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파이팅! (2)
이번 주도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이혁원과 나종진의 교육까지 겹쳐 더더욱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픽스턴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신현수였다.
월요일과 화요일 당직을 서면서 툭하면 전화통을 붙잡은 채 한참 동안 놓지를 못했다. 때때로 곤란한 표정까지 짓는 것으로 보아 결혼 준비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촉박한 날짜 때문일 것이다.
손일석이 난감한 표정으로 입맛만 다셨다.
“지훈아, 그러니까 니 얘기는 수, 목, 금 3일 동안이라도 현수를 당직에서 빼 주자, 이거지? 그렇게 되면 우리 둘이 다음 주 주말까지 12일 동안 당직을 서야 하네.”
“인생에 한 번뿐인 일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전화기만 들면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기 불편해서 그래.”
“근데 준비할 게 그렇게 많나?”
“해 봤어야 알지. 어쨌든 현수가 당직 서기 싫어서 그럴 놈이 아니잖아. 할아버님하고 서연이 아버님 때문에 신경 쓸 게 많을지도 모르고.”
손일석이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직 3일 더 선다고 죽기야 하겠어? 그렇게 하자. 에휴! 어떻게 3년 내내 1년차처럼 일을 하는 것 같냐? 지훈아, 우린 수련 마치고 결혼하자.”
무언가 한마디 해 주어야 할 것 같은 말이었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전해 들은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몇 번이고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김지훈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시간이 없는 모양이었다.
“자식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오프 가.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지훈아, 정말 고맙다.”
고작 당직 3일이 아니었다. 휴가까지 감안하면 김지훈과 손일석이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하는지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너 신혼여행 갔다 와서 빈손으로 오면 죽는다. 우릴 감동시킬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기대해도 되겠지? 참고로 난 약간 레벨 있는 거 좋아하니까 잊지 마. 흐흐흐!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뭐 필요한 거 있어? 면세점에서 사다 줄게.”
상당히 진지한 표정이다.
“면세점? 에휴! 너도 참 내 말을 못 알아들어요. 3년이면 서당 개도 풍월을 읊는다는데, 넌 뭐냐?”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미안해 그럴 것이다. 어쩌면 정말 진담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점이 신현수만의 매력일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잘 갔다 와서 맛있는 거나 사, 인마. 그럼 오늘부터 우린 달려 볼까?”
신현수의 미안한 얼굴을 뒤로하고 의국으로 향했다.
다들 동기이자 친구라면 그 정도는 해 줘야 한다는 얼굴이었다. 내심 손일석보다 훨씬 빡빡한 신현수와 당직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김지훈마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김지훈은 이혁원과, 손일석은 나종진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얼굴을 맞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중간에 항상 일이 년차들이 끼어 있기는 했지만, 치프들의 눈에 픽스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눈에 밟히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피할 방법도 없었다.
“후우! 종진이 저 자식을 어떻게 하지? 오늘 수술 방에서 툭하면 졸고 있네. 벌써 체력이 떨어질 리도 없고 말이야. 도진이가 제대로 교육을 시키는 건지 모르겠어.”
“도진이가 의외로 성질을 많이 죽이는 것 같긴 해. 조용조용 말은 하는 것 같은데 결정타를 안 날리네.”
“어떻게 하지? 그렇다고 우리가 이 자식들을 대놓고 태울 수도 없고 말이야. 이럴 때는 치프라는 게 별로 좋지는 않네. 그치?”
김지훈이 입술을 쭉 내밀며 눈가를 좁혔다.
오더를 내는 것으로 목요일의 일과가 모두 끝났다. 1년차들과 픽스턴들이 나가기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서도진에게 손짓을 했다.
“잠깐 나 좀 보자.”
김지훈이 턱을 괴고는 조용히 서도진을 보았다.
“도진아, 혁원이하고 종진이 교육은 시키고 있는 거야?”
“예. 시간 나는 대로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 근데 왜 여기저기에서 말이 나오지? 내 눈에도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제법 보여. 차팅하는 것만 가르치면 끝이 아니잖아?”
서도진이 당황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큰일이야 있겠어? 다 사소한 일이지. 하지만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문제가 되겠지? 하여튼 우리 눈에는 부족하게 보인다. 널 믿고 교육을 맡긴 거니까 신경 좀 써.”
김지훈이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조곤조곤 얘기를 한 후 서도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나 치프의 말이다. 김지훈이 나가자마자 서도진이 1년차들을 불렀다. 모두 머리를 맞대고 김지훈의 말을 곱씹었다.
결론이 나왔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불려 들어왔다.
“니들, 내 말 잘 들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수술 기록지를 작성하는 일도 벅찰 거야. 오더 내는 것도 생소할 수 있어.”
당연한 일이었다. 수술 종류가 한두 가지도 아닌 데다, 그에 따른 오더도 기본은 같다고 하지만 세세하게는 모두 다르다. 미숙하고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이미 픽스턴들이 작성한 기록지들은 빨간색으로 불타오르기 직전이었다.
“우리도 똑같이 그랬으니까 이해해. 하지만 우리가 선택한 과는 일반 외과야. 바이탈을 다루는 과라는 소리야. 아뻬도 수술 안 하면 사람 죽는다는 건 니들도 잘 알잖아. 그럼 뭐가 중요하겠어?”
꿀 먹은 벙어리다. 알고 있지만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치프 선생님들, 특히 김지훈 선생님에게 배운 건 하나야. 환자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수술도, 응급처치도 모두 환자를 살리기 위한 거라는 걸 잊지 마. 정신 똑바로 차려. 한 번만 더 내 귀에 수술실에서 졸았다거나, 응급실에 늦게 내려왔다는 소리 들리면 각오해야 할 거야.”
서도진의 목소리가 슬슬 높아졌다. 1년차들도 바짝 긴장하는 눈치였다.
교육은 서도진만의 몫이 아니다. 더구나 누구보다 픽스턴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앞으로 2주 후면 2년차가 되기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사실상 1년차들도 함께 타고 있는 것이다.
박순용이 잠깐 말이 끊어진 틈을 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박순용 선생님, 선생님이 보기에 픽스턴들이 까마득한 후배겠지만 의국에서는 1년 차이밖에 안 됩니다. 그 점을 잊지 마세요.”
간과하기 쉬운 문제였다. 후배이기 이전에 의사라는 사실도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한동안 목소리가 낮아졌다 높아지기를 반복했다.
한참 만에야 이혁원과 나종진이 식은땀을 흘리며 의국에서 나왔다. 답답한 한숨을 내쉬며 스테이션으로 향하던 이혁원이 흠칫 놀랐다. 김지훈이 논문 하나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상황을 보건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피할 일이 아니었다. 잘못한 일이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혁원이 나종진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지훈이 물끄러미 픽스턴들을 보았다. 얼굴을 보니 꽤나 혼난 모양이었다. 피곤까지 겹쳐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1년차 때가 생각나며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이었다.
한 가지 사실만은 평생 머릿속에 각인시켜야 했다. 이는 김지훈도 평생 잊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이혁원, 나종진, 한 가지만 명심해. 환자에 관한 한 절대 자신에게 너그러워지지 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일이 환자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일일 수도 있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열심히 하자. 수술 방에서 졸지 말고.”
김지훈이 힐끗 눈길을 주고는 숙소로 향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서도진에게 검사도 받지 않은 수술 기록지들이 놓여 있었다.
빨간 종이인지, 검은 종이인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이혁원이 기록지를 들다 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단순한 지적이 아니었다. 무엇을 잘못 기록했는지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수정돼 있었다. 김지훈의 글씨만이 아니라 손일석의 글씨까지 보였다.
치프들의 마음이랄 것도 없었다.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혁원아, 왜 이렇게 큰 잘못을 한 거 같지? 근데 우리 언제 자냐? 100일 당직 때는 어떻게 하지?”
그조차 배워야 할 일이었다. 남들보다 체력 문제가 심했을 박순용도 1년차 생활을 해냈다. 조각 잠을 자는 일에도 요령이 있을 것이다.
이혁원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너그러우면 안 된다고.’
문득 김지훈의 빛바랜 가운이 떠올랐다.
***
어느새 주말이다. 신현수 장가가는 날이다.
당직 일이 년차들만 남기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물론 허리춤에는 건전지를 새로 간 삐삐가 단단히 매달려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면서도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신랑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신부 대기실에 고개를 들이민 손일석이 씨익 웃으며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신부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서연아, 신혼여행 때 뭐 해야 하는지 알지? 지금 만들어도 9월까지만 근무하니까 상관없잖아? 전문의 시험 준비할 때 배 때문에 좀 힘들까?”
이런 소리를 하는데 왜 밉지 않을까?
참 허물도 없는 놈이다.
교수들을 비롯해 병원 식구들이 속속 도착했다. 양가의 하객들도 상당히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 속에 고경아가 서 있었다.
‘예쁘다! 신부보다 더 예쁘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물론 김지훈의 생각이다.
곧 결혼행진곡과 함께 식이 시작됐다.
오프라면 모르지만 당직이다. 신랑 신부 입장만 보고는 식당으로 향했다. 간만에 뷔페에서 배를 채웠다.
게 눈 감추듯 몇 접시를 비우고 식장으로 향하려는 순간 삐삐가 울렸다.
박순용이었다.
(선생님, 35세 여자 환자입니다. 금일 발생한 교통사고로 내원했습니다. 헤모뻬리 의심됩니다.)
“바이탈은 어때요?”
(심상치가 않습니다.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당직 선생님이 누구시죠?”
(이준영 선생님입니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급히 손일석과 함께 이준영 교수를 찾았다. 하객들 사이에 머리 하나는 삐죽이 솟은 사람이 보였다. 제자 중 한 명이 결혼식을 올리는데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하기만 했다.
“선생님, 헤모뻬리가 의심되는 환자가 있습니다. 바이탈이 좋지 않답니다.”
“그래? 들어가자.”
동요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목소리다. 옆에 앉아 있던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교수, 현수 결혼식인데 마저 보고 가자. 수술은 지훈이하고 일석이가 하라고 그래. 저놈들이면 믿고 맡겨도 되잖아. 치프들이다, 치프들.”
확고한 신뢰는 감사한 일이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송재덕 교수가 당직이었다면 이미 차를 타고 있었을 것이다. 환자에 대한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이다.
병원으로 향했다. 다들 마음이 급해 입을 열지 못했다.
도착하자마자 응급실로 들어가 환자부터 살폈다. 서도진부터 이혁원까지 모두 내려와 환자에게 매달려 있었다.
헤모뻬리가 확실했다. 이미 수술 준비는 모두 끝나 있었다.
“바로 올리자.”
“예, 선생님. 수술 들어갑시다.”
손일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곧 이혁원과 박순용이 환자와 함께 수술 방으로 올라갔다.
마무리를 한 김지훈이 조용히 숙소로 향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얼굴도 제대로 못 봤네. 병원에 들어와서 밥을 먹었어야 하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전공의 생활이 그렇다. 신현수도 절대 아쉬워하지 않을 것이다. 병원 식구들과 찍은 사진 속에 김지훈과 손일석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미안하다, 현수야. 그러게, 전공의 때 결혼하는 놈이 어디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말고 깜빡 잠이 들었다. 손일석이 깨울 때까지 내처 잤다.
“야! 내가 당직인데 시작이 좋네.”
“어? 수술 받았어?”
“아니. 근데 이준영 선생님 분위기가 다음 수술은 꼭 주실 것 같아. 더도 말고 주말에 딱 다섯 개만 하자. 그러려면 배 속이 든든해야겠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뷔페에서 밀어 넣은 음식은 다 어디 갔는지 또 밥이 들어갔다.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두 그릇이다.
잠도 잤고, 배도 부르다. 잠깐 휴식을 취한 후 논문을 집어 들었다.
가슴을 은근히 압박하는 이혁민 교수의 담담하면서도 조곤조곤한 말을 피하려면 이럴 때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자꾸만 다른 곳에 신경이 갔다. 라파로다.
보다 넓은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결국 쓰던 논문을 접고 라파로에 관한 새로운 논문을 찾았다.
운도 좋다. 손일석은 땅을 치며 눈물을 흘렸지만, 주말 내내 조용했다. 단지 아뻬 두 개가 떴을 뿐이었다.
그나마 이준영 교수가 수술을 주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통곡을 했을지도 몰랐다.
덕분에 김지훈은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일을 할 수 있었다. 라파로에 관한 논문들을 정독한 것이다.
적용할 수 있는 수술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러고는 고경아에게 연락을 해 수술 방에서 만났다.
“경아 씨,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까 좋죠?”
“좋긴 뭐가 좋아요?”
고경아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라파로 기구들을 다시 확인했다.
필요한 기구는 다 있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히며 이마에 주름을 잔뜩 만들었다.
“경아 씨, 스승님에게 다른 수술도 라파로로 하자고 말해도 될까요? 말씀드리기가 왠지 껄끄럽네.”
“어머? 이준영 선생님이 더 좋아하실걸요? 지훈 씨가 이렇게 철저히 준비를 했는데 당연히 그러시지 않겠어요? 어쩜 나보다 더 몰라.”
“그렇죠?”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문득 병원 최초로 스테이플을 했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났다. 그 기분은 경험하기 전에는 누구도 모른다. 새로운 라파로 수술 역시 그런 감동을 주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 내일 수술 끝나고 말씀드리자.’
은근히 가슴이 들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