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89화 (589/1,329)

제1화. 교육의 또 다른 의미 Ⅱ (2)

평소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이혁원도 퍼스트를 누가 서는지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송진우는 차라리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선생님, 저런 환자는 수술하기 힘들죠?”

“누가? 김지훈 선생님이?”

“말이 헛나왔네요. 그게 아니라 퍼스트요.”

“쉽진 않지. 그리고 김지훈 선생님이 뚱뚱하다고 크게 열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아마 커 봐야 요만큼 여실 거다.”

대충 4센티미터 정도 돼 보였다.

이혁원의 손가락 사이를 눈어림한 송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정도면 밀려오는 지방 덩어리에 배 속을 보기도 힘들 것이다. 욕심은 나지만 현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 정도 열고 수술을 할 수가 있나요?”

“보면 알아. 그런 걸 쏙 빼먹어야 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송진우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수술 방으로 올리라는 연락이 왔다.

응급실을 나서던 이혁원이 눈가를 좁혔다.

김지훈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분명 다음번 아뻬에서 퍼스트를 세운다고 했다.

‘아무래도 느낌이 안 좋아. 사소한 일이라도 일단 한 말은 꼭 지키시는 분이잖아.’

“진우야, 빨리 올라가자. 뛰어.”

영문을 모른 채 뒤따라 올라간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어느 정도 포기하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대뜸 수술 과정을 확인한 것이다.

김지훈 앞에서 이미 네 번이나 반복한 일이었다. 어렵지 않게 풀어냈지만 이혁원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진우야,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만일 퍼스트를 주셨는데 제대로 못 서면 너하고 나 둘 다 죽는 거야. 아니, 넌 일단 내 손에 먼저 죽는다.”

환자가 올라올 때까지 다시라는 말이 계속됐다.

수술실이다.

토요일에 일과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마취과는 물론 어시스트를 들어온 고경아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로 도배가 될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원주까지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씨익 웃었다.

“준비는 빨리하고, 수술은 여유 있게?”

‘원주 안 가요? 늦으면 아빠한테 한 소리 들을 거예요.’

‘걱정 말아요. 늦어도 2시에는 출발합니다.’

‘준비는 안 해요?’

아차! 여자들의 준비 시간을 간과했다.

화장만 최소 한 시간이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손을 씻었다. 이혁원과 송진우도 덩달아 재빨리 움직였다.

마취와 수술 준비가 빠르게 끝났다. 집도의 자리에 선 김지훈이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고갯짓을 했다.

‘진우야, 지금까지 노력한 결과를 보여 봐.’

“송진우, 퍼스트 서.”

마취과와 고경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곗바늘은 이미 12시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더구나 환자까지 뚱뚱한데 1년차에게 첫 퍼스트를 주다니, 자칫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길 수 있었다.

말은 할 수 없고, 답답하기만 한 일이었다.

당황스럽기는 송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잠시 머뭇거리다 이혁원의 눈길을 받고서야 퍼스트 자리에 섰다.

분명 기대에 찬 표정이긴 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신감이 부족해 보였다. 퍼스트가 불안해하면 수술을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다.

집도의로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김지훈이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나만 믿으면 된다는 것 같았다.

“네가 가장 많이 본 아뻬야. 배운 대로만 해.”

송진우의 눈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빨리 끝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수술 시작합니다. 메스!”

이혁원이 말한 대로 김지훈은 불과 4센티미터 정도 열었다. 피부가 열리자마자 노란 지방 덩어리가 삐죽삐죽 삐져나왔다. 절개된 부분이 넓은 만큼 여기저기에서 피가 흘렀다.

송진우가 재빨리 피를 닦았다.

김지훈은 고개도 들지 않고 수술 부위만 보았다.

근육 층을 벌리고, 복막까지 열었다.

제법 잘 쫓아왔다.

“혁원아, 인턴 선생, 힘 좀 주자.”

끙 소리와 함께 복벽이 벌어졌다. 시야가 조금은 넓어졌다. 기다란 포셉으로 대장의 시작 부위인 맹장을 찾았다. 맹장의 후방에 아뻬가 있을 것이다.

슥슥 몇 번 손을 움직이자 빨갛게 익은 아뻬가 보였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대개는 아뻬를 배 속에 둔 채 수술을 했고, 대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 김지훈은 언제부턴가 아뻬를 배 밖으로 끄집어내 절제했다.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동맥과 아뻬를 확실하게 보고 수술할 수 있다.

뚱뚱한 환자의 경우에는 특히 유용해 수술을 훨씬 쉽게 진행할 수 있다.

단, 끄집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했다.

하지만 송진우를 퍼스트로 세운 이유도 이 방법의 이점을 믿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만큼 자신도 있었다.

이혁원의 눈이 반짝였다. 꼭 배워야 한다는 의지가 보였다.

당연히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혁원아, 아뻬를 끄집어내려고 하면 절대 안 나와. 전에도 말했지만, 맹장을 꺼낸다고 생각해야 돼. 이렇게 말이야.”

잘 익은 아뻬가 맹장과 함께 두꺼운 뱃살을 지나 툭 튀어나왔다.

이혁원이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나도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실전에서는 안 되지? 이렇게 하면 마른 환자나 다를 바가 없어서 수술하기 정말 편할 텐데.’

보기에는 정말 쉬워 보였지만, 직접 할 때는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경험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김지훈만의 방법이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완전히 노출된 아뻬를 절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송진우가 퍼스트를 서는 것도 그만큼 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동맥 잡자.”

켈리를 든 송진우의 손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처음에는 다들 그런다. 예외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김지훈이 자연스럽게 손을 유도했다.

“왜 이렇게 긴장해? 힘 빼. 내가 먼저 잡을 테니까, 넌 위쪽으로 잡아. 자주 봤잖아.”

따르륵! 따가각!

“잘했어. 자르고 묶자.”

엄하기만 했던 김지훈의 부드러운 말투에 송진우의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첫 번째 타이가 무사히 끝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덕인지 두 번째 타이는 조금 더 자신이 있어 보였다.

제법이다.

“아뻬 잡고 자르자.”

따르륵! 따가각!

위험할 것이 없는 장기이기에 송진우가 한결 편하게 기구를 조작했다. 타이도 동맥을 묶을 때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했다. 첫 퍼스트의 가장 힘든 부분을 마친 것이다.

김지훈의 눈빛이 묘했다.

‘처음엔 나도 이랬겠지? 지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그래도 동맥하고 아뻬 처리할 때는 조용히 지켜보는 게 최선이란 말이 맞네.’

“배 속 확인하고 닫자. 마취과, 10분 정도면 끝납니다.”

“예? 벌써요?”

마취 기록지를 작성하던 마취과 전공의가 화들짝 놀라면서도 좋아 죽었다. 1시를 넘길까 봐 애를 태웠는데, 무려 30분이나 일찍 끝나는 것이다.

작게 절개한 덕에 마무리도 빨리 끝났다.

이혁원이 묘한 콧소리를 내며 눈가를 찡그렸다.

수술 중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복벽을 최대한 강하게, 힘차게 끌어당긴다. 당연히 피부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봉합한 자리는 불과 5센티미터 정도였다.

자신이 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뻬에서조차 이렇게 큰 차이를 느끼다니, 김지훈이란 벽이 높게만 보였다.

반면 송진우는 흥분으로 숨까지 몰아쉬고 있었다. 1년차에게 딱 맞는 환자가 아님에도 별 탈 없이 해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찬 모양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목소리도 힘차기만 했다.

김지훈의 표정을 미처 보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10분 후, 세상이 바뀌었다.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던 김지훈이 활화산으로 변했다. 인정사정없는 뜨거운 불길이 사방으로 날아다녔다.

불과 5분 만에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시뻘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송진우가 한 줌 재가 되어 푸스스 날렸다.

“송진우, 퍼스트 이렇게 서면 수술 못 준다. 수처, 타이, 기구 조작 모두 연습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그게 말이 돼? 입국식 전에 반드시 수술을 주라는 법 없어. 그리고 이혁원, 너 1년차 교육은 시키고 있는 거야?”

옆에 서 있던 이혁원이 서늘한 눈빛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말이 없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고도 남았다. 만약 송진우가 입국식 전에 수술을 받지 못하면 함께 재로 변하는 것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혀 차는 소리만이 남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송진우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이혁원은 도리어 웃고 있었다.

“진우야, 수술실에서 본 모습이 진짜 김지훈 선생님의 마음이야. 널 그만큼 아끼고 기대한다는 거야. 기죽을 거 없어, 인마. 잘했어.”

“예?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정말 그 정도였으면 당장 타이용 실을 들고 오셨을 거다. 에휴! 생각해 보니까 니가 나보다 낫네.”

이혁원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피식피식 웃었다.

인턴과 1년차 시절, 직접 타이 시범을 보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던 김지훈이 생각난 것이다.

그땐 무섭기도 했고, 피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묘한 행복감이 몰려왔다.

현재도 진행 중인 추억일 것이다.

‘속은 안 그렇다는 걸 빤히 알고 있는데, 탈 때마다 왜 이렇게 다리가 떨리지? 아버지하고 신기동 선생님을 동시에 보는 것 같네.’

어쨌든 첫 퍼스트를 무난히 마쳤다.

이혁원! 송진우! 파이팅이다!

***

수술 방을 나온 김지훈이 시계를 보며 부리나케 병동으로 향했다.

정신을 차릴 놈은 송진우만이 아니었다. 2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1시가 다 되도록 회진도 못 돌았다.

일과를 마치자마자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달렸다. 집에 도착하니 다리가 다 풀릴 지경이었다.

화장을 하고 있는 고경아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옷 꺼내 놨으니까 빨리 갈아입어요. 창문들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요. 과일도 사 가야 되는데 이제 오면 어떻게 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누구에게 타든 탈 때는 입 꾹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하라는 일은 재빨리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 기회를 봐서 주의를 돌리는 것 또한 중요했다.

“처제, 준비 다 했어? 야! 이렇게 입으니까 정말 예쁘다. 오늘따라 얼굴도 활짝 폈네. 좋은 일 있어?”

“어머! 형부, 내가 한 말 잊었어요?”

“무슨 말?”

“오늘 일석이 오빠 외박 나오잖아요. 엄마, 아빠한테 인사도 드릴 겸 원주에서 같이 보기로 했는데, 기억 안 나요?”

언제 그런 말을 했을까?

“경희야, 내 말이 맞지? TV 볼 때는 눈을 보고 얘기해야 한다니까. 아니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든지. 재밌는 거 볼 때는 하나도 못 듣는다고 했잖아. 집중력은 무슨.”

“형부, 정말 제 말이 기억 안 나요?”

꿀 먹은 벙어리다.

“어쩜 10년도 넘는 친구에 처제하고 결혼할 사람인데, 무관심할 수가 있어요? 실망이에요. 서운해요.”

고경희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혹 떼려다 혹 붙였다.

재밌는 프로만 보면 웬만한 소리는 안 들리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고경아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김지훈은 굳건히 집중력이라고 믿었다.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집중력 맞는데.’

잠시 딴생각을 하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창문 단속했어요? 다 했으면 바로 출발하게 차에 시동 걸고 기다려요.”

고경아가 조금씩 변해 간다.

직장에 관한 일은 관대하기 짝이 없지만, 집안일은 여간 깐깐한 것이 아니었다.

편히 행복하게 살려면 반항은 금물이다. 아내의 변화에 맞춰 스스로도 변해야 한다.

물론 김지훈의 생각이 아니라, 애 셋 가진 이경석의 말이었다. 인생 선배의 말은 일단 따르는 것이 좋다.

부랴부랴 창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골목길을 달려 애마를 끌고 왔다.

가끔 이용한 탓에 차 안이 지저분했다.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조수석과 뒷자리를 깨끗이 닦았다.

“나 앉을 자리라고 청소했어요?”

“어머! 형부, 그새 깨끗하게 청소하셨네요.”

여자는 요물이라더니, 방금 전까지 목소리를 높였던 두 여인이 활짝 웃었다. 목소리도 나긋나긋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다.

그런데 왜 땀이 날까?

그럴 수밖에.

차라리 걷는 게 빠를 정도로 밀리는 영동고속도로는 장인어른의 얼굴까지 떠올리게 했다. 일반 외과 대선배만 아니었다면 지금보다는 한결 편했을지도 모른다.

(김 서방, 어디야?)

“어후! 무지하게 밀립니다. 형님은 어디세요?”

(중부도 많이 밀려서 나도 이제 영동 타. 참! 손 서방도 온다며?)

손 서방?

결혼도 하기 전에 확정이다.

“예. 그런다고 들었는데, 저한테는 연락도 없어요.”

(훈련 중인데 전화하기가 쉽겠어? 운전 조심하고 원주에서 보자. 끊어.)

판이 커진다. 모처럼 처갓집 식구들이 모두 모인다.

왠지 휘파람이 절로 나올 정도로 즐거워졌다.

모처럼 집에 온 고경철까지 어른만 8명이었다. 커피 한 잔씩 들고 모두 둘러앉았다.

딸 셋이 모두 모여서인지 왁자지껄했다. 고성문도 흐뭇한 얼굴로 자식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물론 사위들하고 눈이 마주칠 때는 표정이 싹 변하며 근엄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장인과 사위가 마주 앉아 웃고 떠드는 집안이 그리 흔하진 않을 것이다.

“아버님, 별일 없으시죠?”

“응? 나야 뭐, 항상 똑같지. 자네도 별일 없지?”

“저도 항상 똑같습니다.”

큰사위가 있는 자리라 그런지 커피 한 모금을 마신 고성문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 여자들과는 달리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옆에 앉아 있는 고경철도 커피 잔만 만지작거렸다. 아버지와 다 큰 아들과의 관계도 사위와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럴 때 바로 둘째 사위가 나서야 한다. 잘하면 점수까지 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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