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601화 (601/1,329)

제7화. 결코 작지 않은 전환점 Ⅱ (2)

강병옥이 안호석과 이혁원 옆에 바짝 붙어 무언가를 조용히 부탁하고 있었다. 송진우는 뭔가에 놀란 듯 눈가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강병옥, 너 수술 안 들어가고 여긴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안호석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신 대답을 했다.

“오늘 예정된 수술이 취소됐다고 우리 수술에 들어오고 싶답니다. 허락은 받았다는데, 참관이라도 시킬까요?”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을 1년차가 참관을 하고 싶다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김지훈이 아는 한 이런 1년차는 없었다. 수술이 취소돼 여유가 생겼다면 솔직히 숨어서 자고 싶은 때가 바로 1년차 시절이다.

‘진우보다 더 열심히 하는 1년차는 없을 줄 알았는데 병옥이 이 자식도 정말 대단하네.’

“강병옥, 너 할 일 없어?”

너무도 의아해 나온 질문에 불과했다.

1년차에게 일이 없다는 것은 외과 자체에 일이 없다는 말이다. 병원이 망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강병옥이 다부지게 말했다.

“문제 생기지 않도록 잠을 쪼개서라도 일은 확실하게 마치겠습니다. 주요 과정만이라도 보게 해 주십시오.”

어차피 파트가 바뀌면 복강경, 혹은 간담도 수술에 참여할 수 있는데 내심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로 대단한 열의였다. 칭찬은 못해 줄망정 일이나 하라고 타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 이 자식 다시 봐야겠네. 1년차답지 않은 자신감을 보인 이유가 있었어. 흠! 좋아.’

펠로우도 교수인데, 이 정도 일로 호들갑을 떨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강병옥의 열의와 마음가짐을 알았으니 최대한 담담하게 대해도 충분할 것이다.

“좋아. 중간에 일이 있으면 나가도 좋으니까, 난 신경 쓰지 마. 자식! 좋다. 괜찮네.”

흐뭇한 웃음으로 마음을 대신했다.

강병옥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수술에 방해되지 않도록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모니터가 또렷하게 보이는 위치에 서서 남몰래 눈가를 좁혔다.

‘날 보는 눈빛이 확실히 달라진 것 같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해.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눈에 띄지 못한다면 미래를 장담할 수 없어. 김지훈 선생님의 마음에 들어야 교수님들의 눈에 드는 거야.’

수술이 시작됐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강병옥이 수술 팀에 못지않은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살짝 눈길을 준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참관도 실력이니까 열심히 봐. 큰 도움이 될 거야.’

처컥! 처컥!

치이익! 치익!

순조롭게 수술이 진행됐다. 상당히 자연스럽고 매끈한 손놀림에 담낭이 스르르 떨어져 나왔다. 어느새 동맥과 담낭관을 묶고 잘라야 할 과정이 시작됐다.

“가위, 클립, 콘돔.”

돌이 가득 든 담낭이 제거됐다.

배 속을 확인하고, 피부 봉합까지 깔끔하게 끝났다. 2시간이 채 안 걸렸다. 전보다 빠르게 끝났다.

무엇보다도 자연스럽게 진행했다는 사실에 김지훈도 뿌듯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전보다는 한결 나아진 것 같네. 이렇게만 가자.’

어느 틈에 나갔는지 강병옥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아무리 열의가 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관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일이 밀리면 죽음이기 때문이다. 혹은 해당 파트의 다음 수술이 이어졌을 수도 있었다.

전공의들이 힘차게 외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혁원아, 진우야, 긴장해야겠다. 특히 혁원이 너는 추월당할지도 모르겠다.”

이혁원이 흠칫 놀랐다.

아무리 잘난 1년차도 2년차 발끝을 쫓아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만 상당한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년차를 떠나 건강한 경쟁이라면 두 손을 번쩍 들고 환영해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수술실을 나갔다.

안호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수술 잘하셔. 경험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진행을 하시지? 도대체 얼마나 노력을 하시는 거야? 혁원이 저 자식이 수술 킴이라는 별명을 괜히 붙인 게 아니었어.’

수술에 들어왔던 전공의들 모두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자신의 파트 수술을 들어간 강병옥을 보는 이혁원과 송진우의 표정이 심각하기만 했다.

***

5월이다.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살랑이는 바람과 싱그러움을 뽐내는 가로수는 마음을 한껏 설레게 했다.

전공의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물론 펠로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들 싱숭생숭한 가운데 누군가는 룰루랄라 노래를 불렀다. 복강경으로 탈장과 담낭 절제술을 연이어 했다. 특히 우려했던 탈장 수술이 원활하게 끝났다.

‘역시 뭐든 많이 해봐야 돼.’

절로 콧노래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좋은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치 5월이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환자들이 하나둘 내원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나오는 컨설트까지, 정말 복에 겨운 나날이었다.

정규 수술과 응급 수술이 이어지며, 말 그대로 칼바람을 날리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백선희 환자 덕분인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마침 백선희가 진상미와 함께 운동을 나왔다. 이제는 환자용 보행기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회복됐다.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안정됐는지 발그스름한 볼과 눈가에 걸린 미소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선생님, 오늘은 한가하시네요?”

“맨날 바쁘면 저도 쓰러집니다. 환자분, 식사 잘하셨죠? 다음 주부터는 내과에서 치료를 받으셔야 하니까, 며칠 후면 얼굴 보기 힘들겠네요.”

백선희가 눈가에 주름을 만들었다.

“꼭 내과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나요?”

“그럼요. 수술은 외과, 약은 내과. 아시죠? 양승철 교수님께서 건강하게 해 주실 겁니다.”

“선생님한테 끝까지 치료받고 싶은데.”

“언니도 그렇죠? 거봐요. 우리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으면 쭉 받고 싶어진다니까요.”

진상미는 아예 호들갑을 떨며 맞장구를 쳤다.

말이라도 고마웠다. 완치는 없고 평생 검사와 치료를 병행해야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카르페 디엠!

드디어 낮에도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정규 수술을 일주일에 서너 건만 고정적으로 해도 한 달이면 열 건이 넘고, 일 년이면 응급 수술까지 도대체 몇 건을 하는 거야?’

질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펠로우 입장에서는 양적인 면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실력이 는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동안 이경석이 부러웠었다. 외래 환자는 애초부터 비교가 되지 않았고, 대장암 수술도 이미 몇 건을 한 후였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부럽다는 생각을 넘어 불쑥불쑥 초조하기까지 했었다.

드디어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한 것이다.

홍재순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간담도가 대장 파트보다는 메이저 수술이 적고, 솔직히 라파로도 하기 쉽지 않은데 참 빠르네. 요샌 입을 아주 귀에 걸고 다녀. 이경석 선생, 긴장해야겠어.”

“그러게 말입니다. 저번에 담낭암 수술하는 거 보고 자극 좀 받았어요. 전체 수술 건수는 지훈이보다 적지만 대장암 수술 몇 건 더 한 걸로 위안 삼았는데, 이젠 그것도 안 되겠어요. 펠로우 딱지 떼기 전에 확실하게 인정받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응급 수술은 우리가 어떻게 할 부분이 아니다. 일복 터진 놈을 이길 수도 없고. 결국에는 다 똑같아지니까 초조해하지 마. 그리고 날 봐. 허구한 날 항문만 보고 살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생각이 크게 다르진 않았다. 같은 일반 외과 의사라고 해도 어느 파트를 전공하느냐에 따라 수술의 질과 양이 달라진다.

더구나 이제 교수의 길에 들어선 펠로우들이다. 기본기를 확실하게 쌓을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각자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겠어?”

홍재순 말처럼 지름길은 없다.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일 것이다.

시간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홍재순은 항문 수술에 전념했고, 이경석 역시 마음을 다잡고 대장 수술에 집중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교수들이었다. 특히 송재덕 교수가 점점 더 많은 수술을 넘기면서 이경석의 얼굴도 한결 편해졌다.

“경석이 형, 대장암 수술 또 했다며? 어이구! 부러워라. 우리 쪽은 암 수술이 많질 않아서 조금 답답하네. 다음번 수술 때는 나도 좀 불러 줘.”

“수술도 많이 하는 놈이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

“라파로로 해서 그렇지, 사실상 거의 다 마이너잖아요. 나도 큰 수술 하고 싶어서 그래요.”

저마다 관점이 다르겠지만, 때론 욕심을 부려도 좋을 때였다. 환자만 안전하고, 정확하게 치료한다면 말이다.

문득 힘든 항암 치료를 받고도 웃으며 퇴원한 백선희가 생각난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정말 부담되고 어려운 수술이었지만, 또 하고 싶다. 의외로 결과가 좋아서 그런가? 그런데 위장관 쪽 컨설트가 없네. 이혁민 선생님은 힘들어서 죽으려고 하시고, 현수 올 날도 몇 개월 안 남았는데 나한테도 컨설트 좀 보내시지.’

위장관 질환과는 인연이 없는지 욕심일 뿐이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바쁜 나날이었다.

정신없이 병원과 집을 오가는 사이, 어느새 여름의 초입인 6월이 눈앞에 다가왔다.

‘벌써 3개월이 지났네.’

비록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할 일을 뒤로 미뤘다. 석사 논문으로 무엇을 써야 할지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은근 부담이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이혁민 교수는 물론 스승의 눈길도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그런지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이런 생활도 어느 정도 몸에 익었으니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하나하나 결정해 나가자.’

고민이 깊어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연구실에 앉아 논문을 읽으며 주제를 생각했다.

무언가 거치적거렸다.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이제는 교수다. 전공의 때와는 달리 자신이 직접 한 수술을 바탕으로 논문을 써야 한다.

“주제를 정해도 수술 건수가 돼야 쓰든지, 말든지 하지. 그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셨구나. 이 상태로 가면 내년은 돼야 충분한 자료가 쌓이겠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마음의 짐을 덜었다.

쩝쩝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린 김지훈이 힐끗 시계를 보다 말고 후다닥 병동으로 향했다.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새 오후 회진 시간이었다.

여전히 회진 때는 정신이 없었다.

지금도 김지훈 자신의 환자를 본 후 스승과 이혁민 교수, 그리고 신기동 교수 환자까지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몸은 힘들고, 대부분 직접 수술을 한 환자도 아니었지만 이 역시 훌륭한 경험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작게 수술하신 이유가 있었구나. 결과가 같다면 환자한테는 그게 유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수술 전에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큰 수술을 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린 탓인가? 어쨌든 배워야 할 게 정말 끝도 없네.’

뻐근한 몸을 이끌고 내일 있을 수술을 확인하기 위해 의국으로 들어갔다. 송재덕 교수와 이경석이 심각한 얼굴로 상의를 하고 있었다.

‘심각한 환자가 있나?’

송재덕 교수가 사진을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정말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원래 건드리지 말아야 할 환잔데 어떻게 하지? 경석아, 이거 토탈(Total)해야 되겠지? 토탈. 괜찮을까? 괜찮겠어? 빨리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큰일이야.”

토탈?

대장 파트니 대장을 모두 잘라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질병인지 궁금해진 김지훈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복부 CT와 대장 조영술에 대장 내시경까지, 모든 검사 결과가 험악하기 짝이 없었다.

한눈에도 크론과 함께 염증성 대장 질환의 대표적인 질환인 궤양성 대장염이 확실해 보였다.

약물 치료가 원칙인 질환이다.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운데, 환자 상태가 상당히 심각한 모양이었다.

김지훈을 본 송재덕 교수가 반색을 했다.

“지훈아, 잘 왔다. 잘 왔어. 니가 보기엔 어때? 아무리 약을 써도 증상이 호전이 안 된대. 혈변에, 복통에, 복막염 증세까지 난리도 아니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수술을 해야 할 의사들이 아직 최종 결정을 못 내린 상태였다. 함부로 의견 개진을 할 때가 아니었다.

대장 조영술 사진을 보던 이경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선생님, 대장만이 아니라 소장도 일부 잘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환자 상태가 굉장히 나쁘고 호전시킬 시간도 거의 없는데, 무난히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암보다 더 무서운 질환이 이거야, 이거. 암은 대장을 남기기라도 하지. 어쨌든 깔끔하고 깨끗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치? 내 말이 맞지?”

당연한 소리다.

이경석은 입을 꾹 다문 채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도 눈가를 좁히며 어떻게 수술을 해야 할지 생각에 잠겼다. 수술에 들어갈 일이 없었지만, 회진처럼 이 또한 훌륭한 간접 경험이기 때문이었다.

‘뭐가 이렇게 심해? 만만치 않네. 너무 많이 자르면 환자가 못 버틸 테고, 너무 적게 자르면 수술을 하나 마나일 텐데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 토탈밖에 방법이 없나?’

다른 파트였지만 상당히 궁금했다.

그때 송재덕 교수가 생각하지도 못한 말을 했다.

“열심히 고민해야 한다. 열심히. 그래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잖아. 그치?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경석이 니가 잘 알아서 판단하고 수술해라. 수술.”

“예? 제가요?”

이경석은 물론 김지훈도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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