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오늘만 같아라 (2)
각별한 의미를 가진 식사 자리였다.
이준영 교수가 라파로 수술을 들고 10여 년 만에 다시 학회에 이름을 알렸다. 스스로 명성, 혹은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스승과 교수들의 마음은 달랐다.
김지훈 역시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라파로 아뻬를 직접 집도했다는 사실은 은연중 상당한 여파를 일으켰다.
여러모로 특별한 자리였다. 허경발 원장과 고성문 원장, 그리고 교수들의 나직한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간간이 웃음이 터지고, 누군가는 손사래를 쳤다.
이준영 교수의 무뚝뚝한 얼굴에도 묘한 감회가 실리는 것 같았다. 가끔 치프들에게 눈길을 주는 교수들의 얼굴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반면 치프들과 간호사들에게는 허경발 원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려운 자리였다. 더구나 김지훈에게는 이처럼 어려운 자리가 없었다.
큰 스승님에 스승님, 그리고 장인어른까지.
식사가 시작될 무렵에는 오상익 원장과 구영선 교수에 홍재순 교수까지 합류했다. 일반 외과 교수들이 모두 참석한 것이다. 게다가 고성문 원장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지 상당히 반가워하기까지 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조심해야 했다. 신현수와 이경석도 조용히 식사만 했고, 고경아와 성미경 간호사 역시 말을 아꼈다.
유일하게 손일석만이 연신 고개를 내밀며 뭔가 틈을 엿보고 있었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제법 초조해 보이는 모습에 은근히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보다 못한 이경석이 한마디 했다.
“일석아, 허경발 선생님 계신 자리야. 가만히 좀 있어, 인마. 교수님들께 할 말이라도 있어?”
“형,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내 인생의 반쪽이 걸린 문제야. 분위기상 지금쯤 지훈이하고 우리를 부르실 것 같은데, 왜 말씀이 없으시지?”
“네 인생에 반쪽?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너 지금 만나는 사람하고 그 정도로 심각한 사이였어?”
“형도 눈치 참 없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죽이 잘 맞는 이경석에게도 고경희와의 만남을 아직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약간은 의외라는 생각에 김지훈이 피식 웃자 이경석이 눈가를 좁혔다.
‘자식! 그래도 입이 무거울 때가 있네.’
그때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치프들아, 스승님께서 너희들 보자신다. 이리 와서 술 한 잔 받아라. 빨리 와라.”
역시 눈치 하면 손일석이었다. 그런데 타이밍까지 맞춘 놈이 초조함을 넘어 이상할 정도로 과도하게 긴장하는 기색을 보였다. 김지훈이 손일석을 째려보았다.
‘이 자식이 설마 여기서 바로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넌 하오문주가 아니라 미친놈이다.’
허경발 원장과 같은 탁자에 고성문 원장과 송재덕 교수가 앉아 있었다. 치프들 4명이 나란히 무릎을 꿇고, 총치프인 김지훈이 대표로 술을 따랐다.
“우리 치프 선생들 볼 때마다 듬직합니다. 앞으로 기대가 커요. 지금처럼 열심히 해 주면 다들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허허허! 오늘 정말 기분 좋은 날이네. 김지훈 선생, 한 잔 받아. 우리 치프 선생들도 한 잔 받아요.”
젊을 때 호랑이였다는 소문과는 달리, 항상 너그러운 웃음을 보이는 허경발 원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교수들의 생각이었고, 치프들에게는 웃음조차 어려웠다.
“우리 김지훈 선생은 확실히 간담도지?”
“예,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신현수 선생은 위장관을 하고 싶다고 들었고, 이경석 선생은 대장에, 손일석 선생은 혈관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치프들 모두 깜짝 놀랐다. 김지훈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세부 전공은 이미 알고 있다지만, 치프들의 바람까지 일일이 알 줄은 몰랐다.
교수들의 스승이자 일반 외과 대선배로서 가질 수 있는 관심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말로 들렸다. 중앙 의료원 원장이라는 자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큰 스승님 같으신 분이 우리 과에 관심이 없으실 리가 없지만, 그래도 뜻밖의 말씀이네. 어쨌든 정말 감사한 일이다.’
여럿이 있는 자리였다. 대답도 총치프의 몫이었다.
“예. 맞습니다, 선생님.”
허경발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오늘 모임의 성격상 술이 돌아갈 자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손일석이 김지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왜?’
‘선생님들께도 한 잔씩 올려야지.’
다시 생각하니 맞는 말이기도 했다. 김지훈의 입장에서는 너무 많은 도움과 지도를 받았기에 특히 그랬다.
잔을 잡던 김지훈이 머뭇거렸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누구에게 먼저 따라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이 됐다.
‘자리를 생각하면 스승님께 먼저 드려야 하지만, 아버님이 더 선배이시고 손님이나 마찬가진데 어떻게 해야 하지?’
애매모호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잘못했다가는 나중에 한 소리 들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잠시 주춤거리는 사이, 손일석이 자연스럽게 고민을 날려 주었다.
“지훈아, 오늘 발표를 주관하셨으니까 이준영 선생님께 먼저 드리는 게 맞지.”
속삭이는 것처럼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주변에 안 들릴 리가 없었다. 송재덕 교수는 물론 고성문 원장까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식이, 결정적일 때 도움을 주네.’
마음이 푹 놓였다. 이준영 교수에게 술 한 잔을 따랐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늘 발표 잘했다. 내 술 한 잔 받아.”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술을 받는 김지훈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스승에게 받는 술은 쓰면서도 달았다.
치프들이 교수들의 잔을 받고, 술을 따랐다. 다소 진지했던 분위기가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늦으면 안 된다. 김지훈이 고성문 원장에게 몸을 돌리는 순간, 손일석이 슬며시 사이에 끼어들었다.
숨 한 번 훅 들이쉬고는 고성문 원장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잔을 올렸다.
“아버님, 손일석입니다.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고성문 원장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손일석이라고? 그런데 아버님이라니?”
“지훈이한테 아버님이시면 제게도 아버님이십니다.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자넬 가르칠 일이 뭐가 있나? 어쨌든 내 술 한 잔 받아. 서글서글한 게 마음에 드네. 제일 친한 친구라니까 앞으로도 잘 지내야 하네.”
어째 손일석에게 더 사근사근하다. 하긴 아무리 까마득한 후배라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꼬장꼬장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다. 고성문 원장 입장에서는 그 이상의 특별한 인연도 없으니 말이다.
단번에 술잔을 비운 손일석이 더욱 정중하게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잘하겠습니다. 아버님, 한 잔 더 받으시죠.”
“나 술 잘 못하는데.”
“그럼 반 잔만 올리겠습니다. 제수… 아니, 고경아 간호사가 따님 되시죠? 수술할 때마다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덕분에 즐겁기까지 합니다.”
술 탓일까? 분위기 탓일까?
고성문 원장의 입가가 귀에 걸렸다.
“그래? 경아가 내 딸인지는 또 어떻게 알았어? 하하하! 우리 경아가 손재주가 있긴 해. 도움이 많이 된다니까 아비로서 마음이 푹 놓이네. 저놈은 그걸 알까?”
“아무래도 입장이 곤란하겠지만, 속으로는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고경희가 손일석과 진지하게 사귄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죽이 척척 맞는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단숨에 뽑아 버렸다. 옆자리를 완전히 내준 김지훈이 입맛만 다셨다.
‘내가 사위야, 아니면 저 자식이 사위야? 확 경희하고 만난다고 말씀을 드려? 아니지.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가 참아야지. 아버님께 점수 많이 따고, 경희랑 잘돼라.’
그때 송재덕 교수가 고경아를 부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경아야, 거기서 뭐하니? 뭐해? 바늘이 가면 실도 가야 하는 거야. 빨리 와라, 빨리. 성 간호사도 빨리 와서 인사드리자. 스승님, 우리 과 전담 간호사들입니다. 일을 너무 잘합니다. 복덩이들입니다, 복덩이.”
“허허! 그래? 고마운 일이네. 자네가 고경아지? 그럼 그쪽이 성미경 간호사 되시나요?”
“네, 원장님.”
“우리 송 교수가 이렇게 칭찬하는 사람들은 처음 보네. 성 간호사, 열심히 해 줘서 고마워요.”
허경발 교수는 웬만한 인연이 아니고는 아무리 젊다고 해도 말을 놓거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고경아라고 부르자 영문을 모르는 오상익 원장과 구영선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재덕 교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오 원장님, 아는 사람은 알지만 고 간호사가 고성문 선생님 딸입니다. 김지훈 저놈하고 결혼할 사이기도 합니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아! 스승님, 이왕 말 나온 김에 주례를 서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아이고! 장인의 스승이자 사위 될 놈의 큰 스승님이신데 얼마나 좋습니까? 고성문 선생님, 어떠세요? 내 말이 맞죠, 내 말이. 좋습니다. 좋아요.”
지위를 떠나 허경발 원장만큼 적임자도 없었다. 고성문 원장도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제가 스승님 말씀을 어기고 개인 병원을 하고는 있지만, 항상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스승님, 주례를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대화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 김지훈과 고경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허경발 원장이 흔쾌히 허락을 하자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의 어깨를 툭 치고는 고경아를 보고 웃었다.
“뭐가 그렇게 창피해? 어서 인사드려.”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상익 원장과 구영선 교수가 축하의 말을 건넸다. 홍재순은 아예 엄지를 치켜들며 웃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감사한 일투성이였다.
술 한 잔이 돌았다.
송재덕 교수가 완전히 분위기에 취했다.
“우리 성 간호사 애인 없지? 있나? 없으면 이 중에서 하나 골라 봐. 내가 중신 서 줄게.”
성미경 간호사의 얼굴이 빨개지자 한술 더 떴다.
“가만 있자. 다들 짝이 있고, 한 놈만 없네. 일석아, 치프야, 너 애인 없지? 우리 성 간호사 어떠니? 어때? 혹시 벌써 사귀고 있는 거 아냐?”
이쯤에서 말을 끝낼 송재덕 교수가 아니었다. 얼굴이 파래진 손일석이 말도 끝나기 전에 득달처럼 대답을 했다.
“선생님, 저 만나는 사람 있습니다. 아버님, 저 만나는 사람 있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보통 큰 게 아니었다. 너무도 민감한 반응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기동 교수가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말했다.
“손일석, 너답지 않다. 그리고 고성문 선생님에게 왜 그런 말씀을 드려? 너 혹시 개인적인 관계라도 있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말 한마디에서 감을 얻다니, 날카롭기 짝이 없다. 겉보기에는 성격 자체가 달라 보여도 역시 스승과 제자였다.
손일석이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선생님,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신기동 교수의 예리한 눈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며 웃고 말았다.
‘일석이가 정말 경희를 좋아하는 것 같죠? 장인 될 분은 저놈도 어려운 모양이네요.’
그때 고성문 원장이 슬며시 밖으로 나가며 김지훈에게 손짓을 했다. 고경아가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김 서방, 자네가 뽑아 주는 커피가 그렇게 맛있다며? 식당 이모들한테 부탁하지 말고 한 잔 뽑아 와. 술기운 좀 풀자.”
난데없는 말에 김지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도 의아했지만 자판기 커피가 다였다.
어쨌든 장인의 말이었다. 커피 세 잔을 뽑아 들고 들어가자 고성문 원장이 옆방에 자리를 잡고 손짓을 했다.
커피 향보다는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강했다.
고성문 원장이 한 모금을 마시고는 얼굴을 굳혔다.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김지훈은 살짝 긴장하고, 고경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김 서방, 중요한 일일수록 자네 의견을 듣고 결정해야 하겠지만 이번에는 내 말대로 해야겠어.”
“예, 아버님. 그런데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9월에 손 놓고 시험 준비하지? 그때 대부분 일주일 정도 쉬잖아. 그래서 말인데, 가급적이면 그때 결혼식을 올리자. 계절도 좋네. 경아야, 엄마한테는 아직 말 못했다만, 사정이 그렇게 됐으니까 날짜 결정되는 대로 준비해.”
간절히 원하던 일이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김지훈은 물론 고경아도 입을 열지 못했다.
결혼이 인륜지대사 중 하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이야 한두 시간이면 끝나지만, 준비부터 신혼여행에 결혼식 이후 인사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김지훈도 그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전문의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적잖은 부담이었다. 선배들도 전문의를 따고 난 후에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조언했다. 고경아 역시 수술 방 간호사들과 상의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걸 모를 고성문 원장이 아니었다.
“준비는 집사람하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넨 걱정할 거 없어. 생각은 했는지 모르겠지만, 혼수도 신경 쓰지 마. 경아 너는 수술 방에 미리 말해서 지장을 주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좋다. 무조건 좋다. 입이 찌어지려고 한다. 동기들에게 피해를 줄 일도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서두르는 이유는 알아야 했다.
“아버님, 그런데 왜 갑자기 결정을 하시는 겁니까?”
“싫어? 그럼 말고.”
이 시점에도 꼬장꼬장하다. 그럴수록 김지훈은 더욱 진지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전문의 따고 결혼을 하면 준비할 시간도 충분하고, 여러모로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이 계시다고는 하지만, 경아 씨 혼자 준비를 하는 것도 마음이 좋지는 않습니다.”
고성문 원장이 김지훈과 고경아를 보며 웃었다.
“김 서방, 나도 알아. 하지만 자네 사정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스승님과 교수들 말을 들어 보니 아직 확실하게 결정이 난 것은 아니지만, 전문의 따고 나면 시간이 더 없을 수도 있어. 그렇다고 해도 미리 준비는 해야지.”
전공의들의 일정상 신규 채용을 비롯한 통상의 병원 일은 3월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전문의 시험이 끝나고 나면 한 달 정도 여유가 생긴다. 의아한 말이었다.
그때 고경아가 눈을 반짝였다.
“어머! 아빠, 그럼 지훈 씨가 병원에 남는 건가요?”
고성문 원장이 김지훈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어떻게 경아가 먼저 눈치를 채나. 확정된 건 아니지만, 지금처럼 열심히만 하면 거의 100퍼센트야. 게다가 말을 들어 보니까 펠로우도 거의 집에 못 간다고 하던데, 맞지?”
맞는 말이었다. 전문의 따도 끝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홍재순이 그랬다. 정식 교수가 되기 위해 준비할 것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당직만이 아니라 오상익 원장의 당직도 자청해 대신 섰다. 뿐만 아니라 송재덕 교수와 구영선 교수의 당직 때는 최소한 얼굴이라도 비쳤다.
교수들의 오더가 아니라, 해당 파트의 펠로우로서 또 다른 관점하에 환자를 보고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더 많은 경험과 노력이 필요한 시기였다.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김지훈이었다. 중앙 의료원 원장인 허경발 교수의 말이라면 확실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자신의 꿈과 희망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다.
덕분에 그렇게 원하던 결혼까지 생각보다 빨리하게 됐다. 그런데 웃음기도 보이지 못했다.
‘9월이면 경아 씨와 모든 것을 함께할 수 있다고? 지금처럼만 하면 병원에 남아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다고?’
기쁨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결정과 말 때문이 아니었다. 결혼과 장래는 결코 가벼이 생각하고, 대비할 일이 아니었다.
고성문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고 웃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듬직하기만 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고경아를 보고는 슬며시 자리로 돌아갔다.
고경아가 김지훈의 손을 꼭 잡았다.
“지훈 씨, 설마 부담되는 건 아니죠?”
“경아 씨, 솔직히 부담돼요. 경아 씨를 정말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내 사정에 맞춰 결혼 날짜를 잡고 준비도 함께하기 쉽지 않아서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해요.”
“피! 말로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머릿속을 정리하기 전에 마음과 감정을 따를 일이었다. 재빨리 주변을 살핀 김지훈이 살짝 열린 문을 닫으며 고경아를 와락 껴안았다.
“사랑해요.”
고경아가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버둥거리며 반항을 하던 팔에 힘이 쪽 빠졌다.
아주 짧은 시간 서로의 감정에 충실했다.
카르페 디엠!
더없이 짜릿하고 달콤한 입술이었다.
그 시간 이후, 식사 자리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고경아만 보면 가슴이 벅차고 행복했다.
이준영 교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더욱 큰 책임감을 느끼며 각오를 다졌다.
손일석은 목적을 달성했을까?
다음 날, 하루 종일 웃는 것으로 보아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은 모양이었다. 아직은 고성문 원장이 딸 문제에 관해서는 얼마나 높은 벽을 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김지훈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걸렸다. 이제 시작하는 놈과 이미 이룬 놈의 차이였다.
카르페 디엠!
어제오늘만 같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 미래를 꿈꾸던 김지훈이 갑자기 마른침을 삼켰다.
‘펠로우 월급이 얼마나 되지?’
전공의 월급으로는 두 사람 입에 딱 풀칠할 정도였다. 결혼을 하고 나면 그냥 한 이불 속에서 자기만 해도 애가 생길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보다 월급이 많은 고경아가 계속 근무를 한다면 한결 여유롭겠지만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고재현의 부모님에게는 꼭 연락을 해야 하는데, 언제 해야 할까?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지?
걱정거리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고경아에게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운 이들이 절실하게 생각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