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책임 Ⅰ (1)
수요일이다.
일주일은 지난 것 같은데 이제 근무 3일째다.
시뻘건 눈은 뻑뻑하기만 했고,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온몸에 묻은 피로가 출근길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이럴 때 늘어지면 그대로 뻗기 십상이다.
재빨리 응급실 보고를 하고, 이혁원과 함께 일찌감치 회진을 돌았다.
중환자실 환자들의 상태가 좋아 일반 병실로 올릴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보호자들의 모습에 이유 모를 웃음이 나왔다. 피로에 짓눌렸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교수들의 회진이 이어졌다.
한두 명도 아닌데 무작정 모든 환자들에게 신경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공의 때 뼈저리게 느낀 선택과 집중은 지금도 유효했다. 중요 환자들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중환자실 환자들은 어때?”
“다행히 특별한 문제가 없어 오늘 모두 병실로 올릴 예정입니다.”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쉽지 않은 수술까지 잘해 내 대견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근무를 시작했으니까 방심하지 마. 그리고 체력 관리에도 신경 써. 전공의 때하고는 달라.”
“명심하겠습니다.”
스승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실린 응원은 항상 힘이 된다.
김지훈이 밝게 웃으며 외래로 향했다.
그 시간 강병옥도 웃고 있었다.
“진우야, 드레싱만 제대로 하면 누가 했는지 어떻게 알겠어? 불안해하지 말고 얼굴 펴, 인마. 고맙다. 바쁠 땐 서로 도와 가며 일하자.”
얼굴이 벌게진 송진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다행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예약 환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조급해한다고 환자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환자 오면 수술 방으로 연락하세요.”
느긋하게 마음먹고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이준영 교수의 수술이 시작됐다.
완벽하게 준비를 하고 써드 자리에 서서 참관하기를 반복했다. 피곤이 채 풀리지 않은 데다, 솔직히 참관은 가장 지루한 일이기도 했다.
순간순간 졸음이 밀려왔다. 하마터면 다리까지 풀릴 뻔했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뗐다.
“조는 놈이 있네.”
역시 귀신이다.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써드는 볼 수 없는데,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모양이다.
어쨌든 스승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났다. 간간이 마주치는 고경아의 눈길에 때 이른 각오까지 다졌다.
‘우리 가족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해야 돼.’
어느새 오전 수술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드디어 구내식당에서 교수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다.
첫술을 뜨는 순간 이상스러울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우습지만 교수가 됐다는 또 다른 실감이었다.
“형, 교수 된 보람이 있네요.”
“별게 다 보람이다. 근데 지훈아, 너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냐? 내가 다 눈치가 보여, 인마.”
아닌 게 아니라, 식판이 흘러넘칠 정도로 밥이 수북했다.
약간은 멋쩍었지만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다. 아무리 피곤해도 식을 줄 모르는 식욕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는 먹어 줘야 힘이 나죠.”
말 몇 마디 오가는 사이에 식판이 깨끗해졌다.
수련을 하는 동안 저절로 습득하게 되는 외과 의사들의 특징이다. 언제 응급 수술이 뜰지 모른다. 천천히 먹었다간 몇 숟갈 뜨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온몸에 각인되는 것이다. 술이든, 밥이든 가공할 속도는 필수였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끝냈다. 졸음이 무지막지하게 몰려왔다. 전공의 때라면 찬물에 샤워를 하거나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졸음을 쫓았겠지만, 이제는 펠로우다. 재빨리 연구실로 가 알람을 맞추고 조각 잠을 청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30분의 짧은 잠인데 눈이 반짝 떠졌다.
‘아! 잘 잤다.’
운도 좋다.
네 단계 수면 패턴 중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단계까지 갔다 온 모양이었다.
누구나 가끔은 경험하듯, 이렇게 깊은 잠은 시간과 상관이 없다. 단 15분 정도로도 3시간에 버금가는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결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오후 일과를 준비했다.
수술이 막 시작되기 전에 외래에서 연락이 왔다.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혹시 환자 있나요?”
최대한 태연하려 애썼지만 은근히 기대가 된다.
(네. 한 분이 3시에 진료를 신청하셨네요.)
“그래요? 알았어요. 시간 맞춰 내려갈게요.”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다.
‘오케이!’
눈이 점점 더 말똥말똥해졌다.
너무 들뜬 게 표시가 난 모양이었다. 집도의 자리에 들어서던 이준영 교수가 물었다.
“외래에 환자 있어?”
역시 귀신이다.
“예. 3시에 한 명 있습니다.”
그것으로 스승의 말은 끝이었다.
이내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됐고, 참관을 하던 김지훈은 시간에 맞춰 조용히 빠져나왔다.
한달음에 외래로 달려가 복장부터 살폈다.
새하얀 가운.
교수 김지훈.
어떤 면에서는 지금이 바로 첫 진료라고 할 수 있었다.
시작이 좋아야 앞으로도 쭉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환자를 기다렸다. 전처럼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는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어떤 환자일까?’
“선생님, 환자분 오셨어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외래 간호사가 함께 들어왔다.
73세 남자 환자, 권태경.
특별한 과거력은 없었고,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는 환자였다. 어떤 경우에도 바이탈 체크는 기본이다. 혈압과 심박동수 등이 정상적인 것을 확인하고 마주 앉았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습니까?”
“어이구! 되게 젊은 선생님이시네. 개인 병원에서 탈장인데 나이가 많다고 큰 병원 가야 한다고 해서 왔어요. 난 불편하지도 않은데 애들까지 성화를 부리네.”
“그렇습니까? 일단 일어나서 바지 좀 내려 보실까요?”
“여기서?”
“확인은 해 봐야죠. 어느 쪽이죠?”
환자 눈에는 간호사도 여자다. 게다가 보호자 중 한 명은 며느리로 보였다.
잠시 밖에 나가 있으라고 했지만, 그래도 불편한지 환자가 눈치를 보며 허리띠를 풀었다.
오른쪽이라는데 뛰쳐나온 종물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경우 탈장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복압을 증가시키면 압력을 못 이긴 장이 탈장 구멍을 통해 뛰쳐나오기 마련이다.
“배에 힘 꽉 줘 보세요.”
끙 소리가 났다.
우측 서혜부 일부가 볼록 부풀어 올랐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배에 힘 빼시고 누워 보실까요?”
부풀어 올랐던 부분이 스르륵 사라졌다. 들락날락하는 것이 100퍼센트 탈장이다.
김지훈이 외래 차트에 증상과 진단명을 써 넣었다.
Protruding mass on Rt. inguinal area.
Indirect Inguinal Hernia. Rt.
(우측 서혜부의 돌출된 종물. 우측 서혜부 간접 탈장)
필체가 괜찮다. 환자는 알아볼 수 없지만, 역시 영어가 한글보다는 훨씬 쓰기도 쉽다.
사실 의사도 순수 한글로 표현한 증상이나 진단명은 머리에 딱 들어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번역의 한계일 것이다.
환자를 앞에 두고 잠깐 샛길로 빠졌다.
지금은 설명부터 해야 할 일이었다.
“장이 쉽게 나왔다 들어가는 걸 보니 다행히 심한 상태는 아니네요. 하지만 수술을 미룰 경우 여러 가지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는 데다 연세가 많으셔서 빨리 수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의사 선생님, 꼭 해야 하나?”
존대 반, 반말 반이었다.
전공의 때부터 무수히 경험한 일이기에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사실 지나친 하대만 아니라면 노인들의 반말은 친근하면서도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그럼요. 장이 너무 많이 뛰쳐나와서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가질 않은 상태가 되면 썩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크게 열고 장까지 잘라야 하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환자가 흠칫 놀라며 보호자를 보았다.
“아버지, 잘 들으셨죠? 고집 부리지 말고 고생하시기 전에 수술하세요. 선생님, 연세도 있으시고 수술 후에는 꽤 아프다고 하던데, 괜찮으실까요?”
이미 개인 병원에서 설명을 들었는지 보호자들은 고령에 따른 문제와 수술 후 통증을 걱정하고 있었다. 권태경 환자의 눈빛도 은근히 불안해 보였다.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대안이 있다. 기회이기도 했다.
단, 수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빠르게 수술 과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다.
“전통적인 수술은 그런 우려가 크지만, 복강경으로 하면 상당 부분 해소가 됩니다. 비용이 조금 더 들지만, 전체적인 면을 따지면 훨씬 더 유리한 수술법입니다.”
“복강경이요? 그런 수술을 한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탈장도 가능한가요?”
“예. 이미 몇몇 환자들에게 시행한 수술입니다.”
물론 이준영 교수의 환자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더욱 자신을 가져도 좋았다. 든든하게 뒤를 받쳐 주는 스승의 존재만으로도 복강경 수술을 권할 수 있었다.
보호자들이 고민에 잠겼다.
‘이왕이면 복강경으로 합시다. 그게 환자분한테도 훨씬 좋다니까요.’
복강경을 이용한 탈장 수술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수처뿐이었다. 수처가 핵심인 수술이긴 했지만, 솔직히 처음부터 끝까지 집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꺼림칙하기는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감만 믿고 적극적으로 권유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조용히 기다렸다.
보호자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잠시 상의를 한 보호자들이 결정을 내렸다.
“복강경 수술로 해 주십시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수술은…….”
수술 날짜를 잡으려던 김지훈이 말꼬리를 흐렸다. 마음 같아서야 내일이라도 당장 하고 싶지만, 비용과 병실 문제부터 검사까지 챙겨야 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다인실을 원하신다고요?”
외래 간호사가 재빨리 원무과에 전화를 했다.
“선생님, 다음 주 수요일에 병실이 난대요. 요샌 거의 다 다인실을 원하셔서 잡기 어려운데, 생각보다 빨리 나와서 다행이네요.”
일주일 후인데 생각보다 빠르단다.
IMF의 여파였다. 병원 직원들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가뜩이나 수요가 몰리는 다인실을 구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때였다.
형편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 보호자들도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입원을 시키고 수술까지 하는 이상, 경제적인 문제도 신경을 써야겠어.’
어쨌든 결정이 났다.
무심코 목요일을 수술 날로 잡으려던 김지훈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첫 정규 수술이다. 완벽하게 끝내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스승과 함께 수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그동안 자신을 가르쳐 온 스승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 정도는 분명 이해해 줄 스승이었다.
‘스승님이 수술하시는 날이지만 양해해 주실 거야. 내 수술 날 수술하면 더 서운해하실지도 몰라. 흠! 설마 수술할 시간을 못 낼 정도로 외래 환자가 오지는 않겠지.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허락부터 받아야 할 일이었지만, 스스로 변명거리를 만들었다.
환자에게 확고한 말투로 정확한 날짜를 주는 것 역시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럼 다음 주 수요일에 입원을 하시고, 수술에 필요한 검사는 그때 하겠습니다. 수술 날짜는 금요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젊은 선생이 시원시원해서 좋네.”
무사히 진료를 마쳤다.
입원과 수술 날짜까지 스스로 모두 결정했다. 중간에 환자나 보호자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지만 기분만큼은 날아갈 것 같았다.
허구한 날 보는 환자를 봤을 뿐인데 저렇게 좋을까?
입이 쭉 찢어진 김지훈을 본 외래 간호사가 웃었다.
그 탓인지 금요일이 진료하는 날이라는 것을 외래 간호사도 깜박했다. 한참 후에야 생각이 났지만 이미 결정이 난 상태였다. 외래 환자도 적어 특별하게 문제 될 일도 없을 것이라 여겼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수술 방으로 향했다.
같은 날 외래 진료를 하는 이경석의 진료실이 보였다. 이번만큼은 자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던 김지훈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8명이나?
경이적인 숫자다.
위장관, 대장 항문, 간담도 순으로 환자가 많다지만, 이제 두 번째 진료 날인데 너무 많이 봤다.
입 벙긋해 봐야 거만한 웃음만 되돌아올 것이다.
김지훈이 슬며시 몸을 돌렸다.
‘어쩐지 수술 방에서 안 보이더라. 아후! 쪽팔려.’
이준영 교수의 마지막 수술이 진행 중이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문지르며 수술실로 들어간 김지훈이 조용히 써드 자리에 섰다.
픽픽 웃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마무리만 남았을 때 이준영 교수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수술 환자야?”
“예. 라파로 탈장 환자입니다.”
“준비 잘해.”
놀라지도 않는다. 라파로면 축하해 주거나, 아니면 주의할 점이라도 말할 법한데 무반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적응된 일이고, 꼭 해야 할 말도 있다.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입을 열기 힘들었다.
수술 날을 함부로 바꾸는 것은 교수들끼리도 양해를 구하는 일이기에 은근히 걱정이 됐다.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밖에 없는 스승인데도 말이다.
‘어후! 그냥 목요일에 할 걸 그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선생님, 다음 주 금요일에 하기로 했습니다.”
수술 스케줄에 문제가 생길 텐데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번 반응은 조금 당황스러운지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외래에 라파로 탈장 테이프 있다. 참고해.”
우하하하!
역시 스승이다.
그렇게 무뚝뚝한 성격 속에 어쩌면 저렇게 섬세한 마음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히죽히죽 웃음을 참지 못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오늘도 신기동 교수의 수술이 있다. 국소마취 수술이기 때문에 날짜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고 해도, 애초에 정해진 수술 날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혁원은 이미 긴장에 휩싸인 채였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했건만 또 탔다.
“이래서 이거 수술을 줄 수나 있겠어?”
순간 귀가 쫑긋거렸지만, 연이어 날아드는 날카로운 비수에 땀만 빠질빠질 흘렸다.
그나마 이혁원이 환자를 옮기는 중이라, 둘만 있는 자리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어후! 혈관이 어려운 거야, 아니면 신기동 선생님이 어려운 거야? 이 정도 하면 괜찮지 않나?’
입이 오리 주둥이처럼 빠져나올 일이었다.
그런데 몸은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두 손이 저 혼자 혈관 수술을 복기하고 있었다.
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염원일지도 몰랐다.
‘어이구! 수술 끝난 지가 언젠데 이놈의 손은 또 왜 이래? 그래. 타지 않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이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끊임없이 노력하시네. 난 아직 멀었어.’
아주 바람직한 오해다.
회진을 돌고 이혁원이 제출한 리포트를 점검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끝냈다.
빨간 볼펜이 허공을 날자 함께 발표를 듣던 송진우는 벌게지고, 강병옥은 표정을 잃었다.
“이혁원, 너 2년차다. 1년차도 이것보다는 더 준비를 잘할 것 같지 않아? 쯧! 내일 낮에 시간 나는 대로 외래에서 비디오테이프 하나 받아 와.”
“어떤 테이프요?”
“라파로 탈장이야. 그것도 리포트 작성해.”
“언제까지…….”
김지훈의 매서운 눈빛에 목소리가 쏙 들어갔다. 당연히 내일까지다.
눈만 껌벅거리는 이혁원을 뒤로하고 병원을 나섰다. 언제, 어떤 콜이 올지 모르지만 상쾌한 시간이다.
이미 8시가 훌쩍 넘었다. 정시 출근은 가끔 가능할지 몰라도 정시 퇴근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즐겁기만 했다. 더구나 오늘은 오프다.
고경아와의 저녁이 정말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함께 TV를 보며 두런두런 오늘 있었던 일을 나누는 자그마한 호사도 누렸다. 라파로 탈장을 잡았다는 말에 고경아가 뛸 듯이 기뻐했다.
간만에 눈빛 교환하며 손잡고 잤다.
아니, 며칠 안 됐나?
집에서 놀고먹을 때 낮밤을 가리지 않았던 터라, 그렇게 느껴지나 보다.
가족 계획상 삼신할미의 방문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렇다고 몸부림칠 일은 절대 없었다.
방법이야 여러 가지 아닌가!
교과서에 다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