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02화 (602/1,329)

제8화. 결코 작지 않은 전환점 Ⅲ (1)

대장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더구나 염증성 질환이기에 웬만한 실력으로는 집도를 할 수 없는 환자였다. 그야말로 대단한 신뢰였다.

송재덕 교수가 도리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누가 하니? 누가? 어렵다고 힘들다고 피하면, 언제 이런 수술을 할래? 펠로우 제도가 생겨서 그렇지, 예전에는 교수되자마자 다 했어. 경석이 너 수술 잘하니까 자신을 갖고 하면 된다. 암! 그렇고말고.”

퍼스트로 들어갈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전적으로 혼자 책임지고 수술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이경석이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마냥 좋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부담되는 수술인 데다 대장암 수술 경험조차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한 번 내뱉은 말을 취소할 송재덕 교수도 아니었다.

‘정말 이 환자를 나 혼자 수술하라는 말씀인가?’

자신감보다는 불안이 앞서는지 이경석이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경석이 돌연 눈가를 좁혔다.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와 함께 담낭암 수술을 한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한 손보다는 두 손이 확실한 법이다.

더구나 송재덕 교수다. 함께 수술한다면 토탈보다 더 어려운 수술이라도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다.

이경석이 조금은 머뭇거리면서도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말했다.

“선생님께서 도와주실 거죠?”

“내 말 어디로 들었어? 난 힘들어서 이젠 이런 수술 못한다. 못해. 니가 알아서 다 해. 그래서 펠로우로 뽑은 거야. 펠로우로. 밥값은 해야지. 그치? 내 말이 맞지? 난 간다. 가자. 늦었다. 퇴근하자.”

어어? 정말 퇴근을 했다.

이경석이 눈만 껌벅거렸다.

***

병원을 나서던 송재덕 교수가 묘한 표정으로 김지훈과 이경석을 떠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혼자 실실 웃다 말고 흠칫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이쿠! 주차장을 놔두고 여긴 왜 온 거야?”

바쁜 발걸음에 기대가 실려 있었다.

그 시간, 김지훈이 입을 삐죽였다. 남의 떡이 훨씬 더 커 보인다고, 이미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는데도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야! 경석이 형을 확실하게 인정하시네. 하긴 수술 잘하고 환자 열심히 보는데, 인정 못할 일이 없겠지.’

“형, 송재덕 선생님이 단단히 기대를 하시는 것 같은데 좋으시겠어요. 역시 경석이 형이네. 근데 궤양성 대장염 환자를 수술한다니, 정말 그 정도예요?”

“송재덕 선생님도 가급적이면 피하자고 하셨는데 상당히 심각해. 약물에도 전혀 반응을 안 하는 상태고.”

이경석이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약물 치료가 원칙인데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환자 상태는 좋지 않았고, 수술 자체도 결코 쉽지 않은 까닭이었다.

상당한 부담에 확고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뿌듯함은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이경석이 퇴근하려는 김지훈을 주저앉혔다.

“지훈아, 잠깐만 기다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가를 찡그리다 말고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술을 확실하게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했다.

송재덕 교수의 믿음만으로는 분명 부족했다.

‘방법이 있을까?’

검사 결과만을 놓고 볼 때 대장을 모두 잘라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부터 결정을 내려야 했다.

상의할 사람이 필요했고, 이는 전공이나 파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실력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붙잡길 잘했네.’

이경석이 김지훈에게 조언을 구했다.

“지훈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대장 전문은 형인데, 나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럼 저러고 가셨는데 누구한데 물어봐?”

도리어 목소리를 높였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머리를 맞댔다.

어느 틈엔가 대장 파트인 천광호와 나종진은 물론 이혁원까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컨퍼런스를 연 꼴이었다.

내친김이었다. 수술 계획을 세울 수 있을 때까지 토론을 이어 갔다.

오프인 김지훈이 가끔 시계를 보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전공의들을 보는 순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혁원이 눈에 밟혔다.

자업자득이다.

‘에휴! 어쩌다 내가 저 자식 눈치를 보게 됐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상의라도 열심히 해야겠네. 경석이 형도 있고 환자도 급한데, 이 상황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면 앞으로 어떻게 저 자식을 태우겠어?’

고민도 한순간, 이내 수술 범위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다른 견해를 보였고, 전공의들의 의견도 분분했다. 아무리 치열하다고 해도 환자에 관한 토론은 감정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지훈아, 마지막으로 묻자. 네 말대로 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환자를 직접 못 봐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내 의견은 그래요. 어쨌든 최종 결정은 형 몫이죠. 집도의잖아요. 송재덕 선생님이 믿는 사람도 형이고요.”

김지훈의 말 때문일까?

한결 자신감을 얻은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김지훈과 천광호를 번갈아 보았다.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았지만, 수술 팀도 문제였다.

송재덕 교수는 정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치프가 퍼스트를 서야 한다는 말인데, 지금은 여러모로 상황이 달라졌다. 더구나 이경석은 전적으로 믿고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필요했다.

‘지금 내 수준에서는 퍼스트가 상당히 중요해. 나와 손을 맞추고, 조언까지 할 수 있는 퍼스트가 필요해.’

자연스럽게 눈길이 돌아갔다.

김지훈과 함께 수술을 한다면 최상의 결과는 몰라도, 최소한 문제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치프 입장에서는 소중한 기회를 빼앗기는 일이었지만, 환자에게는 극히 유리한 일이기도 했다.

또한 펠로우 제도는 거스를 수 없는 변화였다.

이경석이 눈가를 좁히며 말했다.

“광호야, 이번 수술은 김지훈 선생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네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수술 자체가 어렵고, 내 능력이 미치질 못하네. 그래서 그래. 미안하다.”

흠칫 놀란 김지훈이 입을 열려다 말고 꾹 다물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굳이 멀리서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스승님이 안 들어오셨으면 나도 경석이 형과 수술하기를 바랐겠지? 치프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수술을 혼자 해야 한다면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네.’

입술을 모은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천광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퍼스트를 서고 싶었다. 차라리 이전처럼 송재덕 교수가 들어왔다면 불만을 가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퍼스트를 서기에는 무리한 면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내심 불만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럼 수술 팀은 어떻게 짜실 겁니까?”

“나하고 지훈이가 같이하니까, 전공의는 병옥이만 들어와도 되지 않을까? 아! 지훈아, 네 생각을 안 물어봤네. 도와줄 거지?”

의국 공기가 조금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물론 이해하고 있겠지만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김지훈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씨익 웃으며 천광호의 어깨를 툭 쳤다.

“광호야, 이해해 줘서 고맙다. 역시 치프다워. 경석이 형, 이렇게 된 김에 혁원이도 데리고 들어가죠. 내 파트 전공의를 빼놓을 수는 없잖아요. 아니면 광호 니가 들어올래?”

평소와는 달리 목소리가 방방 떴다. 잠시 고민하던 천광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당연히 제가 들어가야죠.”

그새 마음이 풀린 모양이었다.

누군가의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했다. 비록 세컨이나 써드겠지만, 간만에 참관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색을 하던 이혁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른 2년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엄청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정작 손에 피를 묻히는 날은 비슷했다.

‘어휴! 김지훈 선생님이 자기 파트를 돌라고 할 때만 해도 퍼스트는 그냥 설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어떻게 세컨도 서기 힘드냐. 다음 주면 파트도 바뀌는데 희망이 없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설혹 김지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새카맣게 타는 일만 면해도 한결 편해질 테지만, 2년차의 한계는 명확했다.

무릎 꿇고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당장은 답답하고 힘들지만, 참관 역시 배움이자 후배에 대한 기대와 애정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도 카르페 디엠!

생각과 마음이 꼭 일치하라는 법은 없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울고 있었다.

그러건 말건, 김지훈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술 방법에 대한 윤곽을 잡고 퇴근할 때까지도 말이다.

검사 결과만 보고 수술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파트가 다르다고 해도 퍼스트로 수술에 참여하는 이상, 반드시 환자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원칙이다.

23세 젊은 남자 환자였다.

얼굴을 보는 순간 답답함이 가슴속을 꽉 채웠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했다. 궤양성 대장염은 수술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원칙인데, 수술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심한 복통과 혈변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다. 만성적인 식욕 부진과 소화 기능 이상으로 영양실조까지 의심될 지경이었다. 수술 후 회복이 잘될지는커녕,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젠 흘릴 눈물도 말라붙었는지 보호자가 힘없는 눈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환자만큼 마른 몸을 간신히 일으키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왜 이런 병은 젊은 사람에게 더 많이 발생할까?’

이경석이 수술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환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경석이 형, 이번 주에 수술하신다고 했죠? 일단 고영양 요법을 쓰고, 항생제도 더 강력하게 투여하는 게 좋겠어요. 이러다 어디 한 군데 미세하게 뚫어지기만 해도 곧바로 복막염이 발생할 것 같네요.”

복막염을 우려한 송재덕 교수의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수술 전 최대한 환자 상태를 호전시켜야 했다. 내과와 함께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우려하고 걱정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급기야 복막염 증세까지 보인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지금도 불리한 점이 너무 많았지만, 다음 날 바로 수술하기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심각한 얼굴로 마주 앉았다.

“지훈아, 계획대로 수술할 수 있을까?”

“수술 전까지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하고 상황을 봐야죠. 원칙만 고집하다가는 환자 잡겠어요.”

선택지는 3개다.

첫 번째는 대장을 모두 절제하고 소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드는 것이다. 장기 기능이 멀쩡해도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수술이다. 환자에게나 의사에게나 최악의 선택이었다.

두 번째는 맹장과 상행결장 일부분을 남겨 대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들 수 있는 경우다. 그나마 첫 번째보다는 좋은 예후를 바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대장을 상당 부분 남겨 서로 이어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바람직한 수술은 없다. 그것이 마지막 선택지였고, 가장 기대하기 어려운 경우이기도 했다.

‘선생님, 우리 아이 좀 살려 주세요.’

상의를 하는 내내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가득한 보호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최소한 대장으로 인공 항문을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가능할까? 미세 천공이 발생한 부위가 첫 번째 관건이 되겠어.’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다음 날 오전 회진이 끝나자마자 수술 팀 모두 수술 방으로 향했다. 이경석과 김지훈, 천광호와 강병옥에 여전히 참관에 매진을 하는 이혁원까지 모두 다섯이었다.

9시 정각이 되자 각 수술실이 부산해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김진호 교수와 고경아가 함께했다. 아직 환자가 옮겨지기 전이었지만 은근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경석 선생, 정말 송재덕 선생님은 안 들어오시고 김지훈 선생하고 둘이 하는 거야?”

“예. 그렇게 됐습니다.”

“야! 일반 외과 펠로우들 잘나가네. 열심히 하더니 확실하게 인정을 받는구나. 축하해. 쟁쟁한 외과 의사 두 명이 하는데 금방 끝나겠지?”

수술의 어려움과 위험성을 모르는 김진호 교수가 아니었다. 과도한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쉽지 않은 수술입니다.”

“무슨 소리야. 송재덕 선생님만큼 손이 빠른 사람들이 왜 이래. 엄살 부리지 마.”

기운을 팍팍 북돋아 준다.

그때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내 얘기했니? 김진호 교수구나. 맞지? 허허! 얘들이 손이 빠르긴 하지. 나는 뭐, 이제 나이도 먹고 힘들어서 예전만 못해. 그치?”

“선생님, 우리 펠로우들 힘내라고 농담 좀 한 겁니다. 누가 선생님을 따라가겠습니까?”

“그래. 그렇구나. 농담 속에 뼈가 있는 법이야. 진담 같은 농담이란 말도 있잖아. 내가 할 걸 그랬나 봐. 내가.”

평소 송재덕 교수답지 않게 상당히 진지했다.

헛기침을 하던 김진호 교수가 사레가 들렸는지 캑캑거렸다. 동네 아저씨 웃음이 터졌고, 그 덕분에 모두를 무겁게만 했던 긴장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지훈아, 수술 계획은 잡았니?”

어제저녁 이경석에게 설명을 듣는 모습을 똑똑히 본 터였다.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일단 수술을 시작하면 단단히 긴장해야 한다는 송재덕 교수만의 강조였다.

“예. 충분히 검토하고 결정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자를 거야? 대장을 모두 없애면 환자 힘든데 큰일이다. 소장은 말할 것도 없고, 직장도 잘 마무리해야 삶의 질이 좋아져. 뭐,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잘 짰겠지. 그런 생각 했지? 그치?”

“예. 그 점도 깊게 고민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잘했다. 잘했어.”

마취가 시작될 때까지 송재덕 교수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조용히 듣고 있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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