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책임 Ⅰ (2)
손도 과하게 잡으면 코피가 터질 수 있다.
강철 체력의 김지훈도 잔잔한 피로감을 느끼며 목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응급실은 평온했다. 지난밤 홍재순이 복막염 수술을 한 것 이외에는 특이 사항이 없었다.
이혁민 교수와의 수술도 별 탈 없이 진행됐다.
화요일처럼 양방을 벌여 빨리 끝났다.
그 덕에 이혁원과 라파로 탈장 과정이 담긴 테이프를 볼 시간도 넉넉하게 벌었다.
“수술 과정 확실하게 눈에 박아.”
고개를 끄덕이던 이혁원이 갑자기 반색을 했다.
“선생님, 혹시 제가 퍼스트를?”
의욕은 넘치나 이혁원은 이제 2년차다.
“혁원아, 리포트부터 잘 쓰자. 지금 실력으로 퍼스트 세우면 제대로 설 수나 있겠어? 라파로는 나도 힘든 부분이야. 볼펜.”
리포트에 활활 불이 붙었다.
이혁원의 눈이 점점 바닥을 향하다, 마침내 아래층까지 파고들었다. 이론이 부족하면 실전은 언감생심이다.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로써 모든 일을 끝내고 또 하루를 마쳤다. 이제 막 7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조금 빠르다. 그 때문인지 당직이란 사실이 은근히 마음에 걸렸다.
‘너무 조용해. 오늘은 별일 없으려나?’
그때 이경석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무슨 일 생겼나?’
“후우! 지훈아, 다행히 퇴근 전이구나. 미안한데, 당직 좀 바꿀 수 없을까? 장모님이 내일 갑자기 올라오신다고 해서 말이야. 멀리서 오시는데 밥이라도 대접해야지. 가능하면 내가 오늘 서자.”
슬며시 눈치를 본다.
“어떻게 안 될까?”
다행히 별일 아니었지만 고민스럽다.
당직 하루 바꾸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주는 주말 당직을 서야 하기 때문에 금, 토, 일을 내리 서야 한다. 자칫 일이 몰리면 피곤죽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눈앞의 떡이 더 맛있어 보인다고, 연거푸 쉰다는 사실이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왔다.
‘복불복? 일복?’
선택의 순간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내일의 두려움을 멀리 쫓아 버리고 오늘의 달콤한 휴식에 몸을 맡겼다.
겸사겸사 생색도 내고, 인심도 얻는 일이었다.
“바꿔 주면 뭐 해 줄 건데요?”
“내가 밥 한번 살게.”
“오케이! 1년차들이 한 명도 없네. 도진아, 미안한데 혁원이 오면 내 당직이 바뀌었다고 꼭 전해 줘.”
좋은 게 좋은 거다. 자칫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이혁원의 당직까지 확실하게 챙겼다.
고맙다며 활짝 웃는 이경석을 뒤로하고 퇴근을 했다.
하지만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다.
병동 일 때문에 뒤늦게 당직이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은 이혁원이 그대로 무너졌다.
동기들에게 사정사정해 간신히 김지훈과 자신의 당직 날을 맞췄는데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늦어 당직을 바꿀 수도 없었다. 결국 목, 금, 토, 일을 내리 서야 한다는 말이었다.
첫 일주일 동안 딱 하루 오프를 가다니, 1년차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이었다.
이혁원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은연중 삐져나오는 절망적인 신음 소리에 송진우와 강병옥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는 오로지 이혁원 자신의 몫이었다.
어두운 쪽이 있으면 밝은 쪽도 있기 마련이다.
고경아도 좋다며 오래간만에 외식을 하자고 했다.
고(Go)!
연애할 때 기분을 살려 종로를 위아래로 누비고 다녔다. 커피 한 잔, 술 한 잔, 군것질거리까지 입이 쉬지를 않았다.
3월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밤늦도록 데이트를 즐겼다.
병원에서 올 콜을 대비한 휴대폰의 묵직함까지 더해진 마음은 편안하기만 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늘도 눈빛 교환하며 손잡고 잤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오늘 같기를 바라면 욕심일까?
분명 욕심이지만, 카르페 디엠!
곤히 자던 김지훈이 갑자기 번쩍 눈을 떴다.
‘어라? 금, 토, 일 3일이 아니라 월요일까지 4일 연속이네. 어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식은땀이 쭉 흘렀다.
그 시간, 당직을 서던 이혁원이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5일 연속 당직이라는 사실을 송진우가 일깨워 준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진우야, 그걸 꼭 이 시간에 말해야 하니?”
애먼 놈 멱살을 잡고 흔드는 사태가 발생했다.
송진우의 목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따르르릉!
전화벨이 어서 받으라고 요란을 떨었다.
식은땀이 아니라 눈물까지 흘렸다. 일복이 꼭 한 놈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
금요일이다.
이경석이 아뻬 하나를 했다. 하필이면 전공의들이 단잠에 빠져 있을 새벽에 벌어져 이혁원의 눈이 벌겠다.
이제야 당직을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김지훈도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수고했어.”
이혁원이 이 정도쯤은 문제없다는 듯 웃었다. 깨끗하게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담담하게 현재 상황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왕년의 누군가를 보는 것 같았다.
외래는 여전히 고요했고, 이준영 교수의 수술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다음 주에 라파로 탈장이 잡혀 있는 데다, 언제 다른 라파로 수술을 하게 될지 몰라 정신을 바짝 차렸다.
유비무환(有備無患)!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어쩐 일인지 응급실은 고요하기만 했다.
이태원을 환하게 밝히는 불빛이 이상하게 수상쩍었다.
퇴근을 하던 김지훈이 슬그머니 다가오는 불안감을 애써 지웠다.
‘재수 없는 생각 하면 안 돼.’
12시가 넘었는데 조용하기만 했다.
이대로 쭉 아침까지 깊은 고요가 이어지기를 바랐다.
힐끗힐끗 시계와 전화기를 번갈아 보던 김지훈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고경아의 따스한 체온이 서서히 깊은 잠을 이끌었다.
따르르릉!
새벽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뭐? 칼에 찔린 환자라고?”
순간 음성에서 난도질을 당했던 환자가 떠오르며 잠이 확 달아났다.
부리나케 응급실로 향했다. 이태원 쪽에서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그놈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양아치, 혹은 깡패라고 할 수 있는 놈들끼리 패싸움을 벌인 것이다.
쌍욕이 난무하는 가운데 경찰들까지 와 있어 분위기가 살벌했다. 가장 피하고 싶은 경우였다.
하지만 환자는 환자다. 칼이 어디를 얼마나 건드렸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긴장해야 한다.
“환자 바이탈은 어때? 다른 환자는 없어?”
노티를 하는 서도진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안정적인 상태입니다. 모두 세 명이 왔는데, 나머지 두 명은 단순 열상입니다.”
여전히 욕설이 멈추질 않았다.
“누가 저렇게 욕하는 거야?”
“칼에 찔린 환자가 저러고 있네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의료진의 일이 환자를 보는 거라지만, 자신을 치료하는 사람들에게 할 행동과 말이 아니었다.
더구나 피곤이 극에 달하는 새벽이다.
계속되는 쌍욕에 짜증까지 치솟았다.
‘미친놈들! 할 짓이 없어서 칼싸움이야.’
“어이가 없네. 저러는 걸 보니 복막은 안 열렸나 보다. 겉에 상처만 난 거야?”
“환자가 하도 난리를 쳐서 정확하게 확인은 못했지만, 열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CT에서 장기 손상은 보이지 않는데, 워낙 비협조적이라 복막염 여부도 확실하게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뭐? 열렸을 수도 있다고? 일단 환자부터 보자.”
경찰관의 입회하에 칼에 찔린 부위를 확인했다.
서도진의 말대로 환자는 전혀 통제가 되지 않았다. 수차례 복부 진찰을 시도했지만 욕설을 해 대며 난리를 치는 통에 복막염이 발생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 흉기의 종류를 아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혹시 어떤 칼에 찔렸는지는 아시나요?”
“회를 뜰 때 쓰는 칼 아시죠? 30센티미터 정도에 가늘고 날카로워서 치명상을 일으키는 사건을 몇 번 봤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복부 자상의 치료 원칙은 복막이 열렸는지에 달렸다.
복막염, 혹은 혈복막이 의심되지 않는다고 해도 칼이 복막을 뚫고 들어갔으면 무조건 개복을 해야 한다.
남은 방법은 하나다.
자상 속에 손가락을 넣어 복막이 열렸는지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국소마취를 하고 아무리 조심해도 상당한 통증이 뒤따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갑을 끼던 김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독한 술 냄새에 또다시 이어지는 욕설.
“이 XX 놈들아! 아파 죽겠는데 도대체 몇 놈이나 보는 거야? 빨리빨리 좀 치료해. 어디서 새파랗게 어린 것들만 오고! XX 새끼들!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빨리 치료해.”
바이탈이 멀쩡한 탓에 입은 살아 있다.
보다 못한 경찰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조용히 안 해? 치료하러 오신 선생님들한테 뭐하는 짓이야? 하여튼 족보에도 없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선생님, 죄송하지만 사안이 중대해서 빨리 결정을 내려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환자를 노려보던 김지훈이 칼에 찔린 자리에 손가락을 쑥 집어넣었다.
자상은 모두 세 곳이었다. 두 곳은 복부 중앙이었고, 나머지 한 곳은 간이 있는 우상복부였다.
통증으로 단단하게 경직된 근육 층을 지나자 복막이 느껴졌다. 뚫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였다. 처치실이 떠나갈 정도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졌다.
몸부림치는 것을 막기 위해 함께 있던 전공의들이 모두 달려들어 팔다리를 꽉 잡았다.
아차! 국소마취를 잊었다.
생살을 헤집는 통증이 어떤지는 경험한 사람만이 안다. 의사들 역시 짐작조차 하지 못할 고통이다. 한 곳도 아니고 세 곳을 내리 후벼 대니, 차라리 기절을 하고 싶을 것이다.
“으아아악!”
“엄살 부리지 마, 인마.”
고통을 알 턱이 없는 경찰관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환자는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순간 이제라도 국소마취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런 부류들에게 동정은 금물이었다. 편하게 해 준다고 해 봐야 돌아오는 것은 욕설뿐일 것이다.
경험상 최대한 빠르게 확인하는 것이 상책이다.
‘다행히 간 쪽은 안 뚫린 것 같네.’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손가락이 통과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배를 열어야 한다면 방심하지 말고 간을 철저하게 확인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비명과 욕설이 멈추질 않았다. 김지훈의 손가락도 멈추지 않았다.
툭!
어느 순간 질긴 복막의 저항이 사라지면서 손가락이 슥 밀려 들어갔다.
뭉클뭉클한 것이 만져졌다. 배 속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개복해 내부 손상을 확인해야 한다. 손가락에 흥건히 묻은 피가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었다.
“칼이 배 속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장기 손상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응급으로 수술해야 합니다.”
“혹시 지정 병원으로 이송은 안 되겠습니까? 흉기를 들고 한 싸움이라 사안이 가볍지 않아서요.”
김지훈이 순간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보내고 싶었다.
칼을 휘두를 정도로 흉악한 깡패들까지 치료하고 싶은 의사는 없을 것이다.
입원 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환자가 개차반이라고 해도 의사의 직무와 사람의 목숨을 방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괜찮지만, 이송 중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일단 수술부터 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도진 선생, 혹시 모르니까 피 미리 시켜.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재수 없으면 혈관 하나 끊어졌을 수도 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찝찝해서라도 일단 배는 열어야 했다. 이송 중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즉시 수술 준비가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