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바람이 분다 Ⅱ (3)
다음 수술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급히 응급실로 뛰어 내려간 김지훈이 환자를 찾았다.
진상미다.
복통을 심하게 느끼는지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김지훈을 보고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새우등을 한 채 몸을 펴질 못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환자분, 많이 아프세요?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며칠 전부터 조금씩 배가 안 좋았는데, 어젯밤 갑자기 복통이 심해졌어요.”
“예전하고 비슷한 양상으로 아프신가요?”
진상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밴드가 쉽게 생길 리는 없고, 장 유착이 오기에도 너무 빠른 시긴데 상당히 아파하네.’
김지훈이 조심스럽게 진상미를 똑바로 눕히고는 복부를 진찰했다. 우상복부 동통과 함께 장음이 상당히 증가돼 있었다. 다행히 반사통은 없었지만 진상미 말대로 수술 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좋지 않네.’
“일단 혈액 검사하고 복부 촬영부터 사행하겠습니다. 예전과 증세가 비슷해서 가능하면 복부 초음파와 CT도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선생님. 지금 배가 몹시 아픈데, 혹시 며칠 입원해서 치료하면 안 될까요?”
원하던 말이었다. 설혹 단순한 장염으로 인한 장 경련이라고 해도 수술 병력이 있는 환자다. 다른 질환일 경우를 배제할 수 없기에 입원 치료가 원칙이기도 했다.
“잘됐네요. 그럼 필요한 검사부터 하고, 입원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수술이 있어서 이따 오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서도진 선생, 혹시 검사 결과에서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바로 알려 줘.”
오더를 내리고 응급실을 나서려던 김지훈이 갑자기 콧등을 찡그리며 진상미를 보았다. 수술을 했을 때도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가 없던 진상미였다. 지금도 보호자라고 할 만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 서도진 선생, 환자분이 많이 아프시니까 입원 수속 하는 것 좀 도와드려. 부탁해. 환자분, 직접 하셔야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일은 힘드시면 우리 서도진 선생에게 말씀하세요. 잘 도와드릴 겁니다.”
진상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혹 말뿐일지라도 고맙기만 했다.
서도진에게 진상미를 맡기고 수술 방으로 올라가던 김지훈이 연거푸 고개를 갸웃거렸다.
‘증상이 비슷하긴 하지만 문제를 일으킬 시기가 아닌데 뭐지? 단순 장염이었으면 좋겠네.’
단순 장염도 장 경련을 동반하면 통증이 너무 심해 입원하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어렵게 진단을 하고 치료한 환자였다. 원인 자체도 워낙 드물어 재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신경을 바짝 쓸 수밖에 없는 경우였다.
문득 서정호 생각이 났다.
‘아파서 온 게 탈이지만 형님 말대로 되긴 됐네.’
갑자기 처음 봤을 때 받은 명함 생각이 났다. 허겁지겁 지갑을 살핀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곱게 잘 모셔져 있었다.
‘에휴! 진평호라는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데 내가 신경을 쓸 일이 아니지. 환자가 먼저야.’
진상미의 증상만큼 김지훈의 마음도 애매모호했다.
두 번째 수술 직전이다.
진상미 환자를 잠시 잊고 이젠 수술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노티(Notify:보고)는 수술이 끝난 후 하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개복 수술이다.
이미 경험했던 간 내 담석 환자다. 최고의 호흡을 보여 준 수술 팀 및 마취 팀과 함께한다. 완벽한 조건이기에 실수를 할 수는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눈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경석이 새카맣게 탔다. 구미로 가기 전 집도의의 자세와 태도를 알려 줄 목적이었다지만, 기술적인 면을 지적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김지훈이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첫 수술부터 타면 3개월 내내 탄다. 타는 건 무섭지 않지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야. 정신 똑바로 차리자. 라파로는 몰라도 개복 수술에서 같은 지적을 받을 수는 없어.’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시작하셔도 됩니다.”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말이었지만 수술 팀에게는 긴장하라는 신호였다. 김지훈이 세컨을 서는 박순용에게 눈길을 주고는 눈빛을 굳혔다.
수술이 시작됐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의 손이 라파로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어울렸다. 이제 1년차 말이 된 박순용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척척 알아서 했고, 고경아의 보조는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배를 열고 담낭을 제거했다. 김지훈이 담낭을 열어 담석 이외에 다른 병변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른 병변은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준영 교수가 곧 총수담관을 열고 간 내 담석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담관을 통해 강하게 물을 쏠 때마다 새까만 돌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슬러지(Sludge)처럼 농축돼 끈적끈적해진 담즙까지 최대한 제거했다.
이준영 교수가 총수담관에 T-tube를 넣고 절개 부위를 봉합했다. 어떻게 봉합을 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살핀 김지훈이 적절한 강도로 침착하게 타이를 했다.
담낭을 제거한 자리에 이상이 없는지, T-tube는 총수담관에 잘 고정돼 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주요 과정이 모두 끝났다.
‘이젠 나무랄 데가 거의 없네. 경험만 충분히 쌓으면 미진한 부분들은 저절로 해결이 되겠어.’
더없이 만족스러운지 눈가에 살짝 주름이 잡힌 이준영 교수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김지훈, 마무리 잘해.”
“예, 선생님.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진상미 환자가 응급실로 내원했습니다.”
“진상미 환자가? 어디가 아파서?”
“수술 전에 보였던 증상과 유사한 증세를 보여 입원시켰습니다. 필요한 검사는 오후 회진 전에 나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알았다. 그럼 회진 때 보자. 김진호 선생, 수고했어.”
모처럼 들린 말이었다. 이준영 교수도 음성 병원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오늘 수술이 빨리 끝나긴 했지만 구내식당은 이미 닫았을 겁니다. 다른 일 없으시면 점심이나 같이 드시죠. 짜장면 어떠세요?”
2시가 막 넘었다. 오후 근무가 있다면 교수라고 해도 꼼짝없이 굶어야 하는 것이 외과 의사다. 다행히 오늘은 외래가 없는 날이었다.
“좋지. 휴게실에서 기다릴게.”
마무리를 하던 김지훈과 박순용이 침을 꿀꺽 삼켰다. 수술이 안 끝난 이상 당연히 점심을 건너뛰어야 하겠지만, 이런 민생고는 젊을수록 심한 법이다. 아침, 점심을 연속으로 굶는 일에 적응이 안 된 인턴은 다리까지 휘청거렸다.
이준영 교수가 피식 웃은 것 같았다.
“김지훈, 시간 맞춰서 시켜 놓을 테니까 알아서들 먹어.”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수술실을 울렸다.
곧 김진호 교수 대신 마취과 치프가 와 환자를 깨우기 시작했다.
“지훈아, 오늘 수술 다 끝난 거지?”
“응. 케이스가 좋았어.”
“우리야 빨리 쉴 수 있고 좋긴 한데, 그래도 너무 빨리 끝났네. 어? 벌써 피부 봉합하는 거야?”
마취과 치프가 깜짝 놀라며 서둘러 환자를 깨웠다. 그동안 일반 외과 마취를 맡지 않았다. 더구나 최근에 구미 파견 근무를 하고 온 탓에 김지훈의 손이 어떤지 몰랐다.
곧 회복실로 옮겨진 환자가 무난하게 깨어났다.
세 그릇의 짜장면이 딱 시간 맞춰 도착했다.
‘치프가 되니까 이런 일도 생기네.’
김지훈이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후루룩! 후루룩!
젓가락질 몇 번에 짜장면 한 그릇이 뚝딱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단무지 몇 개를 입에 쑤셔 넣은 김지훈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박순용 선생님, 응급실로 가죠.”
“예, 선생님. 가시죠.”
“인턴 선생, 같이 가자.”
한 놈은 확실히 적응이 안 됐다. 반이나 남은 짜장면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인턴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인턴이고, 전공의들 역시 똑같은 과정을 거쳤다.
어쨌든 김지훈에게는 정말 기분 좋은 첫날이었다.
‘시작이 정말 좋네. 이렇게만 가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진상미 환자의 검사 결과를 찾았다. 짜장면도 제대로 못 먹은 인턴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렸다. 그 덕에 곧 모든 결과를 볼 수 있었다.
혈액 검사와 복부 초음파 및 CT는 모두 정상이었다. 단순 복부 촬영에서 약간의 장염 소견을 보이는 것이 다였다.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안심해야 할지, 아니면 또 예전처럼 고민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역시 손의 감각이다.
다시 진상미를 찾았다. 진경제를 투여했지만 증상은 호전되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복통을 호소하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신중하게 복부 진찰을 했다. 여전히 압통은 있었지만 반사통은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배를 누를 때마다 상당히 심한 통증을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환자분, 다른 환자 같으면 장염으로 인해 장 경련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치료를 할 상황입니다. 하지만 환자분은 수술을 하셨고, 원인도 매우 드문 경우라 일단 금식 유지하고 약 쓰면서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선생님만 믿을게요.”
진상미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대답은 확실하게 했다.
환자에게 신뢰를 받는 것만큼 의사에게 유리하고 좋은 일은 없었다. 김지훈이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병실을 나가려다 말고 다시 진상미를 보았다.
문득 진상미의 얼굴에 그림자가 걸린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아플 때 보이는 얼굴과는 미묘하게 다른 데다 심한 장염을 유발하는 원인에는 정신적인 면도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진평호라는 사람과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환자분, 요새 스트레스 많이 받으셨어요?”
“아니에요. 그간 잘 지냈어요.”
뭔가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환자의 사생활까지 캐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진평호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해결했는지 궁금했지만, 이런 문제는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회진을 돌며 진상미 환자를 진찰한 이준영 교수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지훈, 어때?”
“단순 장염으로 인한 장 경련인 것 같긴 한데, 수술 전에 통증이 있던 자리에 압통이 있어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일단 지켜보자.”
이준영 교수가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경험이 많고 노련한 의사라도 진상미 환자 같은 경우는 마찬가지로 어려운 모양이었다. 하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환자였다.
그렇게 첫날이 지나갔다.
숙소에 올라온 김지훈이 툭하면 웃었다.
‘그나저나 오늘 먹은 짜장면 무지하게 맛있네. 어디서 시켰지?’
시장이 반찬인 탓인지, 아니면 스승의 마음이 담겨 있는 덕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더없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다음 날 아침.
회진을 돌며 진상미 환자를 다시 보았지만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수술 부위의 통증은 검사상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증상이다.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었다.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준영 교수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약간은 답답한 마음으로 회진을 끝내고, 또 금경태 과장을 기다려야 했다. 금경태 과장은 오늘도 잔뜩 찌푸린 얼굴과 기분 나쁜 눈빛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나마 회진은 양반이었다.
‘수술 실력은 우리 병원 3대 고수 중 한 명이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배워야 할 것은 모두 배우자. 이것도 소중한 기회야.’
금경태 과장과는 첫 수술이기에 각오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단 하나 있는 라파로를 하면서 얼굴까지 붉혀야 했다. 퍼스트를 서기 힘들 정도였다.
“김지훈, 카메라 제대로 조작 못해? 내가 하려고 하는 부위가 하나도 안 보이잖아?”
“죄송합니다, 과장님.”
“박순용, 고정 좀 똑바로 해. 김지훈, 넌 세컨이 제대로 못하면 바로 고쳐 줘야 할 거 아냐? 내 수술에 들어왔으면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 맞춰. 알았어? 에이! 쯧!”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한 짜증이었다.
물론 라파로 역시 집도의에 따라 방식이나 차례가 조금씩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원칙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더구나 김지훈은 솔직히 금경태 과장이 정확하게 어느 부분을 지적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었다.
김진호 교수와 고경아의 얼굴도 좋지 못했다.
모두들 수술 내내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금경태 과장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환자에게는 등한시했지만, 남들 몰래 이준영 교수가 라파로를 하는 것을 몇 번 살펴보았다. 상당한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자신보다 더 능숙해 보인다는 사실에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간신히 꾹꾹 눌러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김지훈의 손을 보는 순간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자식 손에 확실히 이준영이 있어. 내가 라파로를 하는 걸 먼저 보았고 수술도 먼저 들어왔는데, 한참 늦게 시작한 이준영의 손과 방식을 따라가? 네놈도 애초에 나한테는 배울 생각이 없었다, 그 말이지?’
되는 일이 없는 나날이었다.
신동석 이사장은 물론 외과 교수들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에게 잘 보이려 안달을 내던 구영선 교수와 임동완 교수의 눈치까지 달라졌다.
자신에게 밉보인다면 전공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김지훈과 신현수는 절대 병원에 남게 할 수 없었다.
다 내쳐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제 믿을 구석은 진평호뿐이었다.
‘그동안 너무 소홀히 했어. 어차피 이 병원을 갈아엎지 못하면 내가 나가야 해. 그럴 수는 없지. 김지훈, 네놈도 날 탓하지 말고 이준영을 탓해. 신현수, 넌 아직 이용할 구석이 있지만 얼마 남지 않았어.’
경고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조용히 김지훈을 따로 부른 금경태 과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김지훈, 치프라고 다 치프가 아니야. 그따위로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힘들어. 내 수술에서는 모든 것을 나한테 맞춰. 환자 열심히 보고, 앞으로 1년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도 잊지 마. 네 미래는 내 손에 달려 있어.”
과장이라는 사람이 전공의를 앞에 두고 협박성 발언을?
김지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맞추지 못한 것이 도대체 뭐지? 또 뭐가 틀어져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어쨌든 내 미래를 당신에게 맡길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가슴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다. 금경태 과장은 믿을 수도 없고, 절대 믿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문득 가까이하지 말라는 서정호의 말까지 떠올랐다.
이젠 당당하게 행동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더 이상 하실 말씀 없으시면 나가 보겠습니다.”
목소리도 당당하기만 했다.
예기치 못한 반응에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