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기회와 위기 (2)
평소에도 가뜩이나 분위기가 안 좋은 상황이다. 서도진과 박순용도 회진을 돌 때마다 표정이 나빠지기 일쑤였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반드시 해야 했다.
한참 동안 CT를 보던 금경태 과장이 팔짱을 끼었다.
‘출혈 범위가 좌측 간을 20퍼센트 정도 먹었다니, 생각보다 심각하군. 회복될 확률이 절반이나 될까? 이 정도는 이준영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테니까 이미 경고를 했겠지? 신동석이 꽤 불안해하겠어.’
얼굴 표정을 보니 뭔가 결론이 난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과장님, 어제는 경황 중이라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긁어 부스럼이었을까? 표정만 더 나빠지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멈출 거면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과장님, 혹시 저희가 낸 오더에 빠진 것은 없습니까? 경험이 없어서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제야 금경태 과장이 고개를 돌렸다.
‘경험? 지금까지 나도 세 번밖에 못 본 환자를 네놈이 어떻게 경험을 해? 이준영 그놈도 음성에서 십 년이나 썩었으니, 수련 때 본 것 말고는 없겠지.’
조언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다. 약간의 티만 내도 득이 되면 됐지, 손해가 날 일이 아니었다.
그간 과장으로서 소홀히 했던 상황을 만회하기로 마음먹은 마당이기도 했다. 최소한 관심을 보이는 척은 해야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다.
“빠진 건 없어. 앞으로가 중요해. 상당히 위험하지만 네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어. 혈액 검사에 현혹되지 말고 열심히 봐. 결과가 좋으면 네게도 도움이 될 거야.”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치료에 관한 특별한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평소처럼 날이 선 말도 아니었다. 도리어 말투로만 봐서는 김지훈을 격려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금경태 과장이 다시 한 번 환자를 보고는 회진을 끝냈다. 시간이 촉박해 수술 방으로 달려가던 김지훈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순한 말 한마디였지만 도통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설마 뭔가 달라지는 것일까?
외래로 들어서던 금경태 과장이 눈가를 좁혔다.
신호선의 입원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다.
적극적으로 치료를 도와준다면 득이 될까? 혹은 당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발판이 될까?
하나하나 되짚었다.
무조건 50억을 찾을 수 있어야 했다.
진평호와의 싸움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병원 내 입지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대가라는 명예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은 물론, 덤으로 꼴 보기 싫은 놈들까지 모조리 내쫓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얻으려면 진평호를 이길 수 있어야 하는데, 신동석이 그럴 수 있을까? 윤재철이 있다고 해도 은퇴한 이상 결코 쉽지 않아. 아니지. 그 전에 무엇보다도 신동석이 날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최근 자신을 경원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쩌면 백제 병원 일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신호선이 병원에 왔을 때 자신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신뢰는 티끌만치도 없었다.
그렇다고 경험 말고는 신호선을 치료할 확실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도리어 책임만 떠안을 수 있었다.
‘간 내 출혈 환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경험해 보지 못했으면 절대 알 수 없지. 교과서와는 전혀 달라.’
결론이 났다. 신동석 이사장과 관계를 유지해야 득이 될 일은 없었다. 만약 신호선이 회복된다면 설령 자신이 관여했다고 한들 공은 이준영 교수에게 돌아갈 것이다. 말 그대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챙기는 꼴이었다.
그렇다면 진평호는?
한동안 고민에 잠겼던 금경태 과장이 입가를 말았다.
‘평소 각별했으니까 신호선에게 문제가 생기면 신동석이 꽤 큰 타격을 받을 거야. 만일 회복된다고 해도 시간이 상당히 걸릴 테니까, 어느 쪽이든 진평호에게는 유리한 상황이 되겠지? 그래. 이건 나와 진평호를 위한 기회야.’
전화기를 드는 금경태 과장의 눈가에 즐거운 주름이 잡혔다. 상황을 전해 들은 진평호의 말에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 이거 생각보다 기회가 훨씬 빨리 올지도 모르겠군. 금 과장, 변동 사항이 생기면 바로 연락해. 내 자네와 끈을 연결한 덕을 톡톡히 볼 수도 있겠어. 수고했어. 이렇게만 해.)
“감사합니다, 회장님.”
진평호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 순간에도 머리가 팽팽 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나저나 신호선 이사장도 누릴 것 다 누리고 살 만큼 살았는데, 내게 도움이나 주고 떠났으면 좋겠군. 자네가 잘만 해 주면 그것도 큰 투자의 일종 아니겠어?)
“회복될 확률이 높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생기는 즉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신호선의 정확한 상태는 자신이 아니면 진평호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 무엇을 잘해야 한다는 소릴까? 마지막 말이 묘하긴 했지만, 어쨌든 진평호가 다른 마음을 먹을 위험은 줄어들었다.
전화를 끊으려던 진평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진상미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병원에 다시 입원하면 눈여겨봐. 이상한 눈치라도 보이면 즉시 연락해.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지 검사랍시고 별것도 아닌 것들이 귀찮게 하네. 손은 써 놨지만 이럴 땐 돌다리도 두들겨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먹이고 입혀 봐야 핏줄도 다 소용없어.)
진평호의 입에서 검사라는 말이 나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조사를 받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에 무너질 진평호였으면 벌써 무너졌을 것이다.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쨌든 진상미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구린 구석까지 말했다는 것은 자신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역시 진평호를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선 덕분에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지는군. 죽든 살든 내게 나쁠 일은 없겠어. 솔직히 85년을 살았으면 살 만큼 살았잖아.’
금경태 과장이 간만에 즐거운 기분으로 외래를 보았다. 물론 약간은 찜찜했고, 그 덕에 표정 관리는 철저히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손안에 쥘 수 있는 이득이 중요하다지만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
신호선이 입원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복부 CT를 비롯해 모든 검사를 다시 시행했다. 다행히 별다른 변동은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물론 신현수도 다소 안심을 하는 눈치였지만 김지훈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혈액 검사를 믿지 말라고?’
헤모글로빈 수치가 약간 떨어져 있었다. 의미 있는 수치도 아니었고, 계속 수액을 투여하다 보면 혈액이 묽어져 그런 결과를 보일 수도 있긴 했다.
그러나 금경태 과장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일단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기는지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었다.
“선생님, 앞으로 혈액 검사를 하루 두 차례 시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양이 적더라도 만일 출혈이 지속되고 있다면 하루 한 번으로는 늦게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그리고 오후에 교수님들과 상의를 하기로 했으니까, 연락 받으면 바로 차트하고 검사 결과 가지고 의국으로 와.”
김지훈이 대놓고 티를 내진 못했지만 반색을 했다.
기대했던 일이었다. 어떤 치료를 해야 할지, 수술은 또 어떤 방법으로 접근할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것은 곧 신호선 환자에게 큰 득이 될 것이다.
마침 금경태 과장의 수술도 없었다.
환자 곁을 지키며 투여되는 수액과 혈액량 및 소변량을 면밀히 체크했다. 적절하게 들어가고 나와야 혈액 점도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그래야 검사도 정확하게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부산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던 김지훈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왠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신호선이 조용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계속 쳐다보셨던 모양이네. 얼굴이 편안해 보여서 정말 다행이야.’
“할아버님, 배는 어떠세요?”
“이젠 많이 좋아졌어. 그런데 김지훈 선생은 우리 현수하고 친한가?”
이젠 말도 상당히 또렷하게 했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럼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현수에게 배우는 것도 많아서 항상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허허! 현수도 김지훈 선생을 단단히 믿고 있어. 앞으로도 둘이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 서로 최선을 다해 경쟁도 하고 말이야. 그래야 환자에게도 좋겠지.”
경쟁이라는 말에 김지훈이 살짝 놀랐다. 신현수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아픈 와중에도 분명 즐거움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좋은 일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허허!”
중환자실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상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신호선이 또 웃었다. 단순히 나이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에 합당한 연륜과 여유일 것이다.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이렇게 회복되시고 수술만 잘되면 걱정할 일이 없으실 겁니다.’
남은 삶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암을 제거한다면 최소한 고통스러운 삶은 면할 것이다.
문득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까지도 말이다.
오후 늦게 신호선 환자에 대한 임시 집담회가 시작됐다. 웬일인지 금경태 과장을 비롯해 시간이 되는 교수들이 모두 자리를 했다. 그 덕에 의국 대신 보다 넓은 회의실로 옮겨야 했다.
김지훈이 쓴웃음을 지었다.
‘환자분이 초대 이사장님이 아니었다면 다 모였을까? 평소에도 이러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 입을 통해서든 이 자리에 참석한 의사들의 이름이 신동석 이사장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시쳇말로 점수를 딸 좋은 기회인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인심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게 처세 중 하나인 것은 분명했고, 어쨌든 머리가 많아질수록 좋은 의견도 많이 나올 테니 말이다.
이준영 교수도 비슷한 마음인지 눈가가 어두워 보였다.
“김지훈, 환자 발표해.”
말투는 더욱 무뚝뚝해진 것 같았다.
내원 시부터 현재 상황까지 자세하게 발표를 했다.
다들 입맛만 다시며 입을 열지 못했다. 세부 전공이 간담도도 아닌 데다, 지금은 신호선의 상태가 좋다지만 예후가 불량하다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힐끗 금경태 과장을 보며 말했다.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수련할 때 한 번 본 것이 다이기에 이런 환자에게 특별히 유의할 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참조할 만한 의견들 있으십니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빤한 일이었다. 앙숙을 넘어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는 의사에게 하기 쉬운 말이 아니었다. 억지로 자존심을 꺾었거나,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역시 스승님이시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자존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으시네.’
그런 점을 아는지 모르는지, 금경태 과장이 입술을 쭉 내밀고는 팔짱을 끼며 쓰윽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유의 거만한 자세였다.
그 모습을 본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아침에 말하는 걸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변한 게 없네. 에휴! 도대체 스승님을 왜 저렇게 견제만 할까? 함께 노력하고 발전하면 얼마나 좋아.’
“수련 때를 포함해 세 케이스 정도 봤는데, 환자마다 차이가 커 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이차 출혈을 막는 것이 급선무고, 암의 위치를 보니 수술할 때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겠습니다. 사망률이 매우 높은 경우로 보입니다. 따라서 수술 경험이 풍부하지 않으면 결과가 좋지 않을 겁니다. 이미 집도의는 정해졌지만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예요.”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리어 은연중 이준영 교수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차라리 욕을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김지훈도 발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경태 과장의 말대로 수술의 위험도와 난이도를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의 발로였다.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나쁘진 않겠죠. 하지만 말씀대로 위치가 좋지 않기 때문에 신기동 교수의 의견을 구하고자 합니다.”
미리 말이 오간 듯 신기동 교수가 바로 말을 이었다.
“간 속에 묻힌 혈관도 다른 장기 내의 혈관과 다름이 없습니다. 해부학적 구조만 정확하게 파악하면 위험은 충분히 회피할 수 있습니다.”
“신 교수, 간담도는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아. 혈관도 혈관 나름이지. 게다가 간암 수술을 몇 차례 했다고 해도 이런 경우에는 경험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어. 사망률이 괜히 높은 줄 알아?”
싸잡아 무시를 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교수님들, 신 교수 말이 맞아요. 아무리 위험해도 구조만 정확히 알면 괜찮습니다. 다들 아시잖아요. 그리고 수술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이준영 교수예요, 이준영 교수. 신 교수까지 함께하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한 건이나 세 건이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이 교수, 내 말이 맞지? 그치?”
송재덕 교수가 직격탄을 날렸다.
이혁민 교수가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금경태 과장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만 저었다.
“하여튼 당장 직면한 문제는 재출혈을 막는 거니까, 지훈이 니가 잘 봐야겠다. 치프야, 지훈아, 현수하고 나쁜 놈하고 열심히 봐야 한다. 간이라고 겁먹을 거 없어. 하던 대로만 하면 돼. 하던 대로. 그러면 다 좋아질 테고, 수술까지 쭉 하면 된다. 암! 그렇지. 지훈아, 그치? 내 말이 맞지?”
분위기가 묘해졌다. 한동안 여러 말들이 오고 갔지만 원론적인 수준이었다. 이준영 교수나 금경태 과장이 아닌 한 함부로 의견을 개진하기도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어쨌든 김지훈에게는 이것만으로도 귀중한 시간이었다.
***
그날 밤, 얼굴이 시뻘게진 서정호가 서류철을 냅다 집어 던졌다.
와장창창!
휙 날아오른 꽃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영감님, 고정하세요.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내가 이… 이 개새끼들을 가만두면 사람이 아니다. 강 형사, 나 말리지 마. 그 새끼들에게 대가리 디밀어 보고, 안 먹히면 나 오늘부로 옷 벗는다. 씨발! 대한민국 검사라는 것들이 저래도 되는 거야?”
고래고래 악을 쓰는 서정호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