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타오르는 불길들 (2)
어느새 잘라야 할 부분이 모두 박리됐다.
“장겸자.”
따르륵! 따가각!
혈류가 확실하게 유지돼 밝은 선홍색으로 보이는 부분을 잡았다. 평행 결장과 소장의 말단 부위인 회장이다.
능숙하게 상행결장의 양끝을 자르고 연결을 시도했다.
원칙은 이미 몸에 익었다.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융통성만 발휘하면 된다.
염증이 퍼져 다소 약해지긴 했지만 이제는 문제가 될 소지가 없었다.
대장과 소장을 이중으로 봉합하는 김지훈의 손이 특유의 빛을 발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과감했다.
“타이!”
마지막 봉합이 끝났다.
확실하게 연결됐는지 두 번 세 번 점검한 후, 배속을 깨끗하게 씻었다. 눈에 안 보이는 고름까지 모두 제거하기 위해 꼼꼼하게 구석구석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지.’
드레인을 박기 전, 송재덕 교수를 보았다.
판단을 구할 참이었다.
수술 부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송재덕 교수가 슬그머니 뒤로 빠지며 말했다.
“지훈아, 교수야, 왜 날 보니? 집도의는 너다. 네가 잘 끝났다고 판단했으면 배 닫아야지. 난 모른다. 몰라. 지훈아, 교수야, 뭐하니? 뭐해? 바깥바람 오래 쐬면 장끼리 더 잘 들러붙는 거 잘 알잖아. 천천히 하자. 천천히. 우리 경석이는 수술 다 끝냈나?”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두서없는 말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지만 수술을 잘 끝냈다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빨리 마무리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이경석의 수술을 보기 위해 몇 번이나 자리를 비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믿어 주시고, 마음까지 편하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 힘차게 외쳤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나 수고했지. 지켜보는 것도 힘들다. 힘들어. 근데 펠로우도 수고했다고 하는데, 너희들은 왜 아무 말이 없어?”
깜짝 놀란 전공의들이 동시에 외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좋다. 좋아. 이 맛에 산다. 이 맛에. 허허! 허허!”
특유의 너털웃음 소리가 옆방으로 건너갔다.
회복실로 옮겨지는 환자를 살피고, 보호자에게 수술 결과를 설명했다.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보호자들의 얼굴에 걱정과 안도감이 동시에 감돌았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닙니다. 아직 패혈증이 발생할 우려가 있어서 오늘 밤은 중환자실에서 보겠습니다. 순조롭게 회복되면 내일 중으로 올라가실 수 있을 겁니다.”
땀에 흠뻑 젖은 김지훈을 보는 보호자들의 눈빛에 신뢰가 실려 있었다.
외과 의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자 보람이었다. 하기에 더욱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나직하게 말했다.
“혁원아.”
뒷말은 필요 없다.
예정에도 없이 자연스럽게 김지훈 파트 전공의가 된 이혁원이 나직한 한숨을 터트렸다.
입원 환자는 3명에 불과했지만, 그중 2명은 중환자실에 있다. 리포트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불과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다.
신기동 교수의 칼날은 무섭다. 김지훈의 눈과 일복은 더 무섭다.
‘복을 넘어 폭탄이네, 폭탄. 후우! 리포트는 언제 쓰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중환자실로 향하던 이혁원이 멈칫거렸다.
김지훈의 발걸음에 힘이 넘쳤다. 체력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문득 송재덕 교수의 웃음소리까지 떠올랐다.
무엇 때문일까?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불현듯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일 폭탄을 견뎌 낸다면 가슴 깊은 곳에 담고 있는 꿈을 한 발 더 먼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혁원이 힘차게 중환자실 문을 열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오더를 내며 끙끙대던 송진우가 반색을 했다. 하나하나 오더를 짚어 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였다.
‘백 일 당직 서는 1년차보다 내가 더 힘들어하는 게 말이 되나?’
그뿐이 아니었다.
“선생님, 어떻게 수술을 저렇게 잘하시죠?”
“니 눈에도 그렇게 보여?”
“저도 인턴 열심히 돌았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김지훈 선생님처럼 수술할 수 있겠죠?”
이혁원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이제 이틀밖에 안 된 송진우의 눈에도 김지훈이 대단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돌연 각오가 펄펄 끓어 넘쳤다.
‘김지훈 선생님, 기다리세요. 제가 꼭 넘고 맙니다.’
김지훈은 이미 이혁원의 커다란 목표였다.
전공의 두 놈의 시뻘건 눈이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환자를 살피고 돌아서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이 자식들이 갑자기 왜 이래? 혹시 일이 많다고 항의하는 거야? 니들 그러면 죽는다. 나도 힘들어, 이 자식들아.’
속이 어떻든 한참 아래인 놈들이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쯤이야 가볍게 받아 줄 수 있다.
태연한 얼굴로 이혁원과 송진우의 눈빛을 흘려보낸 김지훈이 수술 방으로 향했다.
이경석의 수술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배를 닫기 직전이었다. 수술실에 들어온 김지훈을 본 이경석이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위암이 아닌 이상 난이도는 별 차이가 없는 수술이었다. 응급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염증이 심한 상태였다면 더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늦게 시작하고도 먼저 끝낸 것이다. 같은 펠로우로서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지훈아, 수술 끝났구나. 수고했다. 수고했어.”
송재덕 교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김지훈은 탄성을 내뱉었다.
“야! 위치가 안 좋아서 되게 힘들 것 같았는데 정말 깔끔하게 끝냈네요. 연결 부위가 정말 예쁘네.”
다른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다면 도리어 자존심이 상해 발끈했을 것이다. 하지만 4년을 함께하며 누구보다도 김지훈을 잘 아는 이경석이었다.
진심이었다. 제 자랑이라고는 모르는 놈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도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면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하면 될 일이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속 편한 일이기도 했다.
선의를 가진 경쟁자를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자신에게도 크나큰 득이 될 것이다.
이경석이 기분 좋게 웃었다.
“선생님, 피곤하실 텐데 빨리 들어가시죠. 벌써 1시가 넘었습니다. 지훈아, 너도 빨리 들어가. 나 대신 고생했어. 고맙다.”
각자 추구하는 바가 같다고 해도 사람 사는 세상이 똑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힘들었던 하루의 일과를 좋은 기분으로 마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었다.
중환자실 환자를 다시 한 번 살핀 후 병원을 나섰다.
거의 20시간 만에 퇴근인데, 몇 시간 후에 다시 출근을 해야 한다.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어후! 피곤해. 빨리 씻고 자자.’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조심 문을 열었다.
마루 불을 켜자 고경아가 정성스럽게 차려 놓은 밥상이 보였다.
그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병원 근무도 힘들 텐데 자신을 위해 밥까지 차린 고경아가 안쓰럽고 미안했다.
곤히 잠든 모습이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사랑해요, 경아 씨.’
길고 긴 하루가 그렇게 끝났다.
***
새벽 3시다.
늦은 수술 덕에 아직도 전공의들이 의국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할 일이 잔뜩 남은 송진우가 눈을 비비다 말고 이혁원을 보았다. 리포트를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지훈 선생님 정말 대단하세요.”
“아까 얘기했잖아.”
“수술하시는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그래요. 야! 거기다 체력까지 끝내주시는데, 저렇게 일하셨으면 전공의 때 타지도 않으셨겠네요.”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픽픽 터졌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막 숙소로 향하려던 삼사 년차들까지 자리에 주저앉았다.
송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차팅을 하고 있던 강병옥도 관심을 보였다.
“진우야, 김지훈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
박순용의 말에 송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멋있으시잖아요.”
“그럼 두 가지만 해.”
눈이 반짝거린다.
“첫째, 잠은 포기할 것. 둘째, 지금부터 수련 끝날 때까지 죽도록 탈 것. 다른 선택은 없어. 눈이 시뻘게진 채로 때론 재가 되어 날리고, 때론 비수에 난도질을 당하고, 때론 조곤조곤한 말투에 오그라드는 걸 4년 내내 하면 돼.”
“예? 설마 그렇게 생활하셨단 말이에요? 잠은 몰라도 타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또 웃음이 터졌다.
“우리 중에, 아니 전공의 역사상 통틀어 가장 심하게 탄 사람이 바로 김지훈 선생님일 거다. 한마디로 인간 승리이자, 긍정의 왕이라고나 할까? 아마 지금도 우리 모르게 타고 있을지도 몰라.”
송진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이혁원을 보았다.
“왜 날 봐? 박순용 선생님이 거짓말할 분이 아니잖아. 그리고 넌 제대로 탄 적도 없으면서 뭘 그렇게 긴장을 해? 다른 생각 말고 백 일 당직이나 열심히 서.”
한동안 잠도 잊고 김지훈에 관한 말들을 쏟아 냈다.
강철 체력과 강인한 정신력.
뜨거운 가슴과 환자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
놀라운 손, 그리고 후배들에 대한 사랑?
인생의 모토라는 카르페 디엠까지.
후배들이 김지훈을 보는 대략적인 시각이었다.
물론 뒷담화도 잊지는 않았다. 세상에 결점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인 데다, 그놈의 후배 사랑이 문제였다.
이내 술은 없지만 맛있는 안주거리가 됐다.
“야! 그때 얼마나 탔는지, 학교 다닐 때 실컷 때려 줬어야 했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휴가라고 놀러 왔을 때 확 굶겨 보냈어야 하는 건데. 뭐, 그 덕분에 수술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도 몸이 떨린다니까요. 서도진 선생님, 내 마음 알죠?”
“알죠. 어후! 난 1년차 시작할 때 나만큼만 하라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우습게 생각했는데 정말 3년 내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어떻게 그렇게 근무가 겹칠 수 있지? 덕분에 배운 게 엄청 많긴 하네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일이었다.
“난 인턴 때 김지훈 선생님에게 큰 신세를 졌어. 수련 때는 누구보다도 엄하고 딱딱하게 행동하셨지만, 사실 하나도 변한 게 없는 선생님이야.”
문득 지난날을 떠올린 안호석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지훈이 형, 아직도 아버지란 사람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를 보면 마지막을 함께한 일은 잘한 것 같습니다.’
단지 나이가 많고 학번이 빠르다고 해서 선배 대접을 온전히 받을 수는 없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어려움을 함께 걱정해 주고, 같이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선배일 것이다.
조용히 선배들의 말을 듣고 있던 이혁원과 송진우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주먹까지 힘차게 쥐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새싹과 이제 막 잎을 틔운 새내기와 다름없는 전공의가 또 한 번 각오를 불태우는 밤이었다.
모두 잠자리에 들고 1년차들만 남았다. 강병옥이 크게 하품을 하며 송진우를 보았다.
“진우야, 아침 드레싱 때 이 환자들 좀 부탁할게. 내과 병동에 치료할 환자가 있어서 시간이 부족하네. 마이너 수술 환자라 간단하게 하면 돼. 고맙다.”
드레싱을 할 환자가 표시된 리스트를 받아 든 송진우가 눈만 껌벅거렸다.
사정을 이해한다고 해도 100일 당직 기간인 데다 이제 이틀 지났을 뿐이었다. 만에 하나 윗년차들에게 걸리면 둘 다 죽음이었다.
강병옥이 툭툭 등을 치며 말했다.
‘너는 군대 때문에 나하고 경쟁할 일이 없으니까 앞으로 잘 지내보자. 언젠가는 나한테 고마워할 날이 올 거야. 혹시 내가 끌어 줄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일 커피 한 잔 살게. 간호사들 입단속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우리만 입 다물면 걱정할 것 없어.”
같은 년차지만 학교 선배의 부탁이었다.
송진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맙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빨리 일 끝내고 자. 이제 이틀 됐는데 생각보다 더 피곤하네.”
침대에 눕던 강병옥이 눈가를 좁혔다.
‘역시 김지훈 선생님밖에 없겠지?’
생각도 잠시, 이내 코 고는 소리만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