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장인어른! Ⅱ (2)
월요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뜻밖의 말에 멍하니 스승의 얼굴만 보았다.
이준영 교수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평소와 똑같은 말투로 말했다.
“오늘부터 네 앞으로도 컨설트가 나올 거야.”
“제 앞으로요?”
“그래.”
옆에 있던 송재덕 교수가 혀를 찼다.
“거참! 이제는 좀 자세하게, 부드럽게 말하면 안 되니? 이 교수, 그러다 있는 정도 떨어진다. 조심해, 조심. 이 교수하고 양승철 교수하고 다 얘기 된 거야. 우리 경석이도 빨리 자리 잡아야 하는데 걱정이다. 걱정이야. 지훈아, 맨날 설움 당하지 말고 대장하자. 대장.”
얼떨떨한 일이었다.
컨설트는 단순히 환자 의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외과 교수들은 물론, 다른 과 교수들에게까지 신뢰를 얻어야 가능한 일이다.
홍재순도 거의 6개월이 지나서야 컨설트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과 한 달 만에 환자 의뢰를 받다니 실감하기 어려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뒤늦게 들어온 이혁민 교수가 아예 폭탄을 던졌다.
“김지훈, 니 얼굴 보니까 얘기 들은 모양이구나. 내가 바쁠 때는 나한테 오는 컨설트도 니가 받아라.”
“예? 선생님 것도요? 그럼 수술 날짜는 어떻게 정합니까?”
“환자 본 사람이 수술해야 하는데 날짜를 어떻게 정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고? 내 수술하고 겹치지 않도록 조정 잘해라. 알겠지?”
위장관 수술까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일순 머릿속이 복잡해져 아무 말도 못했다. 교수들이 힐끗 눈길만 주고는 회진을 돌기 위해 외래를 나섰다.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도리어 믿기지가 않네. 이렇게 되면 라파로만이 아니라 위암 수술을 할 수도 있네.’
보통 일이 아니다. 전공의 때처럼 수술이라고 무작정 만세를 부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무심코 시계를 보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이제야 회진 생각이 난 것이다.
교수들이 올라간 지 꽤 됐다.
늦었다. 달려야 한다.
허겁지겁 병동으로 올라가자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슬쩍 말렸다. 송재덕 교수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김지훈 선생,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살살 다녀, 살살. 누가 보면 1년찬 줄 알겠다. 어이구! 저놈들은 뭐가 또 그렇게 급할까? 우리가 일찍 올라오면 애들만 고생이야.”
잠깐 환자를 보고 있던 이혁원과 송진우가 발소리를 죽여 가며 달려왔다. 펠로우 1명과 전공의 2명의 가쁜 숨소리가 스테이션을 울렸다.
그렇게 월요일 오전의 바쁜 일과가 시작됐다.
틈이 날 때마다 컨설트가 있는지 확인했다.
기대 반, 초조함 반이다.
수술과 환자가 갖는 또 다른 의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펠로우도 교수다. 더구나 조교수 대우를 받는 이상 제 몫을 해야 하는데, 응급 수술을 빼고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이렇다 할 수술 실적이 없으니 입원 환자도 당연히 적다. 즉, 돈을 못 벌어 준다는 말이다. 이제 한 달 지났으니 때 이른 생각일 수도 있지만, 느긋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김지훈에게는 은근한 부담이었다.
일단 수술을 어느 정도 해야 환자나 동료 교수들에게 확고한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래야 환자가 늘고, 이는 곧 수술 케이스가 많아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컨설트는 이런 선순환을 가져올 아주 좋은 기회였다.
‘좋았어. 일찍 기회를 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자.’
세상은 참 마음처럼 굴러가지 않는다.
월요일은 여느 때처럼 빈손이었다.
화요일은 스승에게 컨설트가 나는 날이다.
수요일에는 애만 태웠다.
남아도는 시간이 있으면 잡생각이 많이 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안호석, 박순용, 서도진, 이혁원, 송진우와 함께 자체 컨퍼런스를 연 덕에 초조함을 잊었다.
금요일에 중요한 수술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간만에 후배들과 함께해서 그런지 상당히 재밌고, 흥미로웠다.
토론을 하는 동안 다급했던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선생님, 앞으로 계속 자체 컨퍼런스를 하실 겁니까?”
“왜? 힘들어?”
“아니요.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도움이 많이 돼서요.”
“다행이네. 이제 나도 여유가 좀 생겨서 가급적이면 앞으로도 계속할 생각이야. 이준영 선생님 수술은 중요 수술만 하겠지만, 내 수술은 간단한 것도 다 할지 몰라. 그래도 되겠어?”
서도진은 반색을 했고, 이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송진우는 눈가에 힘을 주며 바짝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잠잘 틈도 없는 1년차에게 이론은 쏟아지는 졸음을 이겨 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죽기 싫으면 참아야 한다.
선배들도 이미 다 거친 과정이었다.
목요일은 당직이라는 사실만 톡톡히 깨달았다.
대신 송진우의 얼굴에 빨간 웃음꽃이 만발했다. 김지훈이 토해 내는 시뻘건 불길도 웃음꽃을 태우진 못했다. 퍼스트를 두 번이나 선 데다 결정적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도진아, 다음 주에 메스 줘도 될 것 같으니까 확실하게 준비시켜. 이혁원, 네 역할이 제일 중요해. 알지?”
김지훈의 목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적은 없었다.
이혁원도 좋아 죽었다.
빤뻬리 수술에서 퍼스트를 선 것이다.
물론 허옇게 얼굴이 뜨긴 했다.
빨갛고 하얀 얼굴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날이었다.
금요일이 빨리도 다가왔다.
간만에 초진 환자 한 명이 외래 진료를 예약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스승의 수술 스케줄은 부러울 정도였다. 메이저 중의 메이저인 간암 수술에 라파로가 두 개 더 있었다. 빈틈없이 진행해도 저녁까지 꼬박 수술실에 있어야 할 판이었다.
첫 수술이 시작됐다.
이준영 교수가 개복을 하기 전 힐끗 고경아를 보았다.
“고 간호사, 오늘 고생 좀 하자.”
“저보다 선생님이 힘드셔서 어떻게 해요?”
“힘들긴, 차차 나아지겠지. 김지훈, 시작하자.”
간암 수술은 자주 보지 못한다. 그 덕에 김지훈이 퍼스트를 섰고, 열의에 넘치는 서도진이 써드를 자청했다. 펠로우가 없었으면 퍼스트를 섰을 텐데,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했다.
치프의 열정이 파트 전체로 흘러넘친 모양이었다. 이혁원이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송진우는 너무 각오를 다졌는지 수술이 시작되기도 전에 얼굴이 벌겠다.
수술실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여섯 쌍의 눈동자가 오직 수술 부위에만 집중됐다.
“석션, 타이, 보비.”
이준영 교수의 나직한 목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간을 절제하는 과정은 단순하면서도 위험하고 힘들다. 한 번에 새끼손톱만큼 간을 자르고 타이를 한 후, 출혈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가느다란 담도도 놓쳐서는 안 된다.
더구나 우측 간에 발생한 암이라, 자르는 데만 최소 4시간 이상이 걸리는 환자였다. 자칫 집도의와 퍼스트 이외에는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딱 한 놈의 눈만 빼고는 모두 초롱초롱했다.
‘송진우, 너 죽고 싶어? 눈 떠. 수술에 집중해.’
이혁원이 아니었으면 한마디 들었을 것이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의 호흡은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과감하고 자연스러운 손이 어울리며, 순차적으로 간을 절제해 나갔다.
예정 시간보다 30분 정도 빠르게 간이 절제됐다. 이미 1시가 훌쩍 넘었지만, 수술 팀의 피로를 크게 줄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빠진 부분 없지?”
“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이 점점 편해지네. 컨퍼런스도 알아서 하니까, 이제 웬만한 수술은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어.’
“좋아. 마무리해.”
“수고하셨습니다.”
집도의 자리에 선 김지훈이 송진우를 보았다. 서도진 때문인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년차에 따른 트레이닝은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
“자리에 안 서고 뭐해?”
드레인을 박고, 수술 부위를 다시 확인한 후 배를 닫았다. 아뻬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절개 부위가 훨씬 크다. 그 차이만큼 송진우는 더욱 새카맣게 탔고, 얼굴은 활화산처럼 시뻘게졌다.
“혁원아, 한 달이나 됐는데 1년차 타이하고 수처가 이게 뭐야? 송진우, 너 입국식 전에 수술 받고 싶으면 밤을 새서라도 열심히 연습해.”
지겹도록 강조하는 기본이었다.
이미 난로가 된 송진우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빤히 다음 주에 수술을 준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김지훈의 말이 무섭기만 한 모양이었다.
“도진아, 나 오후에 외래 환자가 있어서 나갔다 올 테니까 수술 준비 좀 하고 있어.”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전공의들의 목소리가 힘찼다.
김지훈이 수술실을 나가자 서도진이 뻐근한 목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컨퍼런스 덕분인가? 써드를 서도 재밌네. 이렇게만 수술하면 아무리 힘든 수술도 피곤할 일이 없겠어. 혁원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 확실하게 배우자.”
치프가 그럴진대, 2년차는 말할 것도 없다.
이혁원이 눈빛을 굳혔다.
***
신환은 가물에 콩 나듯 왔지만, 외래 진료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환자들 상당수가 퇴원한 이후에도 외래 진료를 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신환은 긴장을 불러왔다.
45세 여자 환자, 백선희.
‘어떤 환자일까?’
예약 시간에 딱 맞춰 환자가 들어왔다. 차분한 마음으로 환자를 기다리고 있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환자 뒤로 아주 익숙한 얼굴이 보인 것이다.
“진상미 씨, 웬일이세요?”
“잘 지내셨어요? 교수님 되신 거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환자분과 아시는 사이인가요?”
“네. 제가 믿고 의지하는 언닌데, 선생님께 진료를 받았으면 해서요. 마침 오늘 이혁민 교수님께 저도 진료를 받아서 겸사겸사 같이 들어왔어요. 괜찮으시죠?”
“환자분만 괜찮으시다면 상관없습니다.”
환자는 물론 진상미의 얼굴이 몹시 어두웠다. 안 좋은 일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병원에 오면서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별일 없겠지.’
“환자분,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겉보기에 안색이 나쁘지는 않았다. 심각한 질환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백선희가 눈물부터 보였다. 진상미도 눈가를 붉히며 환자의 손을 꼭 잡았다.
조금은 어색한 상황이었다.
눈물은 환자가 충격을 받을 정도의 질환으로 내원했다는 의미였다. 이럴 때는 기다려 주는 것이 환자를 편하게 해 주는 길이었다. 어차피 다음 환자도 없어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조용히 눈길만 주었다.
한참 후에야 백선희가 개인 병원에서 발부한 소견서와 검사 결과를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견이 적혀 있었다.
김지훈이 순간 훅! 숨을 내뱉었다.
R/O Gall Bladder cancer.
(담낭암 의증)
어떤 암이든 초기에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행이 되면 될수록 예후가 나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담낭암은 췌장암처럼 조기에 발견해도 예후가 그리 좋은 암이 아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동봉한 복부 CT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개인 병원의 장비는 대학 병원보다 낮은 해상도와 정확도를 보일 수밖에 없어 다소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후우! 담낭 내 종양이 2센티미터가 넘고, 내부가 지저분한 게 암이 맞는 것 같네. 이것만으로도 2기로 봐야 하는데, 예후가 어떻게 되더라?’
김지훈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백선희와 진상미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좋은 소리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었다. 오진이라는 말을 듣고 싶을 것이다.
“선생님, 정말 암인가요?”
두 손을 꼭 모은 백선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견서가 있긴 하지만, 환자가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 문제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죠. 혹시 개인 병원 선생님께 설명은 들으셨나요?”
“네, 들었어요.”
“뭐라고 하시던가요?”
백선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진상미가 벌게진 눈가를 비비며 대신했다.
“암일 가능성이 높고,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암이 다 제거되지 않으면 항암 치료는 효과가 없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정말인가요?”
무슨 이유인지 환자보다 더 절박하게 보일 정도였다.
당장 확실한 답을 주고 싶지만, 보다 정확한 검사가 필요했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릴 것이다. 환자에게는 그 시간이 지옥 같을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환자분, 죄송하지만 검사를 다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복부 CT에서 병변과 주변 조직이 명확하게 보이질 않고, 추가로 해야 될 검사도 있습니다.”
이제야 백선희가 입을 열었다.
“무슨 검사를 해야 하죠?”
“CT 다시 찍고, 복부 초음파 및 정밀 혈액검사를 해야 합니다. 오늘 예약하시고, 결과가 나오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간호사, 방사선과에 연락해서 언제쯤 CT가 가능한지 물어봐 줄래요? 혈액검사는 오늘 시행하고요.”
잠시 후, 2주 후에나 CT 촬영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모든 과에서 검사를 내보내는 탓이지만 답답한 일이었다. 급하지 않은 환자는 단 한 명도 없기에 억지로 끼워 넣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초음파는 언제 된대요?”
“오늘 예약하면 다음 주 수요일에는 할 수 있대요.”
백선희와 진상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단 며칠이라도 당길 수 있다면 그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피 검사는 지금이라도 가능하니까, CT가 문제네. 무리하지 않고 빨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김지훈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