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추락 (1)
신동석 이사장과 윤재철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손에 들린 한 장의 서류가 파르르 떨렸다.
“사돈, 방법이 없겠습니까?”
절박한 목소리다.
윤재철이 한숨만 쉬었다.
오판이었다.
진평호는 이미 오래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해 온 것이 분명했다. 신호선의 상세가 악화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무자비한 칼날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재단 및 병원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
보건복지부의 병원 실사.
내과 센터를 포함한 신규 병원 시설의 인허가 보류.
때 아닌 몇몇 환자들의 소송까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는 것처럼 병원이나 재단도 마찬가지였다. 잘잘못을 떠나 모호한 법이 그렇고, 냉정한 현실이 또한 그랬다. 병원의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상당한 타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윤재철의 재단 경영 참여가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오전에 받은 한 통의 전화와 공문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만기가 돌아온 채무에 대한 일제 상환 요구.
표면적으로는 병원 확장으로 인해 불안정해진 재무 구조가 이유였다.
대출 결정권을 쥔 은행의 고위 관계자들은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누구도 진평호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진짜 이유라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모든 사안이 다 돈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돈줄이 마르는 것이다.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결정타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일단 돈줄이 막히면 평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액수로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금 흐름이 좋다는 병원이지만 취약한 재무 구조는 일순간의 일이라고 해도 치명적이었다.
물론 한 방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전기가 없는 한,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극심한 피로를 느낀 신동석이 눈가를 꾹꾹 눌렀다.
‘병원을 키운다고 너무 욕심을 냈어. 아버님이 건재하시면 해결이 될까?’
고민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윤재철 역시 답답한 소리를 내뱉었다. 이미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돈, 진평호가 원하는 것은 병원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어요. 여기서 밀리면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공중분해될 수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대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답답합니다. 병원을 지킬 수만 있다면 재단 이사장 자리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아니, 병원에서 완전히 손을 떼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도움을 줄 사람은 없습니다.”
신동석 이사장의 의지가 꺾이고 있었다.
“사돈, 병원은 아버님과 저의 꿈이자 희망입니다. 하기에 모든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어요. 재산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다. 상속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그 돈이 제대로 쓰이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만일 아버님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불행하게도 맞는 말이었다.
만일 이 상황에서 신호선에게까지 문제가 생긴다면 몇 달이 아니라 단 몇 주도 버티지 못할 수 있었다. 상속을 포기한다고 해도 신동석 이사장과 재단의 채무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심리적인 타격까지 겹쳐 진평호에게 더욱 좋은 기회를 줄 수도 있었다.
윤재철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돈어른, 사돈어른이 회복되셔야 하는데.”
미봉책이라고 해도 당장의 위기를 면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신호선이 회복돼 건재함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당분간 상속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그동안 신호선이 쌓은 인맥의 도움을 받을지도 몰랐다.
벼랑 끝에 몰렸다고 해도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발은 떨어진 상태였다.
신동석 이사장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모든 재산과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재단과 병원을 지킬 수 있는 방법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이사들은 재력이 따라오지 못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절박하기만 했다.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신현수였다.
(아버지, 할아버님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신동석 이사장이 채 뒷말도 듣지 않고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윤재철이 다급하게 뒤를 쫓았다.
***
똑!
한 방울의 피가 떨어졌다.
급격하게 출혈이 감소하고 있었다.
이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대처해야 할 시점이었다. 확실하게 치료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출혈이 악화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던 김지훈이 즉각 새로운 오더를 내렸다. 출혈이 멈출 때를 대비해 충분히 고민했기에 망설일 이유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도진아, 혈소판 농축액하고 신선 혈장 남은 거 모조리 수혈하자. 여섯 파인트 남았으니까 수량 확인해. 박순용 선생님, 비지에이 하세요. 간호사, 혈액 검사 나갑시다.”
노란색의 반투명한 혈액 제제 여섯 파인트가 순식간에 신호선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검사 결과를 받아 든 김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혈소판 수치가 증가했다. 헤모글로빈 수치는 더 이상 감소하지 않았다. 혈액의 산염기 평형도 잡히기 시작했다. 한동안 떨어질 줄 모르던 간 효수 수치 역시 감소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변화였다.
지금 가장 적절한 치료는 무엇일까?
지켜보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신호선의 몸에는 무엇보다도 부족한 것이 있다. 이제는 반대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다.
“현수야, 헤모글로빈 수치를 올려야 할 것 같은데 어때?”
“응고인자 소모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가장 우려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호선의 얼굴을 보는 순간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틱한 변화가 이를 암시하고 있었다.
“가능성이 있지만 지금이 터닝 포인트 같아. 부족한 것들을 채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 상황에서는 빈혈이 더 문제 될 소지가 크다는 생각이 들어.”
신현수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환자가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 앞에서는 냉철함도 소용이 없었다.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은 아니지만 망설이다 보면 최적의 시점을 놓칠 수 있었다.
지금은 과감하게 치료해야 할 때였다.
경험이 이를 알려 주고 있었다.
“간호사, 적혈구 농축액 답시다.”
직접 투여 속도를 조절했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신호선의 얼굴에 서서히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눈을 감은 채 힘없이 누워만 있던 신호선이 눈까지 떴다.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신현수를 바로 알아보았다. 차디찬 손에 뜨거운 온기가 전해졌다.
“할아버지!”
신현수의 목소리가 격했다. 보는 사람마저 뭉클할 정도였지만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적혈구 보충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다시 드레인을 살폈다.
똑!
한 방울의 피가 떨어졌다. 배 속에서 흘러나오던 피가 드레인을 따라 맺혀 있었다.
분명 출혈이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니었다. 또 한 방울의 피가 언제 떨어지는지 확인해야 했다.
어느 틈엔가 달려온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도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동안 조치한 치료를 확인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적절하게 대처했다는 의미였다.
시간이 제법 지났다. 피는 떨어지지 않았다.
완전히 멈춘 것일까?
김지훈이 입술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 지금 불편하신 데는 없으세요?”
기력이 너무 쇠해져 말을 하는 것조차 무리인 모양이었다. 대답을 하려던 신호선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멈추지 않는 기침에 얼굴이 시뻘게졌다. 가슴과 배에 힘이 들어가며 배 속을 압박했다.
그 순간 드레인에서 피가 주르륵 쏟아졌다. 10여 장의 거즈가 순식간에 젖었다.
깜짝 놀란 김지훈이 급히 거즈를 확인했다.
검붉은 색이었지만 혈액 특유의 끈적거림을 잃어 마치 색소를 탄 물처럼 보였다. 예전에 흘러나와 배 속 어디엔가 숨어 있던 피가 분명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터트렸다. 중환자실 인턴만이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김지훈, 바로 초음파 하자.”
즉시 방사선과에 연락을 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초음파를 시행했다.
간 주변을 비롯해 배 속 전체를 샅샅이 검사했다. 더 이상 고인 피는 없었다. 수술 부위도 이전보다 훨씬 깨끗하게 보였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장기를 확인하고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간호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바이탈은 안정적이었고, 신호선의 의식은 깨끗했다.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시 잠에 빠져드는 신호선을 보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너무도 돌연한 변화에 도리어 불안할 지경이었다.
‘터닝 포인트가 확실해. 확신을 갖자.’
째깍! 째깍!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갈 줄은 몰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김지훈과 눈을 마주친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드레인을 감싼 거즈를 풀었다.
막 드레인과 거즈를 확인하려는 순간, 신동석 이사장과 윤재철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전에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현수야, 이 교수님, 무슨 일입니까?”
다급한 목소리였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초음파가 끝난 후 들뜬 마음에 전화를 한 신현수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힐끗 신현수를 본 이준영 교수가 침착하게 대답을 했다.
“이사장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거즈는 깨끗했다. 김지훈이 숨을 몰아쉬며 드레인 속에 맺혀 있는 피를 깨끗하게 닦아 냈다.
그리고 모두들 조용히 지켜보았다. 또다시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단 한 방울의 피도 떨어지지 않았다. 드레인에 피가 맺히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렇게도 바라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준영 교수가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사장님, 멈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신동석 이사장이 주저앉듯 털썩 의자에 앉았다.
신호선을 보며 입만 벙긋거렸다. 이제야 신호선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본 것이다.
‘아버님! 아버님! 드디어 회복되시는 겁니까?’
피붙이들의 마음을 느낀 모양이었다. 잠에 빠졌던 신호선이 눈을 뜨며 손을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분명히 아들과 손자를 향하고 있었다.
“아버님!”
“할아버지!”
애틋한 정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렇게도 의연하게 대처했단 신동석 이사장이 눈물까지 보였다. 아버지의 손에서 온기를 느낀 것이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돌아서고 말았다. 가슴이 벅차다 못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버지라는 소리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준영 교수가 어깨를 툭 쳤다.
“김지훈, 수고했다. 조금만 더 고생하자.”
신기동 교수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며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신현수와 신동석 이사장의 고맙다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신호선은 마침내 고비를 넘어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아직은 마음을 놓을 단계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한다면 다시 나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족의 슬픔과 아픔을 보았기에 반드시 그래야 했다.
뒤늦게 달려온 손일석이 힘차게 주먹을 흔들었다. 신동석 이사장과 윤재철의 눈 속에 희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
그 시간, 조 검사의 지휘 아래 진평호와 주요 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 수색이 시작됐다. 허울뿐이었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작정하고 수사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서정호도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감님, 꼭 금경태 과장을 직접 보셔야 합니까? 차라리 조무래기들이 더 낫지 않겠어요? 그리고 뭐라도 있으면 집에 숨겼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그놈이 그놈이지, 뭐. 다들 베테랑인데 내가 없다고 문제 되겠어? 솔직히 이제 와서 더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진상미가 진료나 받으러 왔으면 좋겠네.”
짜증이 팍팍 실린 목소리였다.
진척은 없는데 은근한 압력과 방해가 점점 강해져 답답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진평호와 자주 접촉했다는 이유로 금경태 과장의 집과 교수실에 대한 압수 수색을 신청했지만 막상 기대할 것은 없었다.
‘이 시점에서 감을 믿고 수사를 해야 하나? 에이! 차라리 무당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다. 제길!’
서정호가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창밖만 보았다.
무당이 생각날 정도로 감에 의존하다니, 검사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 검사와 진평호를 생각하자 더욱 울화통이 치밀었다. 반드시 잡아 처넣어야 할 놈들인데, 결정적인 물증이 없어 보고만 있자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느새 병원에 거의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조 검사 팀에 속한 형사였다. 아무리 형식적이라고 해도 압수 수색이 벌써 끝났을 리는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서정호가 통화를 하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크게 말해. 잘 안 들려. 인마! 뭐라고? 하나도 안 들리니까 이따 다시 걸어.”
그러고는 전화를 툭 끊었다. 아예 전원까지 꺼 버렸다.
강 형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도 목소리가 들릴 정돈데, 뭐가 안 들린다고 소리까지 지르고 그러세요?”
“이 새끼들 봐라. 강 형사, 일단 밟아. 금경태 압수 수색 하지 말라는 지휘가 떨어졌다네. 이거 분명 뭔가 있어. 우린 못 들은 거다. 어차피 영장은 나왔고, 구두로는 취소 못하니까 일단 뒤지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검은 자동차가 거리를 질주했다.
얼마 후 금경태 과장의 집에 일단의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동시에 서정호도 교수실 앞에 도착했다.
잠시 후 병원 직원에게 연락을 받고 허겁지겁 달려온 금경태 과장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북부지검 서정호 검사입니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진평호 회장 아시죠? 그에 관련된 사안으로 교수님 집과 교수실에 대한 압수 수색을 실시하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수색이 끝날 때까지 협조 부탁드립니다.”
눈앞에서 수색 영장이 팔랑이고 있었다. 금경태 과장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시간, 외래 탁자에 덩그러니 놓인 휴대폰이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진평호의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