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95화 (495/1,329)

제3화 바람이 분다 Ⅱ (1)

과장이라는 자리는 단순한 명예나 직함이 아니다. 과에 관련된 모든 일을 최종 결정하고, 소속 의사들의 인사 관리부터 환자에 관계된 일까지 도맡아 책임져야 하는 자리다. 따라서 개인적인 자질이나 인성은 물론, 선후배 의사들에게 확고한 신뢰를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더구나 최종 결정은 병원 인사 위원회와 신동석 이사장이 하기 때문에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했다.

만약 다시 추천을 해야 한다면 당사자는 물론 외과 구성원 모두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과연 최적의 적임자는 누굴까?

송재덕 교수는 물론 허경발 교수까지 이혁민 교수의 의중을 묻고 있었다. 가장 침착한 데다 병원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혁민 교수의 고민이 깊어졌다.

현재로서는 이준영 교수가 과장이 되는 것이 순리였다. 인격이나 능력, 어느 쪽을 보아도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음성 병원에 있는 동안의 공백이 마음에 걸렸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인사 위원회에서 그 문제를 걸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특히 아직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금경태 과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불을 보듯 빤한 일이었다. 함께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던 이혁민 교수가 허경발 교수를 보았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귀중한 가르침이 떠올랐다.

‘옳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의 결정을 의심하지 마세요. 사심을 배제하고 모든 이들을 위해 결정했다면, 설혹 문제가 생기더라도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래. 이준영 선생님만 보자. 정말 우리 과만 생각하실 분이야. 고민할 이유가 없어. 신 교수, 어때?’

‘이 교수, 고민할 게 뭐가 있어?’

교수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다.

그때 이준영 교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교수, 신 교수, 마음만 받을게. 고맙네.’

무뚝뚝하고 말이 없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선후배 사이라고 해도 이는 공적인 문제였고, 다른 과와의 일도 생각해야 한다.

10년간의 공백과 금경태 과장과의 껄끄러운 관계는 중대한 하자였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그런 문제를 안고 과장직을 수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과장 자리는 순리대로 맡아야 한다. 그래야 잡음이 없을 것이다. 이혁민 교수나 신기동 교수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고, 과장 자리를 맡을 때도 됐다.

이준영 교수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 교수나 신 교수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맡기에는 벅찬 자립니다. 게다가 위장관하고 유방 파트까지 하려니 힘이 보통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파트에 교수가 보강되어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혈관 수술 하기도 시간이 빠듯해서 과장 일은 절대 못합니다. 능력도 부족하고요. 이준영 선생님이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이 교수, 신 교수, 무슨 소리야? 원칙대로 하는 것이 맞아. 난 능력도 부족하고, 준비조차 되지 않았어.”

“왜 이러십니까, 선생님? 말씀대로 원칙을 지켜야 하는 일입니다.”

티격태격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단 한 발도 물러서지 않던 이준영 교수가 눈빛을 굳혔다. 개인적인 친분이 교수들의 눈을 흐리게 하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교수, 신 교수, 현실을 외면하지 말자. 음성과 금 과장과의 문제를…….”

누구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스승인 허경발 교수가 있는 자리였다.

누구보다도 가슴 아파할 사람이 바로 스승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야야! 선생님 앞에서 왜들 이래? 조용히 하자. 조용히. 선생님, 이거 다들 안 한다고 하는데 제가 할까요?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기 싫다는 놈들 시켜 봐야 일도 안 하고 뺀질거릴 겁니다.”

역시 송재덕 교수였다. 너스레 한 번으로 입을 꽉 다물게 했다.

이준영 교수의 말에 순간 가슴이 허해졌던 허경발 명예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도 내가 제자들은 잘 키웠네. 다들 자격이 충분해. 누가 해도 외과의 앞날을 책임질 수 있겠어.’

“허허허! 사람들하고는. 그만들 해. 너무 겸손해도 보기 좋지 않은 법이야. 오늘 토요일인데 시간들 있나? 오래간만에 시원한 맥주 한잔하고 싶네.”

“맥주요? 좋습니다, 선생님. 다들 뭐하니? 빨리빨리 나가자. 준영아, 커피 남았다. 빨리 다 마셔. 야! 이거 얼마 만에 선생님과 갖는 술자리야? 떨린다. 떨려.”

맥주 한 잔을 앞에 두고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때론 심각했고, 때론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

세월이 흘러 어느새 제자들의 머리도 희끗해졌지만, 스승과 제자의 사이는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자들을 보던 허경발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준영아, 이렇게 즐거운 날 한 사람이 없구나. 금 과장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스승의 눈빛을 받은 제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젊은 날의 치열했던 경쟁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몰랐다. 그저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이었다.

문득 김지훈이 생각난 이준영 교수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훈아, 동기들, 특히 현수하고의 경쟁을 즐겨야 한다. 당장은 누가 앞서는지가 중요하게 보이겠지만, 길게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구나. 결국에는 너희들 모두가 마음을 맞출 때 최고의 써전이 될 수 있을 거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헤쳐 나갈 제자였다. 자신이 범한 실수 아닌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날 밤, 모두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안타까워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겠지.”

허경발 교수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아무리 미워도 정은 남는 모양이었다.

11월의 마지막 주도 팡팡 돌아갔다.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이경석의 입가에도 미소가 활짝 걸렸다. 드디어 정규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지훈아, 현수야, 금요일에 주신단다.”

“와우! 축하해요, 형. 결국 우리 모두 하나씩은 하고 다음 텀으로 가네요. 슬쩍 여기저기 물어보니까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대요. 우리가 잘나긴 잘난 모양이에요. 하하하!”

김지훈의 말에 이경석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신현수도 힐끗 눈길을 주고는 피식 웃었다.

농담이라도 기분 좋은 말이었다.

“그렇게 되나? 말이라도 기분은 좋네. 그리고 난 구미로 가니까 내가 수술한 환자 꼼꼼하게 잘 봐줘야 된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찜찜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다음 텀에 대한 기대까지 겹치며 새로운 활력이 찾아왔다. 각자 자신의 일을 하며 다음 파트까지 준비했다.

간담도를 맡는 김지훈은 이경석에게, 대장 파트를 맡는 신현수는 김지훈에게 미리 인수인계를 받았다.

텀이 바뀌는 주말이 오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손일석을 느긋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화 한 통 없는 걸 보면 생각 이상으로 잘 지낸다는 건데, 강기웅 과장님하고 그게 가능할까?’

만일 강기웅 과장과 심각한 트러블이라도 있었으면 뻔질나게 전화를 했을 손일석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금요일이다.

사실상 이번 텀의 마지막 날이라고 배려를 하는 건지 오상익 교수의 항문 수술만 두 개였다. 덕분에 라파로 두 개를 한 후, 정규 수술을 받는 이경석의 수술을 참관할 수 있었다.

기분 좋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스승의 수술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약간은 긴장한 것 같은 이경석에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수술 준비를 하던 고경아의 눈가에 예쁜 주름이 잡혔다. 김지훈도 미소를 지었다.

“중요한 수술이니까 확실하게 도와줘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김지훈 선생님.”

고경아도 여유가 많이 생겼다. 하긴 이젠 5년차나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시 즐거운 대화가 오고 갔지만, 이준영 교수와 김진호 교수가 들어오는 순간 긴장감이 확 감돌았다. 정규 수술이 주는 중압감일 것이다.

곧 마취가 끝나고 수술이 시작됐다.

이경석이 능숙하게 피부를 절개했다. 분명 그렇게 보였는데 정말 난데없는 말이 들렸다.

“이경석, 아직도 피부를 절개할 때 머뭇거리면 어떻게 해? 지금 넌 집도의 자리에 서 있어.”

불꽃이 타닥 튀기 시작했다.

복막을 열고 담낭을 제거할 때였다.

“과감해야 할 때는 망설이지 마. 여기서는 도리어 그런 방식이 안전하지 않은 방법이야. 너 혹시 퍼스트를 서는 것으로 착각하는 거야?”

“아닙니다, 선생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동맥을 잡을 때는 긴장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힘을 줘? 끊어지면 수술이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퍼스트의 손이 앞서나가면 집도의가 적절하게 통제를 해야지, 뭐하는 거야? 난 지금 퍼스트를 서고 있어. 확실히 해.”

이준영 교수의 입에서 뜨거운 불길이 쏟아졌다.

이경석이 수술 모자가 축축해질 정도로 땀을 흘렸다. 일이 년차 때도 이 정도로 타진 않았을 것이다. 참관을 하는 김지훈도 서늘한 느낌에 부르르 몸을 떨어야 했다.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 왜 이러시지? 분명 무언가를 말씀하시는 건데, 경석이 형이 알아야 할 것이 뭘까?’

수술이 끝날 때까지 이준영 교수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시뻘건 불덩이를 펑펑 날렸다. 만일 실력이 없었다면 제대로 끝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피부 봉합을 마친 이경석의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그런데 눈빛이 살아 있었다.

“이경석, 오늘 내가 한 말의 핵심이 뭐야?”

긴장된 표정으로 길게 숨을 내쉰 이경석이 눈빛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절대 기술적인 문제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 3개월 동안의 경험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집도의로서 수술을 주도해야 하며, 보다 과감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바짝 얼어붙어 있는 김지훈에게 힐끗 시선을 주고는 말했다.

“그래. 맞다. 넌 지금으로도 충분히 신중해. 이제 네게 필요한 것은 과감하고, 주도적인 자세야. 구미에 가면 네가 집도를 해야 할 일이 훨씬 많아질 거다. 어쩌면 의지할 사람이 없을지도 몰라. 그때 지금 느낀 것을 생각해. 넌 자신감을 갖고 수술을 할 준비가 이미 끝나 있어. 잊지 마.”

단호했다. 믿음이 서려 있었다.

말을 마친 이준영 교수가 수술실을 나갔다. 이경석이 눈을 크게 뜨며 힘차게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이경석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뿐만이 아니라 전공의를 대하는 태도가 좋지 못한 강기웅 과장까지 고려한 말이었다. 무엇보다도 무뚝뚝하기만 했던 이준영 교수의 말속에 담긴 애정에 감사할 뿐이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형, 일석이한테 전화 한 통 없어서 별일 없는 줄 알았는데 만만치 않은 모양이네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준영 선생님 말씀만 기억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다.”

이경석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렸다. 수술 내내 살벌했던 수술실에 도리어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방금 전까지 찬바람이 휭휭 불었는데 지금은 다들 좋아하고 있네. 역시 스승님은 고수야. 태우는 기술도 확실하게 배워야겠어. 혁원아, 픽스 턴 때 보자. 얼마 안 남았다. 난 배운 대로 하는 거니까 억울해하지 말고.’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말고 히죽 웃었다.

왜 이혁원만 생각하면 즐거운 걸까?

어째 발걸음까지 가벼워진 것 같았다.

***

그날 밤, 금경태 과장이 진평호와 어렵사리 자리를 가졌다.

외과 센터는 이미 물 건너갔다. 설혹 언젠가는 개설한다고 해도 현재 상황에서는 득이 될 일이 없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될수록 금전적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다.

또한 병원 내에 진상철만이 남은 이상, 인수 후 병원 장악을 위해서는 진평호에게도 자신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 유리한 구석이 있다고 믿었다.

진평호가 백제 병원에 대한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금 과장, 왜 겁도 없이 덤벼들고 나서 나한테 매달리는 거야?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죄송합니다, 회정님. 백제 병원을 제가 먼저 인수하면 신동석에게 큰 부담을 지울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게 회장님께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쯧쯧! 자네 욕심을 그럴듯하게 잘 포장하네. 그래. 살아남으려면 그런 능력도 있어야지.”

금경태 과장이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진평호 앞에서는 통할 변명도 아니었다.

“금 과장, 이렇게 된 이상 자네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어. 이제부터는 무조건 내 말에 따라. 그게 살길이야.”

“당연한 일입니다, 회장님.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고 대답을 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평호가 눈가를 잔뜩 찌푸렸다.

‘궁지에 몰린 놈이 믿을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다른 생각은 못하겠지. 이쯤에서 약간의 정보는 줘야 날 철석처럼 믿을 테고 말이야.’

“금 과장, 잘 들어. 자네니까 믿고 말해 주는 거야. 금싸라기 땅에서 병원을 하는 게 말이 돼? 막말로 허접한 아파트라도 짓기만 하면 자네는 상상도 하지 못할 돈이 들어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당연한 말이었지만 현실은 절대 녹록하지 않았다. 병원은 근린시설에 세울 수 있고, 그 땅은 절대 주거용으로 허가 변경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특혜라고 사방에서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병원 부지가 워낙 넓기 때문에 정말 상상하지도 못할 돈이 오고 갈 것이다.

하지만 규모가 너무 커 진평호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후폭풍이 불 것이 뻔했다. 그런데 진평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왜, 내 말이 불가능할 것 같아? 자세히 말하기는 그렇지만, 땅값 싼 외곽에 서울 병원만 한 병원 하나 지으면 되는 일이야. 물론 수많은 힘이 필요하겠지만 내가 누군가? 나 진평호야.”

오판 정도가 아니었다. 진평호의 목표는 서울 병원이 아니라 돈이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정한득이 가진 권한이 훨씬 더 중요했을 것이다.

성사 여부를 떠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벗어날 상황이 아니었다. 현실은 냉혹하기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럼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일단 기다려. 그럼 백제 병원도 손해는 보지 않고 팔 수 있을 거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모든 일에는 결정적인 기회가 오기 마련이지. 그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야 해. 금 과장, 자네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잘 알고 있잖아? 엉뚱한 생각 하지 말고 내가 부를 때까지 병원 내 정보나 잘 파악하고 있어. 그리고 이자는 투자라고 생각해.”

진평호가 의자에 몸을 묻으며 손을 저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의미였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한 금경태 과장이 서재를 빠져나오며 눈빛을 굳혔다.

‘제길!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다니, 이젠 진평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신동석과 병원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고, 허경발 선생이 중앙 의료원 원장이 된 이상 서울 병원 원장은커녕 과장 자리도 지키지 못할 게 뻔해. 자식 이상으로 아낀 이준영을 추천하겠지. 제길! 그놈만 제잔가? 어쨌든 이 위기를 넘기는 게 중요해.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어.’

이를 악문 금경태 과장이 주변을 살피고는 상의 주머니에 꽂힌 만년필을 빼 들었다. 중간에 달린 버튼을 누르자 진평호와의 대화가 고스란히 흘러나왔다.

‘진평호, 언젠가는 당신의 발목을 잡을 말이 이 안에 담길지도 몰라. 날 무시하지 마.’

한평생 의사로 살아왔는데 녹음기까지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십억의 돈과 명예가 달린 일이었다. 진평호 말마따나 결과가 중요하지, 수단이나 방법 따위는 상관없었다.

현관을 나와 정원을 지나가던 금경태 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뾰족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억울한지, 밤이 깊었는데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진평호가 사람 여럿 잡는 모양이군. 하지만 저런다고 일이 해결되겠어? 그래서 돈과 권력이 필요한 거야. 그것만 잡으면 나머지는 다 따라오게 돼 있어.”

금경태 과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한 명의 여인이 진평호의 집을 나와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누군가 따라나와 잠시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보다가 침을 퉤퉤 뱉었다.

“미친년. 고작 그 돈 받고 떨어질 거면서 그동안 지랄은 왜 떤 거야? 평소에 해 먹어야지. 이 집안사람이었으면서 그 정도 눈치도 없나?”

구름이 가득 껴 유난히도 차갑고 흐린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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