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 (1)
금경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교수,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부탁?”
“내일 퇴원할 생각이야. 그 전에 스승님을 뵙고, 함께 수련했던 교수들도 봤으면 해. 가능하면 신동석 이사장님도 만나 뵀으면 좋겠어. 무리한 부탁이라는 거 잘 알아. 하지만 마지막으로 꼭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
용서를 구할 생각일 것이다. 특유의 거만하고 남을 깔보는 것 같은 말투까지 사라져 있었다.
이준영 교수가 착잡한 기색으로 고민에 잠겼다.
누구보다도 스승에 대한 걱정이 앞설 것이다.
허경발 원장이 금경태를 보는 것이 괜찮을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죄를 짓고 감옥에 갔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인데, 한때나마 제자였던 금경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알면 더욱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노령이라는 사실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경태의 상태를 생각할 때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너무 늦기 전에 아시는 것이 좋겠지.’
“말은 해 볼게.”
“고마워. 김지훈, 너도 날 많이 미워하고 원망하겠지만 현수와 함께 내일 봤으면 좋겠다. 현수에게 말 정도는 전해 줄 수 있겠지?”
어떤 말을 할지 짐작이 갔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맞는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금경태가 저지른 죄의 무게와 마지막 남은 삶의 무게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금경태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준영 교수 역시 병실을 나오며 힐끗 시선을 주었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함께 병실을 나왔다. 서정호가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 교수님, 암이 많이 진행된 상태입니까?”
“수술이 불가능한 말기 간암입니다.”
“그렇군요. 죄송한데, 이런 상황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한다면 혹시 문제가 생길 수 있을까요? 금경태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몰라서 그럽니다.”
냉정한 말이었다. 하지만 서정호의 눈에는 건강하든 아프든 죄인이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안타까움이나 연민은 똑같이 느낀다고 해도 말이다.
“조사하는 데 오래 걸립니까?”
“금경태에게 달렸습니다만, 경험상 아주 간단하게 끝나거나 반대로 몇 날 며칠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김지훈도 굳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살다 보면 별일이 다 벌어지겠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난감하고 답답한 일도 없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진행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상식적인 말이다. 그 말이 최선일 것이다.
단둘이 늦은 회진을 돌고 의국으로 돌아왔다.
다들 오더를 내고 있었다. 진지하면서도 즐거운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시간이 무겁기만 했다. 신현수는 3년차에게 오더까지 맡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탁자 한곳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눈동자에는 증오만이 서려 있었다.
가슴이 턱 막혔다.
‘현수는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일 텐데,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일과가 끝난 후, 치프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병실에서 들은 말을 전했다. 신현수에 관한 말은 뺄 수밖에 없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느꼈는지, 이경석은 물론 손일석조차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때 응급실 전화가 계속 울렸다.
‘그래. 차라리 환자에게 집중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
“현수야, 응급실 같이 가자.”
교통사고 환자다. 저혈량성 쇼크로 바이탈이 심하게 흔들렸다. 정신없이 환자에게 매달렸다. 신현수도 가운 여기저기에 피를 묻혀 가며 오직 환자에게만 집중했다.
응급 수술이 벌어졌다. 항상 보던 수술이었지만 신현수가 참관을 했다.
그 시간 동안 금경태를 잊을 수 있었다.
수술이 끝났다.
어느새 한여름 밤의 어둠이 물러가고 있었다.
눈가가 뻑뻑했지만 잠을 쉽게 이룰 것 같지 않았다. 신현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슬며시 병원 밖으로 나간 신현수가 눈가를 좁힌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넸다.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지훈아, 너 어떻게 할 거야?”
“솔직히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 안타깝다는 생각은 안 들고, 왜 마지막까지 우릴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어. 내가 나쁜 놈인가?”
“다행이다. 난 네가 금경태가 어떤 인간인지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어.”
목소리가 차갑기 짝이 없었다. 증오와 분노만이 느껴졌다. 신현수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그 순간 갑자기 금경태의 말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서 혼자 판단하고 결정을 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다. 욕을 하든, 눈빛과는 달리 용서를 하든 간에 결정은 어디까지나 신현수의 몫이었다.
조심스럽게 금경태의 말을 전했다. 신현수가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생각도 안 하고, 이제 와 용서를 구할 생각인가 보지? 나는 값싼 동정 따위는 베풀고 싶지 않아. 금경태는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모두 치르고 난 다음에 죽어야 해.”
섬뜩한 말이었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다. 금경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었고, 그래서 지금도 용납이 안 되는 모양이야.”
솔직한 심정이었다. 금경태는 선을 넘은 정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흔히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스스로 참회한다면 용서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야말로 호사가들의 말일 뿐이다. 그로 인해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의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증오나 분노 같은 감정이 흐릿해질 정도로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금경태의 얼굴을 본 이후 지금까지 가슴이 답답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이제야 알았다.
“현수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당장 내 마음 편하자고 그럴 수는 없겠지?”
“진심? 난 끝까지 용서 못해.”
신현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것이다. 여전히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감정을 담고 있는데 왠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금경태를 향한 값싼 동정 대신 신현수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했는지도 몰랐다.
“그래. 그래도 싸다. 씨펄!”
까닭 없는 욕이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금경태 때문에 충분히 힘들어했다. 이젠 훌훌 털고 벗어날 때였다.
김지훈이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신현수가 긴 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오전 회진이 시작됐다.
신기동 교수는 물론 이혁민 교수도, 송재덕 교수도 금경태의 병실을 찾지 않았다. 이준영 교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평소와 다름없이 환자를 보았다.
‘선생님들도 말기 암인 건 안타깝지만 용서하실 수는 없다는 말이겠지. 큰 스승님도 그러실까?’
회진이 끝났다. 이준영 교수와 교수들이 스테이션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얼마 후 허경발 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침통한 표정이었다.
별다른 말 없이 금경태의 병실로 향했다. 이준영 교수만이 허경발 원장과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교수들은 복도에 서서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며 뒤를 따랐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당연히 함께해야 할 자리였다.
금경태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까만 눈가가 검붉어졌다.
“경태야.”
“스승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노스승의 눈가도 붉게 물들었다. 그 속이 어떨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스승님, 제가 어떤 짓을 했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제발 절 용서해 주십시오.”
“어리석은 놈. 못난 놈.”
안타까움이자, 책망이자, 질책이었다.
한때는 이준영 교수와 더불어 촉망받던 제자였고, 거칠 것 없이 달려왔다.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했다면 지금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었을 것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고, 금경태는 사람들이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은 지 오래였다. 가운 대신 입고 있는 수의도 그 죄를 가볍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동안 금경태를 바라보던 허경발 원장이 조용히 뒤돌아섰다. 외면이 아니었다. 그릇된 길을 걸었던 제자를 바르게 이끌지 못했다는 강한 자책이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사실에 노스승도 절망을 느끼는 것 같았다.
금경태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더 이상 만날 사람은 없어.”
금경태의 어깨가 떨렸다.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일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빤히 알고 있을 교수들도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신동석 이사장과 신현수는 평생 동안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지 못하던 금경태가 김지훈을 보았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을 용서해 준다면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가슴 깊은 곳에는 분노가 숨어 있었다. 자신에게 한 일은 잊을 수 있지만 신현수의 할아버지에게 한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몇 방울의 눈물로 그 죄를 씻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일이었다. 위선이었다.
그날이 올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금경태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김지훈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 이 자리에 김지훈이 아니라 환자를 앞에 둔 의사로서 있는 겁니다.”
금경태가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는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 아니기를, 진심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주말 일과가 모두 끝났다. 금경태는 퇴원을 했고, 더 이상 아무도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다. 정말 어렵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다른 사람 눈에서 눈물을 흐르게 한 일은 없었을까?’
또 하나의 의문이 화두처럼 다가왔다.
***
말 그대로 시간이 약인 모양이었다.
한영철의 깨끗한 검사 결과와 홍채연의 꿋꿋한 모습에 힘을 얻었다. 환자들이 하나둘 건강을 되찾는 사이, 금경태가 남기고 간 파문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신현수는 도리어 전보다 더욱 쾌활하게 생활했다. 누구보다도 화가 나고 힘들 텐데, 고마운 일이었다.
다시금 일상이 이어졌고, 의국도 본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치프들은 손바람을 날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데다 오프를 꼭꼭 챙길 수 있었던 탓인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의 무더위가 괴로울 뿐이었다.
그나마 병실은 나았지만 의국이나 숙소 에어컨은 무늬만 에어컨이었다. 선풍기가 아니면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욕이 나올 정도로 더웠다.
“왜 이렇게 덥냐. 수술 방에서 오더 냈으면 좋겠네. 제길! 저게 장식품이지, 에어컨이야? 혁원아, 종진아, 덥다. 오더 다 받았으면 빨리 나가라. 체온이라도 줄이자.”
손일석의 말에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여름에도 몸이 떨릴 정도로 시원한 수술실의 냉기가 그립기만 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호사였다. 부디 아무 탈 없이 마지막 텀을 마치기만을 바랐다.
‘좋다. 좋아. 이렇게만 가자.’
그때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응급실일 것이다.
아니다. 이혁원과 나종진은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다. 별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스테이션인가?”
전화를 받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이준영 교수다.
“예, 선생님. 김지훈입니다.”
(환자들 별일 없지? 다른 게 아니라, 2주 후에 시연을 하기로 했다.)
“시연이라니요?”
(라파로를 참관하고 싶다는 병원들이 몇 군데 있어서 자리를 마련했어. 일단 담낭 절제술, T-tube 삽입술, 탈장을 시연하기로 했으니까 미리 준비해.)
“몇 명이나 참석하는 겁니까? 인원이 많으면 수술실에 모두 들어올 수가 없을 텐데요.”
(라파로 본체에 선을 연결하면 교수 휴게실에서도 TV 화면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 그건 걱정할 것 없어. 아무튼 치프들하고 상의해서 철저하게 준비해.)
그럼 그렇지. 전공의의 평화는 결코 오래가는 법이 없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손일석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이 시간에 이준영 선생님이 왜 전화를 하신 거야?”
“라파로 시연을 하신단다.”
“라파로 시연? 그게 무슨 소리야?”
이것저것 질문이 쏟아졌지만 김지훈도 통화한 것이 다였다. 시시콜콜 설명하며 상의를 할 이준영 교수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말에 하고 싶은 말은 다 숨어 있었다. 일단 시연을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치프들! 헬프 미(Help Me)!”
“야! 우리를 왜 찾아?”
“일석아, 이준영 선생님께서 치프들하고 상의하라는 오더를 내리셨다고 말했잖아. 그리고 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발 벗고 나서야지. 그래야 인생 편해지지 않겠어?”
약점 제대로 잡았다. 지금도 가끔은 맹한 구석을 보였지만, 이럴 때는 누구보다도 술술 말이 나오는 김지훈이었다. 손일석 뺨칠 정도였다.
어쩌겠는가? 교수의 오더이자, 손윗동서가 될 김지훈의 말인데.
“어이구! 순조롭게 흘러간다 싶더니 역시 시한폭탄이었어. 그놈의 일복은 끝까지 터질 모양이네. 경석이 형, 현수야, 모여. 나만 죽을 순 없지.”
“그래도 이혁민 선생님이 주관을 하시지 않는 게 어디냐.”
“형, 도찐개찐이에요.”
“표준말 쓰자. 도진개진이다.”
“어라? 그게 맞는 말이야? 도긴개긴이 아니고?”
때 아닌 논쟁이 벌어졌다. 별 쓸데없는 일로 티격태격하는 걸 보니 그동안 상당히 편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생활도 이젠 끝이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집중합시다.”
신현수의 말에 분분했던 말이 쏙 들어갔다.
김지훈도 고민스러운 얼굴이었다.
수련 내내 수술 시연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다른 병원 의사들 앞에서 라파로 시연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었다. 절대 실수를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심 떨리면서도 기대가 됐지만, 막막하기도 해 은근히 걱정이 됐다. 치프들도 말과는 달리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시연에 대해 상의를 했다.
수술 케이스는 이준영 교수가 잡을 것이다. 퍼스트는 당연히 김지훈이겠지만, 왠지 함께 준비하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시연이기에 치프들이 돌아가며 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 우리도 퍼스트를 설지 모르겠네? 근데 수술이 3개잖아. 머리가 하나 남는데 누가 빠지지?”
“일석아, 벌써부터 그걸 왜 걱정해? 지훈아, TV 준비하고 설치하는 일은 병원에서 하겠지?”
“말씀으로는 그럴 것 같아요. 일단 우리 생각대로 하나씩 들어가게 된다면 누가 들어갈지 모르니까, 지금부터 시간 나는 대로 라파로 준비에 집중하죠.”
불과 2주밖에 안 남았다. 간담도 파트를 돈 김지훈과 신현수도 긴장하는데, 손일석과 이경석에게는 발등에 불이었다. 구석에 밀어 넣었던 라파로 수술 테이프를 찾아 일일이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오프를 반납해야 할지도 몰랐다.
예상이 맞았다.
아니, 폭탄이 터졌다. 다음 날 이준영 교수와 함께 이혁민 교수가 수술 시연에 대해 설명하며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이다.
“수술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수술 후 질문하는 시간이 있으니까 이론적인 문제들도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이삼 일마다 점검할 테니까 준비 확실하게 해라.”
빨간 볼펜이 눈앞에서 둥둥 떠다녔다.
끝이 아니었다.
“손일석, 삐끗하면 알지? 내 얼굴에 먹칠하는 거다.”
“경석아, 치프야, 잘하자. 잘해야 한다. 내가 믿어도 되지? 그치? 아니야? 얼굴이 왜 그래?”
이론은 그렇다고 쳐도 경험 부족이 문제였다.
이준영 교수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앞으로 수술 없으면 치프들은 무조건 라파로 들어와. 번갈아서 퍼스트 서면 할 수 있어. 마음에 안 드는 놈 한 명은 제외한다.”
우악!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은 실력이 처진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치프들의 눈이 번쩍였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조용히 숨어 있던 라이벌 의식이 툭 튀어나왔다. 경쟁이다.
김지훈과 신현수도 경험적인 면에서 한 발 앞서 있다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누구 한 명 실력이 없는 사람이 없었고, 노력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몸과 마음이 다 바빠서 그런지 총알처럼 시간이 흘렀다. 이제 일주일 후면 수술 시연이었다. 라파로 수술 때마다 불길이 번쩍번쩍 튀었다.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고 있던 김지훈이 간만에 여유를 갖고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어떤 수술을 들어가게 될지 궁금하기만 했다.
‘담낭 절제술이 제일 어렵지만 가장 많이 보니까, 도리어 드문 수술을 들어가게 되나? T-tube 삽입술을 들어가야 하는데 현수가 만만치 않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따르르릉!
오늘따라 유난히도 전화벨 소리가 요란했다.
“여보세요? 김지훈입니다.”
(지훈아, 나 정식이야. 널 찾는 중이었는데 잘됐다.)
공정식이었다.
내과 4년차가 아랫년차들을 거치지도 않고 직접 전화를 다 하다니, 이 밤에 무슨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