키기 않도록 수처의 기본을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확하고 섬세한 손이 필요하다.

김지훈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수처.”

루뻬를 통해 보아도 봉합용 실과 바늘은 가늘기만 했다. 숱하게 보아 온 신기동 교수의 손놀림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첫 번째 바늘을 떴다.

‘손에 힘이 들어가면 안 돼.’

약간의 저항이 느껴지는 동맥.

손쉽게 뚫리는 정맥.

살짝살짝 배어 나오는 피.

식염수를 뿌리며 깨끗한 시야를 확보해 주는 손.

두 번째, 세 번째.

왜 이렇게 떨릴까?

인턴 때부터 지금까지 족히 수천 바늘은 꿰맸을 것이다. 기본 중의 기본인 수처지만 상황에 따라, 수술에 따라 다르기에 다가오는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후우! 후우!’

한 바늘 한 바늘에 집중을 잃지 않았다. 신기동 교수는 말이 없었고, 이혁원과 나종진은 긴장된 표정으로 수술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한 바늘만 남았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얼마 전 보았던 환자도 이 부분에서 문제가 돼 다시 수술을 했다.

거의 다 끝났다는 생각과 연이어진 수술이 주는 피로감에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도 있다.

끝까지!

혈관을 통과한 가느다란 실에 매듭을 지었다.

동맥과 정맥의 벽이 마치 하나처럼 밀착됐다. 이제 정확하게 수술을 했는지 확인해야 할 때였다.

혈류가 확실하게 유지돼야 한다.

혈관을 물고 있던 겸자를 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