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94화 (594/1,329)

제4화. 신뢰는 자신감의 원천이다. Ⅰ (1)

꽉 막힌 일이라도 고민하면 가끔 답이 나오는 법이다. 외과 센터가 뇌리 속을 스쳤다. 아직은 응급 환자 위주로 돌아가지만, 언젠가는 외과 환자들을 중점적으로 치료하는 곳이 될 것이다.

외과 센터 응급실에 연락을 했다.

다행히 당장 CT를 찍어야 하는 환자는 없었다. 하지만 CT 촬영은 방사선과 기사의 일정과도 관계가 있다. 다른 검사가 밀려있는지 통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동안 전화기를 잡고 씨름을 하던 김지훈이 가운을 걸치고 직접 방사선실로 향했다.

“죄송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사선 기사의 표정이 묘해졌다.

간혹 급한 검사가 필요한 경우 전공의들이 찾아오는 적은 있었다. 하지만 교수가 직접 내려와 부탁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일정을 확인하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잡아도 한 시간 반 후에나 가능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더운 밥 찬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진상미가 백선희의 손을 꼭 잡았다.

“언니, 내 말대로 우리 선생님께 오길 잘했죠? 걱정하지 마세요. 나쁜 병일 리가 없을 거예요. 우리 선생님이 언니 병도 꼭 치료해 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라는 말이 귓가에 박혔다.

그 속에 담긴 신뢰가 무겁게 다가왔다.

‘내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별말씀을요. 촬영할 때 뵙겠습니다.”

직접 부탁을 한 것도 모자라 촬영 때도?

환자는 물론 외래 간호사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사실 통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래 환자가 밀려 있는 것도 아니고, CT에서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기도 한 참이었다.

시간 맞춰 외과 센터로 내려갔다.

CT실로 들어가는 백선희를 보며 진상미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알고 지낸 지 오래됐을 리가 없는데 가족 이상의 반응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무척 외로웠을 텐데, 많이 의지를 한 모양이네. 어쩌면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일지도 모르지.’

문득 지난 일이 생각났다.

진평호와 금경태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악어와 진씨 일가는 또 어떨까?

지난 주말, 사건을 담당했던 서정호를 보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잊히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간암 말기였는데 살아 있을까?’

금경태를 떠올리니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을 단 한 번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아마도 금경태는 삶의 회한에 사무쳐 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터졌다. 착잡함과 허탈함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최소한 주변 사람들에게만은 마음을 다해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을 때, 나한테 관심을 가져 줄 때 잘하자.’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CT 촬영이 시작됐다.

진상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촬영실로 들어갔다. 필름보다는 커다란 모니터에 뜨는 영상이 훨씬 자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컷 한 컷 환자의 복부 단면이 화면에 나타났다. 폐 하부에 이어 간 상부가 보이고, 곧 담낭과 주변 간 조직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김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좋지 않다.

개인 병원 CT와 다른 소견이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아마도 장비의 질적 차이로 인해 발생한 낮은 해상도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제대로 발견해 의뢰를 했다는 것 자체가 천만다행이었다.

마지막 컷까지 확인한 김지훈이 조용히 진상미를 불렀다. 무언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떤 정보든 부족하면 환자의 신뢰를 얻기 힘들기 때문에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혹시 개인 병원에서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나요?”

“왜 그러세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들은 말이 있으면 정확하게 말씀해 주세요.”

진상미의 얼굴에 두려움이 번졌다.

“사실은 간에 암이 퍼졌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경우 수술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언니 앞이라 말씀을 못 드렸어요. 언니도 가족이 없는 사람이고, 너무 무서워해서 저 혼자 들었거든요. 죄송해요.”

“그럼 환자분은 암이라는 것만 아시는 거네요.”

“네, 선생님. 수술이 정말 불가능한 정도인가요? 제발 우리 언니 살려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이제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얼마나 행복했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진상미의 애처로운 모습에 가슴이 쓰렸다. 환자에게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한 이성을 유지해야 할 때였다.

담낭암 수술의 난이도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모든 결과를 취합해 수술이 가능한지부터 판단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또한 다른 어떤 수술보다 집도의의 실력이 중요했다.

수술 욕심을 지그시 억눌렀다.

‘내가 함부로 덤빌 수술이 아니야. 스승님은 어떻게 판단을 하실까?’

“일단 힘들더라도 다음 주 수요일 이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장은 설명 드리기 곤란합니다.”

절망적인 말이었다.

“선생님, 제발. 선생님.”

진상미가 거의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이해가 되긴 했지만 감정에 휩쓸리면 더욱 상황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상미 씨, 환자는 보호자보다 몇 배 더 힘듭니다. 예전에 우리 병원에 오셨을 때 진상미 씨 마음이 어땠는지 생각하세요. 마음 단단히 먹고 환자분을 대하셔야 합니다.”

진상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참만에야 진정됐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잠시 후, 백선희가 검사를 마치고 나오자 진상미가 얼른 눈물을 닦았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환자의 손을 꼭 잡았다.

김지훈이 궁금해 하는 환자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초조해하는 환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섣부른 판단을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방사선과에서 판독을 하고, 다른 선생님들과 상의를 해야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일단 기름진 음식 조심하시고, 수요일에 금식하셔야 하는 거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머뭇거렸다. 차마 발길을 떼지 못했다.

김지훈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최선을 다할 테니까 마음 편히 가지세요.”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백선희와 진상미의 목소리를 뒤로했다. CT를 들고 수술실로 올라가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탈의실에서 다시 한 번 자세하게 확인했다.

‘간 전이는 확실해. 전이된 부분을 모두 절제하려면 우측 간만이 아니라 좌측 간 일부까지 잘라야 하는데, 환자가 버틸 수 있을까? 무의미할까?’

여전히 가슴은 뚫리지 않았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지금은 수술뿐이다.

한참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생각 외로 늦은 탓인지 이준영 교수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궁금함이었다.

김지훈도 당장 상의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모든 수술이 끝나자 도리어 침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펠로우가 돼서 전공의 때처럼 스승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차적인 판단은 내 몫이다.’

이젠 이경석과 홍재순도 있다. 후배들 역시 교육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함께 검사 결과를 보며 머리를 맞대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 수술이 끝난 후, 고경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경아 씨, 담낭암 환자 한 명이 외래로 왔는데 심각하네요. 수술이 가능할지 상의를 해야겠어요.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요.”

“어제도 잠을 못 잤는데 괜찮겠어요?”

“다음 주 수요일에 예약을 잡아 놔서 시간이 없네요. 오늘 미리 상의를 하고, 내일 스승님께 말씀을 드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아요.”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와요.”

김지훈은 물론 고경아의 어깨에도 피곤이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면 그 이상으로 힘들어진다. 환자는 결코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방법이 있을까?’

CT와 환자, 그리고 진상미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오후 회진을 끝내고 연구실에 모두 모였다.

당직인 이경석은 물론 오프인 홍재순도 기꺼이 자리를 함께했다. 회진이 끝난 후 더욱 바빠지는 파트 전공의들도 싫은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더구나 약식으로 진행하지만 엄연히 컨퍼런스다. 후배들 앞이라도 형식과 예의를 지키는 것이 마땅했다.

“45세 여자 환자로 담낭암이 의심됩니다. 과거력상 특이 사안은 없습니다. 종물 크기가 이미 2센티미터를 넘었고, 간 전이까지 보입니다. 전이 부위 위치가 상당히 안 좋아서 수술 여부가 가능할지 먼저 판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CT 확인하시고 좋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자연스럽게 뷰박스 앞에 모였다.

펠로우들이 눈가를 찌푸렸다. 서도진과 박순용도 혀를 차며 얼굴을 굳혔다.

이혁원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궁금해했고, 송진우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홍재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지훈 선생, 매스(Mass) 크기도 크지만, 이거 우측 간하고 좌측 간을 동시에 먹은 거 아냐?”

“그렇게 보입니다.”

“우측을 너무 많이 먹었네. 원칙대로 절제하면 좌측 간도 온전히 남기질 못하는데 수술이 가능하겠어? 이경석 선생, 어떻게 생각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이 정도 진행될 때까지 왜 증상이 없었을까요? 이쪽 계통 암이 참 무서워요.”

김지훈이 전공의들을 보았다.

“우리 전공의 선생들은 어떻게 생각해?”

다들 답답한 기색이었다.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는 실력이 부족한 탓이다. 자격을 얻기 위해 교과서를 완독하고, 수많은 논문과 자료들을 섭렵한 전문의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나도 기억을 되살려 볼까?’

컨퍼런스는 의견 교환만이 아니라, 각자의 경험과 지식을 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오프인 홍재순에게 참석을 부탁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선생님, 담낭암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내가? 공부한 지 오래돼서 정확할지 모르겠네. 혹시 틀리거나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오면 바로 지적해 줘. 그럼 기억나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

이론 하면 홍재순인데, 엄살이자 겸손이다.

오죽하면 이론의 오색이라고 불렸을까?

담낭암의 증상부터 진단, 그리고 수술 방법 및 예후까지 줄줄 흘러나왔다.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전공의들은 입을 쩍 벌렸고, 이경석은 물론 김지훈조차 조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역시 홍재순 선생님이야. 세부 전공도 아니고, 전문의 시험을 본 지 2년 가까이 지났는데 정말 확실하게 기억하시네. 그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덕도 있겠지.’

덕분에 머릿속을 정리했다.

특히 암 절제 여부가 환자의 예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왔다. 항암제가 잘 듣지 않는 암이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수술 가능한지였다. 컨퍼런스를 하는 목적이기도 했다.

“홍재순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들은 내용이 담낭암의 기본 지식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전공의 선생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돼. 그럼 제일 중요한 부분이 남았네요. 수술이 정말 불가능할까요?”

이경석이 눈가를 좁혔다.

“일단 메인 혈관에 바짝 붙여서 절제해야 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아. 게다가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원칙에 입각해 절제를 한다면 과연 환자가 감당할 수 있을까? 간이 20퍼센트도 안 남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 우측 간 전체와 좌측 간 일부까지 절제해야 한다면 사망률을 예측할 수도 없어.”

부정적인 판단이 우세했다.

6개월? 9개월? 12개월?

시한부라는 말에 다른 의미는 없다. 남은 기간이 얼마든 간에 환자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의사로서 가장 하기 힘든 말 중 하나일 것이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난관이 남았다. 수술을 하면 그에 준하는 효과가 있어야 한다. 결코 의사의 만족이나 위안을 위해 수술을 감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리한 수술은 환자에게 더 큰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

“만약 수술을 성공하면 생존률이 얼마나 될까요? 말기 암 환자에게 차이가 있을까요?”

“통상 말기 암으로 판단되면 아예 열지 않는 게 맞지만, 이 환자의 경우에는 직접 전이밖에 없어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원격 전이가 보이질 않잖아.”

“나도 홍재순 선생님 생각에 동의해. 할 수만 있다면 제거해 주는 게 분명 유리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싶어. 안타깝지만 내과에 의뢰해서 항암 치료에 기대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답답한 일이었다. 환자와 진상미의 얼굴이 아른거려 자리를 끝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한계는 명확했다.

한동안 나직한 대화가 오고 갔다. 갑갑하고 무거운 공기만이 감돌았다. 간암 수술을 앞두고 열었던 컨퍼런스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그만큼 의사들에게도 힘들고 부담을 주는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CT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 후우! 아는 사람과 관련이 있으니까 더 부담스럽네.’

아는 사람?

문득 음성의 오지랖 넓은 환자, 홍채연이 떠올랐다.

조기 위암이었지만 위치가 안 좋아 위를 모두 잘라야 할 상황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신현수와 고심을 거듭하고, 함께 상의한 끝에 부분 절제로 훌륭하게 암을 제거했다.

무언가 정리되지 않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단, 홍채연의 수술 결과가 만족스러워야 했다.

혹시 재발하거나 다른 문제는 없을까?

급히 서도진을 찾았다.

“도진아, 혹시 홍채연 환자 기억해?”

(홍채연? 아! 그 환자요? 두 달 전에 검사하러 왔던 것으로 아는데, 왜 그러세요?)

“별문제 없었어?”

(예. 깨끗했습니다.)

조기 위암과 말기 담낭암.

진행 정도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지만, 둘 다 수술이 일차적인 치료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위전절제술을 피한 것처럼 광범위한 간 절제 역시 고려할 수 없는 수술이다.

다른 듯 같은 상황이었다.

무언가 희망이 보였다.

‘이 경우에도 수술 방법을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예후에 차이가 있을까?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라.’

“홍재순 선생님, 경석이 형.”

갑자기 김지훈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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