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거세지는 바람 (2)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김지훈이다. 그런 사람이 단지 의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까지 헤아리고 있었다.
한동안 입술을 꼭 깨물며 마음을 진정시키던 진상미가 자신의 처지와 마음을 털어놓았다.
“다시는 진평호 회장님을 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퇴원을 하고 보니 막막하기만 하더군요. 지난 세월이 아깝기도 했고요.”
솔직히 한 가닥 기대를 했다. 막막함 때문인지, 아니면 간사함 때문인지 진평호가 웃으며 반겨 준다면 다시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애써 변명을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돌아온 것은 차가운 미소와 선심 쓰듯 던져 준 몇 푼의 돈이었다.
무너지는 자존심과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악에 받쳐 큰돈을 요구했지만 주제를 알라는 말뿐이었다.
진평호는 아예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이 그럴 수는 없잖아요. 단 한 사람도 날 반겨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어찌 된 일인지 수술 전에 느꼈던 복통이 찾아왔다. 이러다 또다시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몰려왔다. 그 순간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말 미친 것처럼 집 안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별의별 욕을 먹으면서도 단 한 가지만은 챙겨야 했다. 진평호의 불법적인 일들을 모른 척하면서 일종의 보험처럼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숨겼던 몇몇 서류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맞는지, 먼지가 소복이 쌓인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결국 일주일 전에 서류를 챙길 수 있었다.
희열도 잠시, 야반도주를 하듯 진평호의 집을 빠져나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오래전 일인 데다 대단한 불법이 담긴 서류도 아니었다. 도리어 섣불리 도움을 청했다가 진평호의 분노를 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다.
더욱더 큰 아픔은 자신의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두려움에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외로움이 겹치자 극심한 복통이 찾아왔다. 그것도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순간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안도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고 말았다.
가족도 아닌 사람들이다. 단순히 자신을 치료하며 보았던 의사들이 지금껏 살아오며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눈물만 흘렸다.
“이 나이가 되도록 터놓고 말할 친구 하나 없다는 게 한심하죠?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지금까지 제가 왜 아픈지 원인을 찾지 못하는 걸 보면 저것 때문일 거예요. 사실 그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거든요.”
조그마한 서류 가방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저 가방에 서류가 담겨 있나요?”
“네. 감당도 못할 걸 왜 가지고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처지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이렇게 우연한 일이 있을까?
서정호의 말 이상의 일이 일어났다. 연락을 하면 더없이 좋아하겠지만, 김지훈의 관심은 진평호나 서류가 아니라 진상미였다. 본인에게 해가 될 수 있다면 결정은 스스로 하는 것이 마땅했다. 누구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서류인지 모르지만, 정말 저걸 세상에 알리고 싶으신가요?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진상미가 처연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지막 날 예전에 보았던 사람들을 봤어요. 그중 몇몇은 진평호 회장과 불법을 저지르며 다른 사람들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사람들이에요. 아마 그날도 뭔가 꾸미고 있었을 거예요. 이제는 막을 수 있다면 정말 막고 싶어요.”
진심이었다.
김지훈이 다시 물었다.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마치 해결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처럼 물으시네요. 웬만한 사람은 진평호 회장 앞에서 고개도 못 들어요. 선생님이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만일 저 서류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떤 짓을 할지 몰라요.”
“그런가요? 흔한 말로 정말 거물인 모양이네요. 하지만 세상이 꼭 힘으로만 돌아가진 않잖아요. 내일 아침에도 지금 생각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 번호로 전화하세요. 도움이 될 겁니다.”
명함을 받아 든 진상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검사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내보였으니 의아하기도 할 것이다.
김지훈이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만일 내일 만나 보시게 되면 전후 사정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저도 들은 말이 있는데, 환자분이 직접 만나 보시고 결정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네요. 어쨌든 이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아팠던 거였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지금 오간 말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어찌 됐든 여기는 병원이니까요.”
진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진평호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서정호에게 연락을 할까?
숙소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창밖을 보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진상미에겐 잔인한 일이었다. 부디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
다음 날 오전.
주말을 맞아 다들 분주하게 일과를 마무리했다. 오프인 김지훈도 평소처럼 마무리를 지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진상미뿐이었다.
‘후우! 마음속 짐을 털어놓았는데 왜 아픈 걸까? 증상이 더 심해진 걸 봐서는 정말 배 속에 문제가 있는 거 아냐? 죽겠네.’
진상미가 오전에 또 복통을 호소했다. 어딘지 모르게 초초해 보였고, 안색은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행여 명함을 건넨 것이 도리어 더 큰 스트레스를 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점심때가 훌쩍 넘도록 서정호의 연락도 없었다. 아침 회진을 돌며 넌지시 물어보았을 때 분명 전화를 했다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김지훈도 초조해졌다.
‘형님이 언제 오실까? 그때 표정을 봐서는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오실 것 같았는데, 주말이라 못 오시나? 최소한 형님이 진상미 환자를 만나는 것까지는 봐야 마음 편히 오프를 갈 수 있을 텐데.’
마음이 심란한지 김지훈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
손일석이 혀를 찼다.
“지훈아, 너 무슨 일 있어? 똥 마려운 강아지도 아니고, 급하면 화장실이나 갔다 와. 정신 사나워 죽겠네. 어? 근데 너 오늘 오프잖아? 이 자식이 누굴 놀리나. 당직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빨리 사라져.”
“그럴 일이 있어, 인마.”
“무슨 일? 아! 애인 있는 놈이 주말 오프면 당연히 일이 있어야지. 맞다. 니가 고자도 아니고 급하긴 하겠구나. 제수씨랑 좋은 데 가려고? 양수리?”
“무슨 소리야, 인마. 내가 넌 줄 알아? 어떻게 틈만 나면 그쪽으로만 생각하냐? 하긴, 니 머리가 유독 빨리 자라는 이유가 뭐 있겠어?”
손일석의 눈이 쫙 찢어졌다.
“이 자식이 감히 하오문주인 날 색마로 몰아? 남자도 이젠 가꿀 줄 알아야 하는 시대야, 인마. 깔끔하게 살아야지. 그래야 자신을 잘 관리한다고 인정을 받는 거야. 현수 좀 보고 본받아.”
“말은 잘해요. 우리 처제 소개시켜 주고 싶다가도 너 이러는 거 보면 마음이 싹 사라져.”
찢어졌던 눈이 돌연 반달이 됐다.
“지훈아,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빨리 날 잡자. 내가 술 산다. 우리 친구잖아. 둘도 없는 친구.”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에휴! 알았어. 오늘 같이 점심 먹기로 했는데 물어는 볼게.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오늘 만난다고? 말 좀 잘해 봐. 나만한 매력덩어리가 어디 있어?”
손일석이 반색을 하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제나저제나 목을 빼고 기다리던 서정호였다.
“어? 형님, 언제 오셨어요?”
“응. 아까 왔어. 연락은 잘 받았다. 점심 먹었어? 안 먹었으면 처제랑 같이 먹자. 시간 되지?”
“예. 마침 오프긴 한데, 형님 바쁘지 않으세요? 얘기는 잘되셨고요?”
저절로 손에 들린 서류 가방에 눈이 갔다.
서정호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 시간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자네나 나나 항상 일에 치여 사는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밥 사 주겠어? 빨리 준비해.”
“예, 알겠습니다.”
김지훈이 서둘러 가운을 벗다 말고 손일석을 보았다. 난데없는 형님 소리에 꽤나 의아한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째 어깨가 쭉 펴진 것 같았다.
“일석아, 형님 되시는 분이야. 처형.”
척하면 착이다. 처형이라는 말에 서정호가 누구인지 단박에 눈치챘다.
“아! 그러시구나. 안녕하십니까? 손일석입니다. 지훈이랑 둘도 없는 친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힘차게 인사를 하며 꾸벅 허리를 굽히는 모습이 역시 손일석이다.
“반가워요. 서정홉니다. 이것도 인연인데,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식사나 하시죠.”
으레 한 말일 것이다. 정말 예의상 한 말일 것이다.
“형님, 일석이가 당직이라서…….”
그 순간 손일석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찬스! 경아 씨 동생 이름이 경희라고 했나?’
김지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일석이 가운을 벗고 있었다.
“당직이지만 점심 정도 먹을 시간은 있습니다, 형님. 사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리고 말 편하게 하십시오.”
서정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서글서글한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지.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형님.”
졸지에 손일석과 함께 밥을 먹게 됐다. 고경아에게 말도 안 하고 데려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서정호의 말이었다. 그 점만 빼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치프기에 환자가 없는 한 밥 먹을 시간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무방했다.
‘정말 넉살 하나는 대단해.’
쩝쩝 입맛을 다신 김지훈이 의국을 나오며 서정호에게 양해를 구했다.
“형님, 죄송한데 잠깐 환자 좀 보고 나가겠습니다. 일석아, 무교동 낙지집 앞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형님하고 먼저 가 있어. 경아 씨 나와 있을 거야.”
“오케이! 형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옷 갈아입고 총알처럼 달려오겠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김지훈이 진상미를 찾았다.
특별히 할 말은 없었지만 마음이라도 홀가분하길 바랐다.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진상미가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선생님 오셨어요? 전 괜찮아요. 정말 감사드려요. 서정호 검사님에게 말을 하고 나니까 후련하네요.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방송국 PD분까지 아세요?”
진상미를 안심시키기 위해 정훈철 PD까지 거론한 모양이었다. 그만큼 진평호는 일개 검사가 상대하기에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정훈철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시시콜콜 할 얘기도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진상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너무 반가웠다.
“그런 일이 있었네요. 배는 어떠세요?”
“한결 좋아졌어요.”
복통을 조금은 느끼는 것 같았지만 표정이 꽤 밝았다.
‘얼굴이 정말 좋아졌네.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요? 그럼 어디 배 좀 다시 볼까요?”
김지훈이 눈가를 굳히며 복부를 촉진했다. 압통을 호소했지만 확실히 전보다는 미약했다.
약간은 마음이 놓였지만 최소한 주말 동안 통증이 없어야 다소나마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많이 좋아지신 것 같네요. 이참에 그냥 복통이 싹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선생님.”
진상미의 눈가에 살짝 그늘이 졌다.
“왜 그러세요?”
“혹시 저 때문에 선생님이 피해를 볼까 봐 걱정이에요. 진평호 회장은 이런 일을 절대 잊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죠?”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다른 사람을 걱정할 정도라면 그만큼 안 아프단 말인데, 기대해도 될까?’
내심 걱정도 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진평호가 어떤 인간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세상을 믿었다. 더구나 진상미의 말대로라면 가장 힘들어질 사람은 다름 아닌 진상미 자신이었다.
“어이구! 그런 걱정 하지 마세요. 진평호라는 사람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제 면허증은 빼앗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럴 정도로 좀생이라면 저 못 이깁니다. 제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마음 푹 놓으시고, 환자분은 건강에만 신경 쓰세요.”
큰소리를 탕탕 치는 모습에 진상미가 웃었다. 어쩐지 김지훈이라면 설령 문제가 생기더라도 당당히 맞서 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덕분에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여러모로 정말 고마워요.”
더 밝아진 얼굴과 목소리에 김지훈도 마음 편히 오프를 갈 수 있었다.
“박순용 선생님, 혹시 진상미 환자가 복통 호소하면 일단 치료부터 하고 바로 노티하세요. 경미하다고 안 하시면 안 됩니다.”
“밤에 아파도 노티할까요?”
“아! 그렇네. 혹시 내가 외부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삐삐 치세요.”
신신당부를 하고 병원을 나서던 김지훈이 물끄러미 본관 6층을 올려다보았다. 삐삐가 울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오삼집이다.
고경아와 고경희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손일석이 눈짓을 하며 슬며시 엄지를 세워 보였다.
‘자식이,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경희야, 잘 지냈어? 그런데 점심때 웬 오삼이야?”
“그럼요. 잘 지냈죠. 큰형부가 매콤한 음식 되게 좋아하세요.”
“술은?”
“반주로 딱 한 잔만 하신대요.”
매콤한 양념에 버무려진 오징어와 삼겹살이 하얀 연기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절로 입에 침이 가득 고였다. 이슬이 송송 매달린 차가운 소주와 맥주는 마치 처음처럼 눈을 즐겁게 했다. 낮술도 때론, 혹은 자주 그럴 수 있다.
정작 술을 시킨 사람이 안 보였다.
“경아 씨, 형님은요?”
“저쪽 테이블에 계세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점심 사 준다고 오셔서는 서류만 보고 계시네요.”
고경아의 손가락 끝에 서정호의 얼굴이 걸렸다. 김지훈이 눈짓을 하고는 조용히 서정호 앞에 앉았다.
“형님, 식사부터 하고 보시죠.”
대답이 없다. 눈가를 잔뜩 찌푸린 것이 의외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조금은 지나고 나서야 서정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듣기로는 옛날 자료라고 하던데, 되게 중요한 게 있나 보네요.”
“그렇게 보여?”
“예. 상당히 심각해 보이시는데요.”
“명색이 검산데 앞으로 표정 관리에 신경 써야 되겠다.”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였다.
궁금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웠다. 어렵게 입을 열고 용기를 낸 진상미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시 서류에 눈길을 준 서정호가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지금은 어딘가 미흡하게 보이지만 대단한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이게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퍼즐 조각 중 하나라면 말이야.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증거들을 연결해 주는 고리일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뭔가 감이 와.”
“와! 잘은 몰라도 진평호라는 사람이 꽤 질이 안 좋은 것 같던데, 그랬으면 좋겠네요.”
“반드시 잡아야 할 놈이야. 돈 많은 쓰레기거든.”
무언가 다짐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서정호가 김지훈을 보았다.
‘나한테 바로 연락하지 않고 진상미가 결정하기를 기다렸단 말이지. 입은 확실히 무겁겠어. 그나저나 이 상태에서 밥 먹으면 감을 잃을지도 모르겠네.’
“내가 진상미를 만났다는 건 비밀이야. 그리고 점심은 처제들하고 먹어야겠다. 감을 쭈욱 이어 가야 실타래가 풀리거든. 나하고는 다음에 먹자.”
“예? 어디 가시려고요?”
서정호가 서류를 흔들었다.
“확인해야 할 것이 있어.”
고경아와 고경희가 난리가 났다.
“미안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네. 우리 직업이 그렇잖아. 다음에 내가 거하게 쏠게. 손일석, 자네도 시간 되면 그때 같이 보자. 미안하다.”
“예, 형님.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다음에 뵙겠습니다.”
“형부, 들어가세요. 서운해요.”
식당 밖에까지 나온 손일석이 묘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김지훈을 붙잡았다.
“지훈아, 형님 직업이 뭐야?”
“검사님이셔.”
“검사? 야! 신중해야겠네.”
“뭘?”
“아니야, 인마. 근데 경희 씨 첫인상이 상당히 좋다. 왠지 모를 매력이 있어.”
김지훈이 갑자기 잡아먹을 것처럼 손일석을 노려보았다.
‘매력? 이 자식이 설마 흑심부터 품는 건 아니겠지?’
“똑바로 해라. 우리 처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라도 나면 넌 나한테 죽는 거야. 그리고 쇠고랑까지 차겠지? 우리 형님이 죄지은 놈에게는 상당히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더라.”
“이 자식이 색마도 모자라서 이젠 파렴치범으로 모네. 너나 잘해, 인마. 신의와 성실이라면 나 손일석이야. 내 별호가 천진무구란 거 몰라? 어후! 배고파. 빨리 들어가자.”
김지훈이 바빠졌다. 입으로는 오징어와 삼겹살을 음미하고, 눈은 손일석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진상미와 서정호까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슬슬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고경희의 웃음소리가 유난스럽게 즐거웠다. 손일석도 거의 대부분 고경희나 고경아와 대화를 했다.
한마디로 찬밥이다. 고경아가 가끔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면 벌써 일어나야 할 상황이었다. 무언가 강력한 견제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일석아, 벌써 4시가 넘었어. 안 들어가?”
고작 이 말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손일석이 손가락을 저으며 허리춤을 보였다.
삐삐다.
“나도 요놈 적절하게 잘 사용하니까 걱정하지 마. 경희 씨, 이것도 인연인데 커피 한잔할까요? 다행히 환자가 없네요. 제수씨,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지훈이랑 행복한 데이트를 즐기는 게 어때요.”
고경희가 김지훈과 고경아를 보았다. 뜻밖에도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다 큰 성인들인데 무슨 말을 할까?
결국 오삼만 해치우고 찢어졌다. 낮술도 마다하지 않던 김지훈이었건만, 소주와 맥주는 뚜껑도 따지 못했다.
손일석과 고경희와 헤어진 후에도 한동안 신경이 쓰였다. 둘도 없는 친구에, 예전부터 소개팅이란 말까지 해 온 마당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경아 씨, 별일 없겠죠?”
“무슨 일이요?”
“아니, 그냥. 처음 봤는데 우리보다 더 친해 보여서 그런지 느낌이 이상하네요. 괜히 경희 걱정도 되고.”
고경아가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경희한테 손일석 선생님 소개시켜 준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걱정이에요. 그리고 우리도 저러지 않았을까요? 전 보기 좋네요.”
김지훈도 피식 웃고 말았다.
한눈에 반한다는 말이 공연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삐삐도 안 울렸다. 이제는 주말 오프를 즐겨야 할 시간이었다.
“오래간만에 대학로나 갈까요?”
“좋아요.”
한 쌍의 연인이 팔짱을 끼고 대학로로 향했다.
미래의 연인이 될지도 모르는 한 쌍은 커피를 앞에 두고 수다를 떨기 바빴다. 손일석의 입담은 끝이 없었고, 고경희가 웃느라 눈물을 다 흘렸다.
첫 만남인데 마치 오래된 연인 같았다.
그 시간, 금경태 과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진평호와 마주하고 있었다. 함께 자리한 정한득은 얼굴을 찌푸린 채였고, 다급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이야?”
“회장님, 신동석 뒤에 누가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윤재철입니다.”
“윤재철? 내가 아는 그 윤재철 말이야?”
“그렇습니다. 어제 갑자기 백제 병원에 대해 상의하자는 연락이 왔는데, 그 자리에 나온 사람이 윤재철이었습니다.”
“확실한 거야?”
“확실합니다. 저희가 대리로 내세운 사람이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얼굴이 많이 상했다고는 하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평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