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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591화 (591/1,329)

제2화. 장인어른! Ⅰ (2)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던 손일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거울로 보이는 고성문의 단호한 표정은 어떤 말도 용납하지 않았다. 찍 소리조차 낼 상황이 아니었다.

“예,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서열이 제대로 서야 집안이 화목한 법이다.

졸지에 집도를 하고, 형님까지 됐다. 술자리 대신 병원을 택한 보람이 넘치고도 남았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에서 형님으로? 으하하하!’

잠시 후, 병원에 도착했다. 김지훈이 응급실로 향하다 말고 손일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마치 윗사람처럼 여유롭게 웃으며 말이다.

“일석아, 잘하자. 응? 왜 대답이 없어?”

한숨 소리가 픽 새어 나왔다. 고성문도 무슨 답이 나올지 궁금한지 발걸음이 느려졌다.

고개를 저으며 가슴팍을 치는 손일석의 눈에서 서서히 체념의 기운이 감돌았다.

“예, 형님.”

누군가가 좋아 죽고, 누군가는 무시무시한 눈빛을 등 뒤에 꽂았다. 아무런 타격도 없다. 도리어 힘이 철철 남아도는 모습에 한숨만 깊어졌다.

***

응급실이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개인 병원치고는 환자들이 많은 편이었다. 고성문이 차트부터 살폈다. 그때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이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고 원장, 주말인데 미안해. 우리 딸이 그제부터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맹장 같아. 잘 좀 봐줘.”

“알았어. 걱정하지 마. 자네들, 이리 와 봐. 박삼병 원장이라고, 근처에서 개업하고 있는 내 친구야. 인사드려.”

과는 달라도 대선배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래. 반가워. 고 원장, 누가 둘째 사위야?”

“여기가 우리 둘째야. 이번에 대학 병원 교수로 남았어. 간담도 전공을 해. 그리고 우리 막내 사위는 군대 갔는데, 제대하고 나면 혈관 전공을 할 거야.”

고성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훤칠하니 다들 듬직하네. 자네는 무슨 운으로 사위들을 이렇게 잘 얻는 거야? 검사에, 의사에 자랑할 만해. 그래도 너무 자랑하지 마. 듣는 사람 복장 터져.”

고성문이 김지훈을 보며 곧바로 정색을 했다.

“이 사람아, 내가 언제 자랑을 했다고 그래?”

“뭘 안 해? 저번에 경아하고 둘째 사위 자랑을 하도 해 대서 귀에 인이 박힐 지경이야. 그러다 팔불출이란 소리 들어, 이 사람아. 아! 그리고 김 교수, 자네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해. 그때 일이 있어서 그렇게 됐네.”

“일은 무슨? 골프 치러 갔잖아.”

평소 무뚝뚝하게 대했던 사위였다. 고성문이 힐끗 김지훈을 보며 핀잔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박삼병의 말에 이미 입이 쭉 찢어진 후였다.

한편으로는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발개졌던 김지훈이 슬쩍 끼어들었다.

“아버님, 환자 보셔야죠.”

“응? 그렇지. 김 서방, 같이 보러 가자. 박 원장, 우리 둘째 사위 덕에 재수 좋은 줄 알아. 딸내미가 제법 우량안데, 개복하면 흉 크게 지는 거 알지?”

“라파론지 뭔지 그걸로 하려고?”

“우리 둘째 사위가 그쪽도 전문이야. 셋째 사위까지 있는데 라파로가 뭐 대수겠어?”

우량아? 나이도 지긋하신 양반이 늦둥이를?

아니다. 어려서부터 봐 그렇게 부르는 모양이었다.

20대 중반은 됐고, 말 그대로 살집이 상당하다. 복강경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환자였다.

번갈아 진찰을 했다.

아뻬가 확실했다.

“큰아빠, 저 꼭 수술해야 돼요?”

우량한 숙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럼 수술해야지. 왜, 무서워? 한잠 푹 자고 나면 끝나 있을 거야. 흉도 거의 안 보이게 수술할 거니까 큰아빠만 믿어.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떻게 해? 체격이 아깝다.”

아무리 친구 딸이라지만 여자에게 체격을 운운하다니 눈총을 받을 말이었다. 그런데 고성문과 우량한 숙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성격이 좋은 덕도 있겠지만 정말 허물없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즉시 수술 준비가 진행됐다.

태연한 것처럼 보였던 박삼병이 안절부절못했다. 특히 복강경으로 한다는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 같았다. 어쩌면 평생 신뢰해 온 고성문 대신 새파랗게 어린 의사가 수술을 한다는 사실 때문일지도 몰랐다.

“김 교수, 라파로로 해도 괜찮은 거지? 우리야 개복하는 것만 알아서 그런지 왠지 불안하네.”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개복하고 크게 다를 바도 없고, 도리어 퇴원은 훨씬 빨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걸려?”

“준비하는 시간 때문에 개복보다는 오래 걸립니다만, 실제 수술하는 시간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짧습니다. 합병증이 발생할 확률도 굉장히 적고요.”

고성문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일석은 한숨을 쉬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나 다 가야 하는 군대지만, 가고 싶어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공연히 미안해진 김지훈이 나직하게 말했다.

“일석아, 너무 심란해하지 마. 통합 병원에서 근무하면 손 썩을 일도 없지 않아?”

“지훈아, 그러려면 첫 일 년은 전방 근처까지 가서 근무해야 하고, 빽도 상당히 좋아야 돼. 우리 집 분위기 알잖아? 쉬운 일이 아니다.”

그새 누가 형님인지는 둘 다 잊었다.

10년 세월의 힘일 것이다.

“하오문주가 그 정도도 못해?”

“그렇긴 하지. 사실 군대도 사회하고 똑같아서 경례 잘하고, 손바닥 잘 비비면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 같더라. 선배들 얘기 들으니까, 근무 깔끔하게 해서 점수 좀 잘 받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래.”

“그럼 얘기 끝난 거네. 천하의 손일석이 정보까지 싹 꿰뚫었는데, 통합 병원에서 근무를 못하면 누가 해? 안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제길! 훈련도 안 끝났는데 내년을 걱정하고 있네. 지훈아, 준비 다 된 모양이다.”

간호사의 노티를 받은 고성문은 이미 응급실을 나서고 있었다.

부랴부랴 뒤따라 수술 방으로 향했다. 수술 방의 차가운 기운이 정신을 번쩍 깨웠다.

장인과 함께하는 수술이다. 게다가 복강경이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수술실이다.

새로 장만한 라파로 기계와 기구가 반짝반짝 빛났다.

박삼병이 덧 가운을 입고 한쪽에 서서 수술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 탓인지 간호사는 손일석에게 설명을 들으면서도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의외의 얼굴이 보였다.

“경아야. 너 웬일이야? 왜 왔어?”

“라파로로 아뻬 하신다면서요? 제 전문이잖아요.”

언제 연락을 했을까?

고경아가 힐끗 김지훈을 보며 간호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데 안면이 있는지 도리어 반가워하는 얼굴이었다.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든든하다.’

마취가 끝나고 수술 준비를 마친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기본적인 압박감에 보는 눈도 많았지만 고성문이야마로 결정적인 부담이었다.

“김 서방, 혼자 하지 말고 과정을 설명해 가면서 해야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아직은 한참을 배워야 할 입장이다. 후배를 가르치는 일도 어려운데 대선배, 그것도 장인어른에게 수술하면서 강의까지 해야 한다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 마음을 모를 고성문이 아니었다.

“부담 가질 것 없어. 상대가 선배든, 후배든 간에 배울 게 있으면 평생 배워야 하는 게 사람이야. 수술하면서 무슨 의도인지, 어떻게 하는지 말만 하면 돼. 시작하자. 박 원장, 시작할게.”

김지훈이 손일석과 눈을 마주쳤다.

평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이자 친구가 눈앞에 있다. 손일석 강한 신뢰를 보냈다. 고경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소 불안했던 마음이 서서히 사라지며 자신감이 솟구쳤다.

‘아무리 어려운 케이스라고 해도 일석이가 도와준다면 충분히 할 수 있어.’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시작하셔도 됩니다.”

“메스!”

메스를 받아 든 김지훈이 환자의 복부 세 곳을 가리켰다. 이미 모든 과정을 꿰뚫고 있겠지만, 처음이기에 세세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아버님, 이미 아시겠지만 이렇게 세 곳을 절개하시고, 첫 번째 10밀리미터 트로카를 이곳에 넣으시면 됩니다.”

주의 깊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고성문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김지훈이 움찔거렸다.

‘쓸데없는 부분까지 말씀드렸나?’

“김 서방, 난 지금 장인이 아니라 자네에게 수술을 배우는 의사야. 평소 후배들을 가르칠 때처럼 하면 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험을 가진 일반 외과 의사의 말이었다. 그것도 자식까지 있는 자리였다. 장인어른의 겸허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김지훈은 입술을 모았고, 손일석은 다소 놀란 눈치였다.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할 때였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수술이 시작됐다.

어떤 복강경 수술이든 처음은 다 똑같다.

“압력은 자동 조절이 되지만, 항상 기계에 표시된 수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적당히 잘 주입된 것을 확인하고, 트로카를 순차적으로 넣으시면 됩니다.”

필요한 기구가 모두 삽입됐다.

환자의 자세를 잡고 배 속을 확인했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설명을 듣는 고성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마치 전공의를 보는 것 같았다.

김지훈이 더욱 신중해졌다.

“아뻬가 보이시죠? 절제 과정은 개복과 다름이 없습니다. 켈리로 아뻬와 장간막 사이에 구멍을 내고 살살 벌려 줍니다. 이 환자처럼 내장 비만이 심한 경우 출혈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켈리 대신 보비(전기 소작기)를 이용해 장간막의 구멍을 넓히고, 동맥을 잡겠습니다.”

치이익! 치이익!

대부분 지방으로 이루어진 장간막이 두툼할수록 조직을 박리하기가 쉽지 않다. 개복 시에도 출혈 등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런데 김지훈의 손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과감했다. 슥슥 몇 번의 손놀림으로 동맥을 확보했다. 고경아의 도움을 받은 간호사의 어시스트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통상은 여기서 동맥을 잡고 잘라야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김지훈은 계속 수술을 진행했다. 동맥을 보다 확실하게 확보하고, 아뻬까지 깔끔하게 노출시켰다.

라파로 수술 기구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개복할 때와 거의 다름이 없었다. 예상 밖의 손놀림에 고성문은 물론 손일석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야! 내 사위지만 정말 잘하네. 무뚝뚝한 이 교수가 칭찬할 만해. 어쩐지, 신 교수 목소리도 좀 묘하다 했어.’

‘후우!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아니지. 이제 한 달 됐잖아. 지금도 시간 나면 수술 기구를 만지작거리는 모양이네. 자식! 이젠 정말 내 앞에 있구나. 에휴! 3년이면 강산이 변할 지도 모르겠네.’

그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니터에만 집중하던 김지훈이 잠시 손을 멈췄다.

‘언제 복강경 수술을 또 할지 모르는데, 여기부터는 직접 해 보시는 것이 좋겠지? 재야의 고수라고 불리는 분이시니까, 처음이라고 해도 수월하게 하실 거야.’

“이제 클립으로 동맥과 아뻬를 잡고 자르면 됩니다. 기구로 전해지는 감각도 익히실 겸 아버님이 직접 잡으시죠.”

“내가?”

왠지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단호하게 말할 순간이다.

“예. 반드시 해 보셔야 합니다.”

집도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김지훈을 본 고성문이 헛기침을 했다. 제아무리 수술 경험이 많다고 해도 약간은 긴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외과 의사다.

고성문이 침착하게 수술 기구를 조작했다.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라파로 기구는 생각 외로 다루기가 까다롭다.

노련한 외과 의사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 반드시 피해야 할 동작까지 나왔다.

김지훈이 재빨리 소리쳤다.

아니, 목소리를 높인 건가?

“아버님. 그렇게 조작하시면 장간막 찢어집니다. 손을 약간만 움직여도 기구 끝은 크게 움직인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가는 동맥이라도 끊어지면 개복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알았어. 조심할게.”

“켈리로 동맥이 포함된 조직을 밀어서 클립이 들어갈 자리를 확보하세요. 아니아니 살살 끼워 넣으시라니까요. 예, 좋습니다. 이제 꽉 조이세요.”

끼이익! 끼이익!

“간호사, 가위 드리세요.”

싹둑!

동맥이 잘렸다.

다음은 아뻬를 자를 차례다.

김지훈의 목소리가 또 높아졌다.

그때마다 손일석도 불안감에 움찔거렸다.

“아버님, 잘린 동맥부터 확인하셔야죠. 원칙입니다.”

“그래그래. 라파로는 처음이라 자꾸만 깜빡하네.”

고성문의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것 같았다.

동맥이 클립 속에 제대로 잡혀 있는지 열심히 확인한 후, 아뻬를 묶고 잘랐다. 고경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배 속을 확인했다. 자신의 다소 거칠고 서투른 손에 확신할 수 없는지 고성문이 슬그머니 김지훈을 보았다.

“김 교수, 이젠 된 건가?”

김 서방이 아니라 교수다.

“제가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기구를 조작하며 장기들을 빠르게 확인했다. 당연히 복강경 수술에 한정되겠지만, 한눈에도 실력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경험의 차이이자 무서움이었다.

고성문은 눈가를 찡그린 채 고개를 끄덕였고, 손일석은 이제야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이제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배 속에 찬 공기를 빼고 피부 봉합을 했다.

역시 재야의 고수였다.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의사였지만, 수처하는 동작만 봐도 수술 기구가 얼마나 손에 익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무사히 수술이 끝났다.

고성문이 땀에 젖은 모자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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