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첫 출근 (2)

“그리고 김지훈 선생은 이준영 선생님 파트만이 아니라, 신현수 선생이 돌아올 때까지 내 파트와 신 교수 환자도 관리해야 한다.”

으악! 두 번째 날벼락이다.

개운해지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세 파트 환자를 모두?’

솔직히 신현수의 빈자리까지는 생각했다. 이혁민 교수 혼자 모든 환자를 담당하기에는 벅차다는 사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경석도 있는데 혈관 파트까지 맡으라니 생각조차 하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준영 교수를 보던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하다는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신기동 교수 역시 똑같은 얼굴이었다. 도리어 이경석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재덕 교수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경석아, 구영선 교수가 그만뒀다. 그만뒀어. 그냥 쭉 있으면 좋겠는데 왜 그만두는지 모르겠다. 재순이가 있긴 하지만 나도 그렇고, 오상익 선생님도 병원 일 때문에 많이 바쁘셔서 손이 많이 달릴 거야. 많이. 그리고 지훈이 니가 제일 젊잖아. 그러면 됐지. 뭐가 필요해.”

홍재순은 물론 이경석까지 구영선 교수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그 때문에 펠로우임에도 불구하고 홍재순에게 수술하는 날을 월수금 3일이나 주었을 것이다.

균형추가 많이 기울어졌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애가 줄줄이 딸린 유부남보다는 처지가 나으니 말이다.

‘그래도 너무 일이 많은데. 죽겠네.’

“경석이가 대장 항문 파트를 다 맡아야 돼. 그러니까 지훈이가 나머지를 맡아야지. 그치? 내 말이 맞지? 경석아, 너는 나랑 열심히 하자. 열심히. 대장은 어렵고, 나는 나이가 많잖아. 빨리빨리 확실하게 배워서 나 대신 환자 다 봐야 된다. 다 봐야 돼. 음! 좋다. 좋아.”

확실히 쐐기를 박았다.

식은땀은 나는데 왠지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내심 상당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김지훈으로서는 입을 열 처지가 아니었다. 펠로우 역시 이런 면에서는 전공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다른 교수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특별히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이 정도면 됐다. 앞으로 시간 많으니까 차차 얘기하자. 경석아, 가자. 회진 돌자, 회진.”

“송재덕 선생님, 이준영 선생님, 먼저 올라가십시오. 저랑 신 교수는 조금 있다가 올라가겠습니다.”

회진을 늦게 돌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했다. 비록 1년 동안이지만 파트 펠로우를 맡기로 한 김지훈과 회진을 같이 돌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혁민 선생님 파트는 1년이지만, 신기동 선생님 파트는 일석이가 올 때까지 3년을 돌아야 하나?’

김지훈의 등짝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그동안 일복 터진 놈이라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지만, 전공의 때는 으레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손일석의 말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일석아, 그동안 미안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준영 교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동으로 향했다.

원래 그런 양반이다.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럽기만 했다.

졸래졸래 뒤를 따르던 김지훈이 슬며시 이준영 교수의 진료실로 들어갔다. 오늘부터 스승과 번갈아 가며 외래 환자를 보아야 하는데, 인사는 하고 볼 일이었다.

김지훈을 본 외래 간호사가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축하드려요.”

“하하하! 쑥스럽네요. 혹시 오늘 볼 환자가 있나요?”

솔직히 기대를 갖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제 서른 초반의 나이에 갓 전문의가 됐다. 이런 애송이 의사에게 진료 예약을 할 환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게다가 근무 첫날이니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세 분 있으세요.”

“예? 외래 환자가 있다고요?”

“놀라셨죠? 11시부터 20분 간격으로 세 분 예약돼 있어요. 이준영 선생님께서 수술하신 환자들이에요. 전 주에 시간이 안 되신다고 환자분들에게 직접 전화하셔서 진료 날짜를 오늘로 바꾸셨어요.”

스승이란 이런 존재인가?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제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다. 무뚝뚝한 말투와 얼굴 속에 숨은 마음이었다.

복도에 선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회진을 잊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에는 늦었다. 부리나케 계단을 따라 본관 5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울증도 아닌데 벌써 몇 번째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우울했다, 다시 웃지를 않나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준영 교수가 송재덕 교수, 이경석, 홍재순과 함께 스테이션 앞으로 향했다. 동시에 얼굴이 시뻘게진 김지훈이 비상계단 입구에서 후다닥 달려 나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영락없이 회진에 늦은 전공의였다. 그것도 일이 년차, 혹은 많이 봐줘도 3년차 때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회진을 기다리고 있던 전공의들과 간호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눈만 껌벅거렸다.

도대체 저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분명 전공의가 아닌 펠로우다. 눈치는 보이겠지만 여유롭게 올라온다고 해서 대놓고 탓할 사람도 없다.

사실 그동안 김지훈이 쌓아 온 인상이 있기에 다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했을 것이다.

‘전공의도 아닌데 너무 서둘렀나?’

김지훈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이준영 교수 뒤에 섰다. 아직도 숨이 거칠기만 했다.

그 모습에 송재덕 교수가 소리 내 웃었다.

“김지훈 선생, 이젠 뛰지 않아도 된다. 천천히 다녀. 천천히. 그러다 넘어진다. 치프야, 도진아, 우리 간호사들. 여기 좀 보자. 김지훈 선생과 이경석 선생이 오늘부터 우리 과 교수로 근무하게 됐다. 뭐하니? 뭐해? 환영의 박수 쳐야지, 박수. 잘 왔다. 잘 왔어.”

때 아닌 박수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축하드려요.”

김지훈과 이경석이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했다.

이내 가벼운 소란과 흥분이 가라앉았고, 드디어 펠로우 첫 근무 날의 첫 정규 일과가 시작됐다.

간담도 파트 회진이다. 차트가 하나하나 넘어갔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단 한 명의 환자도 파악하지 못했다. 새로 들어온 1년차들의 이름과 얼굴이 낯설기만 했다. 전문의 시험이 끝난 후 게으름을 톡톡히 부린 결과였다.

‘첫날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번 주는 환자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겠네.’

올해 1년차로 들어온 송진우가 이준영 교수 옆에 바짝 붙은 채 긴장하고 있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얼굴이 벌겠다. 이제 막 전공의 수련을 시작했으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파트 치프인 안호석과 3년차 박순용은 제법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반면 2년차가 된 나종진은 여전히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과는 달리 그 모습들이 환하게 보였다.

‘저 자식들 속이 딱 보이는 게 내가 펠로우긴 펠로우구나. 선생님들도 우리 속을 빤히 보셨겠네.’

피식 웃으며 귀를 기울이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몇 달 사이에 환자가 더 많아졌다. 환자 리스트를 보니 간담도 파트만 무려 35명이었다.

복강경 수술을 받으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삼사 일 내에 퇴원을 한다. 즉, 환자 회전률이 엄청 높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입원 환자가 35명이라니, 이준영 교수가 얼마나 수술을 많이 하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스승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일단 반 정도는 책임지겠습니다. 수술 주실 거죠?’

김지훈만의 바람이자 기대였다.

“회진 돌자.”

이제 막 근무를 시작한 초턴이 앞장서 달렸다. 신임 1년차인 송진우의 가운이 펄럭였다. 안호석과 박순용, 그리고 나종진이 이준영 교수의 뒤에 바짝 붙었다.

김지훈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맨 뒤에 섰다.

위치가 애매모호했다. 전공의처럼 나설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전공들에게 파트 일을 모두 맡길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마디로 어정쩡했다.

‘이거 묘하네. 일단 내 자리와 역할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먼저겠어. 경석이 형은 잘하고 있나?’

맨 뒤에 서서 회진을 뒤따르는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차근차근 침착하게 자리를 잡아 가야 할 때였다. 교수들도 어떤 식으로 펠로우들을 이끌어야 할지 이미 생각했을 것이다.

무사히 회진이 끝났다.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 환자 수술 시작하고 있어.”

김지훈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예?”

“내가 알아서 들어갈 테니까 시작하고 있어. 내 수술 없는 때에는 이 과장하고 신 교수 수술 들어가.”

잠깐 멍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첫날부터 수술을 맡기다니,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히 파격이라 할 수 있었다. 전공의들도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선생님, 첫날부터 수술을 하시게 되네요. 역시 선생님이십니다.”

“에이! 그냥 시작만 하라는 말씀이시잖아. 첫 환자가 라파로지? 호석아, 잘해 보자. 그리고 송진우라고?”

“예. 1년차 송진우입니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낯이 익다. 4년차 때 인턴이었을 테니 그렇겠지만, 지금도 벌건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반갑다. 우리가 어떻게 수술을 준비하는지부터 잘 보고 배워. 백 일 당직 힘들다고 딴생각하지 말고 선배들이 한 만큼만 하면 돼.”

설마 김지훈만큼?

전공의 3명이 동시에 움찔거렸다.

“예, 선생님.”

선배를 보는 인턴과 전공의의 눈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지막을 일반 외과 픽스턴으로 장식한 송진우의 목소리에 힘이 팍팍 실려 있었다.

그동안 보아 온 아랫년차가 한둘이 아니다. 목소리만으로도 빠릿빠릿하다는 감이 척 다가왔다.

흐뭇하다.

회진이 이어졌다.

이혁민 교수 환자는 모두 50명이었다. 위장관 환자가 가장 많은 현실과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일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상당한 숫자였다.

“총치프 서도진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왜 이러세요, 선생님.”

신기동 교수 환자는 15명이었다. 거의 모두 만성 신부전 환자들이기 때문에, 수가 적다고 해서 힘이 덜 드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더욱 신경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깜짝 놀랄 일이 하나 있었다. 파트는 모두 다섯인데 치프는 4명이기에, 이전에는 3년차가 신기동 교수 파트를 맡아 왔다. 그런데 이제 막 2년차가 된 이혁원이 담당 전공의를 맡은 것이다.

의아한 일이었다.

“혁원아, 어떻게 된 일이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신기동 선생님께서 삼사 년차 선생님들은 말을 잘 안 듣는다고, 앞으로는 2년차하고 수술해야겠다고 하시긴 했습니다. 그땐 농담인 줄 알았는데, 텀이 정말 이렇게 정해졌습니다.”

“그래?”

아직도 1년차 때의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이혁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 파트의 환자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꽤나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는 2년차들이 돌아가면서 혈관 파트를 맡는다는 말이었다. 신기동 교수의 성격을 생각할 때 또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측이 맞는다면 후반기에 이혁원을 또 돌릴 수도 있었다.

‘혈관 파트 첫 텀이 혁원이란 말이지. 일석이에 이어 혁원이까지 점찍으셨나? 이 자식은 꼭 간담도를 해야 하는데 곤란하네. 에이! 이제 2년차 된 놈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무심코 시계를 보다 말고 흠칫 놀랐다. 수술 시작 10분 전이었다.

부리나케 달려 수술 방에 도착한 김지훈이 또 헐떡거렸다.

“김지훈 선생, 숨넘어가겠다. 천천히 다녀. 천천히.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우리까지 힘들어진다. 편하게 살자. 편하게. 경석아, 넌 뛰지 마라. 우리 교수다, 교수.”

옆에 있던 이경석이 헛기침을 했다.

정말 편하게 일하라는 소릴까?

알쏭달쏭한 모양이었다.

‘지훈아, 이게 무슨 뜻일까?’

‘나도 모르죠. 형이 판단하세요.’

서둘러 수술실로 향하는 김지훈을 본 송재덕 교수가 입가에 걸린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답 나왔다. 이경석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후다닥 수술실로 들어갔다. 바로 이런 모습이 이번 펠로우들의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나직한 너털웃음이 수술실 복도를 따라 울렸다.

바삐 걸음을 옮기던 김지훈이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첫날이라지만 전공의 때보다 시간이 더 없었다. 문득 누구에겐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막 교수가 됐을 때 전공의보다 일이 더 많아서 전공의 5년차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내가?’

등짝에서 찬바람이 쌩! 하고 불었다.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일단 맡은 파트만 3개에 환자는 100명에 육박했다. 그것도 불과 얼음, 그리고 날카로운 논리가 현란하게 날아다니는 파트다. 펠로우라고 대충 넘어갈 교수들도 아니었다.

당직은 또 어떤가?

주중에는 최소 이틀이다. 주말에도 3주에 한 번은 당직을 서야 한다.

일반 외과 환자가 없어도 응급실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면 나와 봐야 한다.

닥쳐 봐야 얼마나 힘들지 알겠지만, 일단 이 정도 일정이라면 전공의 2년차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5년차는커녕 잘 봐줘야 3년차였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진 김지훈의 한숨이 바닥을 따라 무겁게 흘렀다.

간신히 마취 시작 직전에 수술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공기.

차가운 무영등 불빛.

코끝을 스치는 소독약 냄새.

분주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수술 팀과 마취과.

몇 달 만에 들어온 수술실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었다. 그 속에 담긴 뜨거운 열정과 책임감도 여전했다. 풀렸던 두 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그렇다. 써전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수술실이다.

‘이제 진짜 시작인가?’

김지훈의 눈에 매서운 각오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