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사소하면 지나칠 수 있을까? (1)
이미 수술 과정은 충분히 숙지했다.
각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상행결장을 박리해 나갔다.
이경석의 빠른 손과 김지훈의 과감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손에 침착함과 신중함만이 남았다.
만일 외부 손상을 준다면 인공 항문을 만들 대장을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조금도 긴장을 풀 수 없다.
‘신중하자.’
“타이! 보비!”
수없이 출혈을 잡았다.
마침내 상행결장과 맹장까지 모두 박리했다. 이 부분에 혈류를 공급하는 동맥만 남겼다. 시커멓게 죽은 대장과 혈액이 공급되는 대장과의 경계가 명확하게 보였다.
이경석이 상행결장을 잡았다. 인공 항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병변도 심하지 않아야 했지만 적당한 길이가 필요하다. 약간이라도 짧으면 복벽을 통과하는 대장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져 조직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서 자르고 확인하면 될까?”
“예. 적당한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예정했던 부위를 잘랐다.
환자의 예후를 결정하기 직전이다.
심장이 벌떡벌떡 뛰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벌겋게 부어오르고, 여기저기 검붉은 색으로 변한 점막이 보였다. 남겨도 될지 여간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김지훈이나, 대장 파트를 전공하는 이경석이나 경험이 일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송재덕 교수를 보았다.
“그 정도면 괜찮아 보여.”
풍부한 경험을 가진 노련한 의사의 판단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김지훈이 점막 상태를 눈에 박았다. 책만 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산지식이었다. 언젠가는 지금의 기억이 또 다른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들어낼 범위가 결정됐다.
상행결장의 중간 부분을 잘랐다.
그 윗부분부터 직장까지 이어진 대장을 한꺼번에 배 밖으로 빼냈다. 염증이 심한 데다 시커멓게 변색된 탓인지 정상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후우! 터트리지 않고 절제해서 정말 다행이다.’
자신도 모르게 훅훅 숨은 내뱉은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인공 항문을 만들고 배를 닫을 때까지 수술은 끝난 것이 아니다.
우하복부를 7~8센티미터 정도 절개했다.
복막과 근육을 찢고 벌려 통로를 확보했다. 그 통로로 조심스럽게 대장을 빼낸 후 피부와 봉합했다.
복벽에서 가해지는 압력으로 점막이 부풀어 오르듯 밀려나왔다. 제대로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배 속을 확인하고 마무리를 시작했다.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인 송재덕 교수가 이제야 허허! 웃으며 수술실을 나갔다.
“됐다. 됐어. 마무리만 잘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잘했다. 잘했어. 우리 펠로우들 정말 수술 잘한다. 그런데 수술실 에어컨이 고장 났나? 왜 이렇게 땀이 많이 나니, 땀이. 덥다, 더워.”
송재덕 교수도 수술 팀 이상으로 긴장했을 것이다.
참관만 한 이혁원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길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쇠약한 몸으로 대장의 대부분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은 환자가 몸을 비틀었다. 기도를 확보했던 관을 빼는 순간, 크게 숨을 내쉬며 신음 소리를 냈다.
“환자분, 수술 끝났습니다. 눈 떠 보세요.”
힘들어 보이지만 확실하게 눈을 떴다.
잘 버티고, 잘 깨어나서 정말 고마웠다.
수술 결과를 듣던 보호자의 눈물에는 마음이 아팠다. 23살 젊은 환자가 평생 인공 항문을 달고 살아야 한다. 무엇 하나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삶은 분명 기회를 줄 것이라고 믿었다.
“지훈아, 수고했어.”
“아니에요, 형. 고생했어요.”
이제 김지훈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다시 수술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8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지만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최상의 결과를 얻은 것도 아닌데 의아한 일이었다.
문득 이경석의 눈빛과 손이 생각났다.
서로의 판단과 결정을 믿었다.
두 개의 손은 정말 잘 어울렸다.
가슴이 벅찼다. 어울리지 않는 즐거움이 느껴졌다.
함께 환자를 보고, 함께 수술을 계획하고, 함께 수술을 해냈기 때문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참여했다고 해도 이 이상의 결과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결코 자만은 아니었다.
‘느낌이 정말 다르네. 아무리 힘든 수술이라도 함께한다면 해낼 수 있겠어.’
갑자기 어깨를 타고 넘는 힘에 부르르 몸을 떨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부리나케 수술실로 향했다.
“김지훈, 수술 준비 안 하고 뭐해?”
신기동 교수가 씨익 웃었다.
수술도 없는 이준영 교수는 왜 그 옆에 서 있을까?
환자를 옮기던 이혁원이 뭐가 그렇게 바쁜지 얼굴 보기도 힘든 나종진과 마주쳤다.
“수술 잘 끝났어?”
“수술 킴이 퍼스트를 섰는데 당연하지.”
“너 자꾸 김지훈 선생님을 수술 킴이라고 부르는데 그러다 걸리면 한 마디 들을지도 몰라.”
“그럼 따르륵 선생님이라고 부를까?”
“오! 이혁원 많이 컸네. 이따 보자.”
나종진이 씨익 웃으며 부리나케 수술실로 향했다.
이혁원에게는 큰 자극이었다.
***
일반 외과 펠로우들의 실력과 열정을 엿볼 수 있는 5월이었다. 관련된 의료진들의 입에 김지훈과 이경석이 오르내렸다. 스스로 실력을 증명해 냈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고,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큰 의미를 지닌 5월이 가고 6월이 왔다.
드디어 1년차들의 100일 당직이 끝났다.
온몸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송진우와 강병옥의 입이 귀에 걸렸다. 1년차들과 밤낮으로 부대껴 온 2년차들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수고했어. 백 일 당직이 끝났다고 특별하게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긴장 유지해. 2년차들도 지금처럼 신경 써야 한다.”
총치프 서도진의 진중한 말에 달아올랐던 흥분이 살짝 가라앉았다.
곧 새로운 파트에 대한 인수인계가 시작됐다. 다들 환자를 파악하느라 주말 내내 정신이 없을 것이다.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지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동안 함께 배우고 일하며 사연도 많았다.
‘도진이나 호석이나 이번 텀이 마지막이네. 조금 있으면 전문의 시험 준비한다고 정신없겠지? 시간 참 빠르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살다 보면 특히나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 텀은 유독 그랬다.
이준영 교수 파트로 서도진, 이혁원, 강병옥이 왔고, 신기동 교수 파트는 나종진이 담당하게 됐다. 신현수가 돌아올 때까지 담당해야 하는 이혁민 교수 파트로 간 안호석과 송진우까지 정말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트 이동은 수없이 경험한 일이고,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평생의 힘이 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서로 건강하게 아껴 주고, 다른 이들과 벽을 만들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도 절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이 서도진과 안호석을 불렀다.
“오늘 저녁에 뭐해?”
뜬금없는 말이었다.
응급 수술이 뜨지 않는다면 환자 파악을 하느라 제법 바쁠 것이다. 한두 해도 아니고 전공의 시절 내내 똑같이 살아온 김지훈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당직도 아니시잖아요.”
“별건 아니고, 텀도 바뀌는데 밥이나 같이 먹자. 시간 되는 사람 다 부르고, 1년차들은 꼭 데리고 나와. 이경석 선생님하고 홍재순 선생님도 나오실 거야.”
의아했던 얼굴에 화색이 확 돌았다.
전공의는 언제나 배가 고프다. 명색이 교수들인데 대충 김치찌개에 공깃밥 말아 먹자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돼지든, 소든 최소한 고기다. 아니라면 될 때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뭐 사 주실 건데요?”
“배 속에 기름칠 좀 진하게 하자.”
삼겹살 먹자는 말이다.
순간 미묘한 어둠이 스쳤지만 펠로우 월급은 빤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좋다고 웃으며 의국으로 들어가는 서도진을 보던 김지훈이 콧소리를 냈다.
‘자식들! 눈이 번쩍번쩍 빛나네.’
토요일 오후는 이상하게 빨리 지나간다.
고경아와 커피 한잔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눴을 뿐인데 벌써 어둠이 깔렸다.
부랴부랴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예약된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나왔다.
응급실에 환자 한 명 없는지 펠로우들까지 스물에서 딱 한 명 모자랐다. 당직 때면 유난히 일복이 없는 홍재순의 힘이었다.
게다가 다들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오늘 이 집 고기의 끝을 보겠다는 것 같았다.
“도진아, 응급실에 환자 없어?”
“왜 이러세요. 오늘 같은 날은 조용해야죠.”
얄팍한 지갑을 매만지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좋은 날이다. 교수로서 처음 밥을 사는 날이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큰 의미를 전달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돈 좀 써야 한다.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김지훈과 눈길을 마주친 홍재순이 얼굴을 굳혔다. 이경석마저 근엄한 표정을 짓자 웃고 떠들던 치프들이 흠칫 놀라며 재빨리 자세를 고쳤다. 역시 4년째 눈칫밥을 먹는 치프들다웠다.
“오늘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딱 두 가지만 얘기할게. 그동안 수고했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길 바라. 그리고 우리 1년차들은 왜 줄 걸 안 주는지 궁금했을 거야. 원래 교수님들까지 참석하시면 좋은데, 우리 펠로우들에게 오늘 자리를 일임하셨어.”
그렇다. 드디어 첫 집도 때 사용했던 메스를 전달하는 것이다.
1년차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펠로우들 앞에 섰다. 각자 수술을 준 1년차들에게 메스를 전했다.
김지훈은 강병옥과 송진우에게 검은 케이스를 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색 메스에 담긴 마음이 1년차들의 앞날을 격려해 주고 있었다.
“강병옥, 송진우,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환호성이 터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축하의 말을 나누었다.
1년차들은 입술을 모은 채 메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병옥은 눈가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고, 송진우는 역시나 시뻘게진 얼굴로 케이스만 꽉 잡고 있었다.
이 역시 1년차들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전환점일 것이다. 메스를 전한 펠로우들에게도 큰 의미가 담긴 일이었다.
메스를 받았을 때 느꼈던 감정에 휩싸였던 홍재순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바꿨다.
“자! 이제 허리띠 풀고 먹어 봅시다.”
너른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맥주를 허락했다. 물론 응급실 당직들은 열외다. 누군가는 시원하게 잔을 비웠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사이다와 벗해야 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스승님께 메스를 받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내가 메스를 전해야 하는 사람이 됐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최선을 다해야겠다.’
이혁원이 눈에 들어왔다.
잔을 들고 와 옆에 앉았다.
“선생님, 한 잔 받으시죠.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싸한 소주 때문인지 가슴이 뜨거워졌다. 아끼는 후배들이 다가와 잔을 채울 때마다 점점 더 뜨거워졌다.
강병옥과 송진우의 잔까지 받자 기분이 붕 뜨며 한 순배 더 돌렸다.
턱 밑에서 찰랑이던 술기운이 눈가까지 차올랐다. 그나마 셋이 나누어 받은 덕이었는데, 나 아직 죽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함께 차올랐다.
2차 자리가 이어졌고, 하필이면 서도진과 이혁원은 응급실 당직이 아니었다.
“자식들! 절대 날 잊지 못하게 해 주마.”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태워야 한다는 생각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그 속에 담긴 선배의 애정과 사랑을 못 느낀다면 더 태워 버리는 것이 마땅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혁원이 힘차게 대답했다.
부어라! 마셔라!
카르페 디엠!
뾰족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우! 술 냄새!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요? 오프 때는 좀 쉬어야죠. 내가 못 살아. 1년차가 아니라 지훈 씨가 메스를 받았어요?”
집에는 언제 들어왔을까?
3차 이후로는 가물가물, 아니 머릿속이 텅 비었다. 2차로 골뱅이를 먹는 게 아니었다. 간만에 본 주인아주머니, 아니 이모가 너무 반가워 너무너무 먹었다.
하루 종일 뾰족한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큰한 콩나물국은 끓여 주었다. 입 꾹 다물고 조용히 반성에 집중해야 하는 하루였다.
***
새로운 3개월이 시작됐다.
외래 환자가 꾸준히 유지됐다.
물론 교수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진료 때마다 5명 정도는 내원했다. 워낙 외래 환자 내원이 적은 간담도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만세를 부를 일이었다.
사실 꼼꼼하게 환자를 본 탓에 시간도 적지 않게 걸렸다.
수술 역시 꾸준히 이어졌다.
내과에서 의뢰되는 컨설트에 응급실과 외래 환자까지 더해졌다. 그 덕에 일주일에 최소 여덟 건에서 아홉 건 이상 시행했다. 주말 당직이 걸리면 건수가 쭈욱 늘어났다.
김지훈이 바쁘면?
전공의들은 당연히 더 큰 압박을 받는다.
서도진은 주로 이준영 교수의 수술을 들어가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다.
반면 박순용과 이혁원은 김지훈의 수술 때 퍼스트를 번갈아 서기로 했기 때문에 동기들보다 훨씬 일이 많아졌다.
강병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프만 갔다 오면 일이 잔뜩 밀려 두려울 지경이었다.
“우와! 백 일 당직 때보다 일이 더 많은 것 같네요.”
“김지훈 선생님 파트를 도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환자로 홍수 나지 않기만을 바라. 그러니까 오프 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잠이나 푹 자.”
이제는 적응될 만도 했지만, 김지훈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점점 신경 쓸 곳이 많아져, 잠깐 마음을 놓으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어이구! 이제는 좀 편해져야 하는 거 아냐?’
맡은 파트에 모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위장관은 메이저 파트인 데다 간담도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집중해야 했다.
체력도 달리는 탓에 혈관 파트는 조금은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상대적인 일일 뿐이었지만 내심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내가 전공할 파트도 아니고 결국 일석이가 담당을 할 텐데, 이 정도면 신기동 선생님도 알아주시겠지.’
위험천만한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