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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581화 (581/1,329)

제7화. 책임 Ⅱ (2)

토요일 오전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주말 집담회 때 눈이 시뻘게진 채로 질문과 대답을 하느라 머리가 띵할 지경이었다. 이번 주 근무를 시작한 김지훈과 이경석의 수술 및 환자에 대한 일들이 화제에 올랐지만 귓가에서 윙윙거릴 뿐이었다.

생각보다 극심한 피곤을 느꼈다. 아마도 새벽에 수술한 환자 때문일 것이다.

집담회가 끝나고 교수들과 모여 커피를 마셨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죽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지훈이 자리가 끝날 무렵, 조용히 새벽에 있었던 일을 꺼냈다.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교수들 모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사람을 가려 가면서 치료하면 안 돼. 사람 목숨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어.”

“그래서 집담회 때 정신이 없었구나. 지훈아, 이 교수 말이 맞다. 내가 보기에는 죽일 놈이어도 다른 사람 눈에는 안 그럴 수가 있잖아. 지훈아, 교수야, 평생 고민하게 될 거다. 평생.”

“그래서 환자는 괜찮나? 과정은 찜찜해도 결과가 좋다면 너무 자책할 거 없다. 다 경험해야 할 일들이다.”

“그런 환자들까지 치료해야 하는 게 의사야. 누굴 탓하겠어? 의사가 된 네 자신을 탓해야지.”

교수들이 한동안 자신들의 경험을 꺼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런 경험은 김지훈만이 한 것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만이 무뚝뚝한 얼굴로 가끔 시선을 줄 뿐이었다.

하지만 이준영 교수는 스승이다. 자리가 끝나자 조용히 손짓을 했다.

오후 회진 전까지 함께 중환자실 환자를 보며 의견을 나누었다.

김지훈의 막연한 추측에 동의까지 하며 등을 두드렸다. 걱정하는 기색 속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눈가를 스쳤다.

‘그런 고민 때문에 힘든 것은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야. 네가 가야 할 길을 가는 뿐이니까 힘내자.’

“잘 대처했고, 판단도 훌륭했다.”

스승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었다. 마음이 푹 놓이며 가슴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나도 가끔 같은 고민을 해. 당연한 고민이니까 힘들어하지 마.”

스승의 말 한마디가 그 어떤 말보다 위안이 됐다. 그 덕에 잠시 피로를 잊고 일과를 모두 마쳤다. 주말에도 당직이기에 시간이 있을 때 확실하게 쉬어야 했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 가며 퇴근 준비를 했다.

그때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홍재순과 이경석도 함께 있었다.

“지훈아, 교수야, 주말에도 당직이지? 힘들겠다. 힘들겠어. 누구 닮아서 일복이 그렇게 많니? 응?”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나 재순이하고 같이 천안 간다. 천안. 내가 오늘 백듀티인데 응급실에 환자 있으면 알아서 처리해. 알아서. 재순아, 병동에는 별 환자 없지?”

“예, 없습니다.”

“그래그래. 그럼 우리 다녀올 테니까 수고해. 오늘은 환자 없을 거다. 푹 자라. 푹 자.”

이런 말을 하기 위해 굳이 연구실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아마 오늘 나눈 대화 때문에 여러모로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예, 선생님.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홍재순 선생님, 너무 밟지 마세요.”

“주말이다. 언제 갔다 언제 오냐. 수고해라.”

이경석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고는 머뭇거렸다. 이 모든 사달이 당직을 바꾼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김지훈이 당직을 4일 동안 내리 서야 한다는 사실도 안 모양이었다.

“형, 장모님 오셨다면서요. 빨리 퇴근해요. 다음에 내가 부탁하면 당직 바꿔 줘야 돼요.”

활짝 웃는 모습에도 얼굴을 펴지 못했다. 김지훈의 얼굴은 전공의 때보다 더 초췌했다. 꽤나 미안한지 한동안 시간을 끈 후에야 이경석이 퇴근을 했다.

“나도 퇴근을 해 볼까?”

새벽에 응급실로 와 다음 날 오후 2시가 다 돼서야 퇴근을 했다. 토요일이라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항상 이렇게 살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얼마 못 가 쓰러져 죽을 것이다.

입맛을 쩝쩝 다신 김지훈이 쏜살처럼 집으로 향했다. 고경아가 무릎베개를 내주며 걱정을 했다.

몇 마디 듣지도 못하고 김지훈이 코를 골았다.

“아휴! 우리 남편 불쌍해서 어쩌지? 저녁에 고기 좀 구울까? 등심이 좋을까, 삼겹살이 좋을까?”

고경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맞벌이 부부다. 집안일도 대부분 자신이 한다. 서운한 마음도 있고 때론 위로받고 싶었지만, 무엇보다도 얼굴 보기 힘들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만큼 김지훈이 과중한 일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근무를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도 안 됐는데, 좋게 생각할 일이었다. 언젠가는 김지훈이 거꾸로 자신을 보듬고 감싸 줄 날도 올 것이다.

곧 좋아질 것이다.

고경아는 그렇게 믿었다.

***

얼마나 잤을까?

따르르르릉!

오늘따라 전화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지훈 씨, 병동이래요. 전화 받아요.”

병동?

간신히 전화를 받아 든 김지훈이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당직 치프인 안호석의 목소리가 조금은 다급하게 들렸다. 회진 때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무슨 일이야?”

(선생님, 홍재순 선생님이 수요일에 수술한 환잔데 드레인에서 갑자기 피가 나오고 있습니다. 양이 만만치 않아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출혈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가 나온다고? 홍재순 선생님에게 연락은 했어?”

(예. 지금 천안에서 출발하신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고속도로가 엄청 막힐 시간이잖아요. 언제 오실지 알 수가 없다고 선생님께 환자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천안 병원에 간다고 했다.

막 고기 구울 준비를 하던 고경아가 울상을 지었다. 환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 투정이라도 부릴 수 있건만, 출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럴 땐 간호사라는 직업이 원망스러울 텐데, 도리어 옷을 먼저 꺼내 들었다.

“수술해야 할 환자예요?”

“환자부터 봐야 알겠지만, 별말 없었으니까 수술까진 안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미안해요, 경아 씨. 빨리 보고 와서 우리 맛있게 고기 구워 먹읍시다. 맥주 한 잔 곁들일까?”

“그러다 환자 오면요?”

“맥주 한 잔 정도야. 나 금방 갔다 올게요.”

집을 나선 김지훈의 얼굴이 굳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안호석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홍재순이 도착할 때까지 환자를 지켜봐야 할 수도 있었다. 고속도로가 밀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어이구! 피하고 너무 친해지는 거 아냐?’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병실을 찾았다. 환자를 보고 있던 안호석이 다시 노티를 했다.

“수요일에 빤뻬리로 수술한 환자입니다. 그동안 조금씩 출혈이 있었지만 우징(Oozing)으로 판단돼 지켜보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전부터 갑자기 출혈량이 늘었습니다. 아무래도 액티브 브리딩 같습니다.”

액티브 브리딩(Active Bleeding)?

수술 등의 물리적인 방법으로 지혈을 해야만 제어할 수 있는 출혈을 가리킨다. 보존적인 치료로는 지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자칫 때를 놓치면 혈복막과 똑같이 환자에게 치명적인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홍재순 선생님은?”

안호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고속도로가 많이 밀린다고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도착할 때까지 바이탈 유지하고, 선생님이 보기에도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으면 준비는 미리 해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때도 참 잘 맞췄다.

“무슨 수술을 했어?”

“소장 파열로 장을 일부 잘랐습니다.”

수술을 해야 할 정도의 출혈인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액티브 브리딩의 원인이 될 만한 요인들을 생각하며, 드레인을 감쌌던 거즈를 확인했다. 10장이 넘는 거즈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환자의 안색이 다소 창백했다.

“바이탈은?”

“아직은 괜찮습니다.”

‘피는 제법 나온 것 같지만, 환자 상태가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저절로 멈출 수 있는 출혈이면 좋겠는데.’

안호석의 판단은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치프라고 해도 경험은 부족하기 마련이다. 만일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환자라면 경험이 있는 아랫년차보다 판단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런 점은 어느 의사도 피할 수 없는 분명한 한계였다.

‘제발 환자를 위해서 수술만은 피하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드레인을 살폈다. 김지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뚝! 뚝! 뚝! 뚝!

지금도 피가 떨어지고 있다.

빨간색이다.

배 속에 고여 있던 피가 아니라는 의미다.

떨어지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아까하고 비교해 보면 어때?”

“비슷합니다.”

김지훈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이런 속도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안 되겠다. 홍재순 선생님 연결해.”

불안해하는 환자와 보호자를 뒤로하고 홍재순과 바로 통화를 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출혈 정도와 수술 여부를 설명하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선생님,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퇴근할 때까지도 괜찮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지훈아, 최대한 빨리 올라갈 테니까 그동안 환자 좀 봐줘. 보호자에게 설명도 부탁해. 피곤할 텐데 미안하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길이 너무 밀려. 하여튼 내가 수술한 환자니까 내가 해결할게. 최대한 바이탈만 유지해 줘.)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재순이 말대로 해. 그게 제일 좋아. 책임이 다는 아니지만, 어쨌든 집도했던 사람이 배를 열고 해결하는 게 최선이다. 환자 잘 보고, 우리 도착할 때까지 유지시켜. 보호자에게 설명 잘해야 한다.)

특유의 말투가 사라졌다.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병실로 가 출혈 정도를 다시 확인하고 보호자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천안에서 급히 올라오고 있다는 말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홍재순을 신뢰한다는 표현이었다.

다행인 일이었지만, 환자에게나 의사에게나 최악의 상황이었다.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 일인실로 옮겼다.

코 줄을 단단히 유지시키고, 소변 줄을 다시 끼웠다. 수액을 보충하고, 수혈을 시작했다.

전공의들과 간호사들은 부지런히 움직였고, 김지훈은 환자 곁을 떠나지 않았다. 수시로 드레싱을 직접 하며 출혈 정도를 확인했다.

시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보호자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환자분, 조금만 더 버팁시다.’

뚝! 뚝! 뚝! 뚝!

변함없는 속도다.

혈액 검사와 비지에이 결과도 좋지 않았다. 다량의 출혈이 이미 환자의 신체에 부담을 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보호자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의사의 의무이기도 했다.

“보호자분, 아무래도 수술이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홍재순 선생님이 도착하시는 대로 수술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어디서 피가 나는 건가요?”

“그건 개복을 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집도한 의사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응급 수술 스케줄을 내는 것으로 모든 준비를 끝냈다. 홍재순은 아직도 도착하려면 멀었고, 환자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김지훈이 환자와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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