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87화 (587/1,329)

제10화. 교육의 또 다른 의미 (2)

월요일 오후 이혁민 교수가 펠로우들을 불렀다.

“3주 후에 입국식 한다. 김지훈 선생이 서도진하고 준비 좀 같이해라. 그리고 1년차들 퍼스트 세우고, 능력이 되면 수술도 주어야 하니까 신경 써라.”

홍재순이 약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뻬로 시작해야 하는데 우린 응급실 당직을 안 서잖아. 다들 바쁘겠지만 펠로우도 교수니까 당연히 후배들 교육을 담당해야 하지 않겠나. 치프들도 신경 좀 써 주고.”

“알겠습니다.”

외래에서 나온 김지훈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젠 특별한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새로운 일이 남아 있다. 더구나 형식적이긴 하지만 퍼스트, 혹은 집도는 1년차들이 정식으로 의국원이 되는 과정이다. 신경 바짝 써야 할 일이었다.

“홍재순 선생님, 제가 보기에는 이번 1년차들 다 괜찮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렇긴 한데, 집도 여부는 퍼스트를 세워 봐야 알겠지.”

“이번 주하고 다음 주에 최대한 퍼스트 세우고, 입국식 하는 주에 수술 주면 되지 않을까요?”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웃었다.

“환자가 와야지. 일복 터진 너야 일주일에 하루만 당직을 서도 되겠지만, 나랑 재순이 형은 은근히 어려울 수도 있어.”

“형, 자꾸 일복 소리 좀 하지 마요.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어째 환자를 나한테 모는 것 같네.”

“수술할 때는 입이 쫙 찢어지는 놈이 할 말이냐?”

하긴 나쁜 일은 절대 아니다.

“하하! 경석이 말이 맞다. 지훈이 너 오늘 당직이니까 미리 생각 좀 해야겠다. 아뻬가 오는 건 기정사실이겠지?”

“에이! 선생님까지 왜 이러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홍재순 말처럼 당직 때면 거의 당연한 듯 수술이 떴다.

입맛을 쩝쩝 다시며 일과를 끝낸 김지훈이 총치프 서도진을 불렀다. 박순용, 이혁원, 송진우가 자동적으로 따라 들어왔다.

“도진아, 입국식이 3주 후란다.”

인턴 때부터 벌써 5년째 한솥밥을 먹는다.

척하면 착이다.

“장소하고 예산 문제 알아보겠습니다.”

“1년차도 신경 쓰자.”

“예. 혁원아, 어떤 교육을 시켜야 하는지 잘 알지? 선생님한테 죽지 않도록 바짝 신경 써. 박순용 선생님도 옆에서 도와주시고요. 그래야 진우가 삽니다.”

“예, 선생님.”

다들 흐뭇하게 웃었다. 비록 3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 송진우였다. 지금도 시뻘건 눈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집도까지 얼마나 험난한 길을 통과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누구나 옛날 생각을 새록새록 떠올릴 수밖에 없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김지훈이 의국에서 나와 연구실로 향했다. 잠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할 것이 있었다.

‘벌써 입국식이야? 전공의 교육까지 우리에게 맡기신단 말이지. 이것도 은근히 부담이 크네. 그나저나 석사 논문 주제를 정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몇 개는 생각을 해 놔야 스승님께 말씀을 드리지.’

항상 뒤통수에 들러붙은 부담이었다.

2년이라는 기간이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빨리 시작해야 그만큼 편할 것이다.

책장에 꽂힌 논문 몇 개를 뒤적이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발등의 불은 교육이었다.

‘순환 근무가 없어진 탓에 다들 수술을 받기가 어려운 상황도 고려를 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나도 그렇고, 경석이 형도 집도 경험이 부족한 걸 생각하면 정말 난감하네.’

턱을 괸 채 한참 동안 고민을 하던 김지훈이 전화벨 소리에 귀를 쫑긋거렸다. 당직이라는 사실이 뇌리를 스윽 스쳐 지나갔다.

어김없이 응급실이다. 그새 환자가 오다니,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다.

(서도진입니다. 22세 남자 환자입니다. 아뻬가 의심됩니다. 15분 정도면 검사 결과가 모두 나올 것 같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딱 때맞춰 왔다.

머릿속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석사 논문이 휘리릭 사라지며, 전공의 교육이 다시 자리 잡았다.

역시 경험만큼 강한 무기도 없었다. 지난날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떠올리며 일정을 생각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두고 익혀야 할 것이 기본이다. 처음부터 몸에 배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간과할 수도 있었다. 일에 치이는 1년차는 특히 그렇다.

“알았어. 내려갈게. 도진아, 너도 들어오고 진우 준비 잘 시켜.”

(예? 저도요? 혹시 진우를 퍼스트 세울 생각이세요?)

“도진아, 나 잘 알잖아.”

응급실로 내려가자 서도진 옆에 선 송진우가 바짝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손에는 타이용 실이 들려 있었다. 이혁원의 손에는 니들 홀더(봉합용 기구)까지 들려 있었다.

수처와 타이!

외과 의사의 기본기다.

이걸 못하면 년차를 가리지 않고 죽음이다.

‘자식들! 기본이 중요한 건 알아 가지고.’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자부터 보자.”

은근한 기대와 긴장이 감돌았지만, 김지훈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환자를 보고 침착하게 진단을 내린 후, 환자와 보호자에게 열심히 설명을 했다.

교육은 교육이고, 환자는 환자다. 펠로우라는 사실과 나름의 목표를 잊어서도 안 된다.

슬쩍 라파로 아뻬를 언급했지만, 역시 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개복에 비해서 비싸긴 하지만, 한마디로 자르냐. 에휴! 그나저나 뱃살이 좀 있으니까, 이 환자는…….’

“도진아, 동의서 받는 대로 수술하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전공의들을 휙 둘러본 김지훈이 입원장을 날렸다.

그때 인턴이 힐끗 눈치를 보더니 이혁원에게 무언가 노티를 했다.

아뻬가 의심된단다.

당직이 누군가?

역시나 아뻬다.

저녁부터 수술을 연이어 해야 했지만, 다들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뻬 두 개로 끝이 난다면 다행일 것이다.

전화를 받은 고경아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오프는 확실하게 챙기잖아요.”

(밤에만 안 나가지, 늦게 들어오는데 오프면 뭐해요? 그것도 그거지만, 지훈 씨 힘들까 봐 그래요.)

“걱정 말아요. 조금 있다가 봐요.”

생각해 보니 오프 날도 환자 아니면 연구실에서 자료를 뒤적이느라 늦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척 미안했지만 당분간 집과 직장에 모두 충실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나마 IMF라는 날벼락에 직격탄을 맞고 백수로 지내는 고경희 덕에 외로움은 덜할 것이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전임 교수가 되면 나아질까?’

심란한 마음을 감추고 수술 방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전공의 탈의실에서 서도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송진우, 수술 기록지에 적힌 대로 수술을 해? 니가 퍼스트를 선다고 생각을 하란 말이야. 이런 식이면 김지훈 선생님은 절대 수술 주실 분이 아니다. 다시.”

송진우가 수술 과정을 되풀이했다. 잘 나간다 싶더니, 곧바로 따가운 지적이 이어졌다.

“동맥 잡을 때 한 번만 묶어? 아뻬도 두 번 이상 타이하잖아. 김지훈 선생님 수술할 때 뭐 봤어? 이혁원, 너 1년차 이렇게 교육시킬래?”

“죄송합니다.”

“아랫년차 제대로 못 가르치면 너도 고생해, 인마. 송진우, 뭐해? 다시.”

날카로운 지적이 거듭됐다.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한겨울처럼 살벌한 분위기였다.

송진우는 얼굴이 뻘게졌을 것이고, 이혁원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것이다.

평소 다혈질인 성격도 있지만, 총치프이자 이삼 년차 때 아랫년차 교육을 담당했던 서도진다웠다. 환자가 올라올 때까지 ‘다시’라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수술실이 부산해졌다. 환자 기록을 살피며 마취를 준비하던 마취과 당직 전공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지훈을 보는 눈빛이 여간 심난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오늘은 두 건으로 끝내시는 겁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마취 열심히 할 테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인사까지 하고 마취를 시작했다.

눈치를 보는 놈들이 또 있었다. 손을 소독하고 들어오자 수술 팀 전원이 김지훈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송진우는 얼굴까지 벌게진 상태였다.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수술에 대한 열망이 끓어 넘칠 때였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절대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풀어 갈 일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해, 송진우는 아직 확실하게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퍼스트를 어떻게 서야 하는지부터 알려 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김지훈이 서도진을 보았다.

“도진아, 준비해.”

뜻밖의 말에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찌릿한 눈빛을 받은 후에야 서도진이 집도의 자리에 섰다.

김지훈이 한마디 툭 던지며 퍼스트 자리에 섰다.

“송진우, 잘 봐.”

서도진이 훅! 숨을 내뱉었다.

1년밖에 차이가 안 나기에 서도진이 집도를 하고, 김지훈이 퍼스트를 선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가장 친하면서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배 앞에서 수술을 한다는 생각에 도리어 긴장을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지훈은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교육이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앞가림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수술실에서도 교수로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

이미 생각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막상 집도의 자리에 선 서도진을 보자 상당한 부담이 다가왔다. 스스로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수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교수라는 자리가 이런 건가? 내 자신만이 아니라 후배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걸 등한시했어. 후배가 잘못하면 내가 잘못한 탓이다. 그래서 스승님과 선생님들도 수련이 끝날 때까지 날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애를 쓰신 거겠지.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자.’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됩니까?”

“예. 시작하십시오.”

서도진이 김지훈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간호사가 건네는 메스가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거렸다.

후배의 수술에서 퍼스트를 선다는 사실이 이렇게 긴장될지는 몰랐다.

묘한 긴장감 속에서 수술이 시작됐다.

1년차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일까?

정석과 기본이다.

그래야 집도의의 손에 맞춰 퍼스트를 설 수 있고, 이후 자신의 손을 만들 수 있다.

또한 기본이 탄탄해야 어떤 수술 팀이 꾸려지더라도 훌륭한 일원이 될 것이다.

배를 열고 아뻬를 찾고, 절제를 하는 내내 기본에 충실했다. 내심 서도진의 손과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지만 의외로 무난하게 수술이 진행됐다.

마음 한편으로는 눈 똑바로 뜨고 고쳐야 할 점이 있는지 보고자 했다. 그 정도 실력은 되기에 이혁민 교수도 교육을 맡겼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의외였다. 도리어 서도진의 손에 내심 감탄을 터트리고 말았다.

생각 이상으로 빠르고, 정확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수술인 아뻬를 이만큼 한다면 기본기가 정말 탄탄하다는 말이었다.

다른 수술 역시 잘해 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기에 총치프가 됐을 테고, 실제로도 그랬다. 언제나 후배일 줄 알았는데, 턱밑까지 바싹 다가와 있었다.

‘도진이가 수술을 이렇게 잘했었나? 이거 현수만 라이벌이 아니었네.’

자신도 모르게 수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척척 손이 맞아 가며, 전 과정이 빠르게 진행됐다.

기대한 대로 송진우는 사소한 동작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선생님, 피부 봉합도 타이하겠습니다.”

역시 4년을 넘게 부대낀 서도진이었다. 집도의로서 여유를 잃지 않고 김지훈의 생각까지 읽고 있었다.

수처와 타이하면 김지훈을 빼놓을 수 없다. 휙휙 날아다니는 손에 송진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수술이 끝났다. 제법 살집이 있는 환자인데 40분 정도 걸렸다.

김지훈이 보기에도 상당히 빠르게 끝났다. 빠른 손이 다는 아니지만 뿌듯했다. 그 손에 정신이 팔려 퍼스트 서는 모습을 제대로 보였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

힘찬 목소리를 뒤로하고 탈의실에 앉아 곰곰이 서도진의 수술 모습을 상기했다. 억지로 트집을 잡는다면 모를까, 흠잡을 곳이 거의 없었다.

‘약간 거친 면이 있지만, 펠로우인 내가 지적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자식! 겁날 정도로 열심히 했네. 응? 혹시 신기동 선생님이 지적하시는 게 이런 걸까?’

알 듯 말 듯 하다.

스스로 찾아야 할 답이었고, 때마침 수술 방 복도를 따라 환자를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섰다.

“에이! 모르겠다. 속 시원하게 알려 주시면 안 되나?”

투덜거리며 탈의실을 나서던 김지훈이 걸음을 멈췄다.

송진우는 얼굴이 시뻘겠고, 이혁원은 창백했다. 서도진에게 제법 탄 모양인데, 반응은 정반대다.

항상 보는 모습이지만 오늘따라 웃음이 나왔다.

“둘이 잘 어울린다.”

한마디 툭 던진 김지훈이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 준비가 끝나자 모두들 김지훈을 보았다. 1년차가 퍼스트를 서기에 완벽한 젊고 마른 환자다. 이번에는 퍼스트를 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송진우의 얼굴이 난로가 됐다. 약간의 언질도 받았을 것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전공의와 펠로우의 시각은 달랐다. 김지훈이 힐끗 눈길을 주고는 이혁원을 보았다.

“이혁원, 준비해. 송진우, 확실하게 봐.”

희비가 교차했다. 이혁원이 깜짝 놀라면서도 파릇파릇한 생기가 돌 정도로 눈을 반짝였다.

송진우의 얼굴은 여전히 벌겠다. 실망이라는 건지, 아닌지 해석하기 참 힘들었다.

‘이 자식은 뭔 말을 해도 그냥 얼굴이 벌게지네. 진우야, 어쨌든 그렇게 티를 팍팍 내면 인생 고달프다. 혁원아, 넌 또 왜 그러고 있니. 수술 안 할 거야?’

“이혁원, 자리에 안 서고 뭐해?”

“예, 선생님.”

눈빛을 굳힌 이혁원이 집도의 자리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환자에 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 할지라도 용납하지 않는 김지훈 앞이다. 수술은 말할 것도 없다.

“선생님,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도진에 이어 이혁원의 수술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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