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장인어른! Ⅰ (1)
김지훈이 최대한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님, 요새 수술은 많이 하세요?”
“만날 똑같아. 자네는 수술 좀 하나?”
“이제 한 달 됐습니다. 솔직히 펠로우 생활이 전공의 때하고 크게 다르진 않네요.”
“열심히 해.”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 같은데, 힐끗 서정호를 보고는 헛기침만 했다. 데면데면할 지경이었다.
큰 사위도, 둘째 사위도 아니라면 말문을 활짝 열어 줄 사람은 그나마 아들이다.
‘경철이에게 신경이 많이 쓰이시겠지?’
“처남, 본과 1학년 되니까 어때? 수업 시간이 확 늘어서 힘들 거야.”
“예. 강의가 늦게 끝나서 술 먹을 시간도 없어요.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도 봐야 하는데 걱정이에요. 매형, 좋은 방법 없나요?”
이제야 고개를 돌리며 관심을 보였다.
눈가에 확 주름이 잡혔다.
“술은 무슨! 이놈아! 공부에 쉬운 방법이 어디 있어? 피땀 흘려서 등록금 내주는데, 농땡이 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 서 서방, 김 서방, 내 말이 틀려?”
“그럼요. 당연한 말씀이죠. 의대도 공부할 양이 많기로 유명한 과 아닙니까. 처남, 공부에 지름길은 없다. 아버님 말씀대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어.”
“명심해. 사시를 패스한 사람이 하는 말이야.”
애먼 타박을 받았다는 듯 고경철이 한숨을 쉬며 입을 꾹 다물었다.
공연히 미안해진 김지훈이 옆구리를 툭 치며 속삭였다.
의대생의 영원한 친구.
YAMA(You Are My Assistant)!
“야마가 있잖아. 그것만 확실하게 봐도 재시는 면해. 걱정하지 마.”
“매형, 야마 분량이 장난 아니잖아요.”
“처남, 엑기스만 모아 놓은 건데 양이 많다고 하면 어떻게 해. 다운당하고 싶어? 혹시 너 공부 안 하는 거 아니야?”
“매형, 나 공부 열심히 해요. 왜 이러세요?”
둘이서 소곤대는 모습이 못마땅한지 고성문의 눈가가 쭉 찢어졌다.
“둘이 뭐해? 나 몰래 작당이라도 하는 거야?”
“아버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에이! 쯧쯧! 그나저나 손 서방은 왜 안 오는 거야?”
장인어른까지 손 서방?
정말 비교도 할 수 없는 대우였다.
도대체 손일석이 그동안 어떤 수작을 부린 걸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초인종이 울렸다.
손일석이다.
훈련병들처럼 빡빡 머리가 아니었다. 군의관 후보답게 장교 스타일의 머리에 양복을 쫙 빼입고 왔다. 왠지 봄바람에 그을린 얼굴과 잘 어울렸다.
가족들의 환대와 김지훈의 손짓에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바로 고성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님, 어머님, 육군 대위 후보생 손일석입니다. 절 받으십시오.”
“절은 무슨.”
“모처럼 인사드리러 왔는데 절 받으셔야죠. 앉으시죠.”
넙죽 큰절을 하자 고성문은 물론 최문옥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걸렸다. 게다가 예쁘게 포장된 상자 두 개를 스윽 내밀었다.
“이건 뭐야?”
“아버님, 어머님, 항상 건강하시라고 홍삼 하나 갖고 왔습니다. 변변치 않아 죄송합니다.”
“아이고! 뭘 이런 걸 갖고 왔어? 잘 먹을게. 고마워. 훈련받느라 고생이 많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최문옥 여사의 사위 사랑을 감안할 때 당연한 반응이었다.
“훈련이 조금 세기는 하지만, 삼시 세끼 꼬박꼬박 먹으니까 도리어 살이 붙습니다. 어머님,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런데 홍삼을 괜히 사 온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얼굴이 너무 좋으십니다. 밖에 나가시면 40대로 오해받으시겠습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십니까?”
고성문이 크게 웃었다.
“사람이 아부도 적당히 해야지. 비결이 뭐가 있어? 그냥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틈틈이 운동하는 게 다야. 자네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 경북 영천에서 훈련받지? 그 동네가 칼바람으로 유명한데, 춥진 않아?”
“젊은 놈이 그 정도도 못 이기면 되겠습니까? 전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님 건강에만 신경 쓰십시오.”
아! 역시 손일석이다.
손일석의 말발은 군대 가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얼추 ‘다나까’로 끝나는 말투가 왠지 신뢰감까지 주고 있었다.
그런데 군의관 훈련받는 놈이 말투까지 달라지다니, 꽤 희한한 일이긴 했다.
‘선배들 얘기 들어 보면 저 정도는 아니던데.’
어쨌든 고성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인이 이토록 다정다감하게 말할 줄은 몰랐다.
순간 옛 생각이 난 김지훈과 서정호가 서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부산하게 저녁 식사가 준비됐다.
“어때? 입맛에 맞아?”
최문옥 여사가 아니라 고성문의 목소리였다.
“아버님, 어머님 음식 솜씨야 세상이 다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야! 잡채도 예술입니다. 경희야, 미안한데 밥 한 그릇 더 줄 수 있을까?”
“그럼요, 오빠. 많이 드세요.”
고경희의 목소리가 쟁반 위를 굴렀다.
손일석의 먹성도 엄청 좋아졌다. 최문옥 여사의 음식 솜씨도 솜씨지만, 간만에 먹는 사제 밥은 가히 꿀맛일 것이다.
식구들 중 단연코 압도적인 배를 자랑했던 김지훈도 한 수 물러야 했다.
“제부, 군의관 훈련도 힘들어요?”
“처형, 우리도 똑같이 훈련합니다.”
“그럼 자네도 TV에서 보는 것처럼 산도 타고 다 하나? 힘들지 않아?”
“어머님, 영천 뒤에 화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굉장히 춥고 험한데, 거기서 2박 3일 동안 유격 훈련까지 했습니다. 그땐 정말 집 생각이 절로 났습니다.”
손일석이 슬쩍 고경희에게 눈길을 주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어쨌든 눈길 집중, 화제 집중이다.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된 김지훈과 서정호가 조용히 밥그릇을 비웠다.
식사를 마친 후, 가볍게 차 한잔하고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손일석의 화려한 언변이 여인들의 수다와 완벽하게 어울렸다. 고경아까지도 대화에 푹 빠져 있었다.
구석으로 밀린 사위와 아들은 좀처럼 끼어들 틈이 없었다. 고성문도 소파에 앉아 턱만 문지르고 있었다.
그때 서정호가 김지훈을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아! 김 서방, 얼마 전에 칼에 찔린 놈 하나 수술했지? 전적이 아주 지저분하던데, 고생 안 했어?”
“형님이 그 환자를 어떻게 아세요?”
“조서에 자네 병원하고 이름이 적혀 있어서 알았지. 그 자식 사건 내가 맡았어. 조금 오래 살 거야.”
“그래요? 입에 욕을 달고 살아서 치료하는 내내 기분이 안 좋더라고요. 회복은 잘된 모양이네요.”
“응. 담당 의사가 수술 아주 잘하는 의사가 한 것 같다고 해서 자네 얘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 간 수술이 그렇게 어려운 건가?”
“와! 매형, 전공의 때하고 비슷하다고 하시더니, 간 수술까지 하신 거예요?”
갑자기 남자들의 대화에 물꼬가 트였다. 김지훈이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설명한 덕인지, 아니면 의사의 관심인지 고성문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운이 좋았네. 그럼 자네 라파로도 좀 했나?”
“아직 실력이 모자라서 거의 못했습니다.”
“열심히 좀 해. 남들이 많이 안 할 때 시작하면 그만큼 대우도 받는 거야. 담당 절제술이야 이 교수가 있으니까 당연히 여러 번 했을 테고, 다른 수술은 뭐 해 봤어?”
당연히 여러 번 하지 못했다.
곧이곧대로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
“탈장도 해 보긴 했습니다.”
“그래? 그거 어렵나?”
고성문이 눈가에 주름까지 만들며 김지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어느 틈엔가 여자들과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손일석도 옆에 앉아 있었다. 말을 꺼낸 서정호는 또 뒤로 밀렸다. 이제 해부학을 배운 고경철도 눈만 껌벅거렸다.
“김 서방, 수술 테이프만 보고 라파로를 할 수 있을까? 아니지. 그래도 일정 기간 수술을 보긴 해야겠지?”
“아무래도 그게 좋지 않을까요? 참! 일석아, 내가 신기동 선생님 파트까지 맡았다. 힘들어 죽겠다.”
손일석이 입술을 모았다.
“펠로우가 돼도 여전하시구나. 훈련 마치면 인사부터 드려야겠다. 잘 지내시지?”
“어디 가시겠어?”
점점 대화의 폭이 줄어들었다.
결국 한 소리 들었다.
“아빠! 큰 사위도 있는데 병원 얘기만 할 거예요? 우리 남편이 뭐 하고 사는지는 알아요?”
“허험! 내가 왜 몰라?”
딴청을 부리는 고성문을 보던 김지훈이 얼굴을 붉혔다.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다. 손일석은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가급적 함께할 수 있는 거리를 찾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길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젊은 사람들이 즐겁게 어울릴 자리는 먼 데 있지 않았다.
‘장인어른은 장모님이 맡으시겠지.’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손일석도 김지훈 못지않은 주당이다. 훈련을 받는 동안 술은 입에도 못 댔을 텐데, 지금쯤 술 생각이 간절할 것이다. 손짓 한 번이면 충분했다.
손가락을 튕기며 술잔 꺾는 시늉을 하자 단박에 반응이 왔다. 꿀꺽 침을 삼킨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성문을 보았다.
“아버님, 제가 훈련 때문에 알코올 냄새도 못 맡았습니다. 맥주 한잔하고 싶습니다.”
이리저리 돌려 말할 줄 알았는데, 무슨 깡인지 그냥 대놓고 말했다. 더구나 술자리를 그리 즐기지 않는 장인어른이다. 그런데 단번에 통했다.
“그래? 그래야지. 나랑 엄마는 집에 있을 테니까 자네들끼리 나갔다 와. 술값은 있어?”
“예,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오늘은 자네들끼리 즐겁게 마셔.”
정말 의아하다.
최문옥 여사는 몰라도 장인어른의 이런 태도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우르르 몰려 나가는 와중에 슬며시 물었다.
“일석아, 너 아버님한테 뭘 어떻게 한 거야?”
“뭐가?”
“원래 저런 분이 아니거든.”
손일석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지훈아, 넌 그래서 나한테 평생 배워야 돼. 한 번 하오문주는 영원한 하오문주다. 그리고 사람 따라 능력이 다 다른 거 아니겠어? 군대 갔다고 해서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김지훈이 알고 있던 손일석으로 돌아왔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똑바로 말해. 너 아직 도장 찍은 거 아니다.”
“어허! 왜 이러시나, 김지훈 선생님. 나도 장가 좀 갑시다. 사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안부 전화 드리고, 전에 외박 나왔을 때 경희랑 둘이 인사하러 왔었어. 점수 좀 딴 거 같지? 그 덕에 부모님께도 전보다는 자주 연락하게 되더라.”
확실히 거저 얻는 것은 없다.
손일석의 말을 곱씹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한 통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뜸한 사위보다는 목소리라도 자주 들려주는 예비 사위가 훨씬 예쁠 것이다.
당연한 일인데 잊고 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에휴! 휴대폰까지 사 주셨는데 내가 잘못했네. 이럴 때 보면 일석이 이 자식도 참 마음 씀씀이가 깊단 말이야.’
앞으로는 명심하고 잘할 일이었다.
고경아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즐거운 시간에 얼굴을 구기고 있는 것은 확실한 민폐다.
밝게 웃으며 뒤를 따르던 김지훈이 흠칫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고성문이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고 있었다.
‘마음이 바뀌셨나? 그럼 장모님이 먼저 보여야 하는데.’
“아버님, 같이 가실 겁니까?”
“내가 자네들 노는 데 왜 가? 병원에 환자 있어.”
“예? 오늘 당직이세요? 일반 외과 과장님 안 계세요?”
“그게, 이상하게 자네만 오면 일이 생겨서 내가 당직을 서게 되네. 신경 쓰지 말고 가 봐.”
장인어른은 일하고, 사위는 술을?
선뜻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어떤 환자라고 합니까?”
“아뻬가 의심된다는데 아뻬겠지, 뭐. 금방 끝나는 수술인데, 그냥 술 마시러 가. 하필이면 왜 친구 딸이 이럴 때 올까? 마취과 선생은 언제 나오려나.”
헉! 친구 딸이라고?
왠지 눈빛까지 묘하다.
여기서 술 마시러 가면 두고두고 말을 들을 것 같았다.
시간도 꽤 늦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명색이 의사에 사위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휴! 이것도 일복인가? 일주일에 두세 번 전화하는 놈도 있는데, 최소한 퍼스트는 서는 게 도리지.’
“아버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형님하고 와이프한테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난 괜찮아.”
말과는 달리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명확한 의사 표현이었다.
후다닥 달려가 사정을 설명하자 다들 입맛은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손일석이 김지훈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고경희에게 눈짓을 했다.
“형님, 처형, 저도 같이 갔다 오겠습니다. 한동안 피를 못 봤더니 몸이 근질거리네요. 이참에 구경이라도 하려고요. 이따가 전화드릴게요.”
졸지에 사위와 예비 사위가 장인어른과 함께 병원을 향했다.
직접 운전을 하던 고성문이 힐끗 김지훈과 손일석을 보며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는 뜻밖의 말을 했다.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라파로로 아뻬를 하신다고?
아니 라파로로 아뻬를 하라고?
고성문이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왜, 라파로 아뻬는 못해 봤어? 기구 다 준비돼 있고, 외과 의사가 셋이나 있는데 뭐가 문제야? 자신이 없어서 그래?”
솔직히 개복이든, 복강경이든 자신할 수 있는 수술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무리 없이 척척 해내기에는 실력과 경험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그것 말고도 문제는 많았다.
“그런 면도 있습니다만, 수술만 하고 가는 것이 꺼림칙합니다. 그리고 간호사가 어시스트 설 수 있을 정도로 준비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일반 외과 의사야. 환자 치료는 걱정하지 마. 손 서방, 자네도 라파로 좀 들어갔었지?”
“예, 아버님.”
“그럼 자네가 간호사 가르치면 되겠네. 세컨 서면서 어떤 기구를 줘야 하는지만 알려 주면 되잖아?”
아뻬야 우연히 왔겠지만, 어째 이미 머릿속에 다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은 찜찜했지만 손일석은 도리어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되겠네요. 지훈이가 집도하고, 아버님이 퍼스트 서시고, 제가 보조를 하면 수술이 잘못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지훈아, 아뻬 라파로는 전공의 때 이미 해 봤잖아.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는 다 생각이 있으시지 않겠어?”
“응. 그렇긴 한데.”
김지훈이 말꼬리를 흐리자 고성문이 혀를 차며 바로 결정을 내렸다.
“군대 간 놈도 시원시원하게 말하는데, 교수라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잔말 말고 아뻬가 맞으면 라파로로 하자. 그리고 손 서방.”
놈과 사람이다.
공식 사위와 비공식 사위의 차이다.
“예, 아버님.”
“십년지기인 건 아는데, 김 서방은 손윗동서야. 결혼하기 전이라고 해도 앞으로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면 안 돼. 알았어? 왜 대답이 없어?”
귀가 번쩍 열릴 말이었다.
김지훈의 입이 쭉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