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84화 (584/1,329)

제9화. 첫 정규 수술 (1)

무뚝뚝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김지훈 선생, 앤서(Answer) 작성하고 잘 준비해.”

이게 무슨 말일까?

순간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짓다 말고 김지훈을 보았다.

컨설트에 답을 대신하라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준비 잘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눈만 껌벅거리던 김지훈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걸렸다.

“도진아, 이 환자 수술 주신다는 말씀이신가?”

“그런 것 같은데요. 아까 환자에게 하신 말씀까지 생각하면 거의 100퍼센트 아닐까요?”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드디어 펠로우가 돼 첫 복강경 수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고는 침착하게 컨설트에 대한 답을 작성했다.

<내일(목요일) 복강경으로 담낭 절제술을 시행하겠습니다. 내과 문제가 없다면 전과시켜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교수 김지훈 / 교수 이준영>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병동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스승의 깊은 속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제자를 향한 믿음과 배려였다. 마냥 좋아하고 흥분할 일이 아니었다. 결코 실망을 안길 수는 없었다.

‘모레 라파로 탈장이 있다고 수술을 주시는 걸까? 그것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확실하게 해내야 해.’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했다.

하물며 수술을 통해 사람을 치료하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태만히 한다면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일 것이다.

이제 김지훈 자신의 회진만 남았다.

‘이 자식은 어디 간 거야?’

잠시 사라졌던 이혁원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선생님, 탈장 환자 입원했습니다.”

간사하게도 그새 기분이 또 붕 뜬다. 환호성이 그대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펠로우는 교수다. 헛기침 두 번으로 들끓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 회진 돌자.”

중환자실 환자부터 살폈다.

칼에 찔려 간 손상을 받은 환자만 아직도 중환자실에 있었다. 결코 위중한 상태가 아니었다. 도리어 무수한 이태원 깡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평소 운동을 꽤 했는지 회복이 무척 빠른 편이었다.

불과 4일 만에 입까지 활짝 열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더욱 병실로 올릴 수 없었다. 병실에 올리면 다른 환자에게 이만저만한 민폐가 아닐 것이다. 감시하기에는 중환자실이 더 유리하기도 했다.

“나 언제 병실로 올라가는 거요? 이거 다 죽어 가는 사람들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X 같네. 수술은 잘됐다며, 왜 여기 있으라는 거야?”

형사가 있든 말든, 반말에 욕은 여전했다.

회진 때마다 손윗동서인 서정호가 생각나며 울컥 치미는 것을 삼키느라 애썼는데, 오늘은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다.

스승의 배려와 권태경 환자 덕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제 하룻밤만 지나면 다신 얼굴 볼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욕에는 거의 쌍벽을 이뤘던 보호자가 면회 중이었다.

‘검사 앞에서는 절대 이러지 못하겠지? 이젠 형님한테 연락하고 싶다는 생각도 안 나네. 하루만 참자.’

“이혁원 선생, 드레인 어때?”

“예. 깨끗합니다.”

“오늘 찍은 CT도 괜찮지?”

“별다른 이상 소견 보이지 않습니다.”

김지훈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손일석을 떠올렸다.

“형사님, 환자 상태가 생각보다 상당히 빨리 좋아졌습니다. 평소 몸 단련을 굉장히 많이 한 모양이네요. 덕분에 내일 일반 병실로 올라갈 수 있겠습니다. 상황이 되시면 전원도 가능합니다.”

“그렇습니까? 어휴! 이제야 좀 편해지겠네요. 하루 종일 이 근처를 못 떠나는 데다 아픈 환자들만 보니까 저도 온몸이 다 아픈 것 같아서 힘들었습니다. 선생님도 아픈 사람만 보려면 참 힘드시겠습니다.”

“병원이 다 그렇죠. 환자분, 들으셨죠? 소견서는 자세하고 확실하게 써 드릴 거니까,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고 가시면 됩니다. 치료 잘 받으시고, 조사도 잘 받으세요. 다음에는 칼 조심하시고.”

환자의 안색이 돌변했다.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이유로 마음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저, 정말 가야 하는 거야?”

내원 때는 몰랐지만, 상대방 중 한 명도 중상을 입고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들었다. 회복되는 대로 죗값을 치를 일만 남은 것이다.

갈 곳은 한곳뿐이다.

죄를 지은 놈들이 반드시 가야 하는 그곳.

“그럼요. 보호자분, 내일 아침에 퇴원 수속 바로 밟으시면 됩니다. 환자분, 잘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덕분에 많은 생각을 했는데, 미안하지만 면회는 못 갑니다. 그리고 아무리 깡패라도 지킬 건 지킵시다.’

이러면 안 되지만 속이 후련했다.

욕을 하며 불안해하는 환자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보호자를 뒤로하고 병동으로 올라갔다.

모든 환자들이 순조로운 회복을 보였다. 홍재순의 환자 역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제 남은 환자는 한 명이다.

73세 남자 환자, 권태경.

병실로 들어서자 눈에 딱 보였다.

환자와 보호자도 반색을 했다.

탈장 부위를 다시 확인했다.

“별일 없으셨죠? 전하고 비슷한 상태네요. 특별한 문제 없으면 예정대로 모레 수술하겠습니다.”

“의사 선생님, 아침에 하나? 빨리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안 될까? 힘 좀 써 봐.”

같은 반말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슬쩍 내미는 주스 한 캔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수술 순서를 잡는 원칙이 있습니다만, 연세가 있으셔서 오전 중에는 하시게 될 겁니다. 오늘은 푹 주무시고, 내일 어떻게 수술을 하는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보호자분들도 함께 들으셔야 합니다.”

“설명을 또? 의사 선생님, 고마워.”

권태경 환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이점을 가진 복강경 수술이지만, 마취와 수술에 따른 위험도는 다르지 않다.

더구나 응급 수술도 아닌 정규 수술인데, 환자나 보호자도 충분히 알고 수술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날 밤, 고경아에게 늦는다고 양해를 구하고 서도진, 박순용, 이혁원, 송진우와 함께 수술 대비를 했다.

그런데 강병옥이 피곤에 찌든 얼굴로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강병옥,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잠깐 시간이 나서 어떻게 준비하시는지 듣고 싶어서요.”

모두들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100일 당직 중인 1년차가 자신의 파트도 아닌 환자와 수술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자식! 대단하네. 진우야, 혁원아, 너희들도 좀 배워라. 얼마나 보기 좋니. 시작하자.”

이혁원은 콧등을 찡그렸고, 송진우는 얼굴이 벌게졌다.

내심 놀란 김지훈이 강병옥에게 눈길을 주고는 기본적인 사항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가장 중요한 수술 팀 구성만이 남았다. 수술을 완벽하게 주도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복강경은 경험이 거의 없어 상당한 신경을 써야 했다. 손발이 안 맞으면 어디선가는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내일은 스승님이 들어오실 테니까 평소대로 구성하면 되고, 탈장 수술은 누굴 데리고 들어가지?’

길게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이젠 서도진도 퍼스트 경험이 풍부했다.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정작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경험이 부족한 집도의였다.

‘에휴! 역시 내가 문제네.’

“누가 들어올지 정하고 끝내자. 도진아, 내 파트는 아니지만 탈장 수술도 퍼스트를 섰으면 좋겠는데, 어때?”

“그럼요. 당연히 제가 들어가야죠.”

“고맙다. 진우는 내일 수술만 들어오면 되고, 혁원이 너는 알지?”

“예.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든든하다.

김지훈이 씨익 웃고는 손뼉을 치며 일어섰다.

그때 송진우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탈장 수술도 들어가면 안 됩니까?”

복강경 수술의 장점 중 하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3명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굳이 필요하면 인턴으로도 충분했다. 더구나 잠을 잘 시간도 없는 1년차였다.

김지훈이 흠칫거렸다.

‘얘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힘들지도 않나? 그런데 결정은 내가 아니라 치프가 해야 할 것 같다.’

강병옥에게 자극을 받은 것일까?

연이은 1년차들의 놀라운 열정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100일 당직 중이다. 1년차에게 배려 따위는 좁쌀만치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예 그런 단어는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우고 살아야 할 때였다.

게다가 일반 외과 전공의들은 은근히 피도 눈물도 없다.

서도진이 눈을 번쩍였다.

“그래도 되긴 하는데, 병동 일 빵꾸 안 나겠어? 수술 핑계는 안 통해. 내 성격 알지?”

총치프답게 역시 살벌했다.

송진우가 움찔거리면서도 눈에 힘을 팍 주었다.

“예. 절대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아! 선생님, 진우가 들어가도 될까요?”

“난 괜찮아. 늦었다. 다들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일어선 김지훈이 송진우와 강병옥의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서도진과 이혁원이 정확하게 그 자리에 손을 가져갔다.

선배들의 눈에 강한 열의를 보이는 1년차만큼 멋진 전공의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기분 좋은 밤이다.

송진우가 피곤도 잊고 활짝 웃었다. 얼굴이 또 빨갛게 물들었다.

탁자 위에 두툼하게 쌓인 차트가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힘이 넘쳤다.

그때 김지훈을 뒤따라 나간 강병옥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린다 싶은 순간, 엘리베이터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어색한 웃음을 터트렸다.

‘병옥이 형도 김지훈 선생님을 되게 좋아하나 보네. 하긴 2년 차이밖에 안 나니까 서로 잘 알겠지. 부럽다.’

별게 다 부러운 일이었다.

잠시 후, 강병옥이 의국으로 들어왔다.

“진우야, 너 정말 라파로 들어갈 생각이야?”

“예. 많이 보고 하나라도 더 배워야죠.”

“전공의 때 이미 라파로를 하신 선생님인데 배울 게 많긴 하겠지. 피곤해도 꾹 참고 열심히 하자. 그나저나 오늘 차팅들 안 하나? 진우야, 지금 다들 뭐하고 있는지 확인해.”

어느 틈엔가 강병옥이 1년차들을 주도하고 있었다. 예비역이자 학교 선배이기도 했지만,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하는 덕이었다. 가끔 가장 얌전한 송진우에게 일을 맡기곤 해서 탈이었지만 말이다.

***

목요일 오전.

라파로 담낭 절제술이 시작됐다.

외래 진료 시간을 조정한 이준영 교수가 시간 맞춰 수술실로 들어왔다.

서도진과 송진우, 그리고 이혁원까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에 눈길만 한 번 주었다.

계속 진행하라는 소리였다.

‘최소한 어시스트로라도 들어오실 줄 알았는데, 참관만 하실 생각인가?’

지금도 팔짱을 낀 채 모니터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환자와 오간 얘기가 있다고 해도 엄연히 이준영 교수의 환자였다. 상당한 부담감이 다가왔다.

그런데 김지훈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집도의에 대한 믿음이었다.

눈빛을 굳힌 김지훈이 수술에 집중했다.

처컥! 처컥!

이산화탄소를 밀어 넣는 규칙적 기계음이 울렸다.

김지훈의 손은 침착하면서도 과감했다. 서도진은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담낭 박리 시작합니다.”

“도진아, 담낭관하고 동맥 부위를 조금 더 가까이 비춰 줘. 진우야, 손 흔들린다. 확실하게 고정하자.”

“클립 주고 콘돔 준비하세요.”

수없이 봐 온 수술이고, 모든 복강경 수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술 속도야 이준영 교수와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고도 깔끔하게 수술이 끝났다.

길게 숨을 내쉰 김지훈이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만족스러웠다.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공의들의 힘찬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마지막까지 수술을 지켜본 이준영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자신의 판단을 대신했다.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환자를 넘겨도 되겠어. 생각보다 훨씬 빠르네. 타고난 손이 있다고 해도 노력하는 사람을 당해 낼 수는 없겠지.’

함께 보호자에게 설명을 했다. 보호자의 얼굴에 피는 안도의 미소는 보람이었다.

“선생님, 내일 라파로 탈장도 들어오실 겁니까?”

“니 수술이야.”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항상 짧고 간결하다. 그 속에 갖가지 마음을 담다니, 들을 때마다 신기하다.

하긴 그걸 알아듣는 놈도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들어오시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수고하셨습니다.”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겠다고?

전공의 때는 설설 기었던 김지훈이었다. 나이가 먹은 건지, 넉살이 늘은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문득 지난날이 떠오른 이준영 교수가 콧바람을 일으켰다.

‘1년차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교수가 됐어? 세월 참 빠르네. 혁원이 저놈은 이왕 참관을 할 거면 똑바로 좀 보지. 한눈을 왜 이렇게 팔아?’

꾸벅 인사를 하고 이혁민 교수의 수술을 들어가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불현듯 스승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담석과 탈장 수술은 부위는 다르다고 해도 둘 다 복강경 수술이고, 수술 팀까지 동일하다.

이미 수술 계획까지 다 세운 상태지만, 이론과 실제의 괴리는 머릿속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수술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말 대단한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일은 끊임이 없다.

잔잔함 속에 불을 감춘 이혁민 교수.

언제 칼을 빼 들지 모르는 신기동 교수.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혁원과 열정이 넘치는 1년차들.

위아래에서 주는 중압감이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전공의 못지않게 과중한 일도 김지훈을 짓누르진 못했다. 지금도 일반 외과를 시작하며 품었던 꿈과 희망을 가슴에 꼭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슬슬 자리를 잡아 가는 느낌이 나기 시작하네. 이렇게만 가자.’

오늘도 긴장을 놓을 틈이 없었다. 이런 긴장 속에서만 살면 며칠 견디지 못할 것이다. 빡빡한 일과를 감수하고도 남을 기쁨이 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일과를 모두 마쳤을 때쯤, 내일 정규 수술 스케줄이 나왔다. 가장 나이가 많은 덕에 권태경 환자 수술이 첫 번째로 잡혔다.

스케줄을 보던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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