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수련의 끝 (2)
참관을 한 의사들이 이준영 교수의 뒤를 따라 휴게실로 향했다.
잠시 후, 나직한 웅성거림과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조용해야 할 수술 방이었다. 다들 의사이기에 이를 모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예외를 두어도 좋을 것이다.
김지훈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후우! 정말 해낸 건가?’
송미경을 보았다. 고른 호흡을 따라 창백하기만 했던 환자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지는 것 같았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이때만큼 행복한 시간은 없었다. 고경아의 따스한 눈빛에 더욱 행복했다.
문득 얼굴이 따가워진 김지훈이 고개를 돌렸다. 이혁원이 감히 치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감동을 받은 얼굴이었다. 일반 외과 교수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이준영 교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을 것이다.
‘자식이, 파트 돈 지가 얼만데 이제 안 것처럼 표정이 왜 저래? 아버지라고 괜히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살아, 인마.’
이혁원이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와! 나는 정말 언제 선생님처럼 퍼펙트하게 퍼스트를 설 수 있을까요? 부동맥을 찾았을 때는 정말 숨이 막히는 줄 알았습니다.”
어라? 번지수가 틀린 거 아닌가?
이혁원의 눈길이 김지훈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혁원아, 집도의는 이준영 선생님이야.”
대답도 안 하고 웃기만 했다.
김지훈도 웃고 말았다. 감히 범접도 할 수 없는 스승을 두고 아직 전문의도 따지 못한 자신을 보고 있다니 희한한 놈, 아니 웃긴 놈이다.
잠시 후, 들어온 치프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엄지를 치켜 올렸고, 신현수는 담담한 얼굴 속에 흥분을 가득 담고 있었다.
“고맙다. 우리가 정말 해낸 거지?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을 거야. 환자도 좋아지겠지?”
“그럼, 당연하지. 현수야, 이거 케이스 발표감 아니냐? 지훈아, 아무래도 넌 끝까지 고생해야 할 것 같다. 그건 도와달라고 하지 마라.”
케이스 발표감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야 실감이 났다. 환자에게서 느껴지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지금까지 경험한 일 중 가장 벅차고 보람된 순간이었다.
다음 환자가 내려오기 직전이었다. 수술실로 향하던 이준영 교수가 손짓을 했다.
“어떻게 할래?”
무엇을 묻는지 빤했다.
누군가 한 명은 시연에 참가하지 못할 뻔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송미경 환자 덕에 숫자가 딱 맞았다. 스승과 함께 비장 절제술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치프들은 확실하게 준비를 했고,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다. 경쟁이나 양보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전 시간 나는 대로 송미경 환자를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출혈이 걱정돼서요.”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수술은 신현수 들어오라고 하고, 다음 수술은 손일석에게 퍼스트 서라고 전해.”
김지훈의 말에 칭찬 한마디 정도는 할 법했지만, 역시 이준영 교수였다.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김지훈도 이젠 적응이 되다 못해 당연하게 여길 뿐이었다.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고 있던 치프들이 김지훈의 말에 다행이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특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이경석은 입을 꽉 다물며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두 번째 시연은 담낭 절제술 및 T-tube 삽입술이다.
이준영 교수의 집도 아래 신현수가 퍼스트를 섰다.
매끄러웠다.
화면을 지켜보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이준영 교수의 과감한 손이 신현수의 섬세함을 충분히 배려하고 있었다. 그동안 머릿속을 감돌던 생각이 점점 더 확연해졌다.
‘집도의는 당연히 퍼스트를 이끌어야 하는데, 스승님은 그걸 넘어서서 퍼스트를 편안하게 해 주시는 것 같네. 저런 걸 배워야 해. 근데 현수 저 자식은 어떻게 조금도 흔들리질 않냐. 저런 태도도 배워야 해.’
역시 최고의 수술 팀이다.
가슴을 졸여야 했던 비장 절제술과는 달리, 다들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을 지켜보았다. 상당히 까다로울 것이라고 여겼던 T-tube 삽입이 의외일 정도로 깔끔하게 끝났다.
참관한 의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박수를 쳤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다.
수술실까지는 몰라도 김지훈의 귀에는 그 소리가 분명하게 전해졌다.
회복실로 돌아온 신현수가 흥분을 참느라 콧등까지 찡그렸다. 치프들이 어떻게 봤는지도 꽤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 명이 보이질 않았다.
“지훈이는 어디 갔어?”
“송미경 환자 상태 살핀다고 나갔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수술 내내 왔다 갔다 하는데 정신이 없다. 그건 그렇고, 이제 내 차롄가? 쪽팔리지 않게 잘해야 하는데 걱정이네.”
환자에 관한 한 언제나 한결같은 김지훈이었다. 분명 공정식이 신경 쓸 것이다. 수술 직후라 불안할 수도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서도진에게 맡겨도 좋을 텐데 말이다.
‘후우! 이래서 다들 널 좋아하고, 믿는 거겠지?’
건강한 경쟁이기에 라이벌의 생각과 행동을 서로 인정하고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세 번째 시연이 시작됐다. 라파로 담낭 절제술이다.
손일석이 퍼스트를 섰다.
수술 전 진단에서는 담낭 벽의 염증이 심해 보이지 않았는데 의외로 염증 소견이 심했다. 일순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지만 손일석의 손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이준영 교수는 퍼스트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배려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그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역시 스승님이시다. 시연이라 더 긴장하고 봐서 그런가? 오늘따라 눈에 쏙쏙 들어오네.’
무난하게 수술이 끝났다.
또다시 들려오는 박수 소리와 함께 회복실로 들어오는 손일석을 이번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맞이했다. 입이 귀에 걸렸으면서도 엄살을 떨었다.
“지훈아, 현수야, 나 어땠어? 경석이 형, 나 실수한 거 없었나? 다른 선생님들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떨려서 죽는 줄 알았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어이구! 천하의 손일석이?”
“하오문 문주라고 해서 간덩이까지 부은 건 아냐, 인마. 어쨌든 아무 문제 없었지?”
“걱정하지 마. 이젠 내가 걱정이다. 니들 다 잘해 냈는데 나만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이경석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렸다. 정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형, 라파로 탈장 수술이 만만치 않지만 형 실력이면 충분하고도 넘쳐요. 일석이도 문제없이 퍼스트를 섰는데, 형이 걱정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런가?”
“어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지금 날 갖고 노는 건가? 야! 세상 참 좋아졌네. 겸손을 좀 떨었더니, 한낱 범부들이 깜빡이도 안 켜고 옆구리를 확 치고 들어와? 강호의 법도가 이렇게 깨지네.”
역시 가장 먼저 긴장 푸는 놈은 따로 있다. 실없는 소리를 또 해 댄다.
김지훈이 아예 눈길도 주지 않고, 이경석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조용히 파이팅을 외쳤다. 옆에서 웃고 있던 신현수가 엉겁결에 주먹을 쥐었다.
마지막 수술 시연이다. 지금까지 교수 휴게실에서 수술을 지켜보던 송재덕 교수가 덧 가운을 입고 직접 참관을 했다.
이경석의 빠른 손이 이준영 교수의 과감한 손과 어울렸다.
카메라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탈장이 발생한 구멍을 질기고 단단한 패치로 막는 과정이 끝났다.
송재덕 교수가 흐뭇한 얼굴로 이경석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잘했다. 잘했어. 이래야 내 새끼지. 대장 할 놈이 이 정도는 돼야지. 암! 그렇고말고.’
마지막까지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이준영 교수는 물론 모든 교수들이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제자들에게는 엄하기로 소문났던 허경발 원장도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긴장을 풀지 못하고 지켜보던 치프들이 이제야 활짝 웃으며 주먹을 치켜들었다.
치프들 모두 자신의 실력과 열정을 유감없이 보였다. 비록 교수들이 외부에서 온 손님들과 자리를 함께하느라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지만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잘했다. 수고했다.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모두가 스승이고, 모두가 제자다.
이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날 밤 내내 치프들의 얼굴에서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의국원 모두 큰 자극을 받은 듯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이혁원은 아직도 감격에 겨운 얼굴이었다.
“박순용 선생님, 저희도 치프 되면 지금 치프 선생님들처럼 할 수 있겠죠?”
“그럼. 근데 혁원아, 일단 2년차부터 돼야 하지 않겠어? 너 백 일 당직 끝났다고 요새 엉덩이 붙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종진이는 환자 보는 것 같던데.”
휘리릭!
이혁원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1년차의 쉴 틈은 윗년차들이 없을 때뿐이다.
***
시간이 가며 수술 시연이 준 감동과 흥분이 차차 가라앉았다. 송미경 환자가 무사히 회복돼 퇴원을 하는 날이 감동의 끝자락이었다. 다시는 재발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별말씀을요. 다시 보지 맙시다.”
이런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아픈 사람은 끝이 없고, 일상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의국과 외래 분위기는 차분해졌지만, 치프들은 마지막 고난의 길로 들어섰다. 아랫년차들의 행복함을 대신해서 말이다.
전공의들의 희망과 꿈인 휴가 시즌이다.
파트당 한 명씩 휴가를 갔다. 1년차가 없으면 일을 대신할 2년차만 힘들어지지만, 이삼 년차가 없으면 치프가 힘들어진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처럼 휴가를 못 가니 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특히 3년차의 부재는 아예 말할 수조차 없었다.
따르르릉!
“어후! 또?”
따르르릉!
“2년차가 그 정도도 해결을 못해? 어후! 응급실도 바쁜데 병동 일은 니들이 좀 해결하면 안 되겠니?”
여기저기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한숨이 터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어느새 휴가 시즌이 끝났지만 치프들에겐 마지막 산이 남아 있었다. 전문의 시험 조건인 논문과 전공의 수첩을 점검받고 통과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이혁민 교수는 수련이 끝나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결코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김지훈, 내가 체크한 부분들 고치고, 비장 절제술 케이스 리포트도 빨리 마무리 짓자. 이제 2주밖에 안 남았는데, 언제 다 할래?”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잠시도 쉬지 못하고 바로 논문 수정에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프 때마다 고경아와 함께 결혼 준비를 해 왔는데, 왜 이렇게 남은 일이 많은지 모를 일이었다.
헉헉! 숨이 다 가쁘다.
오프고 당직이고,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수련의 마지막 날이 있듯, 결혼 준비도 어느 틈엔가 거의 다 마무리됐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확연한 현실로 다가왔다.
청첩장을 든 김지훈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9월 셋째 주 일요일 오전 11시.
수원 외곽의 모 가든.
김지훈과 고경아가 여러 귀빈들을 모시고…….
어느 청첩장에나 으레 들어가는 문구들이었지만 김지훈에게는 남달랐다. 결혼을 앞둔 모든 신랑, 신부가 똑같은 마음을 갖는다고 해도 정말 특별하게 느껴졌다.
허경발 원장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흔쾌히 허락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제자가 무어라고, 그 자리까지 함께해 준 이준영 교수를 보며 하마터면 눈가를 붉힐 뻔했다.
고재현의 부모님에게는 아버지, 어머니의 자리에 앉아 달라고 부탁했다. 잘 커 줘서 고맙다며 눈가를 훔치는 어머님의 모습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원주가 그리 가까운 곳이 아니었지만, 고향 친구들은 물론 손일석은 당직까지 바꿔 가며 함을 팔아 주었다. 큰 말썽 없이 천 원짜리 지폐를 밟고 들어가 준 것도 고맙기만 했다.
술상을 차리는 장모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리는 장인,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처제와 처형의 모습에서 이젠 정말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집도 마련했다. 방 두 개에 조그만 마루가 딸린 집이었지만 정말 넉넉해 보였다.
새로 벽지를 바르고 가구까지 들여놓자, 그 어떤 집도 부럽지 않았다. 얼마 안 있으면 한 침대에서 눈을 뜨고, 때론 여유로운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을 고경아와 함께했다. 아니, 솔직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뒤를 졸졸 따라다녔을 뿐이었지만, 정말 고맙고 행복했다.
‘어디서 경아 씨와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결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동안 무수한 문제가 생기고, 때론 얼굴을 붉히며 싸우겠지만 고경아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고 확신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좋아서요. 행복하네요.”
“저도 행복해요.”
김지훈이 고경아를 힘껏 안았다. 한여름의 무더위도 두 사람을 떼어 놓지 못했다. 이럴 때면 언제나 찾아오는 짐승이 있다. 음흉한 늑대 울음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순간 과속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할 일이 남았다.
김지훈! 청첩장 언제 돌릴 거야?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 수원에 가서 혼주를 대신하는 고재현의 부모님에게 가장 먼저 청첩장을 드리는 것이 예의다. 분명 밥도 먹고 와야 할 것이다. 그냥 보낼 어머님이 아니었다.
번뜩 정신을 차린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시동을 걸었다.
“경아 씨, 출발합시다. 다음 주에는 오후에 시간 맞춰서 교수님들하고 병원 식구들에게 같이 드리죠. 어떤 분들에게 드려야 할지는 생각했어요?”
“네. 친한 친구들하고 몇몇 분에게만 드리려고요. 수원에서 하는데 부담스러워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수원보다는 서울이 여러모로 편하겠지만, 고재현의 부모를 만난 후 장인이 내린 결정이었다. 어쩌면 그리운 이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식을 올리고, 인사를 드리라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감사할 뿐이었다.
고경아의 마음 씀씀이도 고마웠다. 평생의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고 싶을 텐데, 아쉬움 따위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렇겠죠. 나는 드릴 분이 교수님들밖에 없는데,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래도 이준영 선생님은 꼭 오시라고 할게요.”
왜 이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할까?
어쨌든 오늘도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수원에 들렀다가 올라가는 길에 그리운 이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힘들 때나 행복할 때나 항상 밤하늘에서 김지훈을 내려다보던 두 개의 별이 보였다. 환하게 웃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고경아를 집까지 바래다준 김지훈이 멀리서도 보이는 병원 불빛을 보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제 불과 일주일 남은 수련은 더욱 바쁘고 알차게 보내야 한다. 떠난 자리가 아름다우려면 마지막 마무리 역시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도 일이지만 사람을 가장 어렵게 생각해야 했다. 그동안 서운해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고 웃으며 수련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랐다.
마지막 일주일이 시작됐다.
병원의 업무 특성상 결혼과 일은 별개다.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을 앞에 두고 사적인 일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나 고경아나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시간을 내 고경아와 함께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청첩장을 건네자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청첩장만 바라보았다. 스승이 제자를 보는 마음 이상의 각별함이 느껴졌다.
“축하한다. 준비는 다 했어?”
그래도 나오는 말은 항상 무뚝뚝하다.
“예, 선생님.”
“경아야, 이놈이 속 썩이더라도 잘 달래서 항상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다. 축하하고, 언제나 행복하길 바라.”
고경아에게 말할 때는 예외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준영 교수가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결혼 후에 뜻하지 않은 일로 힘들 때면 둘 다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자식이 생긴 후에는 더욱 신중하게 행동해야 해. 그래야 만에 하나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바로잡을 기회를 얻을 수 있어.”
행복하기만 할 때 힘든 일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이준영 교수는 자신의 뼈저린 경험을 말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아내와 자식에게 너무 큰 아픔을 안겼다는 죄책감과 후회는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좋은 날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준영 교수가 고경아를 보며 웃었다. 정말 보기 힘든 일이었다.
“경아야, 그건 그렇고 김지훈 저놈처럼 한곳에 빠지는 놈들은 고집도 세기 마련이야. 힘든 일이지. 한 번에 고치려고 하지 말고 살살 다가가면 곧 네게 맞춰 갈 거다. 우리 경아는 현명하니까 걱정할 일도 없는데, 내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한 모양이다.”
한동안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물론 고경아와 이준영 교수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주 간간이 김지훈의 짧은 대답이 들릴 뿐이었다.
외래에서 나온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스승의 말을 가슴 깊이 되새겼다. 두 사람이 만나 가족이 된다는 것은 기적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지만, 그만큼 큰 책임감이 따른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했다.
그래도 무조건 즐겁다.
사랑합니다!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 있습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