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59화 (559/1,329)

제6화 세상보다 사람이 어렵다 (2)

이준영 교수의 눈짓에 조용히 구석에 앉았다.

“서 검사님, 이 문제는 우리 의견보다 이사장님 의견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소리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지금쯤 이사장님께도 말씀을 드리고 있을 겁니다. 저도 왜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만, 양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 진평호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재판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상황이라 부탁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입장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사장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저희도 상의를 좀 했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문을 열던 서정호가 김지훈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동서, 응급실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교수님들 말씀 끝나면 잠깐 얼굴이나 보자.”

“예, 형님.”

서정호가 나간 뒤,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는 물론, 송재덕 교수까지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상당히 난처한 상황인지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을 모은 채 말이 없던 이준영 교수가 조용히 뷰박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지훈, CT 확인해 봐.”

외부에서 찍은 복부 CT다.

한눈에 병변이 눈에 들어왔다. 우측 간에 각각 2센티미터, 3센티미터 크기의 종양 두 개가 보였다. 경계가 불분명하고, 내부가 균일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간암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크기만으로도 이미 2기를 넘어섰다.

‘혈관을 침범한 것 같기도 하네. 좌측 종양이 하나 더 있는 건가? 에휴! 그럼 이미 말기라는 말인데, 어떤 환자일까?’

2센티미터 이상의 크기에 다발성이며, 혈관을 침범했다면 최소한 3기는 넘어선 간암이다. 만일 좌측 간에도 종양이 발생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수술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CT가 선명하지 않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어때? 수술할 수 있겠어?”

“이 사진으로는 말기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판단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다시 찍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다른 교수들과 눈을 마주쳤다.

“송재덕 선생님,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후우! 미우나 고우나 한때는 동료였는데 어떻게 하겠어. 만일 이사장님도 동의를 하시면 검사는 해 보자.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온갖 짓을 다 한 놈이 저게 무슨 꼴이야. 쯧쯧!”

“이 과장은?”

“저도 이사장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신 교수는?”

신기동 교수는 말이 없었다. 못마땅한 표정 속에 안타까움과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준영 교수가 다시 묻자, 조용히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들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김지훈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분위기가 왜 이런 것일까?

분명 교수들과 서정호 검사까지 관련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CT의 주인은 금경태와 진평호, 둘 중의 하나였다.

확인할 방법이 있었다. 힐끗 CT를 다시 보았다.

콩팥이 멀쩡해 보였다.

‘설마 금경태?’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었다.

“김지훈, 저 사진 금경태 CT다. 네 말대로 말기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할 상태로 보인다. 상황이 이상하겠지만, 이사장님께서 진료에 동의하신다면 곧바로 입원할 거야.”

놀라움을 넘어 경악하고도 남을 말이었다.

“우리 병원에 입원한다고요? 선생님, 그건 말도 안 됩니다. 현수가 어떤 마음일지 아시지 않습니까? 다른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도 되지 않습니까?”

김지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금경태가 말기 간암이라면 죄를 떠나 인간적으로 안타까워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경우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환자의 목숨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사람이다. 그것도 한때 금경태를 총애했던 신현수의 할아버지다.

교수들이 답답한 한숨을 터트렸다.

“자세한 사정은 서 검사님께 들어. 우리에게 듣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나을 것 같다. 어쨌든 빨리 진행하는 게 여러모로 좋으니까, 입원하면 최대한 빠르게 초음파 하고 CT 찍어서 결과 확인하자. 의국원들 동요하지 않게 단속 잘해. 나가 봐.”

불만에 찬 김지훈이 머뭇거렸다.

“김지훈, 우리도 마음이 안 좋긴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이번 일만큼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고 따랐으면 좋겠다.”

“그래그래. 세상이 그렇다. 어려운 게 세상이고, 사람이다. 지훈아, 치프야, 그냥 환자로 봐라.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잖니. 화가 나도 참아라. 참아. 금경태도 지금은 환자다. 환자.”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답답하기만 했다. 교수들이 어떤 마음일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이유부터 알고 싶었다.

곧바로 서정호를 찾았다.

“형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금경태가 간암인 건 안타깝지만, 우리 병원에 입원을 해서 진단을 하다니요? 이건 아니잖아요.”

“상식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벼랑에 몰린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지는 누구도 몰라. 금경태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어느 정도 진행된 거야? 희망은 있어?”

“아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너무한 거 아닙니까? 병원이 한두 군데도 아닌데, 다른 병원으로 보내시면 안 돼요? 금경태를 어떻게 봅니까?”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금경태가 너희 병원에 입원하는 조건으로 진평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말하기로 했어. 일부는 이미 진술을 받았고 말이야.”

일종의 거래를 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가슴이 답답하고, 화까지 난 탓인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금경태의 속마음은 더욱 모를 일이었다. 만일 간암 말기라면 수술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얼마나 살지 모른다. 금경태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병을 보여, 한때 동료였던 교수들과 스승이었던 허경발 원장에게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하려는 것일까?

수술이 가능하다면 평생 미워하며 등을 돌렸던 이준영 교수에게 수술이라도 받을 속셈인가?

머릿속에 온통 나쁜 생각만 가득했다.

서정호가 입맛을 다셨다.

“동서가 금경태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서 미안해. 하지만 진평호를 확실하게 세상과 격리시키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 지금도 만성 신부전을 핑계로 어떻게든 병보석을 받기 위해 혈안이거든.”

서정호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환자도 환자 나름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경태는 환자가 아니라 죄인이었다. 그동안 환자를 두고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당연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정말 기분이 묘하네요. 솔직히 금경태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좋게 생각하기도 싫고요.”

“왜 아니겠어. 나 같아도 그랬을 거다. 동서,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기분 좋은 얘기나 하자. 결혼 준비는 잘하고 있지? 뭐 필요한 거 없어?”

김지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제 서정호는 가족이자 윗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리는데 기분만 앞세울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결혼에 관한 얘기다.

“으휴! 형님도 입장이 곤란하실 텐데 저까지 이래서 죄송합니다. 필요한 건 다 샀어요. 사실 뭐가 더 필요한지도 잘 모르고요.”

“하하하! 그땐 나도 그랬어.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까 어느새 와이프하고 한 이불 덮고 있더라. 그럼 신혼여행 갈 때 비상금 좀 챙겨 줄까?”

“형님, 안 그러셔도 됩니다.”

“많이 주지도 못해. 검사도 박봉이야.”

서정호의 말에 공연히 미안해졌다. 후다닥 매점으로 달려가 캔 커피 두 개를 샀다.

그때 손일석이 허겁지겁 달려오며 눈을 부라렸다.

“김지훈, 형님 오셨으면 바로 연락을 해야지. 어디 계셔? 아! 저기 계시구나. 형님! 오셨습니까? 손일석입니다.”

“어! 잘 지냈어?”

“예. 형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럴 일이 좀 있어. 자네는 어떻게, 시간이 좀 나는 모양이네. 지금은 한가해?”

“아닙니다. 다음 주에 신장 이식이 하나 잡혀서 준비할 게 엄청 많습니다만, 형님이 오셨는데 당연히 만사 제치고 인사부터 드려야죠. 형님, 시간 되시면 저녁이라도 하고 가시죠.”

“아냐. 그럴 시간은 없어. 말이라도 고마워.”

“정말 서운합니다, 형님.”

상당한 아부성 발언이었지만, 손일석의 입에서 나오면 이상하게도 유쾌하게 들렸다. 서정호가 크게 웃었고, 김지훈도 답답한 마음을 조금은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결혼부터 고경희와의 만남, 그리고 인사까지 별 얘기가 다 오고 갔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서정호가 김지훈에게 고갯짓을 하며 급히 병원으로 들어갔다. 손일석이 당연한 것처럼 뒤를 따르려 했다.

“일석아, 가지 마.”

“왜?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어?”

“응. 금경태가 입원할지도 몰라.”

“뭐? 금경태?”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었지만, 서정호에게 전화가 왔으니 곧 가부간의 결정이 날 것이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급히 의국으로 올라갔다. 이준영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조금 있다가 입원할 거니까 바로 CT 찍을 수 있게 조치해. 방사선과 교수에게는 내가 연락할 테니까 초음파까지 빨리하자.)

솔직히 의외였지만, 신동석 이사장도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신현수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무척 걱정이 됐다.

“예, 알겠습니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이렇게 의욕이 안 나기는 처음이었다.

손일석의 채근에 금경태에 관한 일을 설명하면서도 얼굴을 펼 수가 없었다. 함께 듣고 있던 이경석이 혀를 찼다.

“그래서 현수가 이사장실로 불려 간 모양이네. 어이구! 기분이 정말 안 좋겠다.”

“씨펄! 그 많은 병원 놔두고 여기 무슨 낯짝으로 와? 간담도 전공을 했는데, 말기는 또 뭐야? 하여간 끝까지 괴롭히네. 근데 입원은 왜 해? 그냥 외래에서 검사해도 되잖아.”

“나도 몰라. 어쨌든 지금 제일 힘든 사람은 현수니까, 이따가 오면 잘 달래 줘. 그리고 아랫년차들도 눈치가 있으니까 단속 잘해.”

“알았어.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하필이면 니가 간담도 돌 때 이런 일이 벌어지냐.”

모두들 걱정 반, 짜증 반이었다.

금경태의 입원장이 올라왔다.

김지훈이 입원장을 만지작거리며 한숨만 내쉬었다. 지난 몇 주간의 즐거움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라파로로 담낭 절제술을 했다는 뿌듯함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석이 말대로 입원까지 할 필요가 있나? 말기가 아니면 수술까지 해야 할 텐데, 그 얼굴을 어떻게 보지? 제길! 정말 속을 알 수가 없네.’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불현듯 치솟는 분노에 눈가에 피로만 쌓였다.

금경태가 마음을 바꾸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외래 간호사에게 연락을 받았다.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빨리 진행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제길! 뭐라고 하지?’

외래로 내려간 김지훈이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까만 얼굴, 생기 없는 눈동자, 수의 속에 가려져 있는 수척한 몸.

전형적인 말기 암 환자의 모습이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변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금경태 같은 인간은 자신에 대한 연민이 더욱 강할 것이다.

김지훈을 향한 금경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슬픔과 아픔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전과는 달라 보였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 비참하겠지. 제길! 자업자득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거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동행한 형사의 존재도 마음에 걸렸다. 그런 모습을 한때는 동료이자 후배였던 의사들에게 보인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가시죠.”

금경태가 아닌 형사에게 한 말이었다.

초음파부터 시행했다. 방사선과 교수도 어색한 표정으로 화면만 보았다.

간이 보였다. 우측 간은 4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뉜다. 그중 2개의 구역에서 종양이 보였다. 각각 3센티미터와 2센티미터였다. 그리고 좌측 간에서 1센티미터 크기의 종양이 하나 더 보였다.

일단 2센티미터를 넘는 크기에 다발성이다. 혈관 침범 여부는 불확실했지만, 이것만으로도 수술 불가였다.

“CT를 찍어 봐야 알 수 있겠다.”

곧바로 CT를 찍었다. 조영제를 주입하자 종양의 성질 및 혈관 침범이 명확하게 확인됐다. 두말할 것도 없는 말기 암이었다.

인간성을 떠나 실력은 알아주었던 금경태다. 아무리 CT 화질이 나쁘다고 해도 이미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는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검사 결과를 묻지도 않았다.

금경태가 형사와 함께 병실로 향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답답한 한숨과 무거운 정적만이 흘렀다.

간담도를 전공한 의사였다. 아무리 간이 침묵의 장기라고 불린다지만,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금경태 자신이 스스로 초래한 일일지도 몰랐다.

암은 단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된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말기까지 진행되려면 상당히 오래전에 발생했다는 말이었다. 중간에 의심할 수 있는 증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돈과 욕심에 눈이 멀어, 정작 자기 자신의 육신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인간으로서는 저지를 수 없는 죄를 짓고 감옥에 갔다. 후회와 불안, 그리고 분노와 절망이 정신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피폐해진 정신은 몸과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그 때문에 급격하게 암이 자랐을 수도 있었다.

금경태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참 만에야 침묵이 깨졌다.

“지훈아, 병실로 올라갔지?”

“예. 지금 설명하실 겁니까?”

“시간 끌어서 좋을 일 없다. 너하고 나만 만나서 설명하자. 양쪽을 다 먹을 동안 왜 몰랐을까?”

병실로 올라갔다. 수감 중인 상황 때문인지 2인실을 사용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금경태를 감시하던 형사가 먼저 맞이했다. 양해를 구하고 금경태와 마주했다.

이준영 교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CT하고 초음파…….”

“이 교수,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거 이미 알고 있어. 억지로 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당히 무덤덤했다.

“알고 있었어?”

“나도 간담도 전공을 했잖아. 환자들에게 침묵의 장기니까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내가 당하네. 얼마나 살 수 있을까? 3개월? 잘하면 6개월?”

남은 삶을 말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두 눈에 회한과 후회가 번졌다.

김지훈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 때문인지 이제는 금경태가 어떻게 되든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시한부 삶이라는 사실에 갑갑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빨리 자신을 돌아봤으면 이렇게까지 될 일은 없었잖아. 왜 굳이 우리 병원에 입원을 해서 사람들을 괴롭힐까? 안면이 없는 의사들에게 진단을 받는 것이 당신한테도 편한 일 아냐?’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지난날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직한 숨만 내뱉었다. 한때는 최고의 라이벌이었고, 한때는 원수보다 더한 사이였지만, 그 때문에 도리어 착잡한 모양이었다.

할 수 있는 치료는 없었지만, 다른 환자였다면 해 주어야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금경태도 의사였다. 구구절절 말해 봐야 심리적 타격만 커질 것이 뻔했다. 아무리 미워도 그것이 최소한의 배려였다. 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 검사님에게 어떤 상황인지 말은 들었어.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금경태가 묘한 표정으로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할 말이 있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자신을 아껴 주었던 사람의 목숨을 돈과 바꾼 인간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하는 걸까?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갑갑하기만 한 이 상황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금경태의 얼굴을 보고 말을 듣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믿을 수 없게도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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