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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567화 (567/1,329)

제10화 새로운 시작 (2)

얼굴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졌다.

반갑게 인사를 한 이혁원이 뜻밖의 말을 했다.

“선생님, 안 그래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여기서 딱 만나네요. 이준영 교수님께서 외래로 오시래요.”

“무슨 일 있어?”

“왜 찾으시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별일 없지?”

“만날 그렇죠, 뭐.”

이혁원이 씨익 웃고는 급히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항상 열심이다.

흐뭇한 미소를 짓던 김지훈이 외래로 향했다. 특별히 부를 일이 없어 궁금하기도 했지만, 스승을 본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다.

‘근데 왜 갑자기 날 찾으실까?’

외래로 들어서자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보였다. 의아한 일이었다.

“오늘 이사장님과 면담했지?”

“예. 지금 면담하고 왔습니다.”

“뭐라고 하셔?”

날짜까지 정확하게 알다니, 역시 스승은 제자의 미래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면담 때 나온 말을 상의하고 싶었는데, 아주 착착 때가 맞아 돌아갔다.

김지훈이 내심 활짝 웃고 말았다.

신동석 이사장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했다. 스승의 입장에서 크게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이준영 교수가 지그시 김지훈을 보았다.

며칠 전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간담도 학회에서 한 발표와 수술 시연이 가져온 기회였다. 그때 자신과 김지훈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한 것이다.

간담도 센터 개설과 복강경 수술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보장을 했다.

솔직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병원을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음성 병원에서 근무했다. 교수들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병원과 재단의 결정이 아니면 서울 병원으로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이미 병원과 환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도리이자 신의였다.

반면 김지훈에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김지훈의 성격상 평생 동안 함께 근무하게 되겠지만 과한 욕심이었다. 스승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있는 그대로 말해 주고, 선택은 제자에게 맡기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이사장님께서 아주 좋은 제안을 하셨구나. 지훈아, 그런데 다른 병원에서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간담도 센터를 새로 만들고, 복강경 수술도 확실하게 지원을 해 준다는구나. 물론 경제적인 면은 신경 쓸 일이 없도록 하고 말이야.”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병원을 옮기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사정도 되지 않고 말이야. 하지만 네게는 아주 좋은 기회야. 그쪽에서도 내가 힘들다면 너만이라도 보내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지금처럼 열심히만 하면 최고로 존경받는 의사가 될 수도 있어.”

이준영 교수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스승을 떠나 다른 병원으로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전 안 갑니다.”

“단번에 결정할 일이 아니야. 무엇이 네게 유리한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스승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제가 다른 병원으로 갑니까?”

“김지훈!”

이준영 교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장 우려하던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김지훈을 붙잡고 싶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과 인연에 얽매여 합리적인 생각을 못한다면, 결국 제자의 앞날을 막아서는 꼴이 될 것이다.

“나 때문에 의사를 했어? 네가 가야 할 길을 결정하는데 왜 나를 생각해? 세상은 넓어. 그 속에 네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어. 네 자신과 가족을 위해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도 안 하고, 어떻게 이 자리에서 바로 말이 나올 수 있어?”

“그럼 다른 병원으로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스승님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음성 병원에서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김지훈의 목소리가 커졌다.

일순 스승과 제자의 말문이 막혔다. 스승이 화를 내고, 단 한 번도 대들지 않았던 제자가 발끈한 이유는 분명했다. 명예나 이익도 중요하다면 중요하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끊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제자의 마음이 사무치게 고마웠지만, 이럴 때 중심을 잡는 것 역시 스승이 해야 할 일이었다. 이미 서른이 넘은 제자였지만, 경험한 사회라고는 지금의 병원이 모두라는 점도 깊이 생각해야 했다. 경험 부족은 종종 섣부른 결정을 불러오기 때문이었다.

“지난 일에 얽매이지 마.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네 장래를 선택하는 거야. 감정에만 휘둘리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돼.”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자신을 위한 말인데 너무 감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스승의 말대로 스스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으면 후회하게 될지도 몰랐다.

마음은 그럴 수 없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스승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었다. 고경아의 의견도 무척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이사장님이 내일까지 결정하라고 했지? 결코 충분한 시간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만도 아니야. 신중하게 생각해. 결국에는 네 인생이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외래를 나왔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동기들과 상의할 생각도 들었지만, 먼저 고경아와 얘기하고 싶었다.

함께 퇴근을 하는 길에 커피 한 잔을 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들은 고경아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호호호!”

“난 심각해 죽겠는데 왜 웃어요?”

“그럼 울어요? 우리 남편 정말 최고네요. 이사장님도 모자라 다른 병원에서도 오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웃어요? 좋은 일이잖아요. 편하게 생각해요.”

고경아가 편안한 눈빛으로 김지훈의 손을 꼭 잡았다.

“지훈 씨, 난 지훈 씨가 결정하는 대로 따를게요.”

“경아 씨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나야 돈 많이 주고, 지훈 씨를 더 대접해 준다는 병원으로 가면 좋지요. 하지만 지훈 씨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는 길이면 좋겠어요. 아니라면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전 반대예요.”

대단한 응원이자 격려였다. 마음이 편해졌다.

진정한 의사, 최고의 써전.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했다. 새로운 직장에서도 배울 수 있고, 좋은 동료들을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최고의 지원과 풍족한 삶이면 가능할까?

신현수처럼 기분 좋은 라이벌이 있을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손일석 같은 친구는?

듬직하게 뒤를 받쳐 주는 이경석은?

서도진부터 이혁원까지 자신을 믿고 따르는 후배들에게서 배우는 것들은?

고경아처럼 일반 외과와 의사들을 이해하고, 함께 수술에 참여할 간호사들은?

이들이 없으면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그뿐일까? 조곤조곤한 말투로 이론에 관한 한 자비가 없는 이혁민 교수, 수술의 원칙을 강조하며 비수를 날리는 신기동 교수, 환자와 제자들에게 더없는 애정을 보이는 송재덕 교수, 그리고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거대한 벽인 스승까지.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었다.

결코 돈으로 살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문득 예전에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독불장군은 없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더구나 김지훈 자신은 노력과 열정이 있을 뿐, 의료계를 이끌 천재는 아니었다. 스승들과 동료들, 그리고 후배들이 없다면 허망한 꿈이 될 것이다.

더구나 생각해 보면 신동석 이사장의 제안 자체가 파격적이다.

카르페 디엠!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다.

누군가는 지금도 장래 문제로 골머리를 썩거나,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행운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온 대가일 것이다.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 아침,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벌써 결정했어?”

“예, 선생님.”

“어떻게?”

“병원에 남기로 했습니다. 스승님과 교수님들께 배워야 할 것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그 전에는 가라고 등을 떠미셔도 못 갑니다.”

이준영 교수가 먹먹해지는 가슴을 감추려 헛기침을 하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게 다야?”

“동기들하고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놈들을 또 어디서 만나겠습니까? 경아 씨만큼 훌륭한 간호사도 없지 않습니까?”

감히 스승 앞에서 농을 섞었다. 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룻밤 사이에 정말 많은 고민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알았다. 올라가서 한눈팔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전문의 시험 떨어지면 다 허사야.”

그럴 김지훈이 아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바로 신동석 이사장을 찾았다.

“허허! 좋습니다. 그럼 전문의 시험 합격을 전제로 정식 계약을 맺읍시다. 받은 것 이상으로 해 주어야 성공한다는 내 말 절대 잊지 말아요.”

“예.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대신 외과 센터에 대한 지원 약속을 반드시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신동석 이사장이 고개 흔들었다.

자신에 대한 처우보다 외과에 대한 애정을 우선하는 모습에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지원만 한다면 생각 이상으로 크게 될 재목이 분명했다.

“여부가 있겠어요?”

이사장실을 나온 김지훈이 가슴을 활짝 폈다.

장래를 결정했다.

죽으나, 사나 병원에 뼈를 묻어야 한다. 이사장의 제안 때문만이 아니었다. 스승과 교수들, 그리고 동기들과 후배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을 잃으면 제아무리 큰 재산과 명예를 얻어도 그것이야말로 사상누각일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이제 전문의 시험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

12월의 해가 점점 짧아졌다.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IMF라는 국민적 재난이 닥친 것이다. 하지만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크리스마스의 흥겨움과 신년의 설렘은 사라졌고, 사회 분위기는 극도로 나빠졌다.

이런 사태를 만든 놈들을 욕하며, 빚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집을 얻을 때 무리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더구나 전문의 시험이 코앞이었다. 충분히 준비를 했건만, 슬슬 긴장이 다가왔다.

시험 날이다.

고경아의 힘찬 응원을 가슴에 안고 시험장으로 출발했다.

무난하게 문제를 풀었다. 몇몇 문항은 상당히 고민이 됐지만, 교과서와 참고 서적을 완독한 덕을 톡톡히 봤다.

“지훈아, 잘 봤어?”

“70점만 넘으면 되는데, 뭐.”

“하긴 나도 쉬웠는데 니가 어려웠을 리가 없지. 경석이 형, 현수야, 잘 봤지? 한 잔 빨러 가자. 이러다 목구멍에 거미줄 치겠다.”

“면접 준비는 안 해?”

“그게 준비한다고 되는 일이야? 그냥 평소 내 인성이 이렇습니다, 하면 끝이지. 그러게, 나처럼 평소 좋은 일을 많이 했어야 걱정할 일이 없지.”

며칠 후, 면접이 이어졌다.

응시자는 150명이 넘는데 면접관이 5명에 불과해 하루 종일 기다려야 했다.

옷매무새를 살피고 면접을 보았다. 그중 한 사람이 유난히도 질문을 많이 했다.

“김지훈 선생, 수련 받은 병원에 남기로 했나요?”

“예. 다행히 합격하면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허허! 면접에서 빵점을 받아도 붙겠구만, 그런 걱정을 했습니까? 간담도 파트에 복강경이라. 수련 때 복강경 수술을 여러 차례 한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이런 정보는 면접 서류에 기재돼 있지 않다.

의아한 일이었다.

“예, 맞습니다.”

김지훈의 대답에 상당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회가 되면 인연을 맺어 봅시다. 어때요?”

면접관들은 각 병원에서 명망 있는 의사들이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말씀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좋습니다. 약속한 거예요. 그럼 수고했어요.”

김지훈의 뒷모습을 좇는 면접관의 눈에 더욱 진한 아쉬움이 묻었다.

수술 잘하고, 실력이 뛰어나다는 전공의는 많다. 하지만 남들이 가기를 주저하는 길을 먼저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를 부러워할 줄은 몰랐네. 내 새끼들도 잘났지만, 저런 의사가 있어야 더욱 발전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워.’

면접장을 나온 김지훈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합격을 자신했지만 누구에게나 불안한 시간이었다.

김지훈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경아가 출근을 하고 나면 홀로 남아 뒹구는 것도 적성에 맞지 않았다. 고향 친구들도 이젠 어엿한 직장인들이라 평일에는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한다.

“선생님, 놀 때는 좀 노세요.”

“도진아, 나랑 같이 놀면 안 될까? 다들 집에 가서 아무도 없잖아.”

“그럼 수원에라도 가든지요. 오프도 제대로 못 가는데 툭하면 오셔서 염장 지르실 거예요?”

역시 치프가 갑 중의 갑이다. 가끔 병원에 들르면 서도진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그마저도 즐거웠다.

땀을 흘리며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름다웠다.

드디어 결과가 발표됐다.

합격이다. 의국원 전원이 모두 합격했다.

만세!

지난 5년 동안의 고생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날이었다.

학교까지 하면 11년이다. 전문의가 마지막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도 정말 긴 시간이었다.

고경아와 함께 이모네 골뱅이 집에서 떠들썩한 자리를 가졌다. 손일석과 고경희, 그리고 신현수와 윤서연만이 아니라 이경석 부부까지 함께했다.

“경아 씨, 고마워요. 경석이 형, 일석아, 현수야, 고생했다. 서연아, 너도 축하해. 고생했어.”

“여보라는 좋은 말 놔두고 경아 씨가 뭐야? 처형, 안 그래요? 하여간 센스가 없어요. 자!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건배! 경희야, 오빠 축하해 줘.”

“일석아, 군대 3년 잘 보내라. 의사에게는 그때가 제일 좋은 시절이라는 거 알지? 제대하면 고생이다. 제수씨, 결혼할 때 꼭 연락해요. 아니구나. 지훈이가 먼저 말해 주겠네.”

“일석아, 제대하면 우리 병원에 와야 한다. 아버님도 그렇고, 신기동 선생님도 기대가 크셔.”

마음껏 이 순간을 즐겼다.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카르페 디엠!

그때 라디오에서 금반지를 모아 위기를 극복하자는 뉴스가 들렸다.

왜 죄 없는 국민이 반지까지 모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역사라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이 바로 IMF이자 그 사태를 만든 놈들이었다.

제대로 찍어야 한다. 아니면 언젠가는 잘못 선택한 대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어쨌든 나라가 행복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개개인의 삶은 이어져야 한다.

신현수와 윤서연은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항간의 소문으로 유학을 간다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윤서연이 마취과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마도 미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손일석은 군대를 갔다. 공중보건의로 가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신체 건강하고 군대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군의관이 바로 외과 전문의다.

어떤 운을 가졌는지, 그 많은 자리를 두고 공수부대로 배치를 받았다. 역시 하오문주답다.

남들과 똑같이 10주간의 군의관 훈련을 받고, 재수 없는 놈들끼리 모여 2주 더 받았다.

낙하 훈련까지 받아야 한다는 소리에 놀란 고경희의 눈물을 닦아 주느라 한동안 애를 먹었다.

김경수와 오성민도 군대를 갔다. 친구가 있어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이경석은 펠로우를 하기 전에 그동안 미뤄 왔던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새까매진 얼굴로 형수를 보는 눈에 사랑이 가득했다. 저러다 셋째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유창범은 개업 준비로 바빴다. 집안에 여유가 있는지 대장 항문 전문 병원을 개설한다고 했다. 이제 막 전문의를 땄기 때문에 6개월 정도는 더 배워야 한다며, 홍재순과 자주 어울렸다.

동기들을 생각하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다들 자신의 길을 열심히 개척하고 달려갈 것이다.

‘우리 시간 될 때만 만나지 말고 일부러 시간 내서 만납시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으면 좋겠네요.’

멀리 병원이 보였다. 외과 센터라는 커다란 간판이 눈에 확 띄었다.

첫 출근이다. 이젠 전공의가 아니라 전문의로서 근무를 시작한다. 비록 펠로우지만 교수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함께 출근하는 고경아의 환한 웃음은 큰 힘이었다.

병원에 들어섰다. 새로운 시작이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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