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 (2)
바람이 이루어졌다. 얼서 빤뻬리(궤양 천공에 의한 복막염)와 아뻬가 연이어 떴다.
송동화 과장이 계속 퍼스트 자리에 섰다. 박순용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해 왔는지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수술이 끝날 때마다 흐뭇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훈아, 지금처럼만 하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워낙 무뚝뚝한 양반이라 표현은 안 하시겠지만 이준영 선생님이 정말 좋아하시겠어. 이젠 교수님들이 없어도 너 혼자 웬만한 수술은 다 책임지고 할 수 있겠다. 박순용 선생도 기본을 정말 탄탄하게 쌓았네.’
해가 밝으면 그림자도 진해지는 법이다.
김지훈의 입가에 미소가 걸릴 듯 말 듯 했다. 나직한 한숨도 내뱉었다. 송동화 과장과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수술을 했다는 사실에 묘한 감흥이 다가온 것이다. 집도를 했다는 즐거움 속에 진한 아쉬움과 서운함이 뒤섞였다.
연이어진 수술에 일이 잔뜩 밀린 박순용이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혁원은 픽스턴이 1년차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반짝이는 눈빛에 박순용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니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할 일이 태산이다. 까딱하면 주말인데 밤새워야 할지도 몰라.’
백날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겪어 봐야 알 일이었다.
오더를 낸 박순용이 후다닥 병실로 올라갔다. 충분히 회복된 후 병실로 옮기지만 수술한 환자는 이삼 일 정도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수술 당일은 아뻬처럼 작은 수술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주말이다. 사고는 긴장이 풀어질 때 터지는 법이었다.
응급실과 수술실을 오가는 사이, 어느새 1시가 넘었다.
손일석이 의국에서 조용히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의자에 앉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어째 눈빛이 좋지 않았다.
“지훈아, 연짱으로 수술 받으니까 좋지? 입 찢어지겠다. 이 자식아, 표정 관리 좀 해라. 에휴! 누군 하룻저녁에 세 개를 하는데, 난 이게 뭐냐. 어떻게 당직 설 때는 조용하다가 백당직만 걸리면 수술이 줄줄이 떠요. 대책이 없다, 대책이.”
“수술 받은 거 들었어?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인마. 그보다 송동화 과장님하고는 이번 달로 수술 끝이라는 건 알아?”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응급 의학과? 누구 때문에 성질이 나서 미처 그 생각을 못했네. 서운하긴 하지만 좋게 가시는 거잖아. 내일 시간 나는 대로 같이 가서 인사라도 드릴까? 아니다. 송동화 선생님 평일 당직 때 몽땅 함께 가자.”
역시 손일석이다. 안 그래도 하고 싶었던 말을 탁 꺼냈다.
“오케이! 이번 주 목요일이다.”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전공의 수첩을 꺼냈다.
메이저 하나(비장 및 평행 결장 제거술).
준메이저 하나(유문 성형술).
마이너 하나(아뻬).
하룻저녁 만에 무려 세 칸을 채웠다.
진단명과 수술명을 적으며, 오늘 한 수술을 차례차례 되짚었다. 무엇을 놓쳤는지, 실수한 것은 없는지, 혹은 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는지를 검토했다.
“수술할 때는 모르겠는데 끝나고 나면 항상 아쉬워. 뭔가 불안하고 부족한 것 같거든. 빤뻬리 할 때 천공 부분을 조금 더 잘랐어야 했나?”
“어이구! 이젠 복기를 다 하세요? 염장을 질러라. 자식이 자꾸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게 영 찝찝하네. 이러다 엉뚱한 환자로 밤 꼴딱 새우는 거 아냐?”
수술 욕심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손일석이었다. 단단히 꼬인 모양이었다.
피식 웃음만 나왔다. 힐끗 눈길을 주고는 방금 전에 수술이 끝난 환자를 찾았다.
박순용이 혼자 환자를 살피고 있었다.
“혁원이는요?”
“수술 기록지 작성하는 모양입니다. 처음 하는 거라 골치 좀 아프겠죠? 저때는 시간도 많이 걸리잖아요.”
김지훈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박순용이 순간 아차 싶었는지 이러저런 말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무 말 없이 꼼꼼하게 환자 상태를 살핀 후, 다시 의국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논문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손일석이었다.
(지훈아, 박순용 선생님 어디 있어? 빨리 응급실로 내려오라고 해.)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박순용만 찾는 걸 보아서는 수술할 환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슬슬 밀려오는 피곤에 이리저리 목을 돌리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난리도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내려가 봐야겠다.’
김지훈이 박순용을 부르며 응급실로 향했다.
단체 TA(Traffic Accident:교통사고)다.
다른 환자들까지 겹쳐 응급실이 북새통이었다.
응급실 인턴들과 간호사들이 거의 뛰다시피 다급하게 움직였다. 김지훈을 보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손일석이 나종진과 함께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줄줄 피를 흘리고 있는 환자.
팔다리가 퉁퉁 부은 환자.
고통에 못 이겨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환자.
의식이 흐릿해진 환자.
한눈에도 중환들이었다.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반 외과 치프가 둘이나 있다. 그것도 김지훈과 손일석이다.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자 간호사들이 내심 안도하는 눈치를 보였다.
곧 안호석과 박순용이 내려왔다.
“뭐하다 이제 내려와?”
손일석이 눈을 부릅뜨며 한 소리를 했다. 각자 일이 있었다고 해도 치프보다 늦게 내려왔다. 그 사실 자체로 입을 열 처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김지훈까지 있는 상황이다. 입 꾹 다물고 환자부터 보는 것이 상책이었다.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부터 집중적으로 살피며 필요한 조치들을 취했다. 의식이 또렷하지 못한 환자와 심한 골절을 입은 환자의 상태가 특히 심각했다.
잠시 후 정형외과, 신경외과, 흉부외과 전공의들이 내려왔다.
의외로 수술이 필요할 정도의 복부 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는 없었다. 그래도 확신은 금물이었다.
주의 깊게 환자를 지켜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이 자식은 왜 안 내려오지?’
응급처치를 마친 환자부터 줄줄이 방사선 촬영을 시작했다. 뇌, 흉부, 복부 CT를 모두 찍어야 하는 환자까지 있어 귀중한 시간이 지연되고 있었다.
X-ray가 나올 때마다 전공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확인했다. 의식이 흐릿한 환자의 브레인(Brain) CT부터 심상치 않았다. 상당한 양의 뇌출혈이 발견된 것이다.
재빠르게 오더를 낸 신경외과 전공의가 김지훈을 보았다.
“선생님, 준비되는 대로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일반 외과 문제는 없습니까?”
“복부 둔상 이외에는 특별한 문제 없어. 월요일에 컨설트 내고, 혹시 그 전에라도 문제 있으면 나나 일석이한데 연락해.”
막 상의를 끝냈을 무렵, 이혁원이 허겁지겁 처치실로 들어왔다. 김지훈이 눈길도 주지 않자 얼굴이 시뻘게졌다.
주머니에 꽂혀 있는 종이를 본 김지훈이 혀를 찼다. 오더지와 수술 기록지였다.
‘종진이는 아까 내려와서 일석이랑 함께 환자를 보는데, 그거 기록한다고 이제 내려와? 단 10분만 늦어도 환자를 놓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어.’
치미는 화를 꾹꾹 누르고는 손일석을 찾았다. 대퇴 골절 및 골반 골절이 동시에 발생한 환자를 보고 있었다. 바이탈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치명적인 손상이었다. 그 때문에 정형외과 환자지만 일반 외과가 볼 수밖에 없었다.
나종진의 가운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손일석이 지시를 내릴 때마다 눈을 빛내며 빠르게 움직였다. 수시로 바이탈을 확인하고, 소변량까지 체크했다.
김지훈의 눈치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이혁원이 재빨리 나종진과 함께 환자를 보기 시작했다. 이마저도 늦었으면 욕을 한 바가지는 먹었을 것이다.
“일석아, 어때? 바이탈이 잡힐까?”
“아까보다는 조금 안정이 되긴 했는데, 골절 부위의 출혈이 멈출지 모르겠네. 뾰족한 방법이 없잖아. 이런 환자만 보면 정말 답답해.”
골절 부위를 수술한다고 해서 출혈을 잡을 수는 없다. 도리어 손상 부위만 늘어 더욱 악화시킬 수 있었고, 골반 골절은 아예 수술이 불가능한 부위였다.
현재로서는 골반과 우측 다리를 단단히 고정시켜 골절 부위를 안정시키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래야 뼛속에서 발생하는 출혈이 멈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안호석과 박순용이 다른 환자들의 치료를 모두 마쳤다. 아수라장 같았던 응급실도 한산해졌다. 어느새 새벽 4시가 넘었다. 다들 눈이 뻘겠다.
그러나 누구도 눈을 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처치를 다 했다. 수술은 엄두도 내지 못할 상황이었기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김지훈이 힐끗힐끗 시계를 보았다. 치료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고비다. 현 상태가 지속되면 저혈량성 쇼크로 인한 심정지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이런 환자의 경우 일단 심장이 서면 회생시킬 방도가 없었다. 의사로서의 한계와 무력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수혈 팩을 강하게 짜고 있는 이혁원을 보던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늦게 내려왔지만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노력한 만큼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네.’
좀처럼 바이탈이 잡히질 않았다. 다들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위이이이잉!
전자 혈압계 커프가 조여지는 소리가 들렸다. 삑삑 소리와 함께 커프가 풀리며 혈압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105/70mmHg.
띠! 띠! 띠! 띠! 띠!
마침내 빠르기만 했던 심장박동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5분 후, 측정된 혈압과 박동수는 더욱 안정적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지훈아, 이 정도면 중환자실에서 보는 게 낫겠지?”
“응. 그게 좋을 것 같다.”
“간호사, 환자 중환자실로 옮깁시다. 인턴 선생, 정형외과에 환자 올라간다고 연락해.”
이제야 정형외과 전공의가 얼굴을 보였다.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매번 본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서운하면서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외상 환자의 바이탈은 일반 외과만이 다룰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한 번의 싸움이 끝났다. 오늘은 환자를 살렸지만 내일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떤 날은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도로 모든 환자들이 좋아지지만, 하루에도 몇 명씩 생을 달리하는 날도 있었다.
응급실은 총성 없는 전장과 다름이 없었다.
스테이션으로 나가자 송동화 과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중간 목소리가 들렸었다. 당연히 환자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김지훈과 손일석에게 손 한 번 흔들고는 당직실로 들어갔다. 수고했다는 말은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꾸벅 인사를 한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혁원, 중환자실 환자 안정되면 의국으로 바로 올라와.”
안호석과 박순용의 눈빛도 만만치 않았다.
토요일부터 일요일 새벽인 지금까지 눈 한번 붙이지 못해 눈이 시뻘게진 이혁원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생은 혼자 한 게 아니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국이다.
이혁원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김지훈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똑같이 잠을 못 잤다. 김지훈의 눈에도 피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이혁원, 아뻬 환자 수술 후 바이탈이 어땠어?”
이혁원이 어깨를 흠칫거렸다.
응급실 일로 이미 안호석과 박순용에게 엄청나게 탔다. 서로 연락을 안 했다는 이유로 나종진까지 함께 탔다.
명백한 잘못이었고, 나종진에게도 너무 미안해 말 한마디 못하고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그런데 김지훈이 또 다른 일을 꺼낸 것이다.
“왜 대답이 없어?”
“죄송합니다.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나한테 미안한 일이 아니야. 수술 기록을 아무리 잘하고, 오더를 정확하게 내면 뭐해? 정작 환자가 어떤 상태인지를 모르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어?”
이혁원의 어깨가 점점 처졌다.
사실 환자 상태를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 시간이 안 맞으면서 일이 꼬이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지만 핑계조차 되지 않는 소리였다. 어쩌면 아뻬라고 은연중 마음을 놓았는지도 몰랐다.
김지훈도 똑같은 일들이 있었기에 그런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 결코 꾀를 부리거나 환자를 등한시할 이혁원도 아니었다.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픽스턴이다. 1년차 시작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일 년 내내 엄청난 일에 짓눌려 제대로 잠도 못 잘 것이다. 더구나 100일 당직 기간에는 압박이 더욱 심하다.
1년차도 사람이다. 하루 24시간 내내 긴장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피곤에 못 이겨 틈만 나면 어딘가에 기대 졸 것이다.
그러나 환자를 가장 먼저 보기에 누구보다도 환자에 대해서만은 최대한 집중하고, 긴장을 해야 한다. 픽스턴 첫날이기에 더더욱 실수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후우! 이 자식을 어떻게 혼내야 하지? 이런 실수를 할 줄은 몰랐네.’
김지훈이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수술 기록이나 오더에 문제가 있었다면 시원하게 태웠을 것이다. 빨간 볼펜만 휘둘러도 충분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했다. 그게 도리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때 낯익은 소리가 들렸다. 창밖이 환해지고 있었다.
“이혁원, 복도로 나가 봐.”
난데없는 말에 이혁원이 머뭇거렸다.
“빨리 나가지 않고 뭐해?”
김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유도 모른 채 복도로 나간 이혁원이 주변을 둘러보다 말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드르륵! 드르륵!
박순용이 드레싱을 하고 있었다. 눈이 시뻘게진 채였다. 자신보다 더 힘들게 보냈고, 똑같이 잠을 자지 못했다.
이제야 김지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혁원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들어오라는 말도 없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박순용이 힐끗 눈길을 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드레싱이 끝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김지훈이 스테이션으로 나왔다.
“박순용 선생님, 회진 돕시다.”
일요일 아침치고는 상당히 빠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나았다. 채 한 시간도 못 자고 회진을 돌면 그건 죽음이기 때문이다.
김지훈이 휙 앞서 나갔다. 박순용이 이혁원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뭐해? 회진 안 돌 거야?’
번쩍 정신을 차린 이혁원이 재빨리 앞장섰다.
다들 피곤해 당장 눕고 싶은 상황이었다. 김지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구나 치프기에 아침 회진을 안 돈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끝까지 환자에 대한 관심과 집중을 잃지 않았다.
회진이 끝났다.
“박순용 선생님, 저녁 회진 때까지 안 찾을 거니까 일 빨리 끝내고 확실하게 쉬세요.”
“수술이 뜨면 어떻게 합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혁원, 정신 바짝 차려. 오늘이 마지막이어야 한다.”
“예, 선생님. 명심하겠습니다.”
이혁원이 지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몇 마디 듣지도 않았다. 버럭버럭 화를 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훈과 박순용이 보인 모습이 가슴을 후벼 팠다. 그 어떤 말보다 아팠다.
‘환자. 다른 어떤 일보다 환자가 우선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이었는데 왠지 느낌이 달랐다.
등짝이 서늘해지면서 식은땀까지 흘렸다. 픽스턴 첫날부터 제대로 탔다.
그 시간, 김지훈도 죽을 맛이었다.
“일석아, 혹시 수술 뜨면 부탁 좀 하자. 박순용 선생님하고 혁원이는 자게 놔둬. 이제 나도 체력이 달리나 봐. 졸려서 눈도 못 뜨겠네.”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푹 자.”
이제 막 일어난 손일석이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어후! 태우는 것도 쉽지가 않네.’
생각도 잠시, 침대에 푹 쓰러진 김지훈이 그대로 코를 골았다. 그 모습에 쩝쩝 입맛을 다시던 손일석이 중얼거렸다.
“강기웅 과장이 이번 달로 근무 끝이라고? 경석이 형도 그렇지. 터치 안 한다고 너무 좋아하네. 에휴!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강기웅 과장도 결국 떠나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떤 흔적과 자취를 남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