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73화 (573/1,329)

제3화. 5년차? (2)

휘파람을 불며 도착하자마자 고경아를 꽉 안았다. 피로가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따뜻한 물로 시원하게 샤워를 한 후 늦은 식사를 했다.

시장이 반찬일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솜씨 때문일까?

감동이 밀려올 정도로 맛있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뚝딱 두 그릇을 비웠다. 고경아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감돌았다.

후식으로 달달한 커피 한 잔을 곁들였다.

“조금만 마셔요. 그러다 잠 설치면 어떡해요?”

“카페인 따위는 내 잠을 막지 못하지. 아우! 고소하다. 역시 우리 경아 씨가 타 주는 커피가 제일 맛있어.”

“슈퍼에선 파는 믹스 커피예요.”

“어? 그런가? 근데 왜 병원에서 먹는 거하고 다르지?”

깨가 우수수 쏟아지는데, 등 따습고 배까지 부르다. 눈이 저절로 감기는 것은 당연지사다.

첫날이라 하루 종일 긴장의 연속이었다. TV를 보며 눈을 깜박거리던 김지훈이 어느새 꿈나라로 달려갔다.

아직 2세 계획은 없어 매일매일 손잡고 잘 수는 없다. 눈도 함부로 맞추면 안 된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잠에 전념해야 한다. 첫날의 긴장을 풀지 못하면 내일은 더 힘들어질 것이다.

모두가 잠든 평화로운 밤이다. 하루의 피로를 깨끗이 씻어 내야 할 시간이다.

얼마나 잤을까? 아주 익숙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따르르릉!

아주 익숙한 손길이 어깨를 흔들었다.

“지훈 씨, 응급실이에요. 전화 받아요.”

딱딱하고 어딘가 불편한 병원 침대와는 달리, 푹신하고 편안한 침대는 눈꺼풀을 더욱 무겁게 했다. 따스하게 전해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온기는 정신마저 나른하게 했다.

좀처럼 잠기운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보세요?”

(서도진입니다. 단체 교통사고로 환자 여섯 명 내원했습니다. 해당 과 전공의들 모두 내려온 상태인데, 연락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일단 전화드렸습니다.)

믿을 만한 후배들이었다. 더구나 일반 외과 총치프인 서도진이 있다.

“우리 과 환자는 없어?”

(예. 희한하게 한 명도 없습니다.)

“손은 안 모자라?”

(응급 의학과 1년차까지 있어서 충분합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수고해.”

전화를 끊고 다시 잠을 청했다. 어디선가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뭐하니? 뭐해? 환자 있다. 환자 있어. 아직도 자니? 자는구나. 그래. 지훈이 니가 자는구나.’

가슴이 두근거리며 불안감이 다가왔다.

그렇게도 편안했던 잠자리가 마치 모래라도 뿌린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며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어후! 우리 과 환자도 없는데 나가 봐야 하나? 도진이가 있으면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은데.’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옷을 입다 못해 구두까지 신고 있었다. 곤히 잠든 고경아가 깰세라 조심조심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새벽 3시다.

외과 환자만 보는 덕에 기존 응급실보다는 한가해 보였지만 역시 아수라장이었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전공의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바삐 움직였다.

급한 불을 끄고 전공의 당직실에서 잠시 쉬던 서도진이 급히 나오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당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당직을 서게 된 이혁원도 함께 있었다.

“선생님, 왜 나오셨어요?”

“외과 센터장님 오더를 펠로우가 어길 수는 없잖니. 첫날부터 혼나고 싶지는 않다. 잠깐 보고 갈 테니까 쉬어.”

“어후! 늦게 퇴근하셨다면서요, 선생님. 여기 우리에게 맡기시고 빨리 들어가세요. 내일, 아니 오늘이네. 과장님 수술만 위암 포함해서 네 건입니다. 알고 계시죠?”

작년과는 달리 이혁민 교수는 화목 이틀만 수술을 하기 때문에 수술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 어제처럼 시작 부분만 담당한 후 참관을 해야 한다면 보통 힘든 시간이 아닐 것이다. 이건 체력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알고 있어. 도진이 너도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내 걱정하지 말고 빨리 올라가서 자. 혁원이 너는 나하고 환자 확인 좀 하자.”

환자 차트를 확인했다. 이왕 나온 김에 파악을 해 놓으면 아침 보고가 그만큼 수월할 것이다.

이혁원이 졸린 눈을 비비며 바짝 옆에 붙었다.

말투와는 달리 환자에 관해서는 상당히 꼼꼼한 송재덕 교수였다. 치료 중인 환자들에게 특별한 문제가 없는지 확인은 해야 했다.

더구나 외과 센터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일단 응급실부터 자리 잡아야 한다.

제법 시간이 흘렀다. 다시 졸음이 몰려오며 눈이 뻑뻑해졌다.

그때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소리가 심상치 않아. 불안해.’

응급실 앞이 불빛으로 번쩍였다. 간호사들이 재빨리 이동식 침대를 끌고 나갔다.

얼굴이 창백해진 환자가 축 늘어진 채로 실려 들어왔다. 의식은 흐릿해 보였고, 이마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한눈에도 일반 외과 환자라는 감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보행자 교통사고였다.

인턴과 응급 의학과 1년차가 급히 환자를 살폈다.

김지훈에게 눈길을 준 이혁원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재빨리 합류했다.

습관적으로 달려가려던 김지훈이 움찔 다리에 힘을 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전공의들이 할 일이다. 믿을 수 있는 후배들이야.’

“바이탈은?”

“혈압은 구십에 육십이고, 심박동수는 백십 회예요.”

“수액 달고 CT 준비해요. 인턴 선생, 비지에이 빨리 나가자. 간호사, 1년차 콜해 줘요.”

다소 잠잠해졌던 응급실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00일 당직 기간이다. 간호사가 전화기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송진우가 모습을 보였다.

이혁원의 오더 아래 바이탈을 잡기 위해 모두들 필사적으로 환자에게 매달렸다.

전공의들의 고함 소리.

수액과 피를 들고 달려가는 간호사.

검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새롭게 내려지는 오더.

급박하게 울리는 심전도 소리.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가 들어오면 응급실은 언제나 전쟁터와 다름없어진다. 아무리 설비가 좋아지고, 기술이 발전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혁원이 서도진에게 중간 노티를 했다. 가운 여기저기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몸은 급하게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동시에 환자는 CT실로 옮겨졌다.

한쪽에 서서 조용히 그 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당직실로 들어갔다.

이제 곧 서도진이 내려와 상황을 정리할 것이다. 노티를 받고 결정만 하면 된다.

마음 한편으로는 직접 환자를 보고 싶었지만, 믿을 수 있는 후배들이자 의사였다. 손이 모자란다면 모르지만, 지금 손을 보태 봐야 시간이 단축될 소지도 없었다.

‘이혁원, 정말 열심히 해 왔구나.’

소파에 앉아 어느 부분이 손상됐을지 생각했다.

비장? 간? 혹은 소장이나 대장 동맥?

각각의 경우에 따른 수술 방법을 상기했다. 모든 과정이 마치 어제 수술을 한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손만 따라 준다면 문제없이 해낼 것이다.

김지훈이 물끄러미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두 손에 환자의 생명이 걸려 있다. 막중한 책임감이 어깨에 걸렸다.

똑똑똑!

서도진이다.

“비장 파열이 의심되며, 복부 소견상 장 손상도 배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이탈이 아직 확실하게 잡히지 않았습니다만, 가급적 빨리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총치프의 판단이다.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처치실로 향했다.

복부 CT를 확인한 결과 서도진의 판단과 일치했다. 모니터 화면에 뜬 바이탈이 아슬아슬하게 경계점을 넘나들고 있었다.

“의식 상태는?”

“기면(졸음) 상태입니다만, 브레인(Brain:뇌) CT상 특별한 문제는 없습니다.”

“보호자는?”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항상 같은 광경이다.

사고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도착한 보호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부인으로 보였다. 함께 온 다른 보호자들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도진이 조용히 속삭였다.

“환자 직업이 청소부입니다.”

새벽어둠 속에서 거리 청소를 하다가 차에 친 환자였다. 넉넉지 못한 집안일 것이다.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사고는 치명적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것이다. 환자에겐 귀천이 없다지만 마음이 아려 왔다.

수술 전이든, 중이든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금물이다. 냉철한 이성만이 환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김지훈이 착잡한 마음을 추스르며 간호사를 보았다.

“오늘 당직 교수님이 누구시죠?”

간호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차! 내가 당직 교수지.’

하루 만에 적응될 일이 아니었다. 습관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고 했다.

헛기침을 한 김지훈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백듀티 교수님이요.”

“아! 이준영 선생님이세요.”

‘비장과 장 파열 정도면 나 혼자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진단을 믿고 내일 아침에 사후 노티하자.’

잠깐의 어색함을 뒤로하고 보호자를 만났다.

“선생님, 아이 아빠는 괜찮은가요?”

복부 CT를 보며 상태를 설명했다.

“비장 손상 및 장 손상이 예상됩니다. 혈압이 확실하게 잡히지 않았지만 지금 바로 수술해야 합니다. 늦으면 늦을수록 환자분이 위험해집니다.”

얼굴이 하얗게 변한 보호자가 비틀거렸다. 제대로 입도 열지 못했다.

동의를 받지 못하면 귀중한 시간만 잡아먹을 것이다. 김지훈이 보호자를 위로하며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항상 느끼는 일이었지만, 아이 엄마이자 아내인 여자는 강하다. 입술을 꼭 깨물며 마음을 진정시킨 보호자가 수술에 동의했다. 상황이 급박한 탓인지 누가 수술을 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도진아, 스케줄 내고 너도 들어와.”

“예, 선생님.”

이제 수술만이 남았다.

입원장에 사인을 하던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비장과 장 손상 수술 경험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감이 느껴지면서도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내 환자. 후우! 이제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는 그만하자. 살릴 수 있는 환자는 무조건 살려야 해. 이 환자가 바로 그런 환자다.’

단단히 각오를 했다.

환자를 올리라는 연락이 왔다.

새벽 5시다.

기존 응급실보다는 확실히 빠르게 환자 처리가 이루어졌다. 그만큼 뒷받침이 된다면 의사 역시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 환자를 건강하게 퇴원시킬 때까지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환자 올라갑니다.”

수술 방 앞에서 보호자를 다시 만나 설명을 했다. 수술과 마취의 위험 및 그에 따른 최악의 경우를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호자의 붉어진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애 아빠 꼭 살려 주세요.”

자신의 남편을 김지훈이라는 의사에게 맡겼다.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타깝지만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보호자에게 확신을 주지 못하고, 스스로도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진단 예측이 맞길 간절하게 바랐다.

수술실에 들어서자 이미 마취가 시작되고 있었다. 서도진과 송진우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혁원이 가슴 앞에 손을 모은 채 구석에 서 있었다.

“이혁원, 너도 들어올 거야?”

“예, 선생님. 써드 서겠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문의보다 실력은 모자랄지 몰라도, 마음과 각오는 이미 최고의 수술 팀이었다.

강한 자신감이 가슴 한구석을 채워 왔다. 이보다 더 어려운 수술도 거뜬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집도의 자리에 선 김지훈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펠로우가 된 지 하루 만에 첫 메이저 수술을 집도한다.

완벽하게 해내고 말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마취과, 수술해도 되겠습니까?”

“예. 시작하셔도 됩니다.”

마취과의 목소리에도 응원이 담겨져 있었다.

“메스.”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이 전해졌다.

김지훈의 손에 들린 메스가 예리한 빛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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