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68화 (568/1,329)

제1화. 첫 출근 (1)

월요일 아침 7시.

펠로우 첫 근무 시작이다.

진정한 의사, 최고의 써전이 되는 새로운 길에 들어서 첫발을 내딛는 날이다. 전공의 때와는 또 다른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임해야 할 때였다.

외과 센터 5층 연구실.

앞으로 홍재순, 이경석과 함께 사용할 방이다. 지금은 3명이 함께 사용하지만 전임 강사가 되면 개인 교수실을 줄 것이다. 물론 연구실도 어엿한 교수실이다.

김지훈이 자신의 책상을 내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인턴이 됐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불안, 일반 외과 전공의 1년차를 시작했을 때 느꼈던 흥분과 긴장이 뒤섞인 묘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훗날 펠로우 제도가 완전히 정착되면 위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어쨌든 지금은 펠로우도 어엿한 교수다. 그에 걸맞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만의 공간. 앞으로 내가 채워 가야 할 공간.’

책장이 휑하다. 지금은 비록 몇 권의 책과 논문뿐이지만, 언젠가는 수많은 연구 논문들로 가득해질 것이다.

가벼운 흥분과 설렘에 미소를 머금던 김지훈이 가운을 걸쳤다.

얼룩 한 점 없이 새하얗다.

교수 김지훈.

가운에 새겨진 이름과 직위가 무겁게 다가왔다.

이젠 일반 외과 전문의이자 펠로우다.

모든 환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를 지녔는지 잘 알기에, 더욱 큰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후우!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조용히 연구실을 둘러보던 김지훈이 입을 꾹 다물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좋은 날이다. 마음껏 이 순간을 즐기며 힘차게 소리 질러도 좋은 날이다.

카르페 디엠!

한동안 벅찬 가슴속에서 전해지는 진한 즐거움과 뿌듯함을 즐기던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문득 미국으로 연수를 간 신현수가 떠오른 것이다.

비록 1년간의 단기 연수지만 엄청난 기회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의 노력과 발전은 언제나 가슴을 서늘하게 하면서도 신선한 자극이었다.

‘같이 시작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자식! 미국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 최대한 많이 배워 와서 나 좀 가르쳐 줘라. 서연이랑 구경 많이 하고. 부럽다.’

가볍게 어깨를 흔들던 김지훈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홍재순이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뒤로 이경석이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김지훈 선생, 일찍 왔네.”

기분이 또 묘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름을 불렀던 홍재순이었다. 단지 선생이라는 단어 하나 붙었을 뿐인데, 왠지 낯설면서도 가슴이 살짝 벅차올랐다.

“첫날이잖아요. 선생님, 경석이 형, 잘 지내셨죠?”

“김지훈 선생, 형이 뭐야? 그러다 애들 앞에서도 형이라고 부른다. 가급적이면 선생이라는 말을 입에 붙여 놔. 다른 사람 눈에는 펠로우도 엄연한 교수다.”

김지훈도, 이경석도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문득 펠로우 첫 근무를 시작했을 때가 떠오른 홍재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잘났든 못났든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이경석 선생, 곧 송재덕 선생님 오실 시간이야. 빨리 옷 갈아입고 내려가자.”

정규 일과가 시작되는 8시까지는 아직 30분 가까이 남았다. 많은 의사들이 그렇지만 특히 응급실이나 외과 센터를 담당하는 의사들에게 정시 출근과 퇴근은 사치일 뿐이었다.

더구나 50이 넘은 나이에도 넘치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재덕 교수가 외과 센터장이다. 펠로우가 감히 정교수보다 늦게 출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센터 내 응급실로 들어선 김지훈이 소리 없는 휘파람을 불었다. 외과 센터를 오픈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최신 설비는 물론 반짝반짝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한 시설에 절로 감탄사가 터졌다.

의료진도 보강이 됐다. 여기에 실력과 노력, 그리고 열정까지 더해진다면 그만큼 더욱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삶과 죽음이 오가는 공간이기에 누구 한 명 태만히 하지 않을 것이다.

“끝내주네요.”

“일할 맛이 나지?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 마. 아직은 수술실까지 돌아갈 형편은 아니야. 전공의들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다.”

홍재순의 말에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와 전공의 간의 입장 차이 및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펠로우 역시 수련을 책임져야 하는 교수의 일원이란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했다.

펠로우들을 본 응급 의학과 전공의와 응급실 인턴들이 후다닥 달려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수인계 중이던 간호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펠로우들을 맞이했다.

전공의 때와는 확실히 대우가 달랐다.

“김지훈 선생님, 이경석 선생님, 이젠 교수님이시네요. 잘 부탁드려요.”

“아닙니다. 우리가 잘 부탁드립니다.”

“호호호! 그런 말씀 마세요. 전공의 때처럼 일해 달라고 하면 욕심이겠죠?”

수간호사의 말에 주말 환자 통계를 확인하던 홍재순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작년에 나한테도 그러더니 올해도 똑같네. 5년 동안 죽도록 일만 한 의사들입니다. 이제부터는 좀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전공의 때처럼 일하기를 바라면 어떻게 해.”

“그런가요?”

“잘 알면서 왜 그래요? 참! 이번에 큰 애가 중학교 간다고 하지 않았나? 학군 때문에 걱정이라고 했죠?”

꽤나 친한지 잠시 환자와는 무관한 말들이 오고 갔다.

그 와중에도 김지훈은 고개를 쭉 내밀고 홍재순이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외과 센터 내 응급실 역시 기존의 응급실처럼 환자 보고 등의 행정적인 일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펠로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해야 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 수간호사가 하던 일을 이젠 펠로우가 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이것도 당연히 의사가 해야 하는 일이네.’

대충 상황을 파악했을 때쯤, 송재덕 교수가 응급실로 들어섰다. 김지훈과 이경석을 보고는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지훈아, 경석아, 치프야. 아니지. 미안하다. 미안해. 이젠 교수구나, 교수. 야! 자세가 딱 나오네. 김지훈 선생, 이경석 선생, 첫 출근이다. 첫 출근이야. 축하한다. 잘 지냈지?”

송재덕 교수도 선생이라고 부른다.

어지간히 쑥스럽다.

“예, 선생님.”

“그래그래. 그동안 실컷 놀았을 테니까 이제 그만 놀고 앞으로 잘해 보자. 기대가 커. 우리 홍재순 선생만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렇게 할 거지? 그치? 암! 그래야지. 젊다는 게 괜히 좋은 게 아니야. 힘이 넘치잖아, 힘이. 홍재순 선생, 보자. 보자. 주말 동안에 환자 많이 왔니?”

역시 송재덕 교수다.

중구난방으로 두서없이 내뱉는 말속에 숨은 뜻을 잘 파악해야 한다. 핵심은 결국 열심히 하라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송재덕 교수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기분 좋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홍재순이 힐끗 김지훈에게 시선을 주며 보고를 시작했다. 어째 무언가 의미가 담긴 것 같은 눈길에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주말 내원 환자는 총 88명입니다. 일반 외과 15명, 정형외과 45명, 신경외과 8명, 그 외 흉부외과 및 성형외과로 20명이 내원했습니다. 그중 수술 환자는 총 8명이며…….”

역시 응급실은 항상 힘든 곳이다. 환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한 명당 소요되는 시간을 생각하면 무척 바빴을 것이다.

보고가 끝나자 아직 응급실에서 치료 중인 환자들을 일일이 살핀 송재덕 교수가 펠로우들을 모았다.

“주말에 고생들 했네. 그건 그렇고 홍재순 선생, 앞으로 환자 보고를 누가 했으면 좋겠어? 자기가 할래? 자기가? 아니면 누가 좋을까? 누가 좋겠어?”

“김지훈 선생이 좋지 않을까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김지훈 선생이 굉장히 꼼꼼해서 잘할 거야. 그리고 제일 젊잖아. 그래. 그렇게 하자. 좋다. 좋아.”

반색을 하는 송재덕 교수를 보며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홍재순이 옆구리를 툭 치며 환자 보고서를 가리켰다.

“내일부터 김지훈 선생이 보고드려. 일요일에는 보고가 없으니까 걱정 말고, 평일 날 조금만 일찍 나와.”

“제가 매일 보고드리라고요?”

아무 대답도 없다. 당연하다는 눈길만 줄 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늦어도 아침 7시까지는 출근해야 한다. 그것도 매일같이 말이다. 이경석도 있는데 왜 혼자 도맡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유는 물어봐야 했다. 하지만 송재덕 교수의 말이 들리는 순간 입도 열지 못했다.

“김지훈 선생, 기존 응급실은 송동화 과장이 있으니까 여기만 맡아. 환자 많으면 우리 과 환자 없더라도 얼굴 비쳐야 한다. 아이고! 내가 말 안 해도 당연히 그렇게 할 텐데 괜히 말했네. 홍재순 선생, 내 말이 맞지? 이경석 선생, 맞지?”

출근하자마자 날벼락이다. 하마터면 면전에서 헛바람을 삼킬 뻔했다.

외과 환자는 과를 막론하고 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100퍼센트다.

그러나 외과 센터장의 결정이다. 목덜미가 서늘해지며 싸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이의 제기나 반항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응급실을 나서자 홍재순은 물론 이경석까지 시치미를 뚝 떼며 뒤를 따랐다. 김지훈만 간절한 눈빛을 보일 뿐이었다.

‘경석이 형! 이경석 선생님!’

여전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한숨이 툭 터져 나왔다. 송재덕 교수의 귀에는 무척이나 깊은 의미가 담긴 그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지훈아, 경석아, 우리끼리 있을 때는 예전처럼 그냥 이름 부르고 그러자. 그게 편하다. 너희들도 좋지? 재순이만 이름 부르면 이상하잖아. 확실히 이상해.”

노모의 눈에는 환갑을 바라보는 자식도 어린아이 같다고 했다. 스승의 눈에도 제자들이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특히 제자들을 자식이라고 여기는 송재덕 교수는 그렇게 여기고도 남았다.

“예, 선생님. 저희도 그게 좋습니다.”

이경석의 말에 특유의 너털웃음까지 터졌다.

“가자. 가자. 이 과장 기다리겠다. 야! 좋구나. 좋아. 나도 너희들 같은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그땐 그냥 막 수술하고 싶었는데, 너희들도 그렇지?”

“예, 선생님.”

이경석의 목소리만 들렸다.

“지훈이 너는 안 좋니? 얼굴이 왜 그래? 첫날이라고 너무 긴장할 것 없다. 그동안 해 오던 대로 쭉 하면 돼. 그럴 거지? 그치?”

절대 눈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얼굴을 빤히 보며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힘이 쭉 빠진다.

“예, 선생님.”

“그래. 그래야지. 수술도 힘 있을 때 해야 돼. 나이 들면 허리가 아파서 긴 수술은 하기 힘들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우리 경석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다행.”

다들 웃었다. 딱 한 놈의 얼굴만 울상이었다.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송재덕 교수의 말을 들으며 외래 복도에 들어섰다.

이경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눈가에 잔뜩 주름을 만들고 있던 김지훈의 얼굴이 스르륵 풀렸다.

나란히 이름이 적혀 있는 진료 안내문!

간담도 진료 : 월수금 - 김지훈 교수

대장 진료 : 월수금 - 이경석 교수

직장 항문 진료 : 화목 - 홍재순 교수

전공의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외래 진료.

감동이다!

기분이 좀 풀린다.

또한 무거운 책임이다.

김지훈은 훅 숨을 내뱉었고, 이경석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펠로우도 교수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벅찬 가슴을 꾹꾹 누르며 이혁민 교수의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오늘 당장 진료할 환자가 있을까?

홍재순 선생님이 월수금에 수술을?

머릿속을 스치는 의문도 잠시, 김지훈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 하지만 더없이 존경하는 사람들이 펠로우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왔어?”

힐끗 눈길 한 번 주고 마는 이준영 교수.

역시 딱 한마디뿐이다.

“이렇게 보니까 느낌이 새롭네. 김지훈, 잘해 보자.”

신기동 교수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펠로우 2년차인 홍재순은 몰라도 이경석을 쏙 빼놓았다. 원래 필요한 말만 하는 사람이기에 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고! 무슨 말들이 왜 이렇게 짧아? 얼굴에 다 쓰여 있구만, 괜히 태연한 척하지 말고 좋으면 좋다고 해. 지훈아, 경석아, 앉자. 앉자. 너희들도 이젠 교수다. 내가 이름 불러서 기분 나쁘니? 아니지?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돼.”

온화한 얼굴로 서류를 뒤적이던 이혁민 교수가 송재덕 교수의 유쾌한 너스레에 미소를 지었다.

“왔나? 앉아라. 얼굴들 보기 좋네.”

언제나 똑같은 모습에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교수들 모두 새로운 길에 들어선 제자들을 격려하고 축하해 주고 있었다. 하기에 월요일 아침 일찍부터 한자리에 모였을 것이다. 이 또한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자세를 고쳤다.

“김지훈 선생, 이경석 선생, 교수와 전공의는 다르다.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 다들 잘할 것이라고 믿지만, 어떻게 보면 쉽지 않은 일이야.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상의하면서 잘해 나가자.”

“예, 선생님.”

“시간이 없어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만 간단하게 얘기할게. 외래 진료와 수술은 파트별로 상의하면 된다. 그리고 교수 당직은 우리 펠로우 선생들이 돌아가면서 서라. 물론 홍재순 선생은 2년차니까 덜 서야겠지.”

홍재순의 입이 쫙 찢어졌다.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선생님들은 당직을 안 서시는 겁니까?”

“전과 동일하게 당직 배정은 하지만, 우리는 백듀티니까 노티만 해라. 응급실에서 본 환자는 각자 자신 앞으로 입원시키면 된다. 단, 아주 어렵거나 혼자 수술하기 힘든 환자인 경우에는 함께 봐야겠지.”

귀가 번쩍 열릴 말이었다. 당장 오늘부터 자신의 이름 앞으로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다니 정말 희소식이었다.

응급실 보고에 대한 부담마저 스르륵 사라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억누른 김지훈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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