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운명의 갈림길 (1)
표정만 봐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환자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걱정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간에서 나는 피가 분명해. 간 기능이 뚝 떨어진 상황에서 저 정도 속도로 출혈이 지속되면 방법이 없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끝이야. 만일 재수술을 하면 시간만 앞당기는 꼴이 될 텐데, 이준영이 어떤 판단을 내릴까? 신동석에게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까?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느니 차라리 극단적인 경고를 하고 재수술을 하는 게 나을 거야.’
금경태 과장이 신호선과 진평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 독해져야 돼. 지난날의 인정 따위에 흔들려서는 안 돼. 집도의도 아닌 내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없어. 그보다 진평호가 약속을 지키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해.’
인생이 달린 일이었다. 진평호의 약점을 잡았다지만, 그것은 곧 자신의 약점이자 죄악이기도 했다. 만에 하나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 순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질 것이다.
불현듯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녹음기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두려움이었다.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일까?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장소에 보관해야 한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아야 한다.
금경태 과장의 눈에 그런 곳이 보였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금경태 과장이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의 교수실로 향했다.
그 시간, 이준영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중환자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신현수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김지훈은 차트를 보며 뭔가를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수혈하는 양에 신경을 쓰라는 말이 뭐지? 말 그대로 해석해야 하나? 그렇다면 대량 수혈에 따른 문제를 지적한 건데. 제길! 이왕 알려 주려면 확실하게 알려 주든지.’
“지훈아, 이준영 선생님 오셨어.”
신현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재빨리 그동안 드레싱을 하며 모아 놓은 거즈를 보였다. 혈액 검사 결과까지 보고를 하자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똑같은 표정인데 금경태 과장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드레싱 다시 하자.”
거즈를 갈았다.
불과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여러 장의 거즈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신기동 교수도 심각한 표정으로 드레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때마침 내려온 서도진에게 킵을 맡기고 모두 스테이션에 모였다.
이준영 교수가 신중하게 차트를 확인하며 말했다.
“김지훈, 원인이 뭐 같아?”
출혈을 확인한 순간부터 고민한 문제였다.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수술 부위의 혈관을 놓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출혈량으로 보면 혈관이 꽤 굵어야 하는데, 그런 혈관을 못 봤을 확률은 떨어집니다. 두 번째는 간 절단면에서 우징(Oozing)처럼 피가 새어 나오는 경우입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은?”
“두 번째 문제와 맞물리는 이유로 혈액 응고 기능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수술 중 과다한 출혈과 수혈이 모두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 교수는 어떻게 생각해?”
“저도 지훈이 생각에 동의합니다. 혈관을 놓쳤을 가능성은 생각하기 어렵고요. 제법 양이 많긴 해도 지금은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상황에서 재수술은 너무 위험합니다. 출혈을 잡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현재로는 그게 최선이긴 하지만, 이대로 지켜보는 것도 재수술 못지않게 위험해. 김지훈, 신현수, 우리가 빼먹은 치료는 없을까?”
신현수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할아버지의 생사가 걸린 문제인데 다른 치료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할 수 있는 치료는 이미 다 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지훈이 무엇인가를 또 고민하고 있었다. 눈가까지 찡그리는 모습에 눈길이 쏠렸다.
“김지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준영 교수의 물음에 김지훈이 더욱 신중해졌다.
금경태 과장의 말을 듣고 떠올린 생각이었다. 막연한 추측일 뿐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미약했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혹시 수혈 방식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단 출혈이 상당히 심했고, 수술 중에만 적혈구 농축액과 전혈(Whole Blood)을 2,000cc 이상 수혈한 상탭니다. 환자분의 체중과 연령을 생각해 볼 때, 너무 빠른 시간 내에 수혈이 이루어지면서 심각한 응고 장애가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한 말이었다. 게다가 대량 수혈에 따른 부작용은 익히 알고 있는 문제들이었다. 이는 신호선만이 아니라 대량 출혈이 발생한 환자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 별 문제 없이 회복된다. 이를 모를 김지훈이 아니었다. 다른 생각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신선 혈장과 혈소판 농축액만 투여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게 현 상태에서는 수혈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은 상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떨어지면 환자에게는 그 자체로 위험한 수준이었다.
더구나 지금도 출혈을 하고 있는 마당이다.
“더 위험해지지 않을까?”
“아직은 여유가 있고, 만일 빈혈이 심해진다는 징후가 보이면 그때 보충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목소리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김지훈에게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기 때문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상당히 과감한 제안이었지만, 한대현이 생각나면서 출혈에 대한 생각을 살짝 달리한 것이다. 솔직히 금경태 과장의 말도 신경이 쓰였다.
“선생님, 혹시 한대현을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이해할 수 없긴 하지만, 그때 일을 다시 생각해 보면 마지막 수혈 때는 거의 혈소판만 주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무리 혈액형이 같아도 일종의 거부반응인 응집 반응이 미세하게나마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엉뚱한 곳에서 응고인자들이 계속 소모될 겁니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성급한 판단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 그렇게 하자는 소리야?”
“아닙니다. 일단 최소한 하루 이상은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출혈량이 줄어든다면 제가 너무 성급하게 말한 꼴이 되지만, 일단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잠시 고민을 했다. 신기동 교수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일단 그 방법도 생각은 해 보자.”
“알겠습니다. 내과와 상의를 하고, 관련 문헌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 밤은 무조건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시 한 번 드레싱을 했다. 여전히 드레인을 따라 피가 뚝뚝 떨어졌다.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
이준영 교수가 신동석 이사장을 만났다. 결코 희망적인 말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환자 곁을 지키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턱을 매만졌다. 한 방울 한 방울 신호선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붉은 피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의사는 감으로 치료하면 안 돼. 내일 오전 수술밖에 없으니까 끝나는 대로 수혈 부작용에 대해 찾아봐야겠다. 그나저나 간 기능이 빨리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게 될까?’
혈액 응고인자의 대부분은 간에서 만든다. 이래저래 악조건이었다.
게다가 할 일이 태산처럼 밀렸다.
신현수에게 환자를 부탁한 김지훈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얼굴이 상당히 안 좋았지만 환자는 신호선만이 아니다. 병동 환자 회진을 돌고 오더를 냈다.
차트 하나를 펼치던 김지훈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문득 환자 한 명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우리 선생님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어요?”
“예? 아무 일도 없습니다.”
“쯧쯧! 얼굴이 말이 아닌데 일이 없긴. 의사도 사람인데 피곤할 때는 쉬어야죠. 그러다 몸 상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다들 선생님 좋다면서 철석처럼 믿는데.”
아픈 사람이 의사인 자신을 걱정했다.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신호선에게 신경을 쓰느라 소홀히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선택과 집중을 잊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환자의 말마따나 건강도 챙겨야 했다. 젊다고 체력을 마냥 과신할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저녁도 못 먹었다.
“도진아, 우리 빨리 밥 먹고 오늘 밤 킵은 셋이 돌아가면서 하자. 박순용 선생님은 12시까지만 서시고, 도진이 너는 새벽에 서. 아침 회진은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안 올라와도 돼.”
시간 배분도 중요했다. 신호선의 싸움은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집중하지 않으면 단기전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당연히 최악의 결과를 직면해야 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잠깐 눈을 붙인 후 중환자실로 향했다. 박순용과 나란히 앉아 있던 신현수가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피곤할 것이다.
슬며시 어깨를 흔들자 간신히 눈을 떴다.
“내가 있을 테니까 잠 좀 자고 와. 박순용 선생님, 선생님도 올라가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신현수가 고맙다는 듯 어깨를 툭 치고는 당직실로 향했다. 믿어 주는 모습이 고마웠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꼼꼼하게 신호선의 상태를 체크했다.
킵을 하는 내내 출혈을 통제할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답답하기만 했다. 이준영 교수에게 말한 방법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밤이 가고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신호선의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출혈에도 불과하고 나빠지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새로운 주를 시작해야 했다.
***
월요일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신호선이 다시 복부 CT를 찍었다. 전과 다름이 없는 소견에 한시름을 놓았지만 의외로 시간이 걸려 마음이 바빠졌다.
부랴부랴 내과와 상의를 하고, 관련 논문들까지 뒤졌다. 그 덕에 조금씩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대량 출혈과 수혈에 따른 문제점들을 새롭게 본 계기이기도 했다.
‘과도한 수혈이 응고 이상을 초래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으로 적혈구 농축액과 전혈 투여에 신중을 기해야 하네.’
뚝! 뚝! 뚝!
여전히 피가 떨어졌다. 속도는 증가하지 않았지만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신호선의 혈색은 창백했고, 체력적인 부담은 상당해 보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혈액 검사 결과를 확인한 김지훈이 신중하게 적혈구 농축액의 주입 속도를 조절했다. 느려서도 안 되지만 빨라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혈을 위해 필수적인 혈소판 농축액과 신선 혈장은 최대한 빨리 투여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힘내세요.’
물끄러미 신호선을 보던 김지훈이 확인해야 할 사항들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그때 이준영 교수와 또 한 명의 의사가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허경발 명예 교수였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며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김지훈 선생, 고생이 많네요. 그동안 별일 없었죠? 환자분은 어떠십니까?”
존댓말이 묘하게도 친근하게 들렸다. 담담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에서 노련한 의사이자 대가로서의 풍모가 물씬 풍겼다.
이준영 교수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옆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네. 정말 대단하시다. 귀담아들어야 할 조언도 해 주시겠지?’
은근한 희망을 품은 김지훈이 현 상태와 그간의 검사 결과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했다.
환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허경발 교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혈 방법을 달리하자고 했다면서요?”
어떤 의미일까?
김지훈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사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허경발 교수가 돌연 김지훈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김지훈 선생, 때론 길도 답도 없는 게 의학입니다. 한계에 부딪쳤을 때는 선배들의 경험과 자신의 의견을 종합해 치료를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 될 수도 있어요. 조언도 구하고, 논문도 찾아봤다면 어느 정도는 확신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시도해도 좋은 방법이라는 의미였다.
순간 가슴이 벅차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이준영 교수도 조용히 김지훈을 보며 입가를 살짝 움직였다.
“김지훈, 내일 아침까지 지켜보고 변화가 없으면 네 말대로 해 보자. 선생님, 환자분도 주무시는 상태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사장님과 자리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김지훈 선생, 자만이 아니라면 자신을 믿어도 됩니다. 확신을 가지세요. 자신을 못 믿으면 환자도 의사를 믿어 주지 않겠죠. 수고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김지훈이 훅! 숨을 내뱉으며 허리를 굽혔다.
구체적인 치료 방법을 알려 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김지훈의 의견을 듣고 동감을 표했다. 평생 동안 간담도에 몸을 바친 대가의 의견이었다.
돌연 마음이 든든해지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주먹을 꾹 쥐고는 힘차게 흔든 김지훈이 눈가에 힘까지 주었다.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한 후, 일과를 마치고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왔다.
어느새 8시가 넘었다.
그때 신동석 이사장이 들어왔다. 면회 시간이 아닌 데다 이런 적도 없었다.
“김지훈 선생, 아버님은 어떠셔?”
“큰 변동은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신동석 이사장의 얼굴이 어두웠다. 환자에 대한 걱정이라기보다는 못마땅한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난처해 보이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특별 면회를 했으면 해. 재단 이사들이 아버님을 보고 싶어 하시네. 이 교수님에게 연락을 취해 주면 좋겠어.”
그동안 자신의 지위를 한 번도 내세운 적이 없는 신동석 이사장이었다. 그만큼 의사들을 존중했고, 그래서 난처한 표정을 짓는지도 몰랐다.
난처하기는 김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환자의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좋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곳이 원칙대로만 움직이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준영 교수에게 연락했다. 마지못해 허락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연락을 드렸는데 환자분 상태 때문에 10분 이내로 끝내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죄송합니다.”
“알겠네.”
곧 재단 이사들이 들어왔다.
별생각 없이 한쪽에 서 있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보였다. 2년 전 수술 방에서 단 한 번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금경태 과장과의 충돌 때문에 얼굴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순서 때문에 이식을 받지 못한 사람.
진상미의 고통과 눈물을 외면한 사람.
서정호가 이를 갈고 있는 사람.
바로 진평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