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494화 (494/1,329)

제2화 바람이 분다 Ⅰ (2)

한 달 전 백제 병원을 인수하겠다는 연락이 끊어졌다. 협상을 위해 으레 벌이는 밀고 당기기일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 후로 어떤 접촉도 해 오지 않았다.

은밀하게 신동석 이사장의 움직임을 알아보았지만 외과 센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인 자금 부족을 겪는 줄 알았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하루가 지날 때마다 자신이 내야 할 이자도 그만큼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결국 정한득과 상의해 20억 이상 낮은 가격에 팔기로 결정을 했다. 130억은 마지막으로 제안을 받았던 가격이었기에 그만큼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상황에서 20억 정도의 이득이라면 만족하고도 남았다.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원하는 소식은 없었다. 진평호가 움직이면 더욱 처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든 그 전에 팔아야 했다.

피가 마르는 하루하루가 지났다. 잠도 제대로 못 자 술에 의존해야 할 지경이었다. 너무 큰 판을 벌였다는 후회와 단 한 푼도 손해 볼 수 없다는 욕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런데 어제저녁 갑자기 신동석 이사장이 자신을 찾았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들어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금 과장님, 다들 기대가 컸을 텐데, 외과 센터는 당분간 보류해야겠습니다. 백제 병원 인수 가격이 맞질 않는군요. 130억이면 차라리 다른 방안을 강구하는 게 나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사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롭니다.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그 정도 돈을 지불해 가면서 외과 센터를 개설했다가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할 상황입니다. 교수님들 실망이 많으실 텐데, 금 과장님이 이런 상황을 잘 좀 설명해 주세요.”

“그럼 완전히 포기하시는 겁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백제 병원이 100억 정도에 나온다면 인수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네요. 그래서 대신 모자 보건 센터 건물을 이용하는 방안을 구상하고는 있습니다.”

“모, 모자 보건 건물을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신동석 이사장이 이상한 낌새를 느낄 정도로 얼굴색이 변했을 것이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불가능한 계획도 아닙니다. 장비는 이미 다 구비된 상태기 때문에 공간만 잘 활용하면 생각보다 괜찮은 그림이 나올 수도 있어요. 어쨌든 100퍼센트 결정을 한 일은 아니니까, 이 구상은 당분간 비밀을 지켜 주세요. 그리고 중앙 의료원은 올해 안에 개원하게 될 겁니다. 허경발 교수님과는 사제지간이시죠?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까 결과도 좋기를 바랍니다.”

날벼락 정도가 아니었다. 중앙 의료원 문제는 물론 허경발 교수가 원장이 된다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돈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져 지금도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하루가 지난 오늘에야 정한득에게 연락을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정한득이 달려왔다. 수십억이 달린 일인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금 과장,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백제 병원을 못 판단 말이야? 정말 신동석이 손 떼는 거야?”

“현재까지는 그런 상황이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정 국장,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대로 진행되면 자네나 나나 길거리에 나앉을 판이야.”

“좋은 방법?”

정한득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눈을 꽉 감은 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눈치가 이상했다. 금경태 과장보다 더욱 초조하고 당황해야 할 정한득이 일말의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정한득이 절대 보일 수 없는 태도였다.

순간 금경태 과장의 등덜미로 싸늘한 기운이 덮쳤다.

“정 국장, 혹시 믿는 구석이 있어?”

“믿는 구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속이 바싹바싹 타. 솔직히 자네보다 내가 더 문제잖아?”

맞는 말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닥친다고 해도 금경태 과장은 개업을 하거나 다른 병원에 취직을 하면 된다. 하지만 정한득은 공직자다. 만일 이 문제가 커지면 아무런 대책도 못 세우고 옷을 벗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것처럼 이상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말만큼 초조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금경태 과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한득은 분명 무엇인가 숨기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했다.

“정 국장, 혹시 나 몰래 진평호 회장과 따로 나눈 말이 있는 거 아냐?”

정한득이 입을 쭉 내밀며 눈가를 찌푸렸다.

“흠흠! 자네는 병원 일과 백제 병원만 신경 쓰면 되지만, 난 아냐. 내과 센터 인허가 문제로 신동석의 목을 잡아야 해. 그 문제는 진평호 회장님과 상의할 수밖에 없어. 솔직히 자네,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지금 당장 인허가를 잡고 신동석을 흔들면 외과 센터 개설은 더 힘들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백제 병원을 무슨 수로 팔겠어?”

금경태 과장의 얼굴이 꺼멓게 변했다.

말속에 답이 있었다.

돈이 관련된 일에 한해서 공직자라는 신분은 분명히 약점이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정한득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진평호의 의도에 따라서는 최대의 강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인허가권을 가진 자와 일개 병원 의사인 자신과는 처지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정한득은 자신 몰래 진평호와 이면으로 또 다른 이득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결국 정한득이 금전적으로 손해 볼 일이 없다는 의미였다.

갑자기 모든 상황이 환하게 보였다. 그동안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자신만 모른 꼴이었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 분노가 몰려왔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뿐이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 이판사판 일을 벌여 백제 병원 건이 알려지면 정한득 역시 공직 생활은 단념해야 할 것이다.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금경태 과장이 입을 열려다 말고 그대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정한득의 눈빛이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금경태, 입을 열려고? 그럼 누가 먼저 죽을까? 아니, 너 말고 죽는 사람이 있을까? 상대는 진평호 회장이야.’

“금 과장, 침착하게 대처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백제 병원 건도 버티다 보면 결국 이득이 될 거야. 과장 자리만 잘 유지해도 이자 정도는 감당할 수 있잖아?”

금경태 과장이 온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이를 악문 채 바들바들 손만 떨었다. 상대를 이용하기는커녕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한득의 입가가 말렸다. 비웃음일지도 몰랐다. 그 모습에 금경태 과장의 눈빛이 도리어 싸늘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해야 했다. 지금까지 이룬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날릴 수는 없었다.

‘정한득, 진평호, 난 이대로 물러나지 않아. 결코 혼자 죽지 않아. 제길!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해. 신동석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조용히 금경태 과장을 바라만 보던 정한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급할 것이 없었다. 병원 일만 잘 풀리면 그간의 손실을 모두 만회해 주는 것은 물론, 그 이상까지 보장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이자 비용은 이미 받은 마당이었다. 그것도 현금으로 말이다.

‘금경태,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욕심을 내야 해. 나도 이번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어. 너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기다리면 본전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거야. 이자야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금 과장,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 봐야겠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 그래도 진평호 회장님이 신경 쓰시지 않겠어?”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한동안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금경태 과장이 냅다 술잔을 던졌다.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날카로운 소리에 산산이 부서졌다.

“진평호, 정한득, 신동석. 날 잘못 봤어.”

이가 깨지도록 어금니를 꽉 문 금경태 과장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어느새 11월도 마지막 주만 남았다.

텀이 바뀔 시간이 다가오자 치프들이 더욱 눈에 불을 켰다. 세 달 후에는 4년차가 되고, 6개월만 근무하면 전공의 수련도 끝난다.

근무 여건상 지금 도는 파트를 다시 돈다는 보장이 없었다. 다들 병원에 남기를 원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수술이라도 더 받고자 했다.

헉헉헉!

그동안 숨이 가쁘도록 일에 집중했다.

비록 일주일에 한두 번이었지만 전공의 수첩을 채우는 수술이 하나둘 늘어 갔다. 이대로 간다면 생각보다 일찍 전문의 시험을 치르기 위한 요건을 채울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경석이었다.

이준영 교수의 수술은 점점 늘어만 가는데, 정작 받을 수 있는 정규 수술 케이스가 뜨질 않았다. 마지막 주말 당직을 서는 이경석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형, 걱정하지 말아요. 다음 주에 무조건 하나 뜹니다.”

“그랬으면 좋겠다. 어떻게 라파로 아니면 내가 하기 힘든 메이저 수술만 줄줄이 뜨냐.”

“그럴 때도 있죠. 근데 요새 금경태 과장이 좀 이상해진 것 같아요. 수술도 몇 개 안 하는데, 되게 바빠 보이네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술 냄새는 더 이상 안 풍겨서 다행이야. 환자 보기 민망할 때가 있었거든. 하여튼 무슨 일이 있긴 있는 것 같아.”

김지훈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자리보전하려고 여기저기 로비하는 건 아닐까요? 내년에는 과장 자리에서 내려오겠죠?”

“이사장님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알았는데 설마 유임시키겠어?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 당장 잘라도 할 말이 없잖아.”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솔직히 의사로서 능력은 어떨지 모르지만 교육까지 담당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환자도 제대로 안 보잖아요.”

이경석이 입맛만 쩝쩝 다셨다.

어쨌든 과장이자 교수인 사람이 직무를 태만히 하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환자는 물론 전공의에게도 불행한 일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그나저나 네 말대로 다음 주에 하나 딱 떠야 하는데. 그래야 구미에 마음 편히 갈 거 아니냐. 일석이는 잘 지내고 있겠지? 강기웅 과장님과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네.”

“일석이 적응력은 우리 병원 최고니까 신경 쓸 이유가 없어요. 형도 걱정하지 마세요. 파이팅!”

김지훈이 주먹을 흔들고는 마치 기운을 전하는 것처럼 이경석의 어깨를 주물렀다.

“자! 제 기운이 팍팍 들어갑니다. 운까지 몽땅 가져가세요. 우리 중 내 운이 최고라는 건 아시죠?”

흥얼흥얼 알아듣지 못할 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이제 곧 서른 되는 놈의 재롱에 이경석이 피식 웃고 말았다. 내심 은근히 답답하고 초조했는데 마음이 슬슬 풀렸다.

‘너나 일석이나 참 편하고 좋은 놈들이다. 고맙다.’

이제는 신현수도 확연히 변했지만 아직도 김지훈과 당직을 서는 것이 훨씬 편했다. 아마 이런 일들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살갑게 대하는 일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김지훈도 진심으로 바랐다.

더구나 다음 텀은 간담도 파트다. 금경태 과장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은 고역이지만, 드디어 스승에게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오는 것이다. 그 전에 이경석이 정규 수술을 받아 보다 마음 편하게 근무하고 싶었다.

좋은 일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경석의 어깨를 주무르던 김지훈의 머릿속에서 라파로 기구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날 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교수 4명이 한자리에 모여 긴장된 표정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앉아 물 잔만 만지작거렸다.

얼마 후 반백의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허경발 명예 교수였다.

4명의 교수가 일제히 일어났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이리 앉으시죠.”

“내가 너무 늦었나?”

“아닙니다. 딱 맞춰 오셨습니다. 어서 앉으십시오.”

허경발 명예 교수가 앉고 나서야 차례차례 자리를 잡았다. 이혁민 교수가 손을 흔들어 커피를 주문했다.

한동안 따스한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의 안부를 전했다.

“다들 잘 지냈다고 하니까 기분이 좋네. 오늘 얼굴을 보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인사이동 때문에 상의를 할 것이 있어서 불렀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송재덕 교수와 눈길을 주고받은 이혁민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일에 관한 한 적임자가 된 지 오래였다.

“저희도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외과 센터가 만들어지면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누가 과장이 되느냐만 고려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허경발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여러 말들이 무성하지만 외과 센터도 내년 중반까지는 확실하게 개설이 될 거야. 이 문제는 당분간 비밀을 지켜 주었으면 해. 그렇게 되면 최소한 두 자리는 생각을 해야겠지?”

비밀을 유지하라는 말을 강조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다.

“외과 센터장과 과장 자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외상 센터가 아니라 우리 과를 중점으로 하는 외과 센터니까 당연히 그래야겠지.”

다들 다소 의아한 표정이었다. 병원 내 소문으로 외과 센터를 만드는 일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허경발 명예 교수의 말이다. 더구나 곧 중앙 의료원 원장으로 취임을 한다. 100퍼센트 확실한 말이었다.

살짝 헛기침을 하며 교수들을 본 이혁민 교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그럼 누구를 생각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난 현직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사람이야. 자네들 의견이 필요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겠어?”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사정이 어떻든 형식적으로라도 금경태 과장의 의견이 필요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또한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허경발 교수는 금경태 과장을 만나지 않은 것 같았다.

“선생님, 금 과장은 만나 보셨습니까?”

허경발 교수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움과 회한의 빛이 스쳤다.

“이사장님께 이미 말을 들었어. 이 교수가 전한 말이라니까 더 이상 물을 필요는 없겠지. 내 시간이 나는 대로 꼭 만나 봐야 하지만, 이 자리는 아닌 것 같아.”

예전에 이미 이혁민 교수가 신동석 이사장과 금경태 과장 문제로 면담을 했다. 그 일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스승의 귀에까지 들어가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일단 그 문제는 뒤로 미루고, 지금은 인사이동에 대해서만 상의하지. 외과 센터장으로 누가 좋겠어? 내 생각에는 송 교수가 어떨까 하는데 말이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서울 병원 교수들에게 신망을 얻은 지 오래였다. 천안 병원 원장까지 한 송재덕 교수이기에 이력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어떤 면으로는 도리어 좌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초대 외과 센터장이란 직함이 대단한 명예를 줄 것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이준영 교수가 간만에 입을 열었다.

“선생님,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송재덕 교수가 손사래를 쳤다.

“어이구! 선생님, 그건 아닙니다. 준영아, 뭐가 당연해? 그건 아니다. 난 이제 서울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순리도 아니야. 선생님, 외과 센터장은 제가 아니라 오상익 교수가 맡아야 합니다.”

뜻밖의 말이었다.

“오상익 교수?”

“그렇습니다. 서울 병원에서 쭉 근무를 한 데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자격이 충분한 교수입니다. 외과 센터에는 다른 과 교수들도 일부 배속되는데, 그 사람들을 잘 이끌기 위해서라도 오상익 교수가 맡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기동아, 혁민아, 그치? 내 말이 맞지?”

교수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불렀다.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이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센터장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허경발 교수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의 자리와 위치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양보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제자가 아니라 일가를 이루어 가는 외과 의사를 본 것이다.

“송 교수, 그럼 과장은 어때?”

“선생님, 제가 천안 병원 원장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과장을 합니까? 그건 절 죽이시는 겁니다. 설마 병원 나가라는 소리는 아니시죠? 그것도 제 자리가 아닙니다.”

그동안 내심 이리저리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스승 앞에서 특유의 말투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아예 마음을 내려놓은 것이 분명했다.

“허허! 그럼 누가 했으면 좋겠어?”

송재덕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준영이가 했으면 정말 좋겠는데 어떨까?’

과장을 누가 하느냐는 의외로 미묘한 문제였다. 금경태 과장의 전횡 때문에 여러 문제가 야기된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0