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500화 (500/1,329)

제5화 위기와 기회 (1)

그간 신동석을 보며 누군가 조력자가 있다는 생각은 했다. 부지 확보부터 내과 센터 개설까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여기저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말이다.

더구나 비록 금경태 과장을 상대로 하는 일이지만 백제 병원을 다루는 솜씨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모사꾼이 하나 있을 줄은 알았는데, 그게 윤재철이었어?’

조력자의 정체가 과거 자신도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사업가 윤재철일 줄은 미처 몰랐다.

권력에 빌붙었으면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충돌한 적은 없었지만, 위암 말기로 수술한 후 은퇴한다는 소리에 마음을 놓았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능력과 수완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윤재철이 왜 신동석을 돕는 것일까?

“이유가 뭐야? 윤재철과 신동석이 예전부터 그렇게 가까운 사이였어?”

“자식들이 모두 저희 병원에서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 서로 안면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윤재철이 저희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 신동석이 병문안을 온 일은 있었습니다만, 그때도 단순한 친분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묘한 일이었다.

신현수와 윤서연의 관계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물론 단순한 연인 정도로 알고 있어, 이미 양가 허락하에 결혼까지 약속했다는 사실까지는 아는 사람이 없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예전의 금경태였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상황을 유추해 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먼저 파악했어야 할 사람을 눈앞에 두고 눈과 귀가 모두 막힌 것이다. 신동석 이사장이 개인적인 일은 절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백제 병원과 돈에 온 신경을 쏟은 탓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사람 보는 눈도 문제였다. 투병으로 심신이 허약해진 데다 은퇴까지 한 윤재철이었기에 관심조차 두지 않은 것이다. 어차피 관계를 맺어 봐야 골치만 아플 뿐, 득이 될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진평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윤재철이라. 백제 병원 문제에 개입했다면 신동석과 밀접한 관계라는 말이고, 결국 병원 일에도 관여를 한단 소린데 골치 아프게 됐군. 윤재철이 동원할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까? 내 앞을 가로막을 수 있을 정도일까?’

상황에 따라서는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만약 가진 재산 전체를 병원에 투자한다면 이쯤에서 손을 떼는 것이 유리했다. 수완과 능력을 겸비한 재력가는 이긴다고 해도 꽤나 큰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평호가 주말을 맞아 간만에 퇴근한 비서를 불러들였다. 비서가 도착할 때까지 진평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에게만 집중했다.

‘윤재철이라고 해도 총알이 부족하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아. 어차피 이건 돈 싸움이야.’

곧 머리 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바른 비서가 도착했다.

“김 비서, 윤재철에 대해서 알아봐. 특히 신동석과 어떤 관계인지 확실하게 파악해.”

“윤재철 회장 말씀이십니까? 그 사람이라면 은퇴할 당시까지의 자료를 이미 갖고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어떻게 알고 그런 자료를 준비한 거야? 자네, 혹시?”

진평호 특유의 의심이다.

“개인적인 친분은 절대 없습니다. 예전에 회장님께서 윤재철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몰라 준비했을 뿐입니다. 비서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모처럼 진평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비서라면 이 정도 능력을 갖춰야지. 확실히 진상미, 그것하고는 비교가 안 돼. 돈에 미친 놈이라 도리어 비밀을 지키기도 수월하고 말이야. 이번 건으로 몇 푼 또 집어 줘야겠군.’

몇 장의 서류를 받아 든 진평호가 꼼꼼하게 읽어 내려갔다. 금경태 과장과 정한득이 초조한 표정으로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축였다.

마지막 장을 넘긴 진평호가 눈빛을 굳혔다.

“최소 4백억에서 최대 7백억이라. 남은 재산이 이게 다라면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확실한 거야?”

“위암 수술 후 기부 등을 비롯해 여기저기 사용한 곳이 많습니다. 그리고 자료의 출처가 송용조 은행장이기 때문에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송용조?”

“윤재철도 회장님께서 주로 거래하시는 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동안 송용조 은행장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오셨는데, 믿을 만한 자료지 않겠습니까?”

진평호가 의자에 몸을 묻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동안 관리를 해 온 보람이 있구만.”

“예. 사실 주거래 은행이 같은 덕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회장님의 혜안이 빛을 발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빤히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다. 슬며시 입가를 만 진평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동석에게 그중 얼마나 흘러갔는지가 관건이겠군. 사오백억 정도면 우리 일에 차질을 주긴 힘들지만 말이야. 그래도 조심해야 할 놈이야. 정 국장, 김 비서, 작업 들어갈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연락해.”

“오늘 당장 말입니까?”

“그래. 언제든 내 신호가 떨어지면 즉시 계획대로 실행하라고 해. 신동석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한 방에 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윤재철이 있는 이상 곤란해질 수도 있어.”

정한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 그럼 언제쯤 실행하실 겁니까?”

“지금 당장은 아냐. 하지만 기회는 분명히 오게 돼 있어. 자네들 눈에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성공하려면 그런 기회가 왔을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밀어붙여야 돼. 머뭇거리거나 동정심 따위에 휘둘리는 순간 상대가 아니라 내가 죽는 거야.”

진평호가 마치 먹이를 앞둔 맹수처럼 눈을 번쩍였다.

금경태 과장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회장님,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금 과장, 자네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지금처럼 병원 내 동정과 신동석에 대한 정보만 확보하면 돼. 이런 정보를 놓치지만 않으면 백제 병원이 문제겠어?”

“회장님만 믿겠습니다.”

“난 매일매일을 전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야. 적은 어떻게든 깔아뭉개 다신 일어서지 못하도록 해야 하지만, 내 밑에 있는 사람은 끝까지 보호하지. 배신만 하지 않으면 말이야.”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있어. 단, 능력이 없는 것도 일종의 배신이야. 내가 원하는 능력을 잃지 마.”

번뜩 진상미 생각이 났다. 등짝에서 찬바람이 휭휭 불었다. 진평호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말이 틀림없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금경태 과장이 양복 윗주머니를 만졌다. 금빛 만년필 하나가 반짝였다.

‘그래. 어떻게든 진평호가 원하는 정보를 확보해야 돼. 오늘처럼 말이 많아지면 언젠가는 실수를 할 테고, 어쩌면 결정적인 약점을 잡을 수도 있어.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약점만 제대로 잡으면 돈은 회수할 수 있을 거야.’

세상에 믿을 놈은 없다. 진평호나 정한득도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물고 물리는 싸움인데, 멍청하게 손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기지 못하면 지는 것이고, 그것은 곧 인생의 실패를 의미했다.

고개를 숙인 금경태 과장의 입가에 돌연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은 거만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지만, 수가 틀리면 진평호도 결코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진평호의 집을 나온 금경태 과장이 정한득을 보며 슬며시 물었다.

“작전이 뭐야? 인허가 말고 또 있는 거야?”

“또 있지 않겠어? 나도 자세히는 몰라. 자네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 회장님 귀에 이상한 소리라도 들어가면 자네나 나나 이거야, 이거.”

정한득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순간 금경태 과장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병원 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살벌한 게임 속 한가운데 서 있는 형국이었다. 아직은 결정적인 패를 들지 못한 채 말이다.

그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회장님께서 두 분 모두 다시 들어오시랍니다.)

집을 나온 지 5분도 안 됐는데 무슨 일일까?

얼굴을 맞댄 진평호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윤재철이 백제 병원 인수로 접촉해 오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당히 밀고 당기다가 바로 넘겨.”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회장님, 백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손해만 오십억입니다. 저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일만 성사되면 아무것도 아니야. 게다가 둘이 나누면 절반이잖아. 금 과장, 자네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되나? 큰돈을 만지려면 그만큼 투자를 해야지.”

정한득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더 이상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금경태 과장이 이를 악물었다.

“회장님, 저희에게는 인생이 걸린 액수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구두로라도 약속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날 못 믿는 거야?”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진평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윤재철이 개입한 이상 어떻게든 돈을 소모시켜야 했다. 금경태 과장에겐 50억 손해지만, 신동석은 100억 이상의 출혈을 하는 꼴이 될 것이다.

“구두라. 좋아. 그러면…….”

그때 금경태 과장이 갑자기 일어나며 양해를 구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만 화장실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화장실이라니,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허옇게 변한 채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럴 법도 했다.

진평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다녀와.”

급히 화장실로 들어간 금경태 과장이 주변을 살핀 후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조그만 스위치를 누르자 지금까지 오간 대화가 선명하게 들렸다.

‘됐어. 말로 한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당신 목소리가 똑똑하게 녹음되는 이상 나중에 발뺌을 하지는 못할 거야.’

다시 한 번 소형 녹음기가 잘 작동되는지 확인한 금경태 과장이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진평호 앞에 앉았다. 보다 확실하게 녹음되도록 상체를 기울였다.

“사람이 배짱이 있어야지 말이야. 쯧! 일이 성사되면 차액 오십억은 내가 책임져 주지. 대신 이렇게 되면 자네들이 투자한 돈은 없는 꼴이니까, 그 점을 잊지 마. 땀 하나 흘리지 않는 놈이 열매를 따 먹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또한 그럴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일이 틀어지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됐나?”

“감사합니다. 여력이 되면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진평호가 휘휘 손을 저었다.

조용히 집을 나온 금경태 과장이 차에 오른 후 녹음기를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경우라도 손실을 최소화할 안전장치는 마련한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백제 병원은 빨리 마무리를 짓고 병원에 신경을 써야겠어. 그래야 별 탈 없이 진평호가 병원을 인수하게 될 거야.’

50억을 보장받았지만 성공이라는 조건이 달렸다. 여전히 외줄을 타는 형국이었다. 마지막 목적을 달성하는 그 순간까지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시작부터 기분 좋은 일투성이였다.

진상미 환자가 주말 내내 단 한 번도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내심 기대를 하고 있던 김지훈도 놀랄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덕분에 이틀 동안 즐거운 데이트까지 즐겼다.

오전 회진 때는 아예 눈을 동그랗게 떠야 했다.

“교수님, 저 내일 퇴원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거의 아프지 않아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이준영 교수가 표정 변화를 보일 정도로 상당히 의아해했다. 당연히 눈길이 갈 곳은 한곳뿐이었다. 김지훈이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 데다 좋은 일도 아닙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흐음!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기 어렵다, 이 말이야? 지훈이 너도 많이 컸구나.’

“김지훈, 괜찮겠어?”

“예? 예. 하루 더 지켜보고 별문제 없으면 퇴원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알았다. 환자분, 그럼 내일 아침에 퇴원 문제를 결정하겠습니다. 정식 식사를 시작할 테니까 일부러 참으시면 안 됩니다.”

회진을 끝낸 김지훈이 빙그레 웃었다.

확실히 스트레스였다. 진평호에게서 받은 설움과 빼돌린 서류 모두가 극심한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다. 서정호에게 서류를 건네며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몰라도, 그때 이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것이 분명했다.

‘후우! 결과적으로는 잘 풀렸지만 정말 어렵네. 솔직히 이런 환자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수술을 들어가 볼까?’

스승과의 수술은 언제나 즐겁다.

라파로 기계 소리는 노랫가락이었고, 모니터로 보는 수술 장면은 한 편의 영화였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스승의 답을 듣노라면 어느새 수술이 끝나 있었다. 불덩이가 날아다니지 않는 수술실은 그 자체로 평화였다.

역시 마음과 몸은 별개가 아닌 모양이었다.

일과를 끝낸 후 다음 날 수술을 준비하고 논문을 쓰다 보면 밤이 깊어지기 일쑤였다. 결코 편한 일상은 아니었지만 도통 피곤이 느껴지질 않았다. 응급 수술이 뜨면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다.

신현수 역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현수야, 치프야, 내일 수술할 환자 준비 다 됐지? 별문제 없지? 그치?”

“예. 확실하게 준비 마쳤습니다.”

“그럼 오늘 발표하자. 치프들 다 모아라. 다 모아. 근데 호치키스는 안 되겠지? 그치? 상행 결장에도 사용할 수 있는 호치키스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치? 내 말이 맞지? 어때?”

“예. 저도 그런 스테이플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4명의 교수들이 벌이는 수술만 들어가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신현수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마치 배움의 즐거움을 이제야 안 것 같았다.

“현수야, 너 요새 얼굴 무지하게 좋다. 어떻게 위장관 돌 때보다 더 좋을 수가 있지?”

“대장 파트도 의외로 재밌네. 수술의 기본 과정이 비슷해서 위장관 수술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어? 환자 보는 재미도 점점 더 크게 느껴져.”

“와우! 신현수, 혹시 어제 촌지 받은 것 때문에 감동 먹은 거야? 거봐. 환자에게 마음을 여니까 얼마나 좋아.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발표 끝나고 밥이나 사. 혼자 먹지 말고.”

어느 틈엔가 손일석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일석아, 그게 무슨 소리야? 요새도 촌지 주는 환자가 있어? 야! 난 1년차 때가 마지막인데 대단하네.”

신현수가 김지훈과 손일석을 째려보면서도 웃고 있었다. 촌지라면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받았을 놈들이 할 말이 아니었다. 봉봉 하나도 촌지는 촌지니 말이다.

사실 주머니 속에 든 만 원짜리 3장에 이렇게 큰 행복을 느낄 줄은 몰랐다.

어쨌든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유일한 예외였던 금경태 과장마저 변했다.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화를 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수술에 대한 열의를 되찾았다. 외래도 모자라 직접 내과 파트 교수들에게 환자 의뢰를 부탁하기까지 했다.

“내가 그간 일이 있어서 조금 등한시한 면이 있는데, 앞으로는 환자 좀 많이 보내 줘. 서로 도와주면 좋잖아?”

당연히 수술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김지훈으로서는 욕을 먹든 말든 환영할 일이었다.

금경태 과장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김지훈은 더욱 눈을 크게 떴다. 금경태 과장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울 태세였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입이 찢어져 다니는 놈은 손일석이었다. 수술 중 비수와 얼음 덩어리가 난무해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충분한 준비를 했고,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교수들의 의욕 덕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오프 때마다 일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평일 오프 이틀도 모자라 백(Back)당직일 때는 삐삐를 차고 병원 탈출을 서슴지 않았다.

“일석아, 다 좋은데 알지?”

김지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가볍게 되받아쳤을 손일석이 천천히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감동에 겨운 눈빛을 보였다.

“지훈아, 왜 이제야 경희 씨를 만났을까? 그동안의 방황과 무의미했던 만남이 너무나 안타깝다. 고맙다. 내 절대 이 신세 안 잊는다.”

“너무 성급한 거 아냐?”

“내일모레면 서른이다. 급하지 않아. 이제야 내 진정한 반쪽을 만난 거야. 정말 고맙다.”

피식 웃던 김지훈이 갑자기 천장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가만있자. 처제랑 잘되면 일석이가 내 아랫사람이 되는 건가? 흐음! 나쁘지 않아. 좋아. 좋네.’

“손일석.”

“왜? 너 표정이 왜 그래?”

“너 잘 생각해라.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좋은 말만 해야 되겠지? 그리고 만일 끝까지 간다면 너하고 내가 어떻게 돼? 장인어른이 상당히 보수적이시다. 위아래 구분이 확실하신 분이야.”

도리어 성급한 놈이 김지훈이다. 하지만 유리할 수 있다면 이것저것 미리 다 끌어당겨 써도 괜찮을 것이다.

효과도 있었다. 손일석이 헉! 소리를 터트리며 말을 잃었다.

왜 그런 소리를 냈는지 몰라도 신 난다.

***

어느새 또 한 주가 지나고 주말이 왔다. 항상 그렇듯 주말은 바쁘기도 하면서 한가롭기도 했다.

토요일 밤 어김없이 응급실과 수술실을 한 번씩 들른 김지훈이 늦은 시간까지 논문을 쓰다 깜빡 잠이 들었다.

한참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때, 귀를 찢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더듬더듬 전화기를 잡고 귀를 대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현수야,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천천히 얘기해.”

(지훈아, 우리 할아버지가 안 좋으셔. 지금 바로 출발하니까 일석이하고 응급실에서 대기해 줘.)

“어떠신데?”

(저혈량성 쇼크인 것 같은데 원인은 모르겠어. 도착하자마자 CT 찍을 수 있게 준비해 줘. 부탁한다.)

냉정하기만 한 신현수가 전에 없이 당황하고 있었다. 목소리마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김지훈이 급히 가운을 걸치며 손일석을 깨웠다.

“일석아, 현수 할아버님께 문제가 생겼나 봐. 저혈량성 쇼크라는데 원인은 모른대. 빨리 일어나.”

“현수 할아버님이면 초대 이사장님이시잖아? 뭐야? 이 새벽에 갑자기 무슨 일이야?”

김지훈과 손일석이 부리나케 응급실로 달려갔다.

왜애애애앵!

툭하면 들리는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에 오늘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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