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2)
전공의 탈의실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자식! 수술 끝났을 때 했어야지. 늦었어, 인마.”
투덜거리는 김지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이혁원은 이제 일반 외과 의사로서 진정한 첫발을 내디뎠다. 당찬 목소리만큼 앞날이 밝기만을 바랐다.
다음 날 저녁, 의국이 떠들썩했다. 또 한 명의 1년차가 아뻬를 집도한 것이다.
나종진의 얼굴이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었다. 손일석이 씨익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종진아, 얼굴 펴. 인마, 신기동 선생님한테 그 정도 탔으면 칭찬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자식이, 우리 타는 걸 매일 보면서도 이러네.”
“나종진, 축하한다. 일석아, 수술은 잘했지?”
“그럼. 우리 종진이가 보통 손이 아니야. 50분도 안 돼서 수술 깔끔하게 끝냈어.”
손일석이 엄지를 척 치켜 올렸다.
1년차들이 제각각 다른 표정을 지었다. 부럽다는 눈빛과 함께 혹시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혁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가에 힘을 주고 있었다.
‘종진이가 라이벌이라 이거지? 그래. 친구이자 동기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널 훨씬 빠르게 발전시킬 거야. 내가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나머지 두 명이 마음에 걸렸다. 어떤 마음일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1년차답게 머리는 떡이 졌고, 어깨에는 피로가 잔뜩 걸려 있었다. 눈에는 지금도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 감기기 직전이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지금이야말로 총치프가 나서야 할 때였다.
“1년차들, 내 말 잘 들어. 집도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야. 때가 되면 누구든지 받는 게 수술이야. 누가 먼저 했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아뻬가 왔고, 수술 당직이었기 때문에 받은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너희들이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해.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겨.”
“선생님들에게요?”
치프들 사이에 오간 말들을 꼬치꼬치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민감한 문제가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확신은 줄 수 있었다.
“경석이 형, 현수야, 우리 1년차들 집도 확실하게 책임져야 돼. 애들이 내 말을 안 믿는 것 같은데, 치프들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보여 줘.”
“오케이! 자식들! 얼굴 펴. 당장 오늘이라도 아뻬 하나 더 뜨면 바로 집도다.”
이경석이 호언장담을 했다. 1년차들의 얼굴이 조금은 펴졌다.
“걱정하지 마. 내일 아뻬가 뜨기만을 바라면 돼.”
신현수의 말이 이어지자 분위기가 확 변했다.
치프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밝았다. 건강한 경쟁이 스스로를 얼마나 발전시키는지 지난 4년간의 몸으로 익혔다. 이제 일반 외과의 길에 들어선 1년차들은 치프들보다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
일과가 끝났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아직도 끄지 못했다.
예행연습이다.
오프인 신현수가 윤서연과 한참 동안 통화한 후 자리를 지켰다. 왠지 초조해 보이는 얼굴에서 유부남의 비애가 느껴졌다. 결혼을 하기 전인데도 온갖 눈치와 눈총을 받아야 하는데 오죽할까. 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행복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부럽다. 나도 결혼하고 싶다.’
문득 고경아 생각이 난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예. 시작하시죠. 활활 태워 드리겠습니다.”
손일석과 눈싸움 한 번 벌인 후 발표를 시작했다.
“최근 고식적 수술의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한 복강경 수술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주로 담낭 절제술에만 응용되고 있지만, 기구의 발전에 따라 많은 영역으로의 확대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본 병원에서 시행한 사례들을 보고드리고자 합니다.”
미리 발표 때 할 말을 복사해 나눠 주었다. 나름 매끄럽다고 생각했지만 신현수의 손이 자꾸 올라갔다. 확실히 말과 글은 달랐다.
“지훈아, 거기서는 끊지 말고 다음에 이어질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했으면 좋겠어.”
“그런가?”
“응. 단문이 자꾸 이어지니까 너무 딱딱한 느낌이 나. 반대로 다음 내용은 잘라 줘야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
역시 이런 면은 신현수에게 배워야 했다.
중간중간 수정을 해 가며 발표를 끝냈다. 질문을 받을 차례다. 날카로운 질문을 원했지만 이제 4년차다. 학회장에는 날고 기는 의사들이 바글바글할 것이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심 걱정까지 됐다.
“아뻬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뭡니까?”
“탈장 때 사용하는 패치로 인한 문제는 없습니까? 이물이라 장 유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 점에 관한 보고는 없습니까?”
“안전한 수술을 위해서는 의사들의 숙련도가 상당히 중요할 텐데, 어떻게 확보할 수 있습니까?”
오산이었다.
‘아니, 언제 이렇게 준비를 했지?’
계속되는 질문에 답하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다. 이 정도라면 이준영 교수 앞에서는 물론 집담회 때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이준영 교수와 단둘이 발표에 대비했다.
오판의 연속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날카롭고도 예리한 질문에 온몸이 후줄근하게 젖었다. 나직한 한숨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김지훈, 이래서야 발표나 제대로 하겠어? 오늘 내가 질문한 내용들 확실하게 정리해서 내일 아침 회진 때까지 갖고 와.”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며 날밤을 샜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헉! 소리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손에서 빨간 볼펜이 날아다닐 줄은 몰랐다.
서도진과 박순용이 차마 그 모습을 보기 힘든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혁원의 눈은 왠지 반짝이는 것 같았다. 빨간 볼펜은 년차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안 것이다.
새카맣게 타는 사이, 주말 집담회가 성큼 다가왔다.
1년차들의 입국식이 벌어지는 날이기에 의국원 모두 흥분한 기색이었다.
무난하게 집담회가 끝나 한시름을 돌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악 소리가 나왔다.
그동안 이준영 교수는 주로 간담도 전문의 입장에서 미비한 점을 지적했다. 반면 다른 교수들은 각자 자신들의 세부 전공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 차가운 얼음이 맺힌 날이 잔뜩 선 비수, 뭔가 달라진 것 같은 너털웃음.
답을 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이준영 교수는 할 말이 많을 텐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간 학회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봐 겁이 덜컥 났다.
“김지훈, 학회 발표가 절대 만만한 게 아니다. 내일 아침 첫 발표니까 단단히 준비해라. 신현수, 니가 슬라이드 넘기는 일 맡아야 하니까 호흡 좀 잘 맞춰 봐.”
대답할 힘도 없었다.
오늘은 입국식이다. 총치프로서 행사를 주관해야 한다.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날밤을 또 새울 수는 없었다. 눈이 벌게진 채 발표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신현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걱정돼?”
“야! 그걸 말이라고 하니. 죽겠다. 이러다 발표고 뭐고 창피만 톡톡히 당하겠어.”
걱정이 태산인데 씨익 웃고 있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너 학회 참석해 보지 않았어?”
“딱 한 번, 그것도 세계 학회였지. 구경하면서 듣기만 하는 것하고 발표가 비교나 되냐?”
“그럼 그때 본 걸 잘 생각해 봐. 발표 혼자 하는 거 아니다.”
“니가 슬라이드 담당하니까 혼자는 아니지. 근데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목소리를 높이던 김지훈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좌장!’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학회 발표는 세 사람이 한다. 발표자와 슬라이드 등을 담당하는 사람, 그리고 발표 전체를 주관하는 사람, 즉 좌장이다. 어려운 질문이 나오면 발표자 대신 대답을 하기도 하고, 때론 토론을 유도하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분명 이준영 교수가 좌장을 맡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답은 항상 가까이 있다.
‘맞아. 항상 내가 스스로 답을 찾게 하셨지, 직접 답을 주신 적은 없잖아? 이번이라고 다를 게 없겠지. 어이구! 그래도 이럴 때는 좀 도와주시지. 설마 발표 때도 입 딱 다무는 건 아니시겠지?’
한결 마음이 놓였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이준영 교수의 눈에 부족하다고 보이면 발표 후 온 사방에 불이 날 것이다.
피할 곳은 결코 없다. 지금까지 들은 질문과 내용들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다.
신현수와 오후 내내 호흡을 맞췄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질문을 반복해 완전히 숙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어느새 창밖이 어둑어둑해졌다.
“다들 고마워. 현수야, 내일 아침 7시쯤에 출발하자. 일석이 너는 오늘 술 자제하는 거 잊지 마. 내일 술 냄새 풍기고 다니면 알지?”
손일석이 아쉬움에 입맛만 쩝쩝 다셨다.
왜 아닐까? 학회에서 발표를 해야 하는 김지훈도 아쉬우니 말이다.
‘정말 쉴 시간이 없네. 내일만 지나면 한결 낫겠지? 에휴! 일단 발표부터 무사히 끝내자.’
국내 학회 첫 참석에 발표까지 한다.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기회이자 영광이었다.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입국식 장소로 향하던 김지훈의 눈에 검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들어왔다.
별이 보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탁한 서울 공기에 맑은 날에도 보기 힘들었고, 그동안 정신없이 바빠 하늘을 볼 여유도 없었다.
핑계일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리운 이들이 보고 싶었다.
***
입국식이다.
천안과 구미 병원의 교수들과 의국원들이 참석했다. 순환 근무가 폐지됐지만 모두가 일반 외과 소속이고, 불가분의 관계다. 반가운 얼굴에 즐거움이 넘쳤고, 각 병원 치프들도 오래간만에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김지훈이 입국식 준비를 한 서도진과 함께 입국식을 진행했다. 이혁민 교수와 각 병원 과장들의 간단한 인사와 축하의 말에 이어, 1년차들 소개가 시작됐다.
처음 보는 얼굴은 없었다. 모두가 선배고 후배이자, 스승이자 제자였다. 서울 병원 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오상익 교수의 건배 제안을 끝으로 공식적인 행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입국식이 시작됐다.
유쾌함과 흥분으로 떠들썩했다. 딱 한 잔만 하라는 치프들의 성화에 맥주를 받아 든 김지훈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마음이 편할 줄은 몰랐다.
‘분위기 정말 좋다.’
금경태가 과장이었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유독 친한 사이도 있겠지만 이젠 파벌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자리를 옮겨 가며 못한 얘기들을 나누고, 술잔을 부딪쳤다.
점점 취기가 돌았다. 술잔은 쉬지 않고 돌았다.
한 과의 의사들이 모두 모여 마음 놓고 술을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이기에 오늘만은 예외였다.
도를 넘지 않는다면 마음껏 즐겨도 되는 날이다. 1년차들은 그마저도 예외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우리 1년차들 뭐해? 선생님들께 한 잔씩 받고, 재롱 잔치 해야지. 종진아, 앞장서라.”
아뿔싸! 손일석에게 선수를 뺏겼다. 김지훈이 재빨리 눈짓을 했다. 이미 얼굴이 뻘게진 이혁원과 나종진이 1년차들과 함께 오상익 교수 앞에 섰다.
덕담 한마디에 폭탄주 한 잔이다.
드디어 1년차들이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더구나 각 병원 교수들이 거의 다 참석했다. 마지막 잔까지 받기에는 체력이 따라 주질 않을 것이다.
“좋다. 좋아. 오늘은 마음 놓고 마셔. 오늘하고 내일은 선배들이 다 알아서 해 줄 거야. 혁원아, 종진아, 잔 들고 뭐하니? 빨리 마셔라. 빨리. 포도당에 비타민 좋다. 좋아.”
1년차들의 얼굴이 점점 더 시뻘게졌다. 난로가 따로 없다.
중간중간 재롱 잔치가 이어졌다. 끽해야 단체로 노래 정도 부르는 것이었지만 흥겹기만 했고, 박수와 환호성이 터졌다.
그 대가는 아득함과 캄캄한 정신세계다. 이제 100일 당직이 반도 안 지났지만 체력은 바닥이다.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줄줄이 병원으로 실려 가고, 마지막까지 남은 1년차는 나종진과 이혁원뿐이었다. 필사적으로 버티고는 있었지만, 눈 뜬 송장과 다름이 없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선생님, 이제 1년차 들여보내겠습니다.”
“그래. 많이들 먹었다. 건사 잘해라. 우리는 조금 더 있다가 갈 생각인데, 니들은 어떻게 할래?”
원래 치프들은 교수들과 함께 일어나야 한다. 자리도 정리해야 하고, 으레 이런 때면 마무리할 일도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몇몇 교수들의 얼굴 역시 말짱했다. 술이 센 것이 아니라 내일 학회에 참석할 교수들이었다. 허경발 원장까지 참석하는 자린데 술 냄새를 풍길 수는 없는 일이다.
‘이해해 주시겠지.’
“내일 일 때문에 저희도 알아서 움직이겠습니다.”
“알았다. 내일 보자.”
치프들이 모두 일어났다.
“에이! 하필이면 학회 전날 입국식을 잡아서 우리 치프들 술 한 잔 제대로 못했네. 이 과장, 자기 술 못 마신다고 이러면 안 된다. 내년에는 이러지 말자. 이건 반칙이야, 반칙.”
송재덕 교수가 무척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과장은 이혁민 교수다.
김지훈이 3년차들에게 뒤를 맡긴 후, 갑자기 2차를 가자고 했다. 이미 11시가 넘었다. 신현수가 난색을 표했지만, 이런 자리는 1년에 한 번뿐이다.
“간단하게 맥주 한잔하고 들어가자. 언제 또 보겠어. 일석아, 정문 앞 호프집 알지? 먼저 가 있어.”
“넌 뭐하려고?”
“박순용 선생님과 1년차들 확인하고 바로 갈게.”
아랫년차들을 챙기는 것은 총치프의 본연의 일이다.
박순용과 함께 이혁원과 나종진을 부축하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난리가 따로 없었다. 응급실에 딸린 당직실은 1년차들이 모두 차지했다.
코를 고는 소리가 요란했다. 비타민을 탄 노란 10퍼센트 포도당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리가 없어 이혁원과 나종진은 병동 숙소에 눕혔다. 완전히 떡이 됐다. 숨을 쉴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떻게 병원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입국식 중에 이미 맛이 갔을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예전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나도 저랬겠지?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간 쌓인 스트레스라도 풀렸으면 좋겠다.’
치프들과 맥주 한 잔을 했다. 내일 일로 한 시간 만에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너무 빨리 지나 진한 아쉬움이 남았지만, 9월을 기약해야 했다.
“창범이 형, 9월에 봐요.”
“그래. 우리가 벌써 전문의 시험 준비할 때가 됐네. 세월 참 빠르다. 잘 지내고, 그때 보자. 참! 발표 잘해. 축하한다.”
그렇게 수련을 시작한 후 네 번째 입국식이 끝났다.
신현수와 다시 한 번 점검을 한 후, 최대한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정말 말끔한 정신이어야 했다.
‘현수야, 정말 고맙다. 집에 못 가서 어떻게 하냐?’
‘지훈이 발표를 도와주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네. 최선을 다했으니까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정신 바짝 차리고 달려가지. 서연아, 너도 나 오프일 때 당직일 때가 있잖아. 이해해 줘.’
한동안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다 잠잠해졌다.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때 빼고 광까지 낸 후, 일찍 학회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중에는 학회에 참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시 아는 얼굴이 있나 주변을 살피며 발표장으로 들어갔다. 아직은 한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영 교수가 도착해 함께 학회 준비 위원들을 만났다.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대선배들이었고, 쟁쟁한 의사들이었다. 신현수와 함께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발표문과 슬라이드를 점검하는 사이, 하나둘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전국 각 병원에서 모여들어 생각보다 훨씬 참석 인원이 많았다.
‘간담도를 전공한 선생님들이 이렇게 많았나? 이분들은 어떤 방식으로 환자를 보고, 수술을 하실까?’
그들 중 누구 하나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병원, 혹은 지역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의사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은근한 긴장이 다가왔다.
준비를 마쳤을 무렵, 간담도 학회장의 개회사가 이어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졌다. 곧 발표할 시간이 됐다는 신호였다.
이준영 교수가 좌장 자리에 앉았다. 신현수가 슬라이드를 돌릴 준비를 마쳤다.
연단에 선 김지훈이 심호흡을 했다.
수많은 의사들의 눈길이 느껴졌다. 무척 떨릴 줄 알았는데 막상 자리에 서자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발표를 기다리는 의사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허경발 중앙 의료원 원장.
장인어른인 고성문 원장.
송재덕 교수,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
어딘가에 앉아 있을 손일석과 이경석, 그리고 고경아.
간담도를 전공한 수많은 의사들.
세상은 넓었다. 그중에는 훗날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김지훈도 병원 밖의 세상으로 한 발을 내디딜 때였다.
“복강경을 이용한 증례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발표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