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홀로 설 줄 알아야 함께 갈 수 있다 Ⅰ (1)
4년차 첫 일주일이 지나고 두 번째 주도 어느새 주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넉넉한 인원과 웬만해서는 큰 소리가 나지 않는 의국 분위기에 각 년차의 성실함이 더해져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했다.
치프들은 여전히 고민에 잠겨 있었다. 지금도 교수들은 퍼스트를 서는 모습을 보며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응급 수술이 뜨면 거의 예외 없이 수술을 주고는 대부분 대단히 만족한 웃음을 보였다.
“도대체 무슨 조화야? 내가 신기동 선생님 손에 맞추려고 얼마나 신경을 쓰는데, 퍼스트만 서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지 모르겠네. 일석아, 어떻게 생각해?”
“나도 모르겠어요. 사실 신기동 선생님이 이준영 선생님보다 더 깐깐하신 면이 있긴 한데, 요샌 송재덕 선생님 눈치도 이상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네. 이러다 야야야! 소리 듣고 쫓겨날까 봐 불안하다니까.”
신현수의 얼굴도 심각하기만 했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몇 마디 말은 가공할 위력이 담겨 있다. 듣는 말은 가장 적겠지만, 타격은 가장 클 것이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정규 수술 중에는 누구 한 분 예외 없이 고개를 흔들면서도 응급 수술은 거의 다 주시잖아. 평가도 긍정적이고. 그 차이가 뭘까?”
모두들 자연스럽게 김지훈에게 시선을 주었다.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총치프로서 신경 써야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도 똑같이 타고 있는데 뾰족한 답이 있겠어? 일단 각자 최선을 다하고, 힌트가 될 만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상의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리고 곧 입국식 날짜가 정해질 텐데, 그 전에 수술을 받는 1년차가 있을 수도 있어. 우리 문제도 문제지만 신경 바짝 써.”
“야!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여유를 잃지 않다니, 역시 우리가 총치프 하나는 잘 뽑았어. 오케이! 집도는 고사하고 퍼스트도 제대로 못 선다는 소리 들으면 그것도 다 우리 책임이니까 열심히 가르쳐야지. 하오문을 이끌 놈도 뽑아야 하는데 걱정이네.”
가뜩이나 힘든 1년차들이었다. 특히 100일 당직은 진저리를 칠 정도로 괴로운 시간이다. 시간이 갈수록 눈은 점점 시뻘게지고, 어디든 기댈 수만 있으면 졸고 있었다.
윗년차들에게 관용은 없었다. 조금만 틈을 보여도 경고를 날렸고, 누적되는 순간 가차 없이 불길을 쏟아 냈다. 좋든 싫든, 그게 초반 트레이닝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시기이기도 했다. 곧 집도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말이 왔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당직이다.
4년차가 된 이후 주말은 번갈아 수술 당직을 서기로 했다. 복불복이긴 하지만 토요일보다는 일요일이 훨씬 힘들다. 자칫 수술이 몰리면 월요일까지 여파가 미칠 수도 있었다. 그 탓에 손일석조차 토요일을 선호할 지경이었다.
하기에 의향을 꼭 물어봐야 했다.
“현수야, 수술 당직 언제 설래?”
“내가 일요일에 설게.”
단호한 말에 김지훈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자식! 이젠 나보다 욕심을 더 부리네.’
헤이해질 틈이 없었다. 신현수와 당직을 쭉 같이 선다는 것 자체로 큰 득이 될 것이다.
내심 각오를 다졌지만 이번 주말 당직 교수를 생각하는 순간 은근한 두려움이 다가왔다.
신기동 교수다.
타는 것도 적응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불과 이혁민 교수의 논리가 높긴 해도 넘을 수 있는 산이라면, 신기동 교수의 차가운 비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였다. 잘못 떨어지면 끝이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까지 생각났다.
‘똑같은 수술이어도 직접 혈관을 수술하시면 3년을 넘게 쓰지만, 우리가 하면 1년도 못 쓴다고 하셨지? 어떤 교수님보다도 꼼꼼하고 정확한 수술을 강조하시니까 각오 단단히 해야겠어.’
응급 수술을 미리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신기동 교수의 손을 생각하던 김지훈이 새로 받은 논문에 집중했다. 갑자기 라파로 케이스 보고가 생각났다.
“현수야, 간담도 학회가 정확하게 언제 열리는지 혹시 얘기 들은 거 있어? 분명히 이번 달이라고 하셨는데 말씀이 없으시네.”
“그러게. 나도 들은 말이 없어. 그래도 발표 준비는 미리 해. 케이스 발표라고 해도 쟁쟁하신 분들 앞이라 정말 만만치 않을 거야.”
“내가 발표해야 한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신 게 아니야. 도리어 니가 해야 할지도 몰라.”
“내가 왜?”
“지금 간담도 도는 놈이 너잖아.”
신현수가 입맛을 다셨다. 각 병원의 간담도 교수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만으로도 장래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욕심이 정말 없는 건지, 마음에도 없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김지훈의 얼굴을 봐서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모습 때문에 마음을 열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신경은 쓰이는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케이스 보고서를 꺼냈다.
한동안 조용히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따르르릉!
결국 전화가 울렸다.
(이혁원입니다. 45세 남자 환자로 공사 중 2층에서 떨어지며 발생한 복부 둔상으로 내원했습니다. 현재 혈압 90에 60이며, 박동수는 130회 정도입니다.)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다. 노티가 끝나기가 무섭게 응급실로 내려갔다.
신현수는 이번에도 함께 움직였다.
띠띠띠띠띠!
모니터 소리가 급박했다.
눈을 부릅뜨고 환자를 보고 있는 이삼 년차에 신현수까지 있어 더없이 든든하기만 했다.
침착하게 환자를 살폈다. 복부 둔상이라기보다는 좌측 옆구리 둔상이었다.
“안호석, 지금 바로 CT 찍을 수 있겠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빨리 찍자.”
비장이 깨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혈복강 중에서는 가장 흔하고, 그만큼 많이 해 본 수술이다. 하지만 비장 파열 자체로도 위험한 데다 동반 손상 등을 생각하면 결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복부 CT가 나왔다. 신현수와 함께 CT를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복강 내에 상당한 양의 피가 고여 있었다. 혈복강은 분명했다. 그런데 의외의 장기가 손상돼 있었다. 좌측 신장 주변에 피가 잔뜩 고여 있었다.
신장은 후복막 속에 묻혀 있는 장기다. 따라서 파열이 되어도 후복막 내에서 출혈을 하기 때문에 복강에는 피가 대량으로 고일 수가 없다. 복막을 뚫고 새어 나온 피 정도만 관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치료 방법도 달랐다. 심한 손상일 경우에는 당연히 개복해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구조상 후복막이 자연적으로 압박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바이탈을 유지하면서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다는 문제는 있었다.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비장이 아니라 콩팥인가? 어? 아니네. 현수야, 콩팥도 멀쩡해 보이지?”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지훈이 급히 환자에게 달려갔다. 신장이나 방광이 손상됐다면 소변에 피가 섞여 뻘겋게 나올 것이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소변은 깨끗했다. 저혈압으로 인해 양만 줄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현수야, 혈관 손상일 가능성이 높지?”
“그런 것 같아.”
비상이다.
예측 가능한 상황은 후복막과 신장 동맥 어딘가가 손상을 받아, 복강 내로 출혈을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가장 정확한 진단 방법은 혈관 촬영이지만,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환자의 의식은 흐렸다. 온몸이 차갑고,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호흡 역시 얕고 빨랐다. 혈압은 낮고, 심장은 헐떡였다.
전형적인 저혈량성 쇼크 상태였다.
“호석아, 바이탈 확실하게 잡아. 수술에 필요한 준비까지 바로 해.”
노티를 받은 신기동 교수가 불과 30분도 안 돼 다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환자 상태와 복부 CT를 확인하고 보호자를 만났다.
“콩팥으로 가는 혈관이 손상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른 혈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만, 어떤 경우라고 해도 수술을 해야 합니다.”
냉정할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보호자들이 초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혈관 손상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신기동 교수가 더욱 냉정해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도 환자 상태는 안 좋고, 응급실에서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까 빨리 결정하셔야 합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환자의 부인이 주저앉았다. 함께 온 보호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당장 할 수 있나요?”
신기동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마취과에 연락까지 다 했습니다.”
“동의하시면 바로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김지훈, 위험성 확실하게 설명하고 동의서 받아. 시간 없어. 빨리 움직여.”
가장 힘든 시간이다. 수술과 마취 중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설명했다. 아무리 돌려 말해도 결국 환자가 죽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의사가 신이 아닌 이상 삶을 확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보호자가 떨리는 손으로 동의했다.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애 아빠 꼭 살려 주셔야 합니다. 제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호석 선생, 환자 옮기자.”
김지훈의 오더가 떨어지자마자 모두들 부산하게 움직였다. 간이침대에 실려 수술 방으로 향하는 환자의 고개가 힘없이 흔들렸다.
띠띠띠띠띠!
삐이이이이!
모니터가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다. 바이탈이 크게 흔들린다는 말이었다.
아직 마취는 시작도 못한 상태였다. 마취과는 물론 안호석과 박순용까지 들어와 바이탈을 잡기 위해 매달렸다.
‘도대체 얼마나 큰 혈관이 손상된 거지? 이러다 수술도 못하고 환자 잃는 거 아냐?’
이미 수술 가운까지 입은 김지훈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냉정해 보이는 신기동 교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순간 혈압이 반짝 올라갔다. 바로 마취를 걸었다. 빠른 속도로 수술 준비를 끝냈다.
“수술 시작합니다.”
마취과의 대답이 들리기도 전에 복부를 열었다.
신기동 교수의 손이 전에 없이 빠르게 움직였고, 김지훈 또한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목표는 오직 하나다. 최대한 빨리 출혈 부위를 찾아 막아야 한다.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은 그뿐이었다.
띠띠띠띠띠!
삐이이이이이!
복부가 완전히 열리자 혈압이 더욱 떨어졌다. 모니터에서 울리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고막을 자극했다.
이렇게 급박한 환자는 없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오기 시작했다.
배 속에 고인 피가 만만치 않았다.
“석션, 탭, 물.”
신기동 교수도, 김지훈도 수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였다.
석션 통에 시뻘건 물이 줄줄 떨어졌다. 검붉은 피로 물든 탭이 수술 방 바닥에 어지러이 쌓였다.
마침내 수술 시야를 일부나마 확보했다. 좌측 후복막이 크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이혁원, 인턴 선생, 끌어. 간호사, 탭.”
좌측 배 속 깊은 곳에 탭을 쑤셔 넣고는 강하게 압박했다. 신기동 교수가 빠르게 대량 출혈이 발생할 수 있는 간과 비장 등의 내부 장기를 확인했다.
눈에 띄는 출혈 부위는 없었다.
“김지훈, 후복막 확인하자.”
탭을 제거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새어 나온 시뻘건 피가 쑤우욱 차올랐다. 이 정도 속도라면 동맥 손상이 분명했다. 무작정 후복막을 열었다가는 동맥을 찾지도 못하고 출혈만 악화시킬 것이다.
다시 출혈 부위 주변을 탭으로 압박했다. 신기동 교수가 대동맥과 다른 장기의 위치를 확인했다. 김지훈 역시 신장 동맥을 찾을 수 있는 랜드마크를 확인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한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대동맥에서 신장 동맥이 갈라지는 부분이었다.
김지훈이 그 부분을 노출시켰다. 조심스럽기보다는 과감했다. 지금은 시간이 생명이었다.
“켈리, 멧젬(끝이 뭉툭한 수술용 가위).”
신기동 교수 역시 후복막을 과감하게 잘라 나갔다. 피에 물든 조직을 헤치자 신장 동맥이 보였다.
심장박동을 따라 벌떡벌떡 뛰어야 할 동맥의 움직임이 미약했다. 환자 상태가 심각하다는 말이었다.
띠띠띠띠띠띠!
삐이이이이!
경고음이 여지없이 울렸다.
김지훈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동맥 출혈 부위에만 집중해야 했다.
신기동 교수와 김지훈의 손이 과감하다 못해 거칠게 움직였다. 신장 동맥의 경로로 예상되는 부위의 후복막을 빠르게 절개했다. 어느 순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피가 줄줄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동맥 출혈이라고 보기에는 약한 힘이었지만 밝은 선홍색이었다. 동맥 출혈이 분명했고, 그만큼 혈압이 떨어져 있다는 의미였다.
검붉은 피에 물든 조직을 과감하게 헤치자 순식간에 그 자리에 피가 찼다.
드디어 출혈 부위는 찾았다. 접근이 문제였다.
“석션.”
아무리 혈압이 떨어졌다고 해도 대동맥에 바로 갈라진 동맥의 출혈이다. 파워를 최대한 올렸지만 석션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수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한 사투가 벌어졌다.
탭과 거즈와 손까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 김지훈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긴장과 집중이 최고조에 달했다. 빠르고 과감한 손이 멈추질 않았다.
검붉은 선혈 속에서 언뜻 길고 허연 조직이 보였다. 그 한가운데에서 선홍색의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 순간 신기동 교수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따르륵! 따르륵!
“석션, 탭.”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지훈이 주변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피를 제거했다.
제대로 잡았기만을 바랐다. 엉뚱한 부위를 잡았다면 주변 조직 손상으로 더욱 혈관을 잡기 어려워질 것이다.
띠띠띠띠띠!
아직도 환자의 심장은 헐떡이고 있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탭을 제거했다. 재빨리 맑은 물로 출혈 부위를 씻어 냈다. 동맥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 잘린 동맥의 양쪽에 혈관 겸자가 정확하게 물려 있었다.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다. 손상된 신장 동맥을 잡았다.
신기동 교수의 오랜 경험과 실력이었다.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감탄이 터져 나왔지만, 아직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 빠르게 주변을 정리한 신기동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과감하면서도 정확한 김지훈의 손놀림.
‘네가 퍼스트가 아니었으면 힘들 뻔했다.’
아직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 동맥 손상을 받았지만 신장은 예민하면서도 강인한 장기다. 환자도 젊고 건강했던 사람이다. 신장까지 살린다면 그보다 좋은 결과는 없었다.
“마취과, 바이탈 어떻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소한 출혈 부위를 잡았다. 초조한 5분여가 지나갔다.
“혈압 100에 60으로 잡힙니다.”
출혈을 모두 잡았다고 해도 시간적 여유는 별로 없었다. 단 1초라도 빨리 신장에 혈류를 공급해야 살릴 수 있다. 여전히 시간이 생명이었다.
“김지훈, 신장 살려 보자.”
은근한 긴장에 김지훈이 어깨를 흔들었다.
혈관 봉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