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03화 (603/1,329)

제8화. 결코 작지 않은 전환점 Ⅲ (2)

당장 수술해야 할 환자에 국한된 말이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들이었다.

어떤 세부 전공을 하든 일반 외과 전체를 통찰하지 못하면 깊이를 가질 수 없다.

특정 환자만 보는 전문의보다 더욱 실력 있는 의사가 도리어 모든 환자를 보는 일반의일 수도 있다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은 아니다.

‘어쩌면 펠로우 제도가 생긴 이유에 모든 파트를 보다 깊이 있게 배우라는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네. 어설픈 실력으로 교수가 되는 것만큼 최악도 없겠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수술 준비가 모두 끝났다.

퍼스트 자리에 선 김지훈이 이경석을 보았다.

새로운 느낌이다.

불현듯 가슴이 뜨거워지며 무언가 꽉 차올랐다. 함께 수련을 시작했고, 함께 교수의 길을 달려가고 있다. 최고의 써전이 되고자 하는 꿈은 자기 자신의 노력만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할 때만 이룰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어쩌면 또 다른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인지도 몰랐다.

신현수와 손일석까지 생각났다.

‘언젠가는 너희들하고도 이런 날이 오겠지? 우리 넷이 모두 모이면 아무리 어려운 수술이라도 해낼 수 있는 날이 올까? 난 그렇게 믿는다.’

이경석도 같은 마음인지 잠시 김지훈에게 눈길을 주었다.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눈가에서 동료에 대한 믿음과 뜨거움이 느껴졌다.

이내 마음의 준비가 된 모양이었다. 길게 숨을 내쉰 이경석이 나직하면서도 또렷하게 말했다.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시작하셔도 됩니다.”

“선생님,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날카로운 메스가 하얀빛을 뿌렸다.

바싹 마른 환자의 배는 너무 쉽게 열렸다. 몇 번의 손놀림에 배 속이 환하게 드러났다.

답답한 한숨 소리가 터졌다.

점막을 따라 퍼진 염증이 얼마나 심한지, 겉만 보고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하행결장 주변이 지저분했다. 복막염을 유발한 미세 천공이 발생한 부위로 추정됐다.

어차피 제거해야 할 부위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맹장이나 상행결장에 발생했으면 소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신중하게 대장을 촉진한 이경석이 답답한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아, 확인해 봐.”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병변을 확인하는 순간 세 번째 선택지는 사라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선택만이 남았다.

대장을 모두 절제하고 소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들면 환자의 예후는 극히 나빠진다. 가뜩이나 소화 기능이 떨어진 상태에서 음식물을 소화시킬 물리적 여유까지 상당 부분 잃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절제 범위를 최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하기에 소장과 대장이 연결되는 부분만은 충분히 남기고자 했고, 그렇게 계획을 잡았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조직이 훨씬 약한 상태였다.

대장을 전부 잘라 내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난감한 상황이었다.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많은 난관이 예상되지만 지금은 정확한 판단이 중요했다. 어차피 서로 이어 줄 수 있을 정도로 대장을 남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핵심적인 문제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대장을 대부분 제거해야 할 것 같네요. 이렇게 된 이상 맹장과 상행결장을 남겨서 인공 항문을 만들 수 있을지 결정하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을까?”

이경석이 대장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참관을 하고 있는 송재덕 교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수술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결정하기 어려웠기에 김지훈도 조용히 기다렸다.

째깍! 째깍!

무거운 침묵 속에 시계 소리만 울렸다.

이경석이 쉽사리 결정을 하지 못했다.

수술 방법에 따라 예후에 큰 차이가 난다. 하지만 잘못 판단하면 수술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회복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집도의기에 대단한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퍼스트의 역할은 단순히 집도의를 보조하는 것만이 아니야. 수준에 따라 하는 역할이 바뀐 것처럼 지금도 다르지 않을까? 스승님이라면 분명히 조언을 하셨을 거야.’

상대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집도의나 퍼스트라고 해도, 교수들과 펠로우는 입장과 마음가짐이 다를 것이다. 전공의가 집도할 때는 반드시 교수들이 퍼스트를 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석이 형이 날 퍼스트로 세운 이유는 손을 빌리는 것만이 아닐 거야. 선생님들도 함께 수술을 할 때면 서로 상의를 하고, 의견을 구하잖아.’

아무리 얇아도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는 일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4년간의 전공의 생활이 지금까지도 몸에 밴지도 몰랐다. 좋은 습관은 분명 유지해야 하지만, 바꿔야 할 것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

일단 어떤 수술이 최선의 선택일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김지훈이 이경석을 슬쩍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대장과 소장을 확인했다.

지난 경험을 모두 되살렸다. 안타깝지만 마찬가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병변이 발생한 대장을 남기는 것은 확실히 무리야. 일단 제거할 부분은 모두 자르고, 어느 부위로 인공 항문을 만들지 결정하는 것이 최선이다.’

아직도 이경석은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든 대장을 살리고 싶은 눈치였다.

김지훈이 신중하면서도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석이 형, 대장을 모두 살릴 수는 없어요.”

“에스 결장만 살릴 수 있으면 대장끼리 이어 줄 수 있어. 인공 항문을 만드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잖아.”

“너무 위험해요. 염증이 이렇게 심한데 연결 부분이 아물기나 할까요? 수술 후에 터진다면 재수술을 해야 하는데 환자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형 마음은 알지만 냉정해야 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을 전공하는데 어떻게 수술해야 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환자를 향한 안타까움이었다.

또한 누구보다도 환자를 위하는 김지훈이다. 그런 의사의 결정이라면 다른 방법은 없다는 말이었다.

“네 말대로 무리겠지?”

지금까지 조용히 결정을 기다리던 송재덕 교수가 눈을 반짝였다.

“그래. 그게 환자한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다. 안타까운 만큼 결정을 내리기 힘들겠지만, 수술실에서는 절대 자신의 감정에 흔들려서는 안 돼. 냉철해야 된다.”

‘지훈이하고 선생님의 판단이 같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 감정을 앞세우면 문제만 만들 뿐이야.’

집도의의 안타까움과 불안이 사라졌다.

“마취과, 시간 끌어 죄송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수술 부위를 보는 눈빛에 강한 확신이 서렸다.

환자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됐다.

두 곳을 잘라야 한다.

첫 번째는 직장이다.

병변이 있는 부위를 최대한 제거하고, 절단면을 확실하게 막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항문과 연결된 직장 일부가 남는다. 하지만 골반 내에 묻힌 직장까지 건드리면 출혈을 비롯해 수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자칫 수술 자체가 환자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경석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직장을 조심스럽게 잡고 잘랐다.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점막의 염증이 심했다. 장을 봉합하는 바늘도 버티지 못하고 찢어질 정도였다.

“조금 더 밑에 쪽이면 가능할지 확인하자.”

내용물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주의를 기하며 대장 내부를 살폈다. 대략 3센티미터 하부가 그나마 덜해 보였다.

골반 내부에 너무 근접한 부위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난관이었다.

가장 긴 기구를 사용하면 봉합은 그나마 할 수 있다. 문제는 타이였다.

손이 들어가면 타이할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조직이 너무 약해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대로 손상을 주게 될 상황이었다. 직장에 심한 손상이 발생하면 최악의 경우 항문까지 제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지훈아, 가능하겠어?”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타이 하면 김지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지만 솔직히 자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더구나 집도의가 불안해하면 퍼스트가 불안해하듯,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하시죠.”

“오케이! 장겸자.”

골반 입구에서 불과 1센티미터 정도 남기고 직장을 잘랐다. 봉합할 부분이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이경석이 어렵사리 한 바늘을 떴다.

“타이!”

간만에 극도로 어려운 타이를 만났다. 전공의 시절 가슴이 벌벌 떨릴 정도로 어려운 타이를 여러 번 해 봤지만, 결코 익숙해질 일이 아니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압력이 불안정했다. 매듭을 만들어야 할 부분이 보이지도 않았다.

손가락을 따라 하얀 실이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직장을 꽉 조여야 한다.

모든 감각을 손끝에 집중시켰다.

툭!

매듭이 걸렸다.

손을 뺀 김지훈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혁원아, 초점 확실하게 맞춰. 경석이 형, 괜찮겠죠?”

직장 손상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더 이상 힘을 가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이었다.

“좋아. 계속 진행하자.”

수처와 타이가 이어졌다.

“경석이 형, 잠깐만요. 지금 부분은 점막을 더 뜨는 게 좋겠어요. 너무 약해 보이지 않아요?”

“지훈아, 바늘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약해. 이번 타이는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한 바늘 한 바늘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수술복이 후줄근하게 젖어 들었다.

조직이 너무 약해 눈에 환히 보여도 힘들 판이었다. 골반 위로 불과 1센티미터 정도 드러나 있기에 김지훈에게는 악몽처럼 힘든 타이였다.

매듭을 조일 때마다 마음을 졸여야 했다. 조금씩 흐르는 피를 닦아 내는 천광호의 얼굴이 굳을 대로 굳었다. 강병옥은 아예 석상처럼 빳빳한 자세를 유지했다.

마지막 수처가 남았다.

집도의든 퍼스트든, 점막 자체를 보기 힘들기 때문에 이때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이경석이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괜찮겠어?”

“점막이 제대로 걸린 것 같아요.”

마지막 타이가 남았다.

이 부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연결 부분이 새고 만다. 찢어질까 두려워 헐겁게 타이하면 벌어질 것이고, 반대로 너무 강하게 조이면 점막이 찢어지거나 실이 끊어질 것이다.

김지훈은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컷!”

완전히 봉합된 절단면이 보였다. 상당히 어려웠던 과정이었지만 깔끔했다.

이경석은 물론 김지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잘 채워 준 결과였다.

이제 한 고비를 넘었다.

정상적인 조직이라고 해도 대장을 모두 절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더구나 심한 염증까지 동반됐다. 조금만 과도하게 조작해도 찢어질 상태였다.

만일 손상 부위를 통해 내용물이 새어 나오면 배 속을 심각하게 오염시킬 것이다.

면역력에 문제가 있는 환자인 데다 수술 규모마저 작지 않아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남은 직장과 에스 결장을 드러내는 것은 그나마 수월했다. 하지만 후복막에 반쯤 묻힌 하행결장을 박리해 나갈 때는 악전고투가 따로 없었다. 이미 발생한 미세한 천공으로 대장 자체가 너덜너덜할 지경이었다.

“수처! 타이! 광호야, 병옥아, 확실하게 끌고 움직이지 마. 조직이 너무 약하다.”

손을 대면 출혈이고, 조금만 힘을 주면 대장 외부 조직이 쭉쭉 찢어졌다. 염증성 대장염 수술의 최대 어려움이었지만, 이 정도로 힘들지는 몰랐다.

이경석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김지훈 역시 극도의 긴장에 사로잡혔다. 대장을 절제하는 수술이기에 망정이지, 보존해야 했다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간을 타이하는 것보다 더 어렵네. 염증이 이렇게 심한데 맹장 주변을 남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침내 하행결장을 모두 박리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평행결장을 분리해 냈다.

이제 남은 부위라고는 상행결장 일부와 골반 속에 묻혀 있는 직장뿐이었지만 가장 중요한 부위였다. 상행결장과 이어진 맹장을 남길 수 있어야 소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드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눈빛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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