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신뢰는 자신감의 원천이다 Ⅱ (2)
또다시 입을 다문 백선희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유일한 치료는 수술뿐인데, 그마저 무수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니 절망적일지도 몰랐다. 다만, 김지훈의 확고한 말과 태도에 실낱같을지라도 일말의 희망을 품는 것 같기도 했다.
백선희가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럼 선생님이 수술하시나요?”
“동의하시면 제가 수술할 예정입니다.”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몸이다. 앞으로의 삶만이 아니라 목숨까지 달린 수술이다. 보다 경험이 많고, 실력 있는 의사에게 받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방법?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심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다른 병원으로 가시는 방법이 있습니다만, 우리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자 하신다면 이준영 선생님이 계십니다. 원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게 최선인가요?”
다른 병원은 몰라도 스승에게 수술을 받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절대 욕심을 부릴 수술이 아니기도 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영 선생님은 환자분이 절대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입니다.”
백선희가 무거운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CT를 찍을 때 직접 내려올 정도로 열의를 가진 의사였다. 진상미도 눈앞의 의사가 아니었다면 평생 고통 속에 살았을 것이라고 했다. 암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주저 없이 권유받은 의사가 바로 김지훈이었다.
열의만큼 실력을 가진 의사일까?
이제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데 치료를 맡겨도 될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병을 가장 잘 아는 의사이기도 했다.
온갖 상념이 스쳤다.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지훈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전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 결국 저도 함께 수술을 참여하게 됩니다. 집도의만 달라질 겁니다.”
“만일 수술을 하시게 되면 자신은 있으신가요?”
“아무리 사소한 병이라도 환자를 두고 자신하는 의사는 없습니다. 각자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과 마음을 쏟지만, 끝까지 마음을 졸이는 건 의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민하지 마세요.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도 환자분의 마음이 편해야 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선택하셔야 할 때입니다. 그게 제일 중요합니다.”
자신에게 온 환자를 다른 의사에게 보내는 의사는 그리 흔치 않다. 대학 병원 교수인 데다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겸손일까? 아니면 두려움을 감춘 것일까?
“시간을 좀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럼요. 하지만 수술은 가급적 빨리 받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받으실 생각이면 외래가 끝나기 전에 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간이 촉박하고, 빨리 결정할수록 환자분에게도 유리한 일이니까 다른 오해는 하지 마세요.”
외래를 나서는 백선희의 안색이 무겁기만 했다. 당사자가 아니기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진상미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
***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한편으로는 환자에게 확고한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책이 들기도 했다.
‘이제 펠로우를 시작했는데, 아직은 먼 일이겠지.’
심난할 때는 바쁜 게 최고다.
불현듯 항상 신뢰를 보내는 입원 환자들이 생각나 홀로 회진을 한 바퀴 돌았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받는 사이인 모양이다. 환자들의 웃음에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조급해하지 말자. 언제 입원 환자가 있을지 걱정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 명이 넘잖아.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스승님도 확 넘어 버릴 수 있어.’
주먹을 불끈 쥐고 수술 방으로 향했다.
오늘도 모든 수술실에서 쉬지 않고 수술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냉기 속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가벼운 긴장을 느끼며 이준영 교수의 수술이 벌어지는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간호사가 다급하게 손짓을 했다.
“신기동 선생님이 찾으세요.”
이제 오후 2시였다. 보통 네다섯 시는 돼야 수술을 하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외래로 내려가자 이혁원이 이미 스케줄 하나를 들고 있었다.
“선생님, 찾으셨습니까?”
“응. 응급 수술 하나 있으니까 빨리 준비해.”
“알겠습니다.”
외래를 나온 김지훈이 눈길을 주자마자 이혁원이 차트를 내밀었다. 만성 신부전으로 이미 손목에 위치한 동맥과 정맥을 연결한 환자였다. 그런데 투석을 위해 바늘을 꽂아야 할 부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투석을 해야 하는데, 언제 완전히 막힐지 모르는 상태였다. 더구나 새로운 동맥과 정맥을 연결한 후 최소 2주는 지나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비상이다.
국소마취하에 수술을 한다고 해도 만성 신부전 환자는 신경 쓸 것이 상당히 많았다. 급히 마취과에 부탁을 하고 부랴부랴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수술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미 양측 손목의 혈관을 모두 수술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수술을 선택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직접 외래로 내려가 신기동 교수에게 노티를 하고, 수술 계획에 대해 물어봐야 했다. 신기동 교수가 별다른 고민도 없이 말했다.
“팔꿈치에 위치한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면 돼.”
참 간단했다.
역시 경험과 실력의 차이는 대단했다. 내심 쓰라린 가슴을 어루만지면 수술 방으로 행했다.
그때 복도에서 진상미와 함께 있는 백선희와 마주쳤다.
“결정하셨어요?”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제게 입원하시라는 말이 아니니까 오직 환자분 자신만 생각하세요. 아셨죠?”
돌아서던 김지훈이 갑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아! 혹시 몰라 입원실 예약을 미리 해 놨으니까 조금만 빨리 결정하셨으면 좋겠네요. 일단 원무과에 부탁을 해서 한두 시간 정도는 미룰 수 있지만, 입원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환자분들이 많아서요. 죄송합니다.”
“입원실을 예약하셨다고요?”
“당일에는 입원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제가 좀 성급하게 행동했습니다. 하여튼 한두 시간 내에만 결정하시면 별문제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바쁘다, 바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원무과에 사정을 해야 했다. 간신히 시간을 미루고 수술 방으로 달렸다. 이혁원이 이미 환자를 수술실로 옮긴 상태였다.
재빨리 수술 준비를 하며, 수술할 부위의 혈관 위치를 기억해 냈다. 주의해야 할 중요 구조물이 무엇이 있는지 가물가물했다. 세 파트를 담당하는 데다 평소 쉽게 접하는 부위가 아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혹시 이혁원은 알고 있을까?
“혁원아, 이 부분에서 주의해야 할 구조물은 뭐가 있어? 그리고 무슨 동맥과 정맥을 연결해야 해?”
이혁원이 눈빛을 굳히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역시 신기동 교수 파트 전공의다웠다.
‘자식! 니 덕분에 큰 도움이 됐다.’
얕은 지식은 사상누각이다. 신기동 교수의 예리함을 피할 구석은 없었다.
수술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찬바람이 불었다.
결국 차가운 비수가 허공을 휙휙 날아다니다 김지훈의 가슴에 푹푹 박혔다.
“쯧쯧쯧! 손만 따라오면 뭐해?”
이혁원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신기하게도 손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위험한 구조물을 정확하게 피해 가며 확실하게 퍼스트를 섰다.
손목 혈관보다 훨씬 굵은 동맥과 정맥이 수월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시간이 꽤 걸릴 수밖에 없는 수술이었다. 그만큼 김지훈에게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그 시간, 백선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진상미와 상의를 하고 있었다. 널리 알려진 실력과 권위를 갖춘 의사와 이제 전문의가 된 김지훈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는 고민할 이유조차 없었다. 그런데 좀처럼 결정할 수가 없었다.
응급실까지 따라와 검사를 지켜본 의사.
자신의 질환을 상세하게 설명해 준 의사.
우습게도 입원실까지 잡아 놓은 의사.
그러면서도 수술에 욕심을 부리지 않는 의사.
갈등의 연속이었다.
“상미야, 어떻게 해야 하지?”
“언니, 다른 병원으로 갈 생각이 아니면 김지훈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편하게 결정해요.”
“검사를 또 하기는 싫어. 넌 어떻게 할 것 같아?”
진상미가 입술을 모았다.
“나도 고민을 하긴 했겠죠. 하지만 결국 김지훈 선생님께 수술을 받았을 것 같아요. 어쨌든 언니와 나는 상황이 좀 다르잖아요. 이제 두 번째 봤고, 어떤 선생님인지도 잘 모르니까 편하게 생각해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요인이든 결국 의사에 대한 신뢰 문제였다. 물론 실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말이다.
이미 진료를 받았지만 다시 한 번 김지훈의 의견을 듣고 싶어진 백선희가 외래 간호사를 찾았다. 어쨌든 입원을 안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죄송한데, 혹시 김지훈 선생님을 뵐 수 있을까요?”
“지금 수술 중이세요. 제가 연락을 드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째깍! 째깍!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수술 중이시네요. 수술 방 간호사에게 물어보니까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네요. 어떡하죠?”
째깍! 째깍!
어느새 오후 5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다른 병원으로 갈 생각이 아닌 이상 이제는 입원 수속을 해야 한다. 누구에게 수술을 받을지 확실하게 결정을 하지 못했지만 병원은 정했다.
백선희가 머뭇거리며 외래 간호사에게 부탁을 했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입원장이 있어야 하는데, 이준영 교수님도 수술 중이시라 부탁드릴 분이 없네요.”
때마침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보였다. 반색을 한 외래 간호사가 급히 달려가 사정을 설명했다.
힐끗 백선희를 본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준영입니다. 담낭암으로 내원했고, 김지훈 선생에게 진료를 받으신 환자분 맞죠? 입원장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그런데 아직 어느 선생님에게…….”
백선희가 말꼬리를 흐렸다.
이유를 모를 이준영 교수가 아니었다. 외래 차트와 검사 결과를 직접 확인한 후, 최선의 선택은 수술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김지훈 선생 앞으로 입원하시면 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선생입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권위 있는 의사가 강한 신뢰를 보였다. 백선희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고, 진상미는 조용히 결정을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 불쑥 문을 열었다.
이준영 교수의 진료실 문을 거리낌 없이 열 수 있는 사람, 외래 간호사가 미처 말할 틈조차 없을 정도로 성격 급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이 교수, 회진 가자. 회진. 어? 환자분 계셨네. 아이고!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 교수 외래 진료 날이 아니라서 실례를 했네요. 응? 어디서 많이 뵌 분인데, 혹시 이혁민 교수하고 김지훈 선생에게?”
진상미가 급히 일어나 인사를 했다. 수술을 받은 것도 아닌데 자신을 기억하다니, 대단한 기억력이었다. 어쩌면 환자에 대한, 혹은 다른 누군가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네. 맞아요, 선생님.”
“그러시구나. 별일 없으시죠? 그런데 여기는 웬일로?”
스윽 뷰박스에 걸린 CT로 눈이 갔다. 살짝 묘한 표정을 짓다 말았다.
공연한 헛기침을 하며 힐끗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지훈이가 좀 서운하겠어. 하긴 아직 환자들이 무작정 믿기에는 경력이 부족하지. 실력은 준영이가 보증을 한다고 해도 환자들이 그걸 아나?’
빤한 눈빛이었다.
“김지훈 선생이 지금 수술 중이라, 제가 대신 입원 절차를 밟는 중입니다.”
송재덕 교수가 단박에 상황을 알아챘다.
“그래? 야! 역시 실력이 뛰어난 의사는 환자분들도 아시는구나. 이 교수까지 함께하면 수술 끝났네. 환자분, 잘 결정하셨습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교수들입니다.”
백선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의 교수가 모두 강한 신뢰를 보였다. 이런 믿음을 받는 의사를 불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김지훈은 물론 새로운 교수도 이준영 교수와 함께 수술을 하게 된다고 했다.
입원장을 든 이준영 교수가 무언의 재촉을 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잘 결정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최선을 다해 환자분을 치료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김지훈 앞으로 입원장이 발부됐다.
그 시간, 하얗게 탄 채 수술실에서 나온 김지훈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꼼짝할 힘도 없었다.
한숨을 푹푹 쉬며 수술을 상기하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외래로 달려갔다. 백선희가 어떤 결정을 했던 마무리는 지어야 했다.
“예? 내 앞으로 입원을 했다고요?”
“네. 이준영 선생님께서 대신 입원장을 발부하셨어요.”
간호사가 생글생글 웃으며 외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김지훈의 얼굴이 점점 상기됐다. 감당할 수 없는 신뢰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환자 역시 김지훈 자신을 신뢰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강해지고 단단해질 신뢰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수술과 환자 치료에 임하는 것만이 환자와 스승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길이었다.
오후 회진이 시작됐다.
막 병실에 올라온 백선희 환자를 먼저 찾아 대화를 나누었다.
도중에 회진을 돌던 이준영 교수가 들어왔다. 병실 환자를 보고 난 후, 무뚝뚝한 얼굴로 김지훈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지막에야 한마디 했다.
“김지훈 선생, 다음 주 화요일에 수술할 예정이야?”
“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백선희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단지 그 말뿐이었는데 더없이 든든한 응원이자 힘이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신뢰에 강한 자신감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