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인생의 전환점 (1)
마지막 날이다.
아침 회진을 돌고 주말 집담회까지 마쳤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와 똑같은 일과였다. 천안 병원에서 근무한 4년차들이 출발한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마지막 날이라는 실감이 다가왔다.
이제 오후 회진을 돌고 교수들에게 인사를 하면 드디어 3년 반 동안의 수련이 끝난다.
의국에 모인 치프들이 상념에 잠겼다. 다들 기억해 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중에는 좋은 일도 있었겠지만 나쁜 일도 적지 않았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훗날 피가 되고 살이 되거나, 반대로 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지금은 다들 웃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힘든 시절이었다. 빤히 그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파란만장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인턴 첫 근무부터 정말 힘들었다. 초턴에게는 가장 두려운 곳인 응급실 근무부터 시작해, 과도한 업무로 악명이 높은 메이저 과만 돌았다. 항상 후줄근한 모습으로 피곤에 짓눌려 살았지만, 지난 일이라 그런지 웃음만 나왔다.
‘이혁민 선생님 리포트 때문에 참 힘들었었지만 솔직히 우쭐하기도 했었는데, 그땐 어려서 그랬을까? 장성기 선생님, 변상훈 선생님, 덕분에 참 많이 배웠습니다. 최철한 선생님과 유석재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다른 과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군대에서도 잘 지내시겠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일로 정훈철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어떻게 보면 그로 인해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한수임과 승희까지 알게 된 일은 행운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
물론 안 좋은 기억도 있다. 악어와 정갑수 때문에 상당히 피곤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이라도 날렸으면 옷을 벗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땐 신현수도 이상하게 눈에 걸렸었지만, 친구라고 여기고 생활한 덕에 평생의 라이벌을 얻었다.
어찌 됐든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이 훨씬 많았고, 꿈과 희망에 부풀어 인생이 밝게만 느껴진 시절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고경아를 만났다는 사실은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다. 첫 데이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다.
장례식장 문제와는 조금도 상관이 없어야 할 사람인 금경태의 미움을 샀다. 불타는 정의감과 정훈철과의 인연이 가져온 대가는 난데없는 음성 병원 파견이었다.
정말 암담하고 억울했다.
‘그때 신상민 교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몰라.’
단 몇 마디뿐이었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말에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준영 교수를 만났다.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뚝뚝한 표정과 말에 압도당했지만,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정신없이 일하고, 배웠다.
스승이란 말을 난생처음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첫 수술을 스승에게 받았다. 음성을 떠나올 때는 아쉬움에 눈가까지 붉혔다.
‘큰 스승님께 받은 메스까지 주실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지금 난 스승님께 자랑스러운 제자일까?’
구미 병원 생활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남들은 한 번만 해도 나가떨어질 100일 당직을 두 번이나 돌았다. 힘들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때 처음 코피까지 흘렸다. 선배들의 배려와 격려가 아니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고맙기만 했다.
평생 잊지 못할 아픔도 있었다.
19살 꽃다운 나이에 말기 대장암으로 내원한 환자.
아직도 최선희라는 이름을 잊을 수가 없었다.
‘후우! 언젠가는 그런 환자도 살릴 수 있는 날이 오겠지? 할머니는 살아 계실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손녀를 부르며 넋이 빠졌던 할머니,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오열했던 할머니 역시 잊지 못할 것이다.
씁쓸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1년차 휴가를 대신한 의료봉사.
이를 악물고 스승에게 다시 배웠다.
고경아와 서로의 마음을 확실하게 확인했다.
함께 봉사를 한 오지랖 넓은 영훈이 엄마의 순수한 마음도 그때 알았다. 어떤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치프가 돼 다시 만나 수술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니까 단순한 일도 없었고, 스쳐 지나간 것 같은 인연도 꽤 의미가 있는 것 같네.’
지난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르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 보면 행운의 연속이었다. 연차가 올라가며 감사해야 할 일은 더욱 많기만 했다. 안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반짝반짝 빛내기 위한 양념에 불과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정갑수와 악어, 그리고 금경태와의 마지막이 생각나는 순간 고개를 마구 흔들 수밖에 없었다. 좋은 기억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 지랄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좋은 일만 생각해도 부족한 판에 나쁜 일들을 굳이 떠올릴 이유가 없었다.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똑같은 인간이 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느새 1시가 다 됐다. 스승과의 마지막 회진이다.
서도진과 박순용, 그리고 이혁원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천천히 돈다고 노력까지 했는데, 어느새 회진이 끝났다. 스테이션에 선 이준영 교수가 잠시 차트에 눈길을 주며 입을 열지 않았다.
‘스승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내년에 제가 병원에 남게 되면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지훈아, 그동안 네 덕분에 즐겁고 행복했다. 내년에 다시 보자. 꼭 그렇게 될 거다.’
아무리 생각이 많다고 해도 때론 말 한마디보다 못한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점점 가슴이 아려 왔다.
김지훈이 훅훅 숨을 내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고했다. 치프들 전체 인사는 언제 할 거야?”
“다음 주 초반에 인사드리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가뜩이나 표정 없는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김지훈이 병원에 남게 되리라는 희망을, 아니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당분간 제자와 함께 환자를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마저도 아쉬운 모양이었다.
회진을 끝낸 치프들이 교수들에게 인사를 했다. 천안 치프들까지 모두 모여 인사를 할 시간을 다시 가져야 하지만, 사실상 지금이 마지막이나 다름없었다.
“아이고! 난 이때가 제일 싫다. 싫어. 해마다 겪는 일인데 왜 이렇게 적응이 안 되니. 빨리들 올라가라. 빨리. 뭐 좋다고 시간을 질질 끌어.”
송재덕 교수가 돌아서며 헛기침을 했다. 설마 눈가를 붉힌 것은 아닐 것이다.
“수고했어. 그동안 즐거웠다.”
신기동 교수는 이준영 교수만큼 말이 짧았다. 하지만 치프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속에 제자들에 대한 사랑과 정이 가득하다는 것을.
“그동안 수고했다. 니들 덕분에 의국 분위기가 많이 좋아져서 고맙게 생각한다. 이만 올라가라. 그리고 김지훈 니는 치프들 논문하고 전공의 수첩 제출 문제가 남았으니까 내랑 몇 번 더 봐야 한다. 그렇게 알고 있어라.”
이혁민 교수는 여느 때처럼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렇게 교수들과의 인사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의국원들과 마주했다. 길게는 2년 반, 짧게는 반년 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부대끼며 살았다. 형제 이상으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다. 그 때문인지 묘한 침묵이 흘렀다.
김지훈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서도진, 서도훈, 안호석, 천광호! 이 자식들 입 좀 봐라. 아주 치프 된다고 좋아서 죽네, 죽어. 일석아, 우리 조금 더 일할까?”
“그럴까? 치프 이거 한 번 해 보니까 놓기가 싫네. 경석이 형, 현수야, 전문의 따는 거 일 년 미루자. 생각해 보니까 전문의 따야 그중에서는 꼴찌 아냐.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낫지 않아?”
서도진이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구! 왜들 이러세요. 끈 떨어지셨으면 이젠 조용히 숙소로 가셔서 공부에 전념하시죠. 이 시간부로 의국은 우리 3년차들이 접수하겠습니다.”
“어? 서도진 너마저? 총치프 됐다고 막 나온다.”
“에헤! 마지막을 깔끔하게 끝내셔야죠. 이건 추태십니다, 추태. 박순용 선생님, 우리 치프 선생님들 모시지 않고 뭐하십니까?”
박순용이 웃으며 다가왔다. 의국원들 중 가장 나이가 많다. 지금까지는 아랫년차였지만 이젠 선배이기도 했다. 아직은 전공의 신분이라고 해도 손을 놓은 이상, 의국 서열이 아니라 본래의 선후배 사이가 강해지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죠?”
“아닙니다. 선생님 덕분에 많이 배웠고, 정말 즐거웠습니다. 전문의 시험 준비 잘하세요.”
“고맙습니다.”
일일이 악수를 하고 의국을 나왔다. 이혁원이 숙소까지 따라와 인사를 했다.
김지훈이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혁원아, 잘 지내. 인마.”
“선생님.”
특별한 말은 필요 없었다. 더 없는 신뢰만이 오고 갔다. 서로의 아픔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함께 일하며 나눈 정과 같은 과를 한다는 큰 인연만으로도 충분했다.
잠시 김지훈과 눈을 마주한 이혁원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의국으로 돌아갔다. 김지훈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웃다, 한숨을 내쉬기를 반복했다.
‘더 태웠어야 했나? 신경 많이 못 쓴 거 정말 미안하다.’
‘선생님, 내년에 꼭 병원에 남으셔서 더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아버지도 기대하고 계세요.’
그렇게 3년 반에 걸친 수련의 마지막 날이 지났다. 가슴속에 있던 큼직한 돌덩이를 치운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더 큰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기도 했다. 어떤 기분인지 말로 표현하기 참 힘든 상황이었다.
천안 치프까지 모두 모였다. 후련하면서도 시원섭섭한 얼굴들이었다.
김지훈, 신현수, 손일석, 이경석, 유창범, 김경수, 오성민.
모두 7명이다.
정갑수의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동안 나누지 못한 말들을 나누느라 한동안 숙소가 떠들썩했다.
시계를 본 김지훈이 손뼉을 쳤다.
“자! 이제 그만들 하시고, 잠시 후 가질 술자리에서 마저 합시다. 그럼 마음 편하게 먹기 위해서 계획부터 짤까요?”
“뭐부터 결정해야 하는데?”
유창범의 말에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신현수를 보았다. 이론의 최강자가 전문의 시험 준비와 진행을 맡는 것이 당연했다. 아쉽지만 김지훈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오늘부로 허울뿐인 총치프였다.
“일단 다음 주 한 주는 쉬었으면 해.”
“그럼! 올해는 휴가도 못 갔는데 당연하지. 으하하하!”
손일석이 유난히도 좋아했다.
혹시 고경희와?
김지훈의 매서운 눈길에 손일석이 딴청만 부렸다.
“대신 공부 시작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부분은 확실하게 책임져야 돼. 교과서 리딩(Reading)과 문제집 풀이를 병행해야 하는데, 최소한 11월까지는 두 번을 박복해야 각자 부족한 부분을 보강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어.”
신현수의 설명이 이어졌다. 분량이 많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막상 얘기를 듣고 보니 장난이 아니었다. 교과서에서 직접 읽어야 할 부분만 2,000페이지가 넘었다. 참고 서적까지 하면 눈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그것도 원서다. 한 명씩 돌아가며 하루에 40페이지 이상을 번역하고, 요약본이 아니라 그 부분을 그대로 발표한다. 이후 그 분량에 해당하는 기존 문제를 풀고, 발표자는 20문제 정도 새로 만들어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한 번역을 듣기만 하고, 문제만 풀면 기본기를 다지기 어렵다. 발표와 문제 만들기만 번갈아 한 사람이 할 뿐, 나머지는 당연히 모두들 똑같이 해야 할 과제였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맡은 파트를 책임지지 못하면 전체에 문제가 생긴다는 걸 잊지 마.”
“어후! 전체 일과만 아침 9시에 시작해서 6시는 돼야 끝나겠네. 그 이후에는 각자 부족한 부분 복습하고, 다음 날 분량까지 준비하려면 정말 빡빡하겠다. 일요일 빼고는 하루도 못 쉰단 말이지. 차라리 일하는 게 낫겠다. 어? 근데 지훈이는?”
이경석이 말하다 말고 흠칫 놀랐다.
다음 주에 일주일 쉬는 것으로 휴식은 끝이다. 김지훈은 3주 후에 결혼을 한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인사까지 다니려면 꼬박 일주일은 빠져야 한다. 그렇다고 전체가 모두 또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남들 놀 때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결혼을 한다. 아쉬울 것도, 힘들 것도 없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걱정들 마세요. 예정대로 진행하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전혀 지장 없도록 딱 맞출게. 대신 나 결혼식 할 때 모두 꼭 와야 돼.”
“당연한 소리!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갈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 니 결혼식 안 가면 누구 결혼식을 가겠어?”
다시 머리를 맞댔다. 각자 책임져야 할 부분들을 대충이나마 확인한 후 오늘의 본론에 들어갔다.
술이다. 수련 이후 처음으로 마음 놓고 마시는 자리다.
입국식이 부럽지 않은 날이었다.
허리띠 풀고 제대로 마셨다.
다음 날, 다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갈증에 시달렸다. 이제는 술 많이 먹었다고 응급실이고 어디서든 간에 포도당 달아 달라는 소리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변했다.
형식상 치프는 그냥 의국원에 불과했다. 지금은 3년차들의 세상이었다.
***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숙소에 홀로 앉아 교과서를 펼치고 있자니 온갖 잡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다들 무엇을 하며 놀고 있을지 궁금했다. 정말 보기 힘들었던 대낮의 태양과 벗해 산으로, 들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9월의 해는 정말 유혹적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꾹꾹 참고 미리 준비를 해야 했다. 맡은 부분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면 자신에게나 치프들에게나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에휴! 혼자 공부하려니까 정말 힘드네. 그래도 이게 어디야?’
고경아의 하해와 같은 마음에 끼니 걱정을 덜었다. 매일 아침저녁은 함께 먹기로 했다. 그것도 손수 차린 밥으로 말이다. 내친김에 잠도 고경아 집에서 자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일렀다. 지금까지 잘 버텨 왔는데, 그깟 며칠 더 못 참을 이유가 없었다.
애써 마음잡고 공부에 집중했다. 하지만 어디나 방해꾼은 있다. 집에 내려갔던 손일석이 불과 이틀 만에 심각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너 갑자기 웬일이야? 이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렇게 심각해?”
“지훈아, 나 확실하게 결심했고, 집에서 허락까지 받았다. 그러니까 니가 나 좀 도와줘야겠어.”
“뭘 도와줘?”
“경희 집에 인사드리러 갈 건데, 아버님 성격이 만만치 않다며. 처음 뵌 자리에서는 잘 넘어갔지만, 경희 씨 달라고 하면 어떻게 변하실지 모르잖아.”
김지훈이 물끄러미 손일석을 보았다.
가장 친한 친구다. 겉보기와는 달리 누구보다도 속이 꽉 찬 놈이다. 고경희와도 정말 잘 어울렸다. 이제는 고경희가 가족이어서 그런지 순간 한 번은 튕겨 줘야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솔직히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었다.
‘이 자식이 아무리 미워도 앞으로 평생을 봐야겠네. 고맙다, 인마. 넌 영원한 내 친구다.’
생각은 생각이고, 말은 말이다.
“그래? 그럼 내가 손윗동서로서 역할을 좀 해 줘야 하나? 근데 우리 결혼식 때문에 아버님, 어머님이 신경을 많이 쓰시고 계실 텐데 괜찮겠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인사드려? 지훈아, 부탁한다. 나 좀 살려 줘.”
손일석의 얼굴이 벌게졌다. 안달복달을 하는 걸 보니 고경희를 정말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전문의를 따면 바로 군대를 가야 하는 탓에 마음이 급하기도 할 것이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그날 저녁, 고경아와 함께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정작 손일석은 입을 열지 못했고, 고경희가 당차게 치고 나왔다.
“형부, 이번 주말에 원주 가서 아빠, 엄마한테 말 잘해 주셔야 해요. 형부 친구들 함 팔러 왔을 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죠? 우리 오빠도 잘 모르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느라 힘들었을 거예요.”
“그럼! 누구 말인데 내가 당연히 그래야지.”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고경아는 웃기만 했다.
주말에 공부하기는 글렀다. 그 탓에 없는 시간, 있는 시간 다 쪼개서 필사적으로 교과서에 매달려야 했다.
드디어 토요일 오후, 넷이 함께 원주로 향했다.
김지훈은 느긋했고, 손일석도 웃고는 있었다.
‘자식!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 아버님 말 몇 마디면 넌 바로 사망이다.’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올까?
무사히 원주에 도착해 장모와 처형의 환대를 받았다. 예상대로 장인은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그런데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이럴 수가! 손일석 이 자식이 대체 뭔 짓을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