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54화 (554/1,329)

제4화 우리가 맺어 왔고, 맺어야 할 인연들 (1)

전공의의 일은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만이 다가 아니다. 년차가 올라갈수록 이것저것 일이 많아진다. 총치프는 특히 환자나 의국 일 이외에도 과에 관련된 일이 많다.

그중에는 본과 3학년 2학기부터 본과 4학년 1학기까지 이어지는 임상 실습을 관리하는 일도 포함된다. 다행히 일과를 진행하며 자연스럽게 교육을 시키면 되고, 서도진이 제 몫을 단단히 해 거의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시간을 쪼개 가끔 PK(Poly Clinic:임상 실습생)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턴과 마주할 때도 쩔쩔매는 실습생 입장에서는 그것이 더 편하기도 했다.

게다가 위계가 엄격한 의대 생활에 이어, 더욱 엄격한 전공의 수련을 하다 보면 학번 차이가 많이 날수록 무엇인가 묘한 장벽이 생긴다.

외부에서는 동문이라는 반가움이라도 있겠지만, 병원 내에서는 의사 사회 특유의 엄격함 때문인지 다소 데면데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항상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궁금한 법이다.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실습 기간이 거의 다 끝날 때가 됐는데도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못 잡고 있던 PK들이 보이지 않았다.

“도진아, 애들이 안 보인다.”

“PK들이요? 중간고사 기간이에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동안 일이 많았긴 많았던 모양이다. 아직은 시간이 느릿느릿 지나가야 할 나이인데 꽤나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을 많이 못 쓴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갈수록 신경 써야 할 사람들이 많아지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혁민 교수였다.

“예, 선생님. 내일 오전에 홍재순 선생님과 시험 감독 들어가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학교 다닐 때 시험 감독을 들어온 전공의 선배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만큼 어려웠던 선배들이었는데, 어느새 자신이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기분이 묘했다.

다음 날 오전, 시험 감독을 들어갔다.

시작을 알리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PK들이 의대생들의 영원한 친구 야마(YAMA:족보)집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한 문제라도 더 확인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보였다.

“빨리빨리 집어넣자. 시작 시간과 상관없이 끝나는 시간은 같다. 문제 수가 많아서 두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어. 빨리 안 넣을래?”

결국 홍재순의 나직한 경고가 터지고 나서야 시험지를 나눠 줄 수 있었다.

김지훈이 옛날 생각에 또 피식 웃었다.

YAMA(You Are My Assistant)!

그간의 출제 문제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족보집.

‘저거 없으면 졸업을 할 수 있었을까?’

평소 실력으로 보는 것이 시험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시험과 관계없는 사람들이 주로 그런 소리를 한다. 학력고사 만점 받은 학생이 뉴스에서 하는 말, 교과서에만 혹은 학교 교육에만 충실했다는 말이 거짓말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안다.

의대도 마찬가지다. 밤샘과 벼락치기는 기본이고, 여차하면 시험 범위 중 일부분은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과목과 분량이 워낙 많아, 평소 공부 좀 했다고 해도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물론 어디나 그렇듯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있다. 세상에는 오로지 교과서만 있고, 할 일은 공부뿐라는 사람도 예외다. 그런 부류가 아니면 노력만이 아니라 요령도 있어야 한다.

왜? 답은 간단하다.

메이저 과목인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는 엄청난 분량의 시험 범위를 자랑한다. 교과서 구석에 한 줄만 쓰여 있어도 시험 문제가 된다.

여기에 정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성형외과, 안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방사선과, 신경과, 정신과, 비뇨기과, 임상병리도 모자라 0.5학점짜리 치과까지 시험을 본다.

이걸 단 일주일 만에 다 본다.

그뿐인가?

졸업을 하려면 성적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일단 평균 점수가 70점 이상이어야 한다. 학점이 높은 과목을 잘 보면 상당히 유리하다.

하지만 조건이 그것뿐이면 치과처럼 0.5학점에, 미래와 전혀 상관없는 과목은 백지를 낼 수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과목이 60점을 넘어야 하는 조건도 충족시켜야 한다.

하나라도 부족하면? 재수강이 아니라 다운(Down), 즉 유급이다.

세 번을 당하면 퇴학이다. 최고로 비싼 등록금을 내고 귀한 시간까지 허비한 후, 정작 의사 면허 시험은 구경도 못하는 것이다. 아니면 정갑수 꼴 나기 십상이다.

그나마 절대평가를 한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장학금을 노린다면 모르지만, 꼴등을 해도 조건만 만족시키면 의사가 되는 길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언젠가는 들통이 나겠지만 말이다.

이래저래 시험 기간은 지옥이다.

지금 후배들이 바로 눈앞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더구나 일반 외과는 메이저 과목이고, 3학점에 달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점수가 엉망이면 눈물을 흘리며 방학을 반납해야 한다. 다운을 면하기 위한 유일한 구명줄인 재시험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고점이 74점에 불과해 학점 높은 과목을 못 보면 치명적이다.

정말 빨리 졸업하고 싶은 생각뿐일 것이다. 자신도 그랬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힘들어 죽겠지? 그래도 니들은 방학이 있잖아. 병원 들어와 봐라. 메이저 과를 하면 1년, 365일이 시험 기간이다. 잠 몇 시간 쭉 자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달콤한지 지금은 모를 거야. PK 백날 돌아 봐야 수박 겉핥기다.’

시험이 시작됐다.

“지금부터 눈 돌리면 컨닝으로 간주한다. 시험지 압수당하면 바로 집으로 가서 내년을 준비하면 돼. 자! 그럼 열심히들 풀고, 좋은 성적 받길 바란다.”

농담이 아니다. 실제로 중압감과 유혹을 못 이긴 몇몇이 유급을 당한다. 절대평가인 데다 장차 사람을 치료해야 하기 때문에 기초부터 제대로 쌓지 못하면 안 된다. 그런 이유로 부정은 더욱 엄격하게 처리한다.

홍재순 교수가 마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시험을 보라는 듯 눈을 번쩍이고 있었다. 김지훈과 서도진이 강의실을 왔다 갔다 하며 감독을 했다.

‘설마 본과 4학년인데 컨닝을 하진 않겠지. 그런데 시험은 쉽나? 요샌 어떤 문제가 나오지?’

시험지가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눈에 익은 문제들이 많이 보였다. 끙끙대며 고민을 하는 후배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지금 보면 쉬운 문제들도 상당히 많은데, 그땐 왜 모든 문제가 그리 어려웠는지 시험 내내 식은땀만 흘렸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슬며시 시험지를 훔쳐보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라파로에 스테이플까지 시험에 나온 거야? 야! 선생님들 참 빠르시네. 우리 때는 보지도 못했던 문젠데 배점까지 높네. 어째 이 자식들 표정을 보니까 점수 잘 나오긴 글렀네. 몇 명이나 재시험을 보려나?’

시험 보는 얼굴도 가지각색이었다.

볼펜을 휙휙 날리며 답안지를 작성하는 놈.

이마에 주름살을 만든 채 심각하기만 한 놈.

한숨만 푹푹 쉬는 놈.

아예 포기한 것처럼 문제만 바라보고 있는 놈.

학생 때는 보지도 못했던 모습이 다 보였다.

턱!

볼펜 놓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걸어 나와 답안지를 내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너무 빠른 시간이었다. 무지하게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포기를 한 놈이다. 경험상 후자일 테고, 답안지를 보니 그랬다. 주관식 답안지가 깨끗했다.

“너 문제 다 안 풀었는데 그냥 나가는 거야?”

“죄송합니다, 선생님. 기말고사는 열심히 공부해서 잘 보겠습니다.”

말은 뻔지르르하다. 자기 인생이고, 스스로 책임질 나이도 됐다. 두고 볼 일이었지만, 이런 경우 100퍼센트 재시험이다. 공부 안 한 대가로 방학을 모조리 반납해야 한다.

다행히 그런 후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시험 시간인 두 시간이 다 돼서도 대부분 시험지를 붙든 채 일어서질 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홍재순 교수가 소리를 지르고서야 끝낼 수 있었다.

“빨리빨리 답안지 내. 여적 못 푼 문제를 쳐다보고만 있으면 풀려? 거기 세 번째, 빨리 내라. 늦게 내는 것도 반칙이야. 점수 깎는다.”

톡식(Toxic)하다.

사실 이론의 강자는 그래도 된다.

서도진이 달려가 답안지를 회수했다. 우르르 몰려 나가는 후배들의 얼굴이 다들 좋지 못했다. 상당히 어려웠다는 눈치였다. 정말 몇 놈만 웃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듯, 책으로 배운 것과 임상 경험은 차원이 다르다.

총론은 몰라도 각론에 들어가면 문제 자체가 임상에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내용이다.

전공의가 돼 경험이 쌓이면 상당히 수월하게 아뻬 환자를 진단하고, 수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 때는 야마에 나온 문제라고 해도 단어 몇 개만 바꾸거나, 상황만 꼬아도 생소하기 마련이었다.

‘자식들! 그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다.’

강의실을 나오며 후배들을 힐끗 쳐다보던 김지훈이 갑자기 입술을 모았다.

문득 홍채연이 생각난 것이다.

의사와 환자, 선배와 후배, 의사와 학생.

지극히 단순하고 명료해 보이는 관계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뜻이 숨어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고려한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이 어렵게 느껴지는 데는 선배인 내 책임도 있겠지? 신경 좀 써야겠다.’

사람 사는 세상 참 어렵다. 일일이 다 신경을 쓰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내 일과 생활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무관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산다는 게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후배들 얼굴을 모두 보았다는 사실 자체로 기분은 좋았다.

즐거운 일은 또 있다. 물론 한편으로는 두렵지만 말이다.

사위인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 최문옥 여사가 올라온 것이다.

(지훈 씨, 이번 주말이에요. 토요일에 일과 끝나자마자 연락해야 돼요.)

“왜 벌써 올라오셨대요?”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아요. 토요일에 만나서 얘기해요.)

사흘이나 일찍 올라오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가슴이 확 들떴다. 장모님이 차려 준 밥상 생각도 났다.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그 웃음 덕분일까?

5월 마지막 주를 앞두고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 하부에 발생한 진행성 위암이었다. 이제 2기에 불과하다고 해도 김지훈에게는 위장관 파트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도전이었다.

‘어이쿠! 주말에는 시간이 없으니까 주중에 준비를 다 해야 하네. 현수한테 뭘 물어봐야 하지? 일석이나 경석이 형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혼자 준비해도 되지만 확실하게 해내고 싶었다. 간만에 치프들과 머리를 맞대는 것도 즐거울 것이다.

워낙 큰 수술이라 은근히 불안하기도 해, 도와달라고 치프들을 닦달했다.

당직을 함께 서는 신현수가 가장 만만했다.

“난 바빠서 안 돼. 다음 주에 담낭 절제술 주신다고 했어. 서연이 등쌀에 집에도 가야 돼.”

‘라파로로 담낭 절제술을? 부럽다. 너무 잘나가네.’

악 소리가 난다.

신현수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물론 신현수가 잘나가면 다음 텀으로 간담도를 도는 김지훈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위암 수술이 담낭 절제술보다 훨씬 큰 수술이라지만, 솔직히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치프는 한 명이 아니다.

“난 다음 주에 크론 있어. 집도는 아니지만 준비할 게 많아. 넌 혼자 잘하면서 김지훈답지 않게 왜 이래? 인생은 원래 혼자 살아가는 거야. 외로운 거지.”

“지훈아, 미안하다. 마지막 혈관 수술 주신다면서 마음에 안 들면 알아서 하라고 하셨어. 그 말의 의미가 뭔지 알지? 난 더 이상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

헉 소리까지 터졌다.

모두들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방심하고 싶어도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경험을 쌓고 배워 간다면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에서는 더욱 빛날 것이다. 그 대열에서 혼자 빠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갈수록 바빠지겠지. 다들 말은 그렇게 해도, 우리가 정말 머리를 맞대야 하는 상황이라면 언제든 함께 상의할 수 있고 말이야.’

동기들이 주는 자극은 강렬하면서도 즐거웠다. 최근에는 얼굴 찌푸릴 일도 없는 데다, 문득 다가온 주말에 대한 기대로 은근히 설레기도 했다.

“지훈아, 너 좋은 일 있어?”

“왜?”

“우리한테 다 퇴짜 맞았는데, 니 눈은 왜 웃고 있을까? 현수가 라파로로 담낭까지 떼는데 말이야. 이건 뭔가 있어. 내 촉이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어. 자백할래, 아니면 맞고 말할래?”

다들 궁금한 눈치다. 말 못할 것도 없지만 왠지 쑥스러웠다. 이 기분만은 혼자 간직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갈 손일석이 아니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자리를 비우자 더욱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넌지시 한 방을 날렸다.

“일석아, 장기적으로 보면 너하고도 관련이 있을 일이야.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좋지 않아. 이건 옳지 않아.”

손일석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고는 흠칫 놀라며 입을 딱 닫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고경희에게 분명 들었을 것이다.

“내가 정식으로 말할 때까지는 지금처럼 조용히 지내자.”

“그럼! 내가 이쪽 일만은 입이 무겁잖아. 야! 좋겠다.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거지?”

“응. 가구 보러 간다.”

손일석이 길게 숨을 내쉬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경희를 정말 사랑하는 모양이었다.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다 말고 갑자기 눈가를 좁혔다.

“그럼 장모님이 오시겠네?”

“그렇지. 니 장모님이 아니고, 내 장모님.”

“우리 사이에 왜 이러셔. 지훈아, 경희한테 들으니까 장모님이 엄청 좋으시다며. 이번 기회에 자리 좀 만들어 줘.”

“뭐? 우리 할 일 많아, 인마. 그리고 경아 씨가 좋다고 할 것 같아? 절대 허락 안 할 거다.”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그때 방석 두 개 더 놓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밥값 내가 낼 테니까, 넌 그냥 맛있게 먹으면서 지켜보기만 하면 돼. 아이고!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경희한테 연락해야겠다. 제수씨는 걱정 마라. 아니, 처형.”

대답도 안 듣고 후다닥 사라졌다. 웃음만 나왔다. 제일 친한 친구와 사랑하는 처제의 사랑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이것도 손일석과 고경희에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어쨌든 평일 오프는 반납이었다. 다행히 한 번뿐이었다. 고경아에게 사정을 하고는 위암 수술에 대비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새 토요일이 왔다.

최문옥의 미소는 너무 친근했다. 마치 어머니와도 같았다.

간단하게 늦은 점심을 하고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활동하기 딱 좋은 늦봄의 따스함 속에서 가구들을 보기 시작했다.

“김 서방, 이거 마음에 들어? 가구는 한 번 사면 십 년이고 써야 하니까 세련되면서도 튼튼해야 돼. 내가 보기엔 이게 좋은데, 어때?”

“전 다 좋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눈도장 찍어 놔. 경아야, 아까 본 장롱 다시 한 번 보자. 그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지?”

“엄마, 그것도 좋은데 다른 매장도 가 보는 게 어때?”

온 동네를 헤맨다. 차가 있다지만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TV와 냉장고도 산다면서 언제 다 볼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어디서 살아야 할지도 아직 정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집은 어떻게 하지? 어머님, 아버님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은데, 대출을 받아야 하나?’

집 걱정 때문인지 피곤이 몰려오며 다리까지 아파 왔다.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사람도 이런데,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최문옥과 고경아의 다리가 온전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결국 무엇을 살지 후보만 정했다. 더구나 고경아는 무슨 생각인지 고경희와 저녁 약속까지 한 마당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고경아가 고개를 요리조리 흔들었다.

“엄마, 내일 다시 봐요. 마음에 드는 건 있는데, 확 끌리는 게 없네. 엄마도 그랬어?”

“그럼. 살림살이 사는 게 쉬운 줄 알아? 꼼꼼하게 골라야 해. 이번 주에 못 사면 엄마가 또 올 테니까 천천히, 신중하게 골라. 김 서방, 자네도 그게 좋겠지?”

“그럼요, 장모님. 너무 설레고 즐겁네요. 전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그래도 긴장과 흥분 때문인지 옷 살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가끔 품평까지 했다. 솔직히 침대와 장롱, 그리고 화장대가 놓인 신혼 방을 상상할 때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고경아의 싱그러운 내음은 얼마나 달콤할까?

우워워워워!

장모가 있는 자린데 이놈의 늑대는 눈치도 없나?

김지훈의 얼굴이 난데없이 뻘게졌다.

그때 최문옥이 김지훈을 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긴 자네하고 경아가 먼저 들어가. 난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 자네 어머니가 옆에 계신다고 생각하고 경아와 함께 골라야 돼.”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어머니란 말에, 장모의 마음에 울컥 뭔가가 치솟으며 가슴속을 헤집었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김지훈 자신의 빈자리는 곧 고경아의 빈자리였다.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힘들다고 여긴 것이 정말 부끄럽고 미안했다. 불과 며칠 전에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어려운지 느꼈으면서도, 막상 고경아와의 관계는 쉽게 생각했다.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이해하고 아껴 주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말을 듣는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오직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말을 듣는 것이 먼저였다.

‘경아 씨,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해요. 사랑해요.’

고경아의 손을 잡았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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