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20화 (520/1,329)

제7화 새로운 출발 (1)

금경태가 병원에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다른 과 교수들은 물론 행정직까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띌 정도였다. 일반 외과 과장에 병원장까지 노리던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생각과는 달리 일반 외과 내부적으로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특히 구영선 교수를 비롯해 구미 강기웅 과장까지 금경태와 연관된 교수들이 전전긍긍 마음을 잡지 못했다.

송재덕 교수가 나서서 분위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금경태가 뿌린 어두운 그림자가 모두 뽑히지 않은 탓일지도 몰랐다.

“금경태만 나가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는데, 올해는 크리스마스고 뭐고 다 쫑 났네. 이 분위기를 도대체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손일석의 투덜거림에 김지훈도 한숨만 푹푹 쉬었다.

“곧 좋아지겠지.”

교수들까지 흔들리는 마당에 전공의들이 갈팡질팡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다들 예전보다 피곤해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그렇게 1996년 12월이 가고, 1997년 1월이 밝았다.

김지훈이 뒤늦게 그리운 이들을 찾았다.

‘어머니, 아버지, 올해는 늦었습니다. 작년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정말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하고 싶네요. 어머니, 저 경아 씨랑 잘살게요. 참! 한 가지 고민이 있어요. 경아 씨랑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은데 상황이 만만치 않네요.’

수련 중에 결혼은 민폐 중의 민폐다. 일주일간 주어지는 특별 휴가에 주말을 포함하면 최소 9일 동안 남은 사람들이 고스란히 업무를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의 시험 준비까지 생각하면 올해는 힘들 것이다.

‘에휴! 안 되겠지?’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시며 고경아를 살포시 안았다.

“경아 씨, 앞으로 9개월만 근무하면 수련이 끝나네요. 인턴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 정말 빠르죠.”

“우리가 만난 지도 4년이나 됐어요. 후회하지 않죠?”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사실 후회돼요.”

“어머? 정말이요?”

“그럼요. 왜 더 빨리 경아 씨를 만나지 못했을까요?”

이 정도 멘트라면 감동해야 하는 거 아닌가?

김지훈이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눈을 흘기는 고경아의 손톱이 파르라니 빛났다.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서정호와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데이트한다고 도통 볼 수가 없었던 고경희까지 나와 반갑기만 했다.

그런데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손일석이 쓰윽 얼굴을 내밀었다. 왜 왔는지는 빤했지만 오늘은 오프가 아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석아, 너 당직이잖아?”

“나 백(Back)당직이다.”

손일석이 허리춤에 매달린 삐삐를 툭툭 치고는 서정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형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어! 그래. 앉아. 항상 웃는 얼굴이라 좋네. 그런데 당직이 이 시간에 나와도 돼?”

“백당직입니다. 그리고 형님이 오셨는데 당직이라고 해도 일단 인사는 드려야죠. 경희 씨하고도 잘 만나고 있습니다.”

고경희의 입가에 행복이 걸렸다.

고경아도 웃기만 했다.

‘처제도 저 자식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네. 재주도 좋아. 그래. 잘해 봐라. 대신 눈물 흘리게 하면 죽는다는 것만 잊지 말고.’

손일석이 무릎에 손을 얹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알았어, 인마.”

“뭐? 뭘… 뭘 안다는 거야?”

“더듬기는. 니 눈빛만 보면 답이 딱 나와. 경희는 내가 확실하게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헉! 귀신같은 놈이다.

눈을 찡긋거린 손일석이 유감없이 특기를 발휘했다. 분위기를 확 끌어 올렸다.

이내 즐거운 웃음이 터지며 술이 오고 갔다. 곧 술기운이 퍼지기 시작하고, 술잔을 놓고 제사만 지내야 하는 손일석은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어쨌든 즐겁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 더욱 즐거웠다.

김지훈이 한동안 머릿속에 궁금함을 가득 담은 채 그간 나누지 못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적절한 때가 왔다. 요새 힘들어서 어떻게 하냐는 고경아의 말에 서정호가 검사 생활을 언급한 것이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거의 동시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형님,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누구? 진평호하고 금경태?”

“예. 금경태 때문에 분위기가 영 좋지 않습니다.”

“곧 재판이 열릴 거야. 판결이야 판사가 하는 거지만 구형은 최대한 때려야지. 진평호는 이십 년 가까이 맞아야 하고, 금경태도 최소 팔구 년은 될 것 같다.”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 사람 목숨이 걸렸던 일인데 그거밖에 안 돼요? 대개 판결은 구형보다 적지 않습니까?”

“법은 우리 감정하고 달라. 사실 말만 오갔지, 신호선 그 양반한데 가한 구체적인 위해가 없잖아. 그래도 의도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절반은 살 거야. 어이구! 니들하고도 이런 얘기 해야 되나? 술이나 먹자. 지훈아, 한잔하자.”

단숨에 술잔을 비운 김지훈이 입을 모았다.

최소 4년이다. 금경태의 인생이 끝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이미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인데,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 그 지경까지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탐욕과 그릇된 야망이 원인일까?

‘정말 이해가 안 되네. 에이! 잊자. 나라도 빨리 잊어야 우리 과 분위기도 좋아진다.’

까르페 디엠!

뒤늦게 고경순이 합류했다. 손일석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고경순이 좋아 죽었다.

분위기가 방방 떴다. 간만에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셨다. 3차를 가자는 고경순을 고경아와 고경희가 간신히 뜯어말렸다. 이미 전작이 있는 김지훈은 반쯤, 서정호는 완전히 떡으로 변해 있었다.

3차는 확실히 무리다.

***

드디어 신동석 이사장을 비롯해 책임을 가진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원 전체가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중앙 의료원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예정대로 원장은 허경발 교수였고, 부원장으로 신상민 교수가 임명됐다. 축하의 꽃다발이 전해졌고, 허경발 교수는 웃음을 보이면서도 단단히 각오를 한 얼굴이었다. 금경태로 인해 더욱 막중한 책임을 느낀 것이다.

곧바로 인사 발령이 발표됐다. 의사들은 물론 행정직과 간호직까지 포함된 대규모 인사이동이었다. 곳곳에서 환호와 탄식이 이어졌지만 대체적으로 공정한 인사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한쪽에서 진상철 교수가 스스로 퇴직했다는 사실이 조용히 입에 오르내렸다. 직원들 모두 술렁였지만 전공의에겐 다른 사람 일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어떤 직위에 앉든 생활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일반 외과는 예외였다. 발 빠른 손일석이 대형 소식을 물고 온 것이다.

“와! 지훈아, 현수야, 우리 과 완전히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이구! 이 자식들은 도대체 귀는 왜 달고 다니는 거야? 현수 너는 정보가 제일 빨라야 하는데 어떻게 점점 지훈이 닮아 가냐?”

하도 호들갑을 떨어 절로 귀가 쫑긋거렸다.

“먼저 오상익 선생님께서 서울 병원 원장님이 되셨다. 과장도 안 하신 분인데 정말 파격적인 인사 아니냐? 누가 추천했을까?”

“야! 정말 의외긴 하지만 축하드리고도 남을 일이네. 좋아하시겠다. 그럼 과장님은?”

“어허! 성급하기는. 우리한테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어. 드디어 외과 센터를 정식으로 개설하실 모양이야. 금경태가 사라진 효과가 이제야 나타는 것 같아. 일이 척척 풀려.”

김지훈과 신현수가 의아한 눈으로 손일석을 보았다.

“정말이야? 발표도 안 났는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쯧쯧! 이 자식들이 어떻게 아직도 날 모를 수가 있지? 송재덕 선생님께서 외과 센터 센터장으로 발령 나셨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또 있어?”

순간 박수가 절로 터졌다. 일반 외과 입장에서는 경사 중의 경사였다. 더구나 이렇게 되면 누가 과장이 될지 답이 나왔다. 손일석과 힘차게 손바닥을 마주친 김지훈이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그럼 과장님은 당연히 이…….”

손일석이 손가락으로 김지훈의 입을 막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좀 이상한데 말이야. 이혁민 선생님이 되셨어.”

순간 김지훈과 신현수가 눈만 멀뚱거렸다. 문제가 없는 한 과장은 순차적으로 맡는다. 일종의 관행이지만 연륜이 쌓이면 과를 운영할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이준영 교수가 맡는 것이 합당했다.

신현수가 중얼거렸다.

“이혁민 선생님이 먼저 과장이 되시면 이준영 선생님이 다음에 과장이 될 수가 없는데 이상하네. 이혁민 선생님이 욕심을 내실 분도 아니고 말이야.”

“아예 자리에는 욕심이 없으신 걸까? 평소 말씀하시는 거나 행동하시는 걸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해. 그렇지 않아?”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눈가를 찡그리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영 교수가 생각하는 순리가 있을 것이다.

“음성에서 계셨던 기간을 스스로 빼신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대학 병원 근무 경력이 가장 짧으시잖아. 분명 이준영 선생님은 그 시간을 감안하신 걸 거야.”

‘좋은 일로 내려가신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솔직히 이준영 선생님이 과장 되시는 거에 시비 걸 사람이 있어? 없잖아. 정 찜찜하시면 2년만 하시고 내놓으시면 모양도 좋고, 이혁민 선생님 마음도 편하실 테고 얼마나 좋아.”

손일석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중앙 의료원 원장인 허경발 교수가 주도하는 인사 위원회의 결정이다. 교수들의 의견을 충분히 타진하고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어쨌든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었다.

그날 밤, 응급실에 들렀던 김지훈이 슬며시 외래에 들렀다. 진료 시간표에 적힌 이혁민 교수의 이름 앞에 과장이란 두 글자가 보였다. 기쁘면서도 왠지 한편으로는 섭섭했다.

문득 내일 아침 교수들이 어떤 얼굴들일지 궁금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교수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이혁민 교수가 오상익 교수를 보며 치프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래야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단 하나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전공의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테이션을 울렸다.

아직 취임도 안 했지만 오상익 교수가 축하의 말에 웃기만 했다. 감격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송재덕 교수를 볼 때 특히 그랬다.

“송 교수님 덕분입니다. 천안 병원 병원장을 하셔서 저보다 먼저 되셔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어이구! 원장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듭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그리고 앞으로는 센터장으로 불러 주세요. 송 센터장! 아! 좋네. 좋아. 전 볼펜 돌리는 것보다는 발로 뛰는 게 체질에 맞습니다. 나쁜 놈들아, 내 말이 맞지? 그치? 지훈아, 치프야, 대장 하자. 대장.”

난데없이 나쁜 놈에 또 대장 타령이다. 그런데 모두들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정말 간만에 터진 웃음이었다. 교수들의 얼굴도 그만큼 편안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구영선 교수와 임동완 교수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가? 스승님도 편안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다.’

머리를 긁적이던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와 눈을 마주치다 말고 흠칫 놀랐다.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 빼먹은 거 없어?’

축하 인사를 드려야 할 교수가 두 명 더 있다.

김지훈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그래그래. 외과 센터 곧 만든다. 잘해 보자. 우리 잘해 보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는 거야. 그게 외과 의사다. 그치? 내 말이 맞지?”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인사를 받은 이혁민 교수가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를 보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따스한 눈빛과 미소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고맙다. 송재덕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 모두 지난 일은 모두 잊고 잘해 보자. 오늘은 우리 일반 외과가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다. 김지훈, 신현수, 손일석. 안 그렇나?”

“그렇습니다.”

“그래. 앞으로는 웃자. 좋은 일만 있을 기다.”

사투리가 나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지만 가슴이 벅찬 모양이었다. 과장이 됐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는 누구든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야! 역시 과장님이다, 과장님. 새롭게 시작하는 날이라! 멋지네. 내가 먼저 그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아깝다, 아까워. 에이! 현수야, 원장님과 회진 돌아라. 회진. 구 교수, 임 교수, 우리는 시간도 많은데 모닝커피나 한잔할까? 내일부터는 시간 정해서 올라오자구. 좋지? 안 좋아?”

“아닙니다, 선생님. 들어가시죠.”

각 파트 회진이 시작됐다. 한꺼번에 올라왔지만 금경태가 과장이었을 때와는 달리 누구도 불편해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순리대로 따라가면 마음이 편한 법이다.

회진을 마친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를 힐끗힐끗 보았다.

“왜?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선생님.”

김지훈의 생각을 왜 모를까?

“녀석! 이게 가장 좋아. 우리 과는 몰라도 다른 과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야. 도리어 분란만 일으킬 수 있어. 너도 그런 경우가 생기면 넓게 봐야 한다.”

추측이 맞았다. 병원 전체를 생각해 보면 10년의 공백 아닌 공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점을 무시하고 과장으로 임명하면 당연히 반발이나 뒷말이 나올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 이준영 교수는 스스로 스승인 허경발 원장의 짐을 덜어 준 것이다. 그것이 순리이자 제자의 도리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김지훈이 밝게 웃었다.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편안했기 때문이다.

평생 잊지 않고 실천해야 할 것을 또 하나 배웠다.

***

바닥으로 향했던 화살표가 하늘을 향해 뚝 꺾이자 분위기가 돌변했다. 특히 이론을 수술만큼 중시 여기는 이혁민 교수가 과장이 된 여파는 무시무시했다. 모든 일과가 더욱 빡빡해지며, 일상이 치열해졌다.

치프들도 헉헉거릴 지경이었다. 일과가 늦게 끝날 때마다 비명이 터졌다.

“으아! 내일까지 논문 초안 가져오라고 하셨는데 죽었다. 지훈아, 나 오늘 오픈데 어떻게 하지? 사랑이냐, 죽음이냐 그게 문제네. 어후! 일단 살고 보자. 그래야 사랑도 하지.”

“도진아, 내일 케이스 발표 준비했어? 뭐? 아직도 못했어? 너 누구 죽일 일 있어, 인마. 아침까지 깔끔하게 못해 놓으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아서 해.”

“지훈아, 송재덕 선생님이 모레 예정된 환자 발표 같이 준비하래. 6센티미터 상방 직장암 환자 스테이플러다.”

그 와중에 김지훈은 머릿속을 자꾸 맴도는 생각에 정신이 더욱 없었다.

결국 고경아가 야간 당직인 틈을 타 수술 방으로 내려갔다. 눈이 뻘게진 채 고경아와 라파로 기구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수술 기구 종류가 생각보다 훨씬 많네. 우리가 사용하는 건 절반 조금 넘는 것 같네. 그렇죠?”

“네. 이러다 뜯지도 못하고 버리는 기구가 나올 것 같아요. 비싼 기군데 사용도 안 하고 정말 아깝죠?”

고개를 끄덕인 김지훈이 기구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포장 뒤에 적힌 사용 방법들까지 확인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언제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세상일을 누가 알까?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가고, 어느새 1월도 다 지났다.

그동안 논문 초안을 제출할 때마다 깨졌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빨간 펜을 휘두르는 이혁민 과장은 가히 저승사자였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수술실에서는 교수들의 눈빛이 다시 퍼렇게 번쩍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인원이 모자란데 정말 어깨에 힘이 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는 법이다. 인턴들이 순환 근무가 끝나면서 예년보다 일찍 픽스턴이 왔다. 미안한 말이지만, 픽스턴의 숫자만큼 노동력이 느는 것이다.

드디어 긴장된 얼굴로 인턴들이 의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만세! 이혁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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