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65화 (565/1,329)

제9화 인생의 전환점 (2)

특유의 깐깐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장인의 목소리가 예상외로 부드러웠다. 대충 오늘의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을 텐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뭐지? 아버님이 왜 한 마리 순한 양이 되셨지?’

불현듯 예전 식사 자리가 생각났다. 역시 대단한 놈이다. 단 한 번뿐이었던 그 짧은 시간에 손일석은 장인의 마음을 확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이때를 놓칠 손일석이 아니었다. 본론을 꺼내자마자 장인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역시 예상한 대로 일이 진행될 모양이었다. 지금이 바로 절친이자 장차 손윗동서가 될 사람의 힘을 보여 줄 때였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장모부터 처형에 고경아까지 일제히 지원사격을 해 댔다.

손일석은 이미 납작 엎드린 상태였다. 당차기만 했던 고경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죽어 가는 목소리로 한마디만 했다.

“이렇게 불쑥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아버님.”

“아빠,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이 효과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리 사전 작업을 충실히 한 것일까?

고성문이 김지훈을 보며 묘한 헛기침을 했다. 뭔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네 부모님께는 허락을 받았겠지?”

“예, 아버님. 이미 확실하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아버님께 먼저 허락을 받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부모님께 바로 인사드릴 생각입니다. 아버님, 허락해 주십시오. 경희 씨를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다.”

간절한 목소리까지 정말 유효적절한 말이었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우리 경아 결혼식이 있으니까, 자네 문제는 그 이후에 진지하게 얘기하는 게 좋겠어. 경희 너도 괜찮지?”

허락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왠지 허탈하다.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장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딸자식 말이라면 껌벅 죽는 인자한 아버지만 보였다.

말문이 터진 손일석이 화려한 말발을 앞세우자 장모와 처형이 홀딱 넘어갔다. 장인은 자꾸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의 주인공은 손일석과 고경희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 일주일 후면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김지훈은 한마디로 찬밥이었다. 처형의 환대와 장모님의 살뜰한 말이 아니었으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자네, 김 서방하고 아주 친한 친구라는 것은 알지만 손윗사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돼. 앞으로는 항상 말과 태도를 조심해야 하네.”

“예, 어머님. 명심하겠습니다.”

손일석은 진지했고, 뜻밖의 화기애애함 역시 끝까지 지속됐다. 식구들이 모두 주차장까지 따라나왔다. 무슨 일인지 고성문까지 얼굴을 보였다.

‘아! 운 좋은 놈! 이럴 수는 없어.’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김지훈과 고경아는 말이 없었다. 손일석과 고경희가 눈치를 보면서도 신나게 떠들었다.

한마디쯤 날려 줄 법도 한데, 김지훈과 고경아가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서운해? 자네는 이제 내 아들이고, 저놈은 군대 가야 하잖아. 공부한다고 서울에만 있지 말고, 주말에는 꼭 와서 밥 먹고 가. 자네 장모 될 사람이 하도 보고 싶어 해서 하는 소리니까 잊지 마. 경아야, 막내 딸내미는 좀 다르다.’

장인의 말을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정말 복 받은 사람은 손일석이 아니라 김지훈 자신이었다. 아들이라는 말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무리 친구 되시는 분의 아들이 여행사를 하지만, 신혼여행 예약까지 직접 해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슬며시 고경아의 손을 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손이었다.

***

본격적인 시험 준비가 시작됐다. 교과서 리딩과 문제 풀이에, 다음 날 준비까지 쉴 틈이 없었다.

금요일에는 이사까지 겹쳐 최대한 빨리 끝내고 빠져나왔지만 이미 끝난 상태였다. 월차를 낸 고경아는 물론 장모와 고경희의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다.

김지훈은 미안해 죽겠는데, 함께 나온 손일석의 표정을 보니 부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물론 고경희와 장모를 챙기는 것을 절대 잊을 놈이 아니었다.

“어이쿠! 어머님! 고생하셨습니다. 도와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경희 씨, 처형, 고생했어요.”

함께 저녁을 먹었다. 미처 소화도 되기 전에 모두들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내일 오전까지 정리를 하느라 바쁠 것이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두근두근!

벌떡벌떡!

이제 이틀 후면 결혼이다.

벌써부터 심장이 벌렁거리고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밤새 뒤척이다 토요일을 맞이했다.

결혼 전날까지 공부에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필요한 것들을 챙기다 보니 어느새 하루가 후딱 지나가 있었다.

깜빡 눈을 감았다 떴는데 새벽이었다.

고경아와 함께 고경희와 장모를 태우고 수원으로 향했다. 신부 화장이다 뭐다 해서 시간이 없다고 난리였다.

신랑은 옷만 입으면 특별히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미용실 의자에 함께 앉아야 했다.

미용실 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생전 로션 한번 바르지 않았던 얼굴에 화장까지 해 댔다. 대충 빗으로 넘겼던 머리에 드라이를 하고, 무스인지 뭔지를 발라 댔다. 머리카락이 철사로 변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식장에 도착해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정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낯익은 얼굴들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허경발 원장이 눈앞에서 주례를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대수술을 앞둔 것보다 더한 긴장이 다가왔다.

고경아에게 반지를 끼워 주는 순간, 그제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언젠가 청평에서 보았던 담장을 따라 핀 하얀 꽃보다 더욱 아름다웠던 여인이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약속이다. 사랑의 증표다.

한 쌍의 반지가 두 사람을 하나로 이어 주었다.

결혼행진곡이 울렸다.

장모는 웃고 있는데 장인은 눈가를 붉히고 있었다. 고재현의 부모님은 손수건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가슴 한구석이 찡했지만, 이내 폭죽 소리와 함께 흩날리는 하얀 눈꽃이 전해 주는 행복에 빠졌다.

“양가 가족분들 사진 찍습니다.”

고경아의 친척이 이렇게 많은지 이제야 알았다. 아무도 없는 김지훈이었지만, 고재현의 부모님과 수원 친구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었다. 정훈철과 한수임이 승희와 함께 섰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 분명했다.

“친구분들 모이세요.”

고향 친구들 주변으로 치프들과 병원 동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공정식과 다른 과 동기들까지 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인원에 그저 고맙기만 했다. 고경아의 친구도 만만치 않게 많이 왔다.

“직장 동료분들 모이세요.”

교수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천안 병원 박경일 교수에 장성기 교수와 변상훈 교수, 그리고 김진호 교수까지 보였다. 이준영 교수가 보였을 때는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수술 방은 물론 응급실과 병동 간호사들까지 왔다.

일일이 청첩장을 돌린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 축하를 해 줄 줄은 몰랐다.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아릴 지경이었다. 고경아도 입을 꼭 다문 채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폐백이 이어졌다. 장인, 장모와 고재현의 부모님을 한데 모시고 절을 올렸다. 웃으며 덕담을 건넨 장인과 장모가 대추와 밤을 고경아의 치마에 던져 주었다.

“행복하게 잘 살아.”

이제 하객들에게 인사를 할 차례였다.

피로연장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가장 먼저 교수들을 찾았다. 허경발 원장님에게 술 한 잔을 받았다.

“지훈아, 경아야, 행복하게 잘 살아.”

송재덕 교수가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오늘 술 많이 먹어야 할 것 같으니까 조금만 따라 줄게. 빨리 먹고 나 한 잔 줘라. 지훈아, 좋니? 좋아? 좋구나. 이때가 제일 행복한 때다. 어떻게, 소식은 있니? 없어?”

“선생님, 무슨 소식이요?”

“음! 아니다. 아니야. 과속은 안 했구나. 그래, 그게 좋다. 천천히 딱 넷만 낳아. 넷만. 그게 딱 좋다.”

넷이라는 소리에 고경아가 얼굴을 붉혔다.

이준영 교수 앞에 섰다. 아무 말 없이 술 한 잔을 가득 따라 주었다. 담담한 눈길에 스승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렇게 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교수들만 10명에 가까웠다. 정훈철에 이어 병원 식구들에게도 술을 받았다. 바닥에 깔릴 정도라 생색만 내는 정도였다. 그런데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양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슬슬 취기가 올라왔다.

인사를 다 드렸다.

어느새 식장이 한산해졌지만 끝이 아니었다. 친구들과의 뒤풀이가 남았다. 친한 친구 몇몇과 해야 했지만, 수원이라는 지리적 문제 때문에 결국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모였다.

김지훈과 고경아의 친구는 물론 고경희까지 가세했다. 처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은 손일석의 짝이었다.

“위하여!”

김지훈이 넙죽넙죽 술을 받자, 고경아가 불안한 눈으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당연한 일이다. 결혼 첫날부터 떡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먹은 술도 결코 녹록한 양이 아니었다.

최대한 자제를 한 끝에 무사히 술자리를 끝냈다. 그런데 막 일어서려는 순간, 손일석이 고(Go)를 외쳤다.

“경아 씨, 아니 처형, 간만에 나이트 한번 갑시다. 어차피 오늘은 근처 호텔에서 자고 내일 공항 가니까 딱이네. 경희야, 너도 좋지?”

우레와 같은 함성과 함께 김지훈과 고경아가 그대로 분위기에 휩쓸렸다.

원래 나이트와는 친하지 않은 김지훈이었다. 고경아와 블루스 때만 나가고 내내 자리를 지켰다.

젊은 청춘들은 이때다 하고 난리가 났다. 유부남인 신현수와 이경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잘 놀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춤을 안 추니 할 일이 없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고경아의 손을 꼭 잡고 대화를 나누었다.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말이다.

시도 때도 없이 건배가 이어지고, 김지훈은 최대한 몸을 빼며 컨디션을 조절했다.

‘오늘은 절대 취하면 안 돼.’

가랑비에 옷 젖는지 모른다고 했다. 조금씩 먹었는데 꽤 양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잔 수는 세지도 못할 정도였다. 잔잔하게 마시는 술이 취하면 더 무서운 법이기도 했다.

슬슬 치밀어 오르는 술기운을 뺄 겸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주변은 어두워졌고, 때 아닌 비까지 오고 있었다. 정말 가랑비였다. 차가운 밤공기에 한기가 느껴졌다.

살짝 피곤하기까지 해, 잠깐 쉴 생각으로 차에 들어가 앉았다.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경아 씨가 기다릴 텐데.’

잠깐 눈을 감았다. 정말 얼마 안 지난 줄 알았다. 누군가 시끄럽게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순간 뒤통수가 싸늘해지며 저절로 시계에 눈이 갔다.

헉! 새벽 3시다.

고경아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난리 났다. 말도 없이 사라져 한참을 찾은 모양이었다. 설마 차에서 자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경아 씨, 미안해요.”

“그러게, 무슨 술을 그렇게 받아 마셔요.”

“안 마시려고 노력은 했는데…….”

혀가 꼬였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슬슬 눈치를 보던 친구들이 준비한 선물을 차에 실어 주고는 자리를 피했다.

아침에 공항까지 태워다 줄 고재현과 간신히 시간 약속을 하고는 부리나케 고경아의 뒤를 따랐다.

첫날부터 무릎 꿇고 싹싹 빌었다. 간신히 고경아의 화가 풀렸지만, 첫날밤은 이미 물 건너갔다. 창밖이 환하게 밝아 오는 데다 피로가 쌓여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정말 손만 잡고 쪽잠을 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전 11시에 김포공항으로 출발했다. 신랑, 신부의 눈이 벌겠다. 잠이 부족해야 하는 건 맞는데, 절대 이건 아니었다.

김지훈이 감히 고경아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했다.

***

제주도다. 9월의 청명한 초가을 날씨가 신혼부부들을 반기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내내 손을 꼭 잡은 덕인지, 아니면 봐준 건지 어느새 고경아의 마음은 눈 녹듯 풀린 상태였다.

확실히 웃어야 신혼여행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렌트카 회사를 찾았다.

“예약된 차가 없는데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쏘2 아니면 쏘3로 예약했다고 들었으니까,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세요.”

예약 자체가 되지 않았다. 날벼락이다.

고경아는 당황해 발만 동동 굴렀고, 김지훈은 입맛만 다셨다. 분명 장인이 여행사를 하는 친구 아들에게 맡겼다고 했다. 최신 차량으로 부탁까지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고경아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내가 바로 확인할 테니까 10분 후에 다시 걸어. 경아야, 당황하지 말고 기다려.)

다시 통화를 했다. 장인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정말 렌트카 예약 자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성수기라 남는 차도 없었다. 울상이 된 고경아를 본 김지훈이 어깨를 활짝 펴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경아 씨, 차 없어도 아무 상관 없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무슨 착오가 있나 본데 신경 쓰지 말아요.”

이것이야말로 남자, 아니 남편이 가져야 할 태도였다.

그깟 차 없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중문단지에 있는 모 호텔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넓고 좋네. 야! 저게 한라산인가?”

“어디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고경아가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그 와중에 슬며시 버스 안을 돌아보니 신혼부부로 보이는 사람은 단 한 쌍도 없었다. 제주공항에서 보았던 그 많은 신혼부부들은 모두 승용차를 이용하는 모양이었다.

‘어제부터 시작이 영 안 좋네.’

호텔에 도착했다. 객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제주 바다에 감탄을 터트렸다. 고경아도 좋아 죽었다. 제주 밤바다와 함께하는 첫날밤은 상상만 해도 온몸이 짜릿했다.

그런데 호텔 직원의 눈이 반대쪽을 보고 있었다.

어어어?

바다가 아니라 호텔 뒤편 절개지와 마주 보는 객실 문을 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산도 아니고 그냥 절벽이다.

“잠깐만요. 바다가 보이는 방을 예약했을 텐데요.”

“그렇습니까? 제가 연락받기로는 이 방이 맞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불길하다.

다시 나타난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제길!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장인에게 어떤 친구인지 몰라도 아들 하나 제대로 뒀다. 아주 개X놈이었다. 렌트카도 모자라 호텔 예약까지 이 모양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그것도 평생에 한 번뿐인 신혼여행이다. 고경아의 얼굴이 또 울상이 됐다.

침착해야 한다. 아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민망했지만, 남편으로서 슬기롭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다.

프런트로 달려가 바다가 보이는 방을 부탁했다. 천만다행으로 방이 있었다. 하지만 성수기다.

“하루에 15만 원씩 추가 결제할 금액이 45만 원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바가지든 뭐든 당연히 괜찮다. 절대 벽 보고 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날까?

정훈철과 교수들이 따로 챙겨 준 봉투를 열었다. 제법 액수가 컸지만 한 방에 홀쭉해졌다.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해 가며 객실로 올라갔다. 물론 고경아 앞에서는 활짝 웃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말 우여곡절 끝에 짐을 풀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하얀 티에 청바지를 입고 나온 고경아를 보는 순간,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향하고 싶은 욕망이 불끈불끈 치솟았다.

‘아니야. 일단 밥은 먹어야 힘이 나지. 참아야 한다. 오늘 밤을 위해 참아야 한다. 짐승처럼 굴면 안 돼.’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중문단지 앞바다를 거닐었다. 나이가 지긋하게 먹은 해녀가 성게 알을 팔고 있었다.

“할머니, 이거 맛있어요?”

진한 사투리가 나왔다.

“그럼, 맛있지. 소주 한 잔 곁들이면 몸에도 좋아.”

대충 해석하면 이런 말이 분명했다. 특히 몸에 좋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신혼부부들이 바글바글한데 그런 말을 할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중국집 춘장만큼 덜어 주고 만 원이다. 소주 한 병까지 해서 4천 원 추가다. 생각보다 상당히 비쌌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살짝 떠서 입에 넣는 순간 바다가 다가왔다. 짭짤하면서도 고소해 소주와 궁합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으흐흐! 이게 몸에도 좋다는 말이지?’

“이거 되게 맛있네. 경아 씨, 빨리 먹어 봐요.”

“난 이상하게 보여요.”

“어허! 몸에 좋다잖아요. 자! 아 해요.”

고경아가 잔뜩 인상을 썼다. 혼자만 맛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거금 만 원이나 주고 산 성게 알이었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닷바람 탓인지, 어제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는데 소주가 잘도 넘어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저녁을 먹을 때였다.

제주 하면 다금바리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무슨 놈의 회가 1킬로그램에 15만 원이나 된단 말인가!

어쨌든 이걸 먹고 첫날밤의 거사를 치르면 아들을 낳는단다. 구태여 아들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쁠 것도 없다. 이왕이면 맛있게 먹을 일이었다.

자! 배도 채웠고, 달무리까지 진 밤바다 덕에 분위기가 확실하게 확 달아올랐다.

객실로 돌아가 첫날밤을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첫날밤이다.

우워워워워!

늑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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