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신뢰는 자신감의 원천이다. Ⅰ (2)
갑작스러운 변화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서도진까지 연구실을 찾아왔다.
“마침 잘 왔다. 앉아.”
김지훈이 빨간 볼펜으로 CT에 표시를 하며 열변을 토했다. 마치 확신에 찬 것처럼 무섭게 자신의 생각에 집중했다.
모든 설명이 끝나자 홍재순이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안색으로 말했다.
“그렇게 수술해서 성공만 하면 최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하겠어?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지훈아, 이런 방법은 도리어 수술 중에 문제를 만들 수도 있어. 만일 출혈이 통제되지 않으면…….”
이경석이 말을 잇지 못했다. 분명 외과 의사라면 누구도 입에 담지 않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Table Death(수술 중 사망).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준영 선생님이 계시잖아요. 도진아, 지금 이 환자 내일 집담회 때 마지막 주제로 올려. 그리고 만일 누구 한 명이라도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내일 아침에 나한테 말해 줘.”
김지훈의 확신과 스승에 대한 믿음이 강하게 어울렸다.
자료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 김지훈이 깊은 고민에 잠겼다. 시한부 선고를 하느냐, 아니면 암을 절제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붙잡느냐의 기로에 섰다.
확실하게 준비해야 했다.
주말 집담회에 주제로 올렸는데 조금이라도 미흡하면 스승은 무조건 시뻘건 불길을 던질 것이다. 이혁민 교수의 조곤조곤한 논리와 신기동 교수의 비수는 덤이다.
두렵다.
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가 두려웠다.
그것은 곧 환자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확실하게 준비하자.’
곤히 잠든 고경아의 볼에 살짝 뽀뽀를 하고, 마루 겸 부엌으로 나왔다. 간의 해부학적 구조부터 수술 계획까지 찬찬히 고민하고, 검토했다.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졌다. 위험 부위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찔거릴 지경이었다. 이경석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전공의 시절 어렵게만 느껴졌던 수많은 수술을 스승과 함께했다. 난이도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경험도 자신감을 주진 못했다.
‘후우! 집도와 퍼스트의 차이가 생각보다 더 엄청나네. 스승님은 어떻게 이런 한계를 극복하셨을까?’
은근한 긴장과 부담 속에 밤이 지나갔다.
***
분주한 오전 회진이 끝나고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모두들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
총치프인 서도진이 발표 준비를 하는 동안 2, 3, 4년차들이 앞줄에 앉았다. 그 뒤로 교수들이 차례차례 자리 잡았고, 맨 뒤에 펠로우들이 나란히 앉았다.
1년차들은 가장 눈에 안 띄는 자리를 찾느라 분주했다. 졸지 않을 수 없는 년차였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다들 이해한다지만 대놓고 졸면 죽음이니, 눈치껏 자는 것도 요령이었다.
평소라면 피식 웃었겠지만 김지훈의 얼굴이 심각하기만 했다. 하필이면 시선까지 마주쳤다. 백선희 환자 때문이었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송진우와 강병옥이 필사적으로 잠을 쫓았다.
서도진이 한 주 동안 시행한 수술을 보고했다. 교수들의 질문이 이어지고, 전공의들은 긴장에 휩싸였다.
펠로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오늘은 이경석이 집중적인 질문 공세에 직면했다. 송곳 같은 예리함에 진땀을 흘리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마지막 주제가 남았다.
45세 여자 환자, 백선희.
간 전이를 동반한 담낭암.
CT 소견을 듣고 직접 확인까지 한 교수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준영 교수만이 무덤덤한 얼굴로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김지훈 선생 환자구나. 이거 수술할 수 있겠어? 안 된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어렵다. 어려워. 이 교수, 어떻게 생각해?”
“확실히 어려운 환자입니다.”
‘김지훈, 아무런 준비 없이 의견을 물을 생각은 아니겠지? 정말 어려운 수술이 될 수도 있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 네 생각부터 들어 보자.’
그 말만 딱 하고는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다들 적응된 지 오래인 일이었다.
“절제를 하면 의미는 확실히 있는 환자긴 하네. 그런데 원칙대로 수술하면 환자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겠나? 김지훈 선생, 설마 아무 생각 없이 말기 암 환자 케이스를 주제로 낸 것은 아니겠지?”
역시 예리한 이혁민 교수다. 교수들의 시선이 김지훈에게 쏠렸다.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상당히 큰 관심을 보인다는 의미였다.
눈빛을 굳힌 김지훈이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절제를 했을 때와 못했을 때의 예후 차이가 상당히 크기에, 반드시 절제를 해야 하는 케이스입니다. 단, 말씀하신 것처럼 원칙대로 수술을 하면 좌측 간의 일부만 남기 때문에 수술 후 환자의 회복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전이된 암이 우측 간 전체로 퍼진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담낭 절제와 함께 간 구역 절제술을 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Cholecystectomy with Hepatic lobectomy.
담낭 절제술 및 간 구역 절제술!
간 구역 절제술은 간암 환자에게서 때때로 시행되는 수술이다. 한쪽에 국한됐다면 통상의 난이도를 갖는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암 조직이 담낭에 인접한 좌우측 간을 동시에 침범했다.
문제는 바로 그 부분에 간 동맥과 담도 등 주요 구조물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양성 질환이라면 아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을 부위였다.
조그만 실수도 자칫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더구나 눈에 보이지 않게 퍼져 나가는 질병이 바로 암이다. 정상 조직을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약하게, 혹은 딱딱하게 변성시켰을 수도 있다. 그만큼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수술이었고, 위험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다들 순간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잠시 CT에 집중하던 신기동 교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김지훈 선생, 그렇게 되면 원칙적인 절제보다 절단면이 훨씬 클 수밖에 없어. 게다가 간으로 들어가는 메인 혈관과 담도를 건드리기 십상인데, 그게 더 위험하지 않을까? 기술적으로 담보할 수 있겠어?”
“저도 그 부분이 가장 염려가 됩니다. 하지만 개복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에는 환자 예후가 너무 나쁩니다. 또한 제 경험이 부족한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스승만이 이런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바로 책임이었다. 자칫 스승에게도 벅찬 부담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김지훈의 눈 속에 담긴 의미를 알기에 모두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준영 교수가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잠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환자에 관한 문제는 사적인 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명확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바로 스승이다. 굳이 책임 문제는 꺼내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것이라고 믿었다.
“죄송하지만, 집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지훈 선생, 백선희 환자가 누구 환자야?”
“제 환자입니다.”
“그런데 왜 내가 집도를 해?”
“예? 선생님, 말씀드린 것처럼…….”
중간에 말을 뚝 잘랐다.
“김지훈 선생, 전공의 아니다. 교수야.”
직접 수술을 하라는 말이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전문의 된 지 이제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전공의로서는 몰라도 교수로서의 경험은 일천하기 짝이 없다. 실력을 인정한다고 해도 밟아 가는 단계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준영 교수는 너무도 확고한 신뢰를 보였다.
“김지훈 선생이 수술하는 날은 내가 외래를 보는 날이니까 날짜 잡으면 미리 말해. 퍼스트는 서 줄 수 있어.”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정말 집도를 할 실력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기에 더욱 그랬다.
그때 송재덕 교수가 감탄을 터트렸다.
“야! 우리 김지훈 선생 실력이 이 정도였어? 누구보다도 빡빡한 이 교수가 인정했으면 수술해도 된다. 해도 돼. 정말 많이 발전했다, 많이. 좋겠다. 좋겠어.”
이혁민 교수는 아직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하지만 송재덕 교수의 말대로 이준영 교수는 아무리 총애한다고 해도 결코 능력을 과대평가할 사람이 아니었다.
‘역시 가장 자주 본 사람이 정확한 판단을 하겠지. 이준영 선생님이 퍼스트를 서면 모자란 부분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거야. 그렇다고 해도 기대 이상이네.’
신기동 교수는 입맛을 다셨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이준영 선생님이 먼저 하셨네. 김지훈, 내 수술을 할 때처럼 혈관을 다루면 할 수 있어. 간에 관해서는 둘째라면 서러워할 양반이 퍼스트를 서 주신다는데, 자신을 갖고 해.’
집담회를 끝난 이후에도 김지훈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예상과 기대가 완전히 빗나갔다. 너무도 엄청난 말에 얼떨떨하면서도, 가슴을 짓누르는 부담에 답답할 지경이었다. 스승의 무한한 신뢰에 부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후! 내가 정말 그 정도 실력이 있다는 말인가? 안전하게 수술을 할 수 있을까?’
순간 또 다른 걱정이 다가왔다.
환자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절망적인 진단을 받은 상태에서 이제 교수가 된 의사에게 몸을 맡길 환자는 없을 것이다. 수술의 어려움과 위험도까지 듣는다면 환자가 내릴 결정은 빤했다.
‘설마 환자 입장을 감안하지 않으신 걸까?’
서둘러 외래로 내려갔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절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만, 환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솔직하게 얘기하고, 환자가 원한다면 선생님께 보내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김지훈, 의사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환자가 자신의 몸을 맡기겠어?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환자를 대해. 그래야 결과도 좋은 법이야.”
“알고는 있습니다만, 이번 경우는…….”
“난 널 믿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상하게 먹먹해지는 가슴을 안고 외래를 나온 김지훈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스승의 말속에 담긴 의미와 신뢰는 그 자체로 제자의 힘이었다.
‘그래. 최선을 다해 보자. 환자가 동의한다면 반드시 수술을 성공시켜서 스승님과 선생님들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자.’
이제야 얼굴을 펼 수 있었다.
간만에 캔 커피를 샀다. 오늘도 이준영 교수는 흐뭇한 얼굴로 달달한 커피를 즐겼다. 어떻게 알았는지 송재덕 교수가 얼굴을 내밀었다.
“지훈아, 네 눈에는 준영이만 선생님이니? 나도 입 있다. 아침에 커피 먹었다고 또 먹지 말라는 법이 있는 건 아니지? 뭐하니? 나도 목마르다. 목말라. 아이고! 죽겠다. 죽겠어.”
겸사겸사 캔 커피를 한 아름 샀다. 교수들과 외래 간호사들의 입술이 커피색으로 물들었다.
***
주말 당직이다.
김지훈이 연락이 뜸하기를 빌며 책을 펼쳤다.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사정을 들은 고경아도 김지훈의 중압감을 느꼈는지 발걸음마저 조용조용 옮겼다.
‘역시 이 부분 처리가 관건이야. CT에서는 괜찮아 보이지만, 만약 혈관이나 담도를 먹었으면 수술이 불가능하니까 먼저 확인을 해야 돼.’
모든 신경을 집중해 수술 계획을 세워 나갔다. 어떤 기구를 써야 할지 고민이 될 때는 고경아와 상의를 했다. 이제는 노련한 간호사답게 기대 이상의 도움을 받았다.
동반자 이상의 모습에 문득 행복이 밀려왔다.
“경아 씨, 사랑해.”
“어머! 수술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놀러 가자고 안 할 테니까 마음 푹 놓으세요, 서방님.”
“난 순수한 마음으로 말한 건데, 그걸 왜 이렇게 삐딱하게 받아들이시나. 앞으로 사랑한단 말 하지 말까?”
“어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입이 닳도록 하루에도 몇 번이고 해야지. 알았어요?”
깨가 쏟아지려고 한다.
마침 밤도 깊었다.
고경희는 잠들면 아무 소리도 못 듣는다.
김지훈이 슬며시 고경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제는 익숙할 만도 한데 얼굴이 빨개진다.
어찌나 예쁘고 섹시한지 없던 힘도 불끈 솟을 판이었다.
따르르릉!
아! 웬수 같은 당직!
맥이 탁 풀렸다.
응급실이다.
당직이기를 기다렸다는 듯 아뻬가 왔다. 젊고 마른 환자라 송진우에게 메스를 맡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송진우 대신 강병옥이 보였다. 지금까지 거의 매번 당직이 겹쳐 왔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혁원아, 진우는?”
“강병옥 선생님하고 수술 당직을 바꾼 것 같습니다. 천광호 선생님한테 허락까지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는 대로 수술을 줄 참이었는데, 운이 안 닿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열심히 해 왔다면 수련 일정에 차별은 없다. 입국식도 코앞이고, 강병옥도 퍼스트를 여러 번 섰기에 이제는 수술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광호야, 병옥이도 수술 받을 만하지?”
“예. 홍재순 선생님도 곧 메스를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입을 열려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퍼스트를 서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찜찜했지만 홍재순의 판단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열심히 한다고 들었으니까 괜찮겠지. 진우, 그 자식은 이런 날 당직을 바꿔.’
“그래? 그럼 오늘 주자. 준비시켜.”
강병옥이 잔뜩 흥분한 채 부지런히 수술 준비를 했다.
수술실에 올라가자 천광호의 다시라는 말이 끊이질 않고 들렸다. 이젠 당연한 과정이 된 모양이었다.
김지훈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첫 수술만큼 중요한 수술도 없는데, 수술이 끝나고 난 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선생님,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반드시 선생님 마음에 들게 해야 돼. 지금이 바로 나를 확실하게 기억하게 할 수 있는 기회야.’
강병옥의 눈매가 매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