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1)
언제 아뻬가 또 올지 모른다. 입국식 전날까지 한 명도 안 올 수 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하지만 마음과 현실은 다르다. 메스를 주는 것은 교수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예전이었으면 아무리 총치프라고 해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석재 선생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선생님들 말씀과 태도로 볼 때는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섣불리 말씀드렸다가는 도리어 난리가 날지도 몰라.’
신중해야 했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원과의 사적인 관계는 철저히 배제했다. 수술을 받을 자격과 능력이 되는지 다시 한 번 고민했다. 거듭 생각해도 충분했다. 더구나 입국식까지는 며칠 남지도 않았다.
나름 결정을 내렸지만 상의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손일석과 이경석이 신현수와 함께 들어왔다.
서둘러 오프를 가려는 걸 억지로 앉혔다.
“넌 형이랑 나랑 오프만 가려고 하면 꼭 이러더라. 오프 제대로 못 가서 성질 나?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아. 이번엔 또 뭐야?”
“미안해, 인마. 다른 게 아니라 입국식도 얼마 안 남았고, 1년차들도 다들 퍼스트는 서 봤잖아. 선생님들도 우리를 대하는 게 예전하고는 다르시고. 그래서 말인데, 아뻬가 왔을 때 수술을 주자고 말씀드려 보는 게 어떨까?”
“우리가 말씀을 드리자고?”
이경석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경석은 물론 신현수도 상당히 고민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생각해 보면 무작정 손사래를 칠 일이 아니었다. 딱 잘라 된다, 안 된다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형, 예전이었으면 이런 고민은 할 수도 없었겠지만, 요새 분위기 보면 조심스럽게 말씀드려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긴 한데, 뭐든지 남들이 안 해 본 걸 할 때가 제일 문제가 되고, 어려운 법이야. 가장 좋은 방법은 선배들이 한 대로 따르는 거지. 가만히 있는 게 안전할 것 같다.”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반대가 둘이다. 아무래도 섣부른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입을 쭉 내밀고는 눈가를 찡그리고 있던 손일석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아니야. 난 지훈이 말에 찬성. 그간의 모든 정보를 종합해 분석해 볼 때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해. 이건 손일석이 아니라 하오문주로서의 직감이자 확신이야.”
김기훈이 반색을 하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끝말만 아니었으면 정말 힘이 됐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반인데, 그럼 결정은 지훈이 네 몫이네. 총치프로서 결정해라. 근데 지금 아뻬라도 뜬 거야?”
“예. 이준영 선생님 당직에 혁원이네요.”
분위기가 확 변했다. 이경석이 손사래를 치고, 신현수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손일석마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미친 거 아니냐는 표정을 지었다.
“지훈아, 신중해야 한다. 송재덕 선생님이나 이혁민 선생님이면 일이 꼬여도 비빌 구석이나 있지, 이준영 선생님은 아니다. 잘못하면 황천행이야. 거기다 입장이 곤란하실 수도 있잖아.”
“나도 그 생각은 했어. 사적인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런 문제에 연연하실 분이 아니야. 관건은 혁원이가 수술을 받아도 되는지 아니겠어? 그것만 말해 봐.”
“그야 충분하긴 하지.”
다들 서로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김지훈이야 1년차 때부터 봐 온 데다 특별한 관계이기에 이준영 교수가 어려울 뿐 무섭다는 생각은 그리 크지 않았다. 반면 넉살 좋은 손일석도 아직은 일종의 두려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이경석의 말이 맞다. 총치프로서 결정을 해야 한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치프들의 걱정이 가득한 눈초리를 뒤로하고 힘차게 응급실로 내려갔다. 깨지든 말든 일단 부딪쳐 볼 일이었다. 설마 생사를 좌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응급실이다.
이준영 교수와 당직실에서 단둘이 마주했다.
어려운 일일수록 윤활유, 즉 약간의 성의 표시가 필요한 법이다. 슬그머니 캔 커피를 내밀자 이준영 교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 모금 시원하게 마셨다.
“웬 커피야? 할 말 있어?”
“예, 선생님. 다름이 아니라…….”
막상 무뚝뚝한 이준영 교수의 얼굴을 보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방금 전까지 온몸에 충만했던 힘과 각오가 눈 녹듯 사라졌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수술 안 들어갈 거야?”
“예.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지만 1년차들이 퍼스트 경험을 쌓았고, 입국식도 며칠 안 남았습니다. 그래서…….”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혀가 자꾸 꼬였다. 우물쭈물 머뭇거리는 모습에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살짝 변하는 순간 당직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 있었네, 여기. 지훈이랑 있는 걸 보니까 수술 있구나. 수술. 지훈아, 뭐니? 근데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 있어? 지훈아, 치프야, 궁금하다. 빨리 말해 봐. 빨리.”
천군만마와도 바꿀 수 없는 원군이다. 치프들 모두 1순위로 뽑은 송재덕 교수다. 김지훈이 아예 고개를 돌리고 송재덕 교수에게 본론을 말했다.
이준영 교수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실렸다.
1년차에게 수술을 줄 때가 됐다는 사실에는 충분히 공감했다. 하지만 이혁원은 아들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잘못 판단할 수도 있는 데다 세상눈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조금 늦더라도 다른 교수에게 수술을 받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송재덕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구나. 지훈이 니 말이 맞다. 말 잘했다. 잘했어. 혁원이 정도면 받고도 남지. 음! 이 교수, 말 나온 김에 오늘 수술 줘라. 수술 줘. 종진이하고 아주 쌍벽이야.”
“선생님, 그게 아무래도…….”
무슨 말을 할지 빤했다.
“에이!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개인적인 관계를 앞세우면 안 되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이 교수는 일반 외과 교수고, 혁원이는 1년차야. 자격이 없는 놈이면 내가 앞서서 반대하겠지만, 차고도 넘쳐. 얼마나 잘났으면 지훈이가 먼저 얘기를 꺼냈겠어? 걱정하지 말고 수술 줘. 내가 주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겼네. 아깝다. 아까워. 왜 내가 찍은 놈들은 다 너한테 꼬이니.”
혈연, 학연, 지연, 하다 못해 사소한 안면까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그걸 이용해 능력도 없으면서 자리를 꿰차고, 이권을 추구하는 사람이 문제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경쟁하고 노력해 정당한 대가를 얻는다면 손가락질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질 못해서 탈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준영 교수가 남은 커피를 한 번에 마셨다.
아버지로서 특별하게 해 준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 스스로 달려온 자식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아직도 가슴속을 꽉 메우고 있었다.
‘자식이 아니라 1년차로 보면 아무 문제도 없는데, 내 입장이 곤란하다고 또 피해야 하나? 더 이상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는 없지만, 혹시 내가 잘못 행동한 것은 없었을까?’
자신의 입장도 입장이지만 무엇보다도 이혁원의 앞날에 방해가 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아버지 덕을 본다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제자인 김지훈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지훈아, 내가 혁원이를 특별하게 대하지는 않았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극히 개인적인 말을 꺼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으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선생님, 지금도 혁원이가 선생님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일 다른 1년차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대하셨다면 오늘 이런 말씀도 못 드렸을 겁니다.”
이준영 교수가 송재덕 교수를 보았다.
그 마음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교수로서 똑같이 대해야 하는 게 맞는 소리긴 해. 내가 수술을 준다는 것이 특혜라면 송재덕 선생님도, 지훈이도 아예 말을 안 꺼냈겠지. 혁원이가 수술을 받을 만한가?’
이준영 교수는 무뚝뚝함 속에 깊은 정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도리어 제자인 김지훈과 아들인 이혁원에게 더욱 엄격하게 행동했다. 지금은 냉철한 판단까지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준영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김지훈, 준비하자.”
무뚝뚝한 목소리다. 한순간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비상이다. 1년차 중 첫 집도다. 더구나 수술실에서는 바늘도 안 들어갈 이준영 교수가 주관한다. 불길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박순용 선생님, 혁원이가 집도할 거니까 수술 들어오세요. 이혁원, 넌 빨리 나 따라와.”
난데없는 소리에 눈을 껌뻑이던 이혁원이 잔뜩 흥분해 부리나케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내 당직 교수가 이준영 교수라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혁원, 다른 생각 하지 마. 넌 우리 과 1년차고, 가야 할 길을 가는 것뿐이야. 널 특별하게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 생각할 거면 지금이라도 다른 과 해.”
말 한마디에 생각이 바뀔 리는 없었다. 이혁원이 우물쭈물하자 김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좋아. 니가 집도의다. 시작해.”
김지훈이 조용히 눈을 감고 수술 과정을 들었다.
손가락이 까딱일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했다. 하루가 달랐다. 이제는 노력한 티가 팍팍 날 정도로 정말 준비를 많이 한 이혁원이었다. 그만큼 수술도 잘해 낼 것이다.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역시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없네.’
방심은 금물이다. 환자가 올라올 때까지 계속 반복이다.
드르륵!
간이침대에서 나는 거친 바퀴 소리가 들렸다. 이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후다닥 달려 나가 환자를 옮겼다.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이래저래 긴장이 많이 될 것이다.
김지훈은 의외로 여유로웠다.
‘오늘은 세컨이니까 설마 타진 않겠지. 끌다가 타면 그건 정말 뉴스거리다.’
마취가 시작됐다. 어떻게 알았는지 당직 전공의 옆에 김진호 교수가 떡하니 앉아 있었다. 김지훈과 이혁원에게 눈길을 주며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었다.
“지훈아, 옛날 생각난다. 어떤 때는 네가 치프라는 게 안 믿어져. 음성에서 참 많이 혼났지?”
“에이! 선생님, 벌써 4년 전 일입니다.”
“그래도 내 눈엔 가끔 네가 1년차로 보인다. 자식! 그때는 맥주도 곧잘 갖고 오더니, 요샌 아예 안면 몰수네.”
“어이쿠! 선생님, 제가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혁원이 집도 기념으로 두 박스 올리겠습니다. 대신 앞으로도 우리 과 수술 방 배정은 확실하게 해 주셔야 합니다.”
“조건부야? 야! 우리 김지훈 치프 많이 컸다.”
음성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몸은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때 흘렸던 땀과 눈물이 왠지 그리웠다.
문득 빛은 바랬지만 아주 특별한 메스가 생각났다.
‘스승님에게 받은 메스를 혁원이에게 줄까? 저 자식이 나중에 제일 아끼는 후배한테 물려주고, 또 물려준다면 그것도 의미가 꽤 클 텐데,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메스에 담긴 의미가 전해지면 좋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손에 꼭 쥔 채 평생 동안 간직하고도 싶었다. 깊게 고민해 볼 일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들어왔다. 첫 집도는 교수와 모든 것을 함께한다.
이혁원과 이준영 교수가 환자의 복부를 소독했다. 깨끗한 천으로 환자의 전신을 덮고 자리에 섰다.
아끼는 후배이자 1년차인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인 이혁원이 집도의다. 스승이자 교수이면서 누군가의 아버지인 이준영 교수가 퍼스트다. 그리고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김지훈이 세컨을 선다.
문득 음성에서의 첫 집도가 떠올랐다. 지금도 마치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때처럼 김진호 선생님에게 10분을 달라고 하실까?’
“김진호 선생, 10분만 시간을 줄 수 있을까?”
“그럼요, 선생님.”
“이혁원, 수술 과정 말해 봐.”
기억이 맞는다면 이름만 다를 뿐,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때 역시 김진호 교수가 마취를 했다. 마치 집도의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술 과정 말하다 정말 많이 혼났는데, 혁원이 너는 그럴 일이 없겠지? 없어야 한다. 아니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이혁원이 긴장된 눈빛으로 수술 과정을 설명했다. 수없이 반복한 일이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이준영 교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엉뚱한 말이 나왔다.
“아뻬를 1번 실크로 두 번 타이하고 자릅니다.”
“이혁원, 아뻬를 묶는 일은 네가 아니라 퍼스트가 해야 하잖아? 너 어시스트 서려고 그 자리에 섰어?”
김지훈도 똑같은 실수를 했었고, 이준영 교수 역시 똑같은 말로 태웠었다.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정말 열심히 가르쳤기에 용납할 수 없었다.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눈빛에 이혁원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뭐해? 반복하지 말고 계속 진행해.’
별별 눈짓과 손짓에 정신을 차린 이혁원이 다음 과정을 이어 갔다. 다행히도 더 이상의 실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상당히 흡족할 텐데, 이준영 교수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참 한결같으시네. 이젠 1분의 여유를 주시겠지?’
갈수록 첫 집도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예전처럼 1분간의 여유를 주었다. 그리고 똑같은 말이 오고 갔다.
“이혁원, 뭐해?”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이혁원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마취과,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십시오. 이번에는 5분 만에 끝났네요.”
이혁원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하긴 신경을 쓸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마스크가 불룩해질 정도로 크게 숨을 내쉰 이혁원이 손을 내밀었다.
“메스.”
드디어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묘한 흥분과 설렘이 다가왔다.
‘넌 잘할 수 있어. 자신 있게 해.’
김지훈과 눈을 마주친 이혁원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환자의 피부를 4센티미터 정도 절개했다. 노랗게 들어난 피하조직을 전기 소작기로 쳐 냈다.
복부 근육을 덮고 있는 근막이 보였다. 메스로 1센티미터 정도 근막을 절개한 후, 멧젬(끝이 둥근 수술용 가위)으로 근막의 결을 따라 사선으로 길게 잘랐다.
‘그래. 잘하고 있어. 지금처럼 계속 진행해.’
검붉은 색깔의 근육을 켈리로 벌렸다. 약간은 노르스름한 빛을 띠는 복막을 열었다. 상행 결장이 보였다. 상행 결장의 시작 부분에 위치한 맹장을 확인하고, 롱포셉(Long Forcep:기다란 집게)으로 맹장을 끌어당겼다.
‘그렇지. 살살, 조심스럽게.’
쥐꼬리처럼 길고 가는 구조물이 슬슬 끌려 나왔다. 염증으로 발갛게 부어 있었다. 동맥을 찾아 결찰하고, 충수돌기에 연결된 주변 조직을 확실하게 자르고 묶었다. 매끈하게 남은 충수돌기를 잘랐다.
‘오케이! 거의 다 끝났다. 떨지 말고 침착하게.’
자른 단면을 화이트 실크로 단단히 두 번 묶고, 제거한 충수돌기를 간호사에게 건넸다. 수술 부위와 상행 결장 및 소장의 말단부에 동반된 질환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핵심적인 과정이 모두 끝났다.
이준영 과장은 수술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혁원의 손을 따라 어시스트만 섰다. 어떻게 판단할지 모르지만, 김지훈의 눈에는 정말 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후우! 첫 수술인데 정말 잘했다. 왜 내 등이 이렇게 축축해졌지? 내가 더 긴장을 했나?’
마지막 봉합을 끝낸 이혁원이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이준영 과장을 보았다. 이제 기억에 따르면 말없이 수술실을 나갈 차례였다. 그런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수처가 이게 뭐야? 이래 가지고 타이는 제대로 할 수 있겠어? 기본이 부족하면 수술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김지훈, 똑바로 가르쳐. 넌 4년차 총치프야.”
헉! 불똥이 또 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마지막 한마디 말이 가공할 압력으로 다가왔다.
김지훈과 이혁원을 잠시 노려본 이준영 교수가 수술실을 나갔다. 몸에 힘이 쭉 빠지며 맥없는 숨이 터졌다.
환자를 깨우던 김진호가 웃었다.
“이준영 선생님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이 떨려. 참, 그것도 능력이시다. 어쨌든 처음인데 혁원이 수술 잘하네. 40분 걸렸다. 아니지. 정확하게는 35분이네.”
김진호 교수의 칭찬과 이혁원의 상기된 얼굴을 보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가 팍팍 살도록 마구 칭찬을 해 주고 싶었다. 이준영 교수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김지훈이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혁원, 너 계속 같은 지적 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 똑바로 하자. 박순용 선생님, 신경 좀 쓰세요.”
첫 집도를 한 날인데 칭찬 한마디 없다. 이혁원의 실망한 기색에 마음이 쓰였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이혁원이 오더를 내자마자 김지훈이 손짓을 했다.
“혁원아, 나 잠깐 보자.”
설마 또 태울 거리가 남은 걸까?
이혁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첫 수술을 무난히 해냈다는 흥분과 뿌듯함 속에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의 말이 마구 뒤섞이는 모양이었다.
어색한 얼굴로 뒤를 따르던 이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교수 휴게실 앞이다. 언제 준비했는지 김지훈이 캔 커피 두 개를 내밀었다.
“들어가서 이거 드려. 제일 좋아하시는 커피야.”
“저 혼자요?”
“오늘 수술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 혁원아, 오늘 수술 잘했고, 축하한다. 수고했어, 인마.”
이혁원의 입가에 이제야 미소가 감돌았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김지훈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 말고 피식 웃었다. 왠지 오늘은 단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스승님, 픽스턴에 100일 당직이라 혁원이와 말씀을 나눌 시간도 없으셨죠? 제자인 제가 오늘 자리 깔아 드립니다.’
한참이 지나도록 이혁원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말이 오갔을까?
휴게실을 나오는 이혁원의 눈가가 붉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